[부산에 정착하여] 당시 귀환 동포에 대한 배급이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직업을 찾기에도 도시가 유리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귀환 동포는 부산에 몰려들었다. 특히 부산의 경우 범일동·범천동 부근의 ‘안창 마을’이라든가 적기 일대에는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몰려들기 이전부터 이미 많은 귀환 동포들이 모여 살았다. 그러나 어르신의 증언을 통해서 살펴보면 귀환 동포에 대한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어르신은 귀환 동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없다고 단언하셨다. 따라서 어르신의 가족은 스스로 생계유지를 위한 활동을 해야 했다.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의 귀환 동포가 친척집에 신세를 지거나, 용두산 부근에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어르신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배가 고파 못사니까 우리 아버지가 부산에 부두에 석탄을 매로 먼저 왔거든. 그래가 우리는 합천서 트럭 타고 부산을 와가 부산의 이모집에 와 가지고 문현동에 쪼깬한 집을 하나 샀어요.” “옛날에 묵고 살게 없어서 동촌강 여 물이 깨끗했거든 내가 그때 열 살 먹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엄마하고 물 싹 빠졌을 때, 파래를 뜯어다가 진시장에 갔다 팔고 이랬는데, 먹을 게 없어서들 파래는 돌에 딱 붙어가지고 꽝꽝 얼어 가지고 있는 거를 뜯어다가 갔다 팔고 그랬어요.” “우리 어무니는 처음에는 국제 시장에서 장사하다가, [부산]진시장에서 장사하고, 아버지는 부둣가에서 까만 석탄 매고 했잖아.” 어떻게 해서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따라서 일자리 많을 것이라 생각되는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부산 이모의 도움으로 충무동에 정착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부두 노동자로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근처 도랑에서 파래를 뜯어 국제 시장과 부산진 시장에서 노점을 시작하였다. 국제 시장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래 규모가 큰 상업 도시로서 이름을 떨치게 해주었던 상징적인 존재이다. 신창동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시장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과 함께였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이른바 전시 통제 물자를 한꺼번에 팔아 돈을 챙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나라 최대 시장이었던 부평동 공설 시장 일대에 갖가지 물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런 물자들이 드넓은 빈터였던 오늘의 국제 시장 자리를 장바닥으로 만들어 자연 발생적으로 상설 시장을 이룩했던 것이 국제 시장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 국제 시장 장터를 ‘돗대기시장’ 혹은 ‘돗떼기시장’이라고도 하는데 시장의 규모가 크고 외국 물건 등 없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데로 싹 쓸어 모아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이거나,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부산진 시장은 1913년 생겨나 현재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서울 동대문 시장, 대구 서문 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전통 시장 가운데 하나로 현재도 하루 평균 만 명이 찾는 곳이다. 이 시장은 조선 시대 5일장 형태로 유지되다 1913년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시장이 되었다. 1950년대에는 목조로 지어져 공설 시장으로 운영되다가 1970년 민영화 되었다. 이러한 시장의 특성을 살펴 볼 때 어르신의 부모님들도 처음에는 이모님의 도움으로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였다. 6·25 전쟁 시기 이전에 규모가 더 컸던 부산진 시장으로 옮겨 장사를 하다 이후 6·25 전쟁과 피난민의 유입으로 국제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여 그 곳에서 다시 장사를 하였다. “가는 족족 우환 동포라고 구박만 받았지.” “친척들 옆에 가면 귀환 동포라고 쑥덕쑥덕 거리고……머 하나 얻어먹을까 싶어서.” 그러나 부산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일본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차별을 부산에서 받았기 때문이었다. ‘우환 동포’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가까운 친척들은 어르신의 가족을 돕는 것을 꺼려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갔어야 할 시기에는 일본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습으로 갈 수 없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제대로 받기 힘들었다. 한국으로 귀환한 이후 합천과 부산에서 초등 교육을 조금 받았다. 부산에서는 충무동에서 범일동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이마저도 학교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다리가 부서진 이후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이후 야간을 조금씩 다닌 적은 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