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9일(토) 유석기 장로님의 인도로 인천교회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과 경기도 양평에 있는 '청란교회'에 다녀왔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교회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청란교회 부목사님께서 시원한 음료수를 주시고 교회 투어까지 해주셨습니다.
● 참고자료: 북한강 & 남한강
양수리에서 만나는 두 물인 북한강과 남한강의 발원지가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북한강은 금강산, 남한강은 태백산이 발원지이네요.
● 참고자료: 청란교회 관련 기사_2017.04.11 세계일보
경기도 양평의 2000여㎡ 부지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교회’(사진)가 들어섰다.
기독교 신앙 단체인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는 최근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교회가 아직 세워진 적이 없다”며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 시대에 되새겨보자는 취지에서 신앙생활 체험공간인 ‘더블유 스토리’(W Story) 내부에 세웠다”고 밝혔다. 더블유 스토리는 하이패밀리가 양평에 조성한 기독교 문화공간으로, 8만9000㎡ 부지에 미술관, 수목장, 선교훈련센터 등으로 구성돼 있다. 더블유 스토리 내 건축물로는 계란 형상을 닮은 청란교회가 유명하다. 건축가 박민철이 설계를 맡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교회’(3층)는 40억원을 들여 시공에만 1년 반이 걸렸다.
송 목사는 “단순히 건물만 세운 게 아니라 종교개혁의 정신을 담아낸 요소가 많다”며 “대표적인 것이 교회 내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라고 소개했다.
송 목사는 “루터의 대표적 업적으로 쉬운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보급한 것과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회중 찬송을 평신도에게 돌려준 것을 꼽을 수 있다”며 “파이프 오르간은 평등사상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 참고자료_한국기독교 선구자 서상륜
- 출처: 갈대상자님의 블로그
▲ 소래교회와 서상륜 기념비
스코틀랜드선교사 로스(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선교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1874년 의주사람 이응찬을 만나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자, 그의 친구인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이 고려문에서 만나 최초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 중 이응찬은 로스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로 일을 하면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 서상륜
한편 서상륜(徐相崙 1849~1925)은 양반가문의 장남으로 한문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친을 따라 한문공부에 능할 뿐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숙하였다. 그래서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 장사를 하던 중 뜻하지 않게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때 이미 기독교를 접한 이응찬이 그를 매킨타이어에게 안내하였다. 전염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서상륜은 헌터 의사의 치료를 받고 병이 낫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심양으로 이동하여 로스 선교사의 성서번역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대동강 변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이후 더욱 쇄국정책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머지않아 조선에도 선교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믿고, 성경번역사업을 위하여 조선청년들에게 투자하면서 성서번역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마침내 로스선교사는 서상륜의 도움으로 1882년 최초로 『로스역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중국 땅 심양에서 한글성경을 발간하였다. 이는 한문에 조예가 깊은 서상륜의 결정적인 역할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로스와 서상륜의 공동번역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성경을 번역한 서상륜은 또 하나의 사명을 안고 그가 번역한 누가복음을 안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 의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도중에 압록강 국경 관리들에게 적발되었다. 그 당시는 성서 반입이 철저하게 금지되었으나 고향 친구의 도움으로 10권을 챙겨 고향에 오게 되었다. 그는 고향에서 전도에 위기를 느끼면서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송천松泉)로 피신하였다. 그는 자기의 가슴 품속에 몰래 숨겨온 성경을 가지고 외가 친척과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전도가 점차 활기를 띠면서 가정집 예배처소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1883년 한국 최초로 외부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소래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1885년 4월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최초 선교사로 입국하면서 조선 땅에도 본격적인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소래교회는 그 이전에 이미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소래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도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미국에 가서 모금하여 지원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교인들은 “우리가 우리 예배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아서 하는 것은 본의에도 어긋나며, 후세에 전하는데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면서 서양의 램프등 5개를 교회에 기증하였는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고 환했는지 온 동리를 환하게 밝혔다고 한다. 이렇듯 소래교회는 한국최초의 예배당인 동시에 외국의 원조 없이 자생적으로 세운교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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