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 / 23.01.10.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인생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다
나 자신을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그리고
우리가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 살아가는 데 앞선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하여
내 인생의 진로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샤를 드 푸코*가 한 말이다.
*샤를 드 푸코(1858~1916) :
프랑스의 위대한 성자. 사막 오지에서 활동한
은수자인 동시에 선교사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영성가다.
수녀원장의 권유로 신학을 공부하고 43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뒤 성지가 아닌 아프리카 사막으로 향했다. 나자렛 영성은 성지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가장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침묵 중에 드러냈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국민일보 공채 1기로 정치부·경제부·문화부를 거쳐 일본 특파원을 거쳤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에 종교국 부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이태형 선생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었다가 이를 증보하여 재출간하면서 제목을 바꾼 것이다.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
저자는 책 서문에서 “이 책을 접하는 모든 분들이 기쁘고 행복하기를 읽으면서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퍼지는 행복한 책 읽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라고 했다.
책은 우리 시대 귀한? 분들의 생각과 철학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재산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마음이 따뜻한 혜민 스님, 이혜인 수녀님, 김용택 시인, 오지 여행가에서 월드비전 세계 시민학교 교장으로 변신한 한비야, 얼마 전에 타개한 이어령 선생, 일 본인인 마우리 미쓰요 선생, 김남조, 고은, 함만복 시인, 이철환, 서영은 작가와 정진홍 울산대 교수 등을 저자가 직접 만나 취재한 내용을 담고 있다.
*_ 혜민 스님
“친구뿐 아니라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로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아야 합니다. 마무리 관계가 좋다고 하더라도 찰싹 달라붙으면 결국 지겨워집니다. 아무리 좋아도 여운이 남아야 그리워집니다. 너무 가까워지면 숨이 막힙니다. 만남과 행복이 옅어지면서 다음이 별로 기다려지지 않습니다. 조금은 ‘서늘한 관계’ 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냉엄한 판단이다. 그리고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성인들이 말씀하신 황금률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자님도, 부처님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바로 ‘남들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너도 남들에게 하라’ 는 것입니다.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그 상처는 그대로 돌려받습니다. 행복해질 수 없지요.”
“스님도 칭찬을 받으면 우쭐할 때가 있나요?”
“아이고, 저는 도구일 뿐입니다. 삶과 글을 통해 부처님의 법을 알리는 도구입니다. 아픈 사람들에게 위안과 평안을 주는 도구입니다. 누가 와서 저를 치켜세우면 금방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습니다. 저를 만나본 사람들이 ‘하버드 나와서 고고한 줄 알았는데 이웃집 형과 같이 털털하네.’ 라고 말하면 그것이 엄청난 칭찬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쭐해지지는 않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의 결정권을 주지 마십시오.
내가 내 삶의 주인입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그 어떤 성스런 스승이라도 나 자신이 있었기에 그분들의 성스러움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십시오.”
‘인생은 연극’ 이고,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말자.’ 고도 조언한 혜민 스님은 1974년생으로, UC버클리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석사, 프리스턴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가 되었고,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_ 이혜인 수녀님
이혜인 수녀의 시를 읽으면 많은 사람들이 따뜻함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다. 그녀는 죽음에 대해, 죽음은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쪽 강에서 저쪽 강으로 건너가는 것 말이다. “저쪽 세상은 어머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계시는 세상입니다. 미지의 세계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매일 보는 사람들도 처음 보듯 대한다면 전혀 느낌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 하더라도 그분과는 내일이면 헤어질 것이라고 여기고 바라보면 무척 사랑스러워질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남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풍요로운 보물을 자기 내면에서 길어 내야 합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내면의 바닥이 드러나지 않도록 채워 나가는 노력도 해야 하고요. 결국은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고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흔히 ‘매사에 감사하며 살라’고 말한다. 감사가 그저 고마워하는 것일까? 이혜인 수녀는 말했다. “겸손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신뢰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하게 됩니다. 절대로 건방져서는 안 되지요. 설사 탁월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들을 끌어 올려 함께 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감동스러운 좋은 것을 보여주면 ‘나도 닮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반대로 누군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 ‘반면교사(反面敎師)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좋은 것은 좋아서 감사하고, 나쁜 것은 거기에서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하지요.” 이혜인 수녀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험담하면 ‘꽃부터 보고 오세오’라고 말한다고 한다. 꽃의 마음, 별의 마음으로 살자고 권한다고 한다. 〈꽃의 말〉
*_. 이혜인
고통을 그렇게 낭만적으로 말하면 저는 슬퍼요 필 때도 아프고 질 때도 아파요 당신이 나를 자꾸 바라보면 부끄럽고 떠나가면 서운하고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더 많아 미안하고 미안해요 삶은 늘 신기하고 배울 게 많아 울다가도 웃지요 예쁘다고 말해 주는 당신에 곁에 있어 행복하고 고마워요 앉아서도 멀리 갈게요 노래를 멈추지 않는 삶으로 겸손한 향기가 될게요 이혜인 수녀는 1945년생으로 핀리핀 성루이스 대학 영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부산 광안리 성베네딕도회 수녀이며 1970년 시인으로 등단해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펴낸 이래 오늘도꾸준히 시와 수필을 써오고 있다.
*_ 김용택 시인
김용택 시인은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퇴직 후에는 ‘섬진강 시인’이 되었지만 교사가 평생직이었다. 그는 학교에 대해 더불어 살고 노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하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행복이란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있을 때 온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행복은 그냥 주어지지 않으며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관심을 갖고 자세히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아야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되어야 지식이 내 것이 되고 인격으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인격이 형성되어야 관계가 맺어집니다. 관계가 맺어져야 생각이 변하지요.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입니다. 결국 생각을 키워주고 생각을 일어나게 해 주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는 또 말한다. “인간에게는 놀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특히 엄마와 놀게 해야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위대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와 아이들이 놀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와 노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어머니 또한 엄마이기를 포기했습니다 . 아이들을 학원에 맡겨버렸습니다. 어머니의 입에서 하루 종일 무슨 말이 나오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공부와 점수로만 따지니 아이들이 온전한 인간이 되겠어요? 점수 벌레가 되는 것이지요.” 요즘 아이들은 어머니 대신 컴퓨터와 휴대폰과 장난감과 놀기는 한다. 하지만 김 시인은 사람과 놀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놀이는 상대가 있어야 하고 상대와 놀기 위해서는 상대를 인정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 놀아야 하는데 놀이는 상대를 인정하는 훈련인 것이라고 한다. 놀이 상대가 없는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과 놀기도 한다.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무식한 공부다. 공부를 왜 잘하려고 하는가는 분명하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말하고 공부를 잘하는 것과 인격을 갖춘 것과는 전혀 상관 없게 되어버린 지 오래다. 공부를 잘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존경하고 있지 않다. 꼭 도둑놈 취급하고 있다. “공부를 잘해서 대기업에 들어가고 변호사,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는 사라집니다. 고민하고 생각하는 자기 말입니다. 인생과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자기는 실종되었습니다. 자기가 없으니 이웃에 대한 고민도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직장을 자기 인생의 터전으로 소중히 가꾸지 않습니다. 직장은 오직 돈 벌고, 출세하는 곳입니다. 불행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잘 놀게 해야 합니다. 직장을 자기 삶으로 귀하게 생각하고 가꿀 줄 아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시골 아이는 죽어도 서울 강남에 갈 수 없습니다. 이제 개천에서 절대로 용이 못 나옵니다. 어쩌다가 나오는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만 구조적으로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 시인’으로 불린다.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무수한 시를 썼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 시인은 말한다. “과거에는 섬진강에 공동체가 살아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없고 강도 썩었다.”고 한다. 그래도 비가 많이 올 때는 조금 괜찮지만 비가 안 오면 강이 썩고 봄이 왔는데도 강에 물고기가 없다고 한다. “섬진강에서 배운 점은 무엇입니까?” “거창한 거 없어요. 그냥 강변을 걸으면 강물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물에 달이 뜨고 별이 뜨고,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섬진강은 사람들 몸속에 흐르는 핏줄과 같습니다. 지금은 잘 안 가지만 과거에는 사계절 강에서 살았습니다. 강은 우리였고 나였습니다. 우리 마음과 강물의 마음이 같았습니다. 우리 삶이 맑고 깨끗하면 강물도 맑았습니다. 우리 삶이 혼탁해지면서 강물도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래요. 섬진강에서 자연을 보았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집에서 40분 걸어서 학교에 갔습니다. 강가 길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강변에 노루와 토끼가 살았고 수없는 풀꽃이 피고 졌지요. 눈 내린 강과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지금은 그런 강이 다 사라졌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자신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서란다. 그는 어린 시절 태어난 곳에서 평생 선생을 하면서 살겠다고 하고는 그것을 실천했다. 섬진강을 바라보면서 강물만큼 맑은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농사지으면서 자연과 생태, 순환의 논리를 배웠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다. 가난한 6남매로 청년기에 담배를 원 없이 피워 보고, 책을 마음껏 읽고 영화를 지겨울 때까지 보는 것을 꿈을 꾸었지만 담배와 책을 외상으로 사야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꿈은 이루어졌다. 시인이 되었고, 광고 촬영도 했다. 자연과 더불어 놀고, 지금의 나를 귀하게 가꾸다 보니 예상치 않은 일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순창에서 태어나 순창농립학교를 졸업하고 스물한 살 때 덕치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1982년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시집, 산문집, 동요집 등을 두루 펴내면서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_ 한비야(여행가)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그건 사랑이었네》등 베스트 셀러 작가로도,‘바람의 딸’로도 알려진 한비야는 2009년 52세 때 미국 터프츠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백두대간을 종주했고, 2010년에는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어 공부를 했다. 2011년에는 유엔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직을 맡았고, 현재는 월드비전 세계 시민학교 교장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 는 토끼의 규칙에 따라서 펼쳐졌다고 말한다. 토끼가 이길 수밖에 없었던 경주라는 것이다. 만약에 거북이 규칙에 따라 물 속에서 경주를 했다면 토끼는 백전백패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부턴가 “세상의 규칙이 아니라 ‘나의 규칙’ 에 따라서 ‘나만의 시간표’ 대로 가겠다고 생각했다.” 고 한다.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이 토끼인지 거북인지 알아야 한다고도 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한비야의 대표 저서 가운데 하나다. “경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회에는 지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지도 안에서 묵묵히 머무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지도를 지리적인 경계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 지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고, 나가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지도란 자기 생각의 틀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멋집니다.
훨씬 가능성이 많아요.
해 보는 데까지가 자기 가능성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나는 여기까지’ 라며 포기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비야는 1958년생으로 홍익대 영어영문과를 나오고 미국 유타대학에서 석사가 된 뒤, 보험회사에 근무하다 7년간 세계여행 경험을 담은 에세이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작가가 되었다. 국제 NGO 월드비전에서 전문 구호활동가로 일하고 있고,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지구 밖으로 행군하라〉등을 많은 책을 썼다. ― 이어령 교수 지난 2.26. 향년 89세로 타개한 이어령 교수는 우리 시대의 석학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수셨다. 나도 무척 존경한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생전에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는 “남들은 나를 보고 성공했다고 말하겠지요. 문필가로, 교수로, 장관으로 활동했으니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실패한 삶을 살았습니다. 겸손이 아닙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의외다. 20대 30대에 이미 많은 일을 하셨고, 그것을 노년이 되어서도 해냈던 그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평가했다니 정말 의외다. 스토리텔링과 레토릭*의 달인인 그가 실패라는 말속에 깃든 레토릭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실패자’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인생 실패를 선언하게 된 것은 ‘동행자가 없어서’라고 그는 말했다. *레토릭 :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 의미 전달에 효과적인 문장과 어휘를 사용해서 설득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표현. “내게는 친구가 없어요.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습니다. 혼자서 나의 그림자만을 보면서 동행자 없이 숨 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더러는 동행자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모두 경쟁자였습니다.” 가족이 들으면 섭섭해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자신이 선택하고 창조한 인간관계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생래적으로 주어진 가족 관계에서도 실패했을지도 모른다고 부연(敷衍)했다. “집에서는 언제나 글을 썼습니다. 머리속은 24시간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요. 애들과 야구 구경 간다거나, 아내와 오붓하게 영화감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면서 그는 인생의 동행자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동행자가 없다는 건 사랑에 실패했다는 의미지요. 그것이 이성이건 동성이건…” 이어령 교수는 스스로 동행자가 없어서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무수히 많은 성취를 경험한 사람이다. 성공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모두가 성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태를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성공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아브라함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를 보면 가장 꼭대기에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자아실편의 욕구는 존경받고 싶은 욕구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성공이란 어떤 면에서는 자기실현이 된 상태입니다. 자기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대학입시와 마찬가지로 인생이라는 입시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은 절대화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자기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흔히 말하는 성공은 타자의 기준, 사회의 기준에 따른 성취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에 ‘남 보라는 듯’‘여보라는 듯’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그 말대로 타자의 기준과 목표에 자기를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싶지 않아도 남들이 원하는 트로피, 남들이 만들어준 트로피를 위해서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실현적 성공의 측면보다는 타인 지향적인 성공이 더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성공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성공자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말은 모두가 금석문과 같다. “누가 ‘사랑해요’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정말 사랑하면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 말이 거짓이기에 계속 상대를 붙잡으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고 글 쓰는 지성인은 결코 성자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두 극점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것과 같이 끝없이 변신하는 삶을 살았기에 실제로는 성공하지 못한 삶이지만, 평생을 그렇게 했기에 역설적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는 자신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물을 파는 사람이기에 일단 물이 나오면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또 다른 우물을 파러 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성공은 갈증을 끝없이 채워가는 마음이 지속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 갈증은 결코 채워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어령은 죽을 때까지 새로운 우물을 팠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우물을 파게 했을까. 그것은 창조적 갈증이었다. 그에게는 갈증을 끝없이 채워가는 정열이 지속되고 있었다.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세속적으로 성공한 그가 인생의 최후반기에 더욱 완벽한 내면으로 영원한 성공을 꿈꾸며 실현하려 했던 것, 그것은 영원히 성공을 꿈꾸며 사는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에게 삶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창조적 갈증이 있다면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늙어도 영원한 청춘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설사 실패감에 젖은 사람이라도 낙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 평생을 지탱해 줄 동행이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일 수는 없다. 이어령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와 대학원을 나오고 20대에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논객으로 활약했다. 1967년 이화여대 교수가 되었고, 노태우 정부 때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했다. 내가 읽고 감명을 받은 그의 글은 〈흙 속에 저 바람속에〉〈축소지향의 일본인〉〈지의 최전선〉등이다. 그가 만년에 기독교에 귀의하여 썼다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꼭 읽어야겠다. ― 마우라 미쓰요 선생 ‘마우라 미쓰요’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작가인 마우라 아야코의 남편이라고 하는데, 이 여자부터 알아야 이야기가 될 것 같다. 1964년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1,000만 엔을 걸고 작품을 현상 공모한 결과, 1위로 뽑힌 《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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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라는 소설의 저자가 아야코다. 출간 즉시 일본에서, 한국에서 아야코 붐이 일어났다. 그녀는 1922년 아사히카와(旭川, 인구 36만의 홋카이도 북부의 중심도시)에서 태어나 19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96편의 소설을 썼다. 《길은 여기에》《양치는 언덕》등 그녀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이전까지 ‘미우라 아야코’가 대세였고 인기였다. 작가로서는 화려했지만, 그녀는 폐결핵과 척추 질병 등으로 24세부터 13년간 병상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아야 했던 비참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허물어지지는 않았으나 처절한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녀의 고통을 함께 지고 간 간 이가 반려자였던 미우라 미쓰요다. 미쓰요의 희생이야말로 아야코의 삶을 지탱해준 원동력이었다. 1955년 공무원이던 미쓰요는 우연히 투병 중인 아야코를 병문안하게 되었고, 병상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 14장을 읽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는 ‘마야코를 낳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진심이 담긴 기도가 아야코의 마음을 움직였고, 5년 뒤 둘은 결혼했다. 그리고 아야코는 기적적으로 치유돼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쓰요는 공무원을 청산하고 아내가 구술한 소설을 필기했다. 남편은 충실한 비서였다. 사랑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결혼할 때는 35세와 37세였지만, 몇 년 전에 86세이던 미쓰요를 저자가 면담하면서 ‘사랑이 무엇인지?’하고 물었다. “사랑이라, 사랑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싶네요. 사랑의 조건과 환경은 시시때때로 달라집니다. 인간의 마음도 변화하지요. 끝까지 죽도록 사랑하겠다는 사람들도 갈라서곤 합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 어떤 조건일지라도 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야코는 언제나 ‘일어나서 빛을 비추라’고 말했습니다. 빛을 향하라고 했어요. 빛이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의 불길한 그림자만 보지만, 빛 쪽을 향했을 때는 그림자는 사라지고 성스러운 따뜻한 빛만 남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살아 간다는 것은 생명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 말대로 저도 생명 자체를 기뻐하려고 합니다. 이제 너무나 늙었지만 이 늙음 자체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 빛을 향하여 기뻐하며 살다가 아야코 곁으로 가는 것이지요.” 그는 아야코를 추억하며 추억이 담긴 책을 쓰고 있다고 했고, 지금도 아내의 채취가 담긴 2층 다다미방에서 잔다고 한다. ‘내게도 그런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지,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저자의 말이다. 미쓰요는 인터뷰를 한 지 4년 후 2015년 10월 30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아야코 곁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으리라. ― 김남조 시인 노천명, 모윤숙 계보를 잇는 한국의 여류 시인하면 김남조 시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녀는 192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5년 조각가 김세중(1928∼1986) 전 서울대 미대 학장과 결혼했고, 38년 동안 숙명여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인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각종 문학상과 국민훈장 모란장, 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 16권의 시집과 12권의 수필집, 콩트집을 냈으며 80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발표했다. 팔순을 넘긴 시인에게 이 땅의 늙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나는 젊었을 때 팔팔하게 살았지만, 팔순을 넘기고 나선 ‘다 소용없어 필요 없어’를 되 내며 사는 노인들을 알고 있다며, 구순을 향해가는 자신의 ‘삶에는 결코 무료가 있을 수 없다’고 외친다. 그러면서 독일의 시인 마리아 릴케 이야기를 해 줬다. 말년에 백혈병으로 고생하던 릴케가 장미를 손질하다 손가락을 가시에 찔렸고, 상처가 낳지 않고 화농이 생겼다. 결국 상처로 인해 릴케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의사는 고통스러워하던 릴케를 위해 여러 차례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릴케가 죽은 후 침대 밑에 진통제가 가득 쌓여 있었다. 진통제를 먹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릴케는 죽는 순간까지 고통의 맛을 음미했을 겁니다. 고통과 슬픔은 막는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찾아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있다 하더라도 더 큰 고통이 찾아오면 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슬픈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처럼 위로받고 견디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은 풍요로워졌지만 삶은 팍팍해진 것이 사실이다. 감수성을 느낄 겨를도 없고, 그러다 보니 감동도 없다. 감정이 메말라졌다는 말이다. 이 시대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하고 묻었다. “잘 보는 것은 자세히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닌 것,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청춘의 장기는 팔팔합니다. 위,폐,장 모두 건강합니다. 피도 젊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라는 보물 창고도 있습니다. 위태하고 절망스러울 때도 전체 안에서 내게 허락된 것들을 보고 그 풍요에 감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입장에서도 와 닿는 시가 있다. 〈노약자〉라는 제목의 시다. 그 이름도 나쁘지 않아 그간에 십만 번 가까이는 해돋이를 보고 해 아래 살아 해의 덕성과 은공을 웬만큼은 일깨웠는지라 사랑의 마음도 십만 번의 열 갑절은 밝거나 흐린 음표들의 악보로써 나의 심연에 흘러 닿아 사람의 노래를 아는 웬만큼은 되었는지라. (후략) 사람의 마음을 음표라고 한다면, 노년은 인생의 오묘한 음표를 헤아릴 줄 아는 시기라는 말인 것 같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고 무엇보다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 고은 시인 2018년 미투로 모든 직에서 제명된 고은 시인은 이제 90살이 되었다. 늙어서 참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는 해마다 노벨상을 발표될 때가 되면 대상에 오르기도 하던 인물이다. 저자는 그를 여러 차례, 그것도 미투 전에 만났다. 1952년 19살 나이에 효봉선사의 상좌가 되었고, 10년 후에 환속했다. 19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 참여로 삶보다 죽음이, 환희보다 비탄이 드리워진 인생을 살았다. 애주가인 그는 지방에 갈 때면 그곳의 토산주를 마신다고 하는데, 술을 ‘기가 막힌 액체’라고 하기도 했다. “조상들이 제사를 지낼 때 머리를 조아리며 차 한잔, 술 한잔 올립니다. 얼마나 신성한 행위입니까. 국가원수들이 만찬 때 취기 있는 액체를 마시고 축하합니다. 얼마나 경건합니까. 결혼한 첫날 밤에 부부가 몸을 섞기 전에 합환주(合歡酒)를 마십니다. 기가 막힌 액체가 아닙니까? 성서에도 예수께서 포도주를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고은 시인은 저자와 술과 사랑, 죽음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1980년대 초 내란 음모를 기도했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형당할 분위기였습니다. ‘그때 죽을 때 뭐라고 하면 좋을까’를 잠시 생각했습니다. ‘민주주의 만세’를 외칠까 ‘멋진 시 한 수를 읊고 떠날까.’등의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다 부질없었어요. 무슨 말을 남긴들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그냥 쏘아라 나 이제 가노라.’고 말하려 했었지요. 죽음은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지요. 죽음과 관련해서 내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냥요.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죽음의 의미를 만들어 반추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에게 죽음일랑 묻지 마세요.” 1933년생인 고은은 중학교 다닐 때 한하운 시인의 시집을 읽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58년 〈폐결핵〉이란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한 작품활동으로 지금까지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140여 권의 책을 내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가 되면 그의 집 앞은 기자들이 진을 쳤다. 그러데 요즘은… ― 함민복 시인 시인의 시를 읽은 기억은 거의 없다. 그는 시에 대해 “시는 감정이 출렁거림을 기록한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지요.”라고 한다. 시는 본질적으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1962년생으로 수도공고를 졸업하고 월성원자력발전소에 취직해 4년간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에 반해 동막해수욕장 근처의 폐가에서 어렵게 살면서 시를 쓰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하며 쓴 시가 〈성선설〉이라는 시로 아주 간단한 시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 엄마 뱃속에서 손가락을 헤아리는 태아의 모습이 다가온다. 시인은 시적인 삶을 살고 있다.그에게 시적인 삶은 어떤 것인가하고 물었다. ‘게을러야 한다. 열심히 안 살아야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결혼하고 자식 생기면 그렇게 살 수는 없지요. 어린 시절 반항기에는 ‘차라리 고아였으면 뭐든지 해 볼 텐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부모님마저 부담스런 시절이었지요. 나이가 들면서 가족 등 감당해야 할 세계가 넓어집니다. 나는 혼자 사는 방법을 택했기에 시적인 삶이 가능했습니다. 내 목숨 하나만 생각했습니다. 이기적인 생각이었지요. 저 역시 남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서 집에 보태고 살았어야 했습니다. 적어도 책임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시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쓰는 것은 그 같은 부담감 때문입니다.” 그가 51살 때 늦깎이로 올린 결혼식은 화제를 모았다. 소설가 김훈이 주례를 서고, 안치환이 축가를 부르고… “저나 아내나 평생 혼자 살 작정이었는데, 자유인으로 살다가 결혼하니 가족 관계가 확 달라졌습니다. 이제 술을 마셔도 눈치가 보입니다. 분명 구속이지요. 그러나 그런 구속이 행복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가족은 김치국물 자국 같아요. 서로 간에 근심도 되고 즐거움도 나누는, 그래서 김치국물이 흘러내린 신문지 같지만 정겨운….” 책의 저자인 이태형 선생은 26년간 언론인으로 살고 있으면서 함민복 시인과 자신은 같은 ‘동갑네기’라고 하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왔다. 어떤 삶이 더 정답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각 삶에는 나름의 희로애락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너무 한쪽 삶을 정답이라고 가르치는 사회 속에서 자랐다.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와 나는 동년배로서 다른 삶을 살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도 쉰을 넘겼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 이철환 작가 이철환의 소설 〈연탄길〉은 요즘처럼 메마른 세상에 빛을 던져준다. 혹독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따스함과, 희망, 용서, 사랑과 참을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소설이다. 2000년에 출간되어 400만 부 이상 팔렸다.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15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그는 1999년 우울증이 찾아와 심하면 보름 동안 머리도 감지 않고 방구석에 처박혀 살았다고 한다.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시절에는 가족과 신앙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우울증을 앓아본 사람만이 그것을 알 것이라고도 한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것은 ‘운동’과 ‘약’이었다. 그는 도시건 시골이건 따스함과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통되어야 배려할 수 있고, 소통한다는 것은 ‘나의 중심’을 ‘너의 중심’으로 가져간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소통은 내 것의 절반쯤은 네게 주겠다.”는 희생의 마음이 있을 때 이뤄진다고 했다. “한 사람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요. 믿음과 신뢰의 관계를 지탱해줍니다. 그 관계를 발전시켜 주는 요소가 배려입니다. 배려하면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한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됩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옆 사람의 기분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도 높인다. 이철환은 1962년생으로 서울에서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다 창작활동에 뛰어들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작은 배려가 인간 사이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바탕으로 〈연탄길〉〈작은 고물상〉등으로 알려졌다. “세상에는 고물이 아닌 것이 없던 시절, 그러나 사랑으로 수리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행복한 고물상 중에서 - ― 서영은 작가 서영은 작가를 잘 몰랐다. 그녀는 공지영만큼이나 1980년대 인기 작가였다. 하지만 그보다 33년의 나이 차이를 넘어 한국 문단의 거목이었던 김동리와 부부가 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5년 김동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세상의 눈초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추구했던 그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추상명사로 사랑을 풀이해줬다. “치러내다와 감당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랑은 치러내는 것이고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상대는 가만히 있는 인형이 아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는 소유하고 다치게 하는 것이지요. 다침까지도 사랑이라는 말로 치장이 됩니다. 자기가 다치게 됐을 때,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당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밀고 당기고 할 것 없이 치러내는 것이지요. 감당하다 보면 자기가 먼저 깨닫고 확 우뚝 서는 지점에 다다릅니다. 그 지점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이 살아서 내 것이 되는 시작점이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 이상(李箱)의 시를 읽듯이,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자. “17세 소녀 시절부터 접한 문학에서 구원을 찾았습니다. 당시 한국 문단의 거목이었던 김동리는 저에게 신과 같았습니다. 굳건한 지지대였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문학은 절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안에 구원은 없었습니다. 거센 지지대였던 김동리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휘청거리며 쓰러졌을 때 손에 쥐었던 모든 것, 업적과 자랑이 모래같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학이 절망이 되고, 반석 같은 지지대의 허물어짐을 목격했을 때, 죽음이 어른거렸습니다. 그때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로 인도됐습니다. 이후 저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크리스천이었지요. 하지만 저의 마음속에 잠재된 영성의 씨앗은 언제나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라고요. 그 간절한 소원의 성취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찢어져야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번 순례길에서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체험하며 나는 이전과 완전히 달려졌습니다. 그것이 저의 구원이었습니다.” 자기 변명과 비호(庇護)처럼 들리지만,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를 진 것이고 자기에게 내재 된 비본질적인 것과 거짓 속임수에 비수를 꽂아 끊어내야 했다고 말한다.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다기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질 수 있게 바닥에 마음을 까는 것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진리 체험을 온몸으로 하고 난 뒤에는 그 일 이상 중요한 것이 없어 보였다고도 했다. “오직 그분의 뜻이 지나가는 통로가 되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1943년 강릉에서 태어난 그녀는 모험을 좋아하고, 한강을 수영해 건너갔다 올 만큼 수영도 잘한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시인이던 선샘님의 영향으로 문학의 세계에 눈떴고, 23세 때 직장생활 중 글을 썼다. 1983년 〈먼 그대〉로 이상문학상을, 1990년 〈사다리가 놓인 창〉으로 연암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산티아고 길은 스페인에 있는 순례길이 아니라 모험의 길’이라는 것을 첨언 해 둔다. ― 정진홍 울산대 교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월이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걸까. 일흔이 넘으면 공자가 말한 대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뜻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 가능할까.’ 정진홍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3년 은퇴 후에는 울산대학교 석좌교수로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평생 유교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세계 여러 종교와 더불어 씨름하듯 살아 온 노 교수는 나이먹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드문 나이인 고희(古稀)가 넘으면 신선이 되거나, 성숙은 저절로 이뤄지는 줄 알았습니다.”이 말은 정작 일흔을 넘겼지만, 신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일 게다. 오히려 욕심은 가시지 않고 가슴앓이도 식지 않고, 미움도 여전하고 불안 분노가 일상을 충동하는 깊은 정서가 되고, 고독과 슬픔, 소외는 철저하게 구체적이며 현실적이 된다고 한다. 정 교수뿐 아니라 노년의 삶을 사는 모두가 비슷한 느낌을 지닐지도 모르겠다. 나이 든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은 철저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 교수는 아니라고 한다. “늙음은 축복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과거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현상과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평생 신문을 써왔던 사람이 문득 시를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세상을 볼 때, 신문의 세계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늙음의 축복 중 하나가 시적 상상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육하원칙에 의거한 신문만 읽고, 써서는 뭔가 부족합니다. 시도 읽고 써야 합니다.” 인터뷰 상대인 저자에게 해주는 말 같기도 하지만, 산문 세계에서 시적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종교적 삶이라고 한 정 교수는 자기를 바라보게 되면 그동안 학대해 왔던 자신을 사랑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주어지는 은퇴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기를 되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노인은 언제부터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의지력에 따라 다른 것으로 흔히 청춘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탁월한 정신력을 갖춘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그래서 스무 살의 청년보다 예순 살의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고 한다. “늙는다는 것은 자유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과 같습니다. 버릴 것 버리고, 나눌 것 나누며 유유자적하는 것을 노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면서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위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고 한다. “자신에게 ‘너 오늘 수고했다. 고맙구나. 사랑한다. 이제 잘 자라’고, 스스로를 사랑해 봐라. 그러면 잠들 것이다.”라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늙어서 죽음을 맞을 때 “너 잘 살아 왔어. 기특하구나. 고생 많이 했어. 이제 편히 쉬어라.”고 격려하고 자신을 사랑하면서 떠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한다. “젊었을 때 죽음을 생각하면 슬프고, 긴장되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늙어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면 ‘내 삶을 어떻게 다듬을까?’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죽을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나 노년이라고 모두 그렇게 삶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득문득 정지의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하철을 탔을 때, 걸을 때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어느 단계에 가면 우리 몸도 마음도 일그러지는 때가 올 것이다. 회복 불가능하게 퇴행 현상으로 접어드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 모두 잘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정 교수는 ‘노년의 증언’이라는 멋진 말을 했다. “노년은 증언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유년과 청년, 장년의 시절을 증언 해야 하는 것입니다. 늙은이들은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말해야 합니다. ‘젊음을 낭비하지 마라. 삶을 공연히 소비하지 마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현실 문제와 연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증언은 정직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만의 가치를 강조하며 ‘너희들 이렇게 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니 삶이 이렇더라.’고 하는 조언은 끊임없이 해 주어야 합니다. 정말로 후배들과 후세들을 아끼면서 하는 노인의 증언은 신뢰가 있습니다.”그리고 또 말했다. “인생은 정확히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요즘은 더욱 고맙다는 생각이 납니다.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삶의 고비가 많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납치되시고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저는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제대로 학교에 다닐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돌을 굴리고 다시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신화가 있습니다. 어릴 때 그 신화를 읽고 ‘굴릴 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희망이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런 무수한 고비를 넘었음에도 오늘이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어떤 섭리(攝理)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 교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감사하게 되면 모든 것이 의미롭게 다가온다고 한다. 그런 마음을 지닐 때 ‘고통에도 뜻이 있다.’는 말이 살아서 다가온다고 한다. 앞으로는 반드시 ‘죽음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도 말한다. 일본 도쿄대학에는 사생학과(死生學科)가 있다. 우리는 생사학(生死學)이라고 하는데 비해, 죽음을 먼저 앞세운다는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 ‘삶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죽음에 대비한 실험을 했더니 교육을 받은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성공, 성장 등에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끝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절대로 비판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한정된 시간을 산다는 강한 자의식이 인간을 훨씬 더 성숙하게 만듭니다. ‘건전한 끝’에 대한 조망을 어릴 때부터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실제 생활에 성숙한 긍정적 요소로 나타납니다. 죽음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자기 책임을 지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온화한 모습으로 노학자의 기품을 보여준 정 교수에게 저자가 ‘마지막으로 가장하기 싫은 일은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친구의 빈소에 가는 것이지요. 친구의 사망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아련합니다. 그 문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친구의 빈소에 가면 아는 사람이라곤 영정 사진 속의 친구밖에 없습니다. 간혹 아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죽은 친구만큼 잘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친구는 그냥 떠나지 않습니다. 나와 공유했던 기억도 가지고 갑니다. 어떤 이야기는 그 친구 아니면 같이 할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외로워지지요. 자꾸 공유하지 못하는 이야기의 숫자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친구가 가면 갈수록 나는 가난해집니다. 그만큼 외로워지지요…”그러면서 노 교수는 말했다. “그게 인생이지요. 노년에는 그것을 견뎌야 해요.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 있을 때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드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친구가 되세요. 그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1937년생인 정진홍 교수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종교학과를 졸업 후 평생 서울대에서 종교문화연구에 매진했다.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울산대 석좌교수이기도 하다.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그리고
우리가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 살아가는 데 앞선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하여 내 인생의 진로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샤를 드 푸코*가 한 말이다.
*샤를 드 푸코(1858~1916) 프랑스의 위대한 성자. 사막 오지에서 활동한 은수자인 동시에 선교사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영성가다. 수녀원장의 권유로 신학을 공부하고 43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뒤 성지가 아닌 아프리카 사막으로 향했다.
나자렛 영성은 성지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가장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침묵 중에 드러냈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국민일보 공채 1기로 정치부·경제부·문화부를 거쳐 일본 특파원을 거쳤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에 종교국 부국장을 지내기도 한 이태형 선생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었다가 이를 증보하여 재출간하면서 제목을 바꾼 것이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마세요」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이 책을 접하는 모든 분들이 기쁘고 행복하기를 읽으면서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퍼지는 행복한 책 읽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했다.
책은 우리 시대 귀한? 분들의 생각과 철학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재산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마음이 따뜻한 혜민 스님, 이혜인 수녀님, 김용택 시인, 오지 여행가에서 월드비전 세계 시민학교 교장으로 변신한 한비야, 얼마 전에 타개한 이어령 선생, 일본인인 마우리 미쓰요 선생, 김남조, 고은, 함만복 시인, 이철환, 서영은 작가와 정진홍 울산대 교수 등을저자가 직접 만나 취재한 내용을 담고 있다.
_ 혜민 스님
“친구뿐 아니라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로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아야 합니다. 마무리 관계가 좋다고 하더라도 찰싹 달라붙으면 결국 지겨워집니다. 아무리 좋아도 여운이 남아야 그리워집니다. 너무 가까워지면 숨이 막힙니다. 만남과 행복이 옅어지면서 다음이 별로 기다려지지 않습니다. 조금은 ‘서늘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냉엄한 판단이다. 그리고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성인들이 말씀하신 황금률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자님도, 부처님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바로 ‘남들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너도 남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그 상처는 그대로 돌려받습니다. 행복해질 수 없지요.”
“스님도 칭찬을 받으면 우쭐할 때가 있나요?”
“아이고, 저는 도구일 뿐입니다.
삶과 글을 통해 부처님의 법을 알리는 도구입니다. 아픈 사람들에게 위안과 평안을 주는 도구입니다. 누가 와서 저를 치켜세우면 금방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습니다. 저를 만나본 사람들이 ‘하버드 나와서 고고한 줄 알았는데 이웃집 형과 같이 털털하네.’라고 말하면 그것이 엄청난 칭찬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쭐해지지는 않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의 결정권을 주지 마십시오.
내가 내 삶의 주인입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그 어떤 성스런 스승이라도 나 자신이 있었기에 그분들의 성스러움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십시오.”‘인생은 연극’이고, ‘인생, 너무 어렵게 살지 말자.’고도 조언한 혜민 스님은 1974년생으로, UC버클리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석사, 프리스턴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가 되었고,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_ 이혜인 수녀님
이혜인 수녀의 시를 읽으면 많은 사람들이 따뜻함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다그녀는 죽음에 대해, 죽음은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쪽 강에서 저쪽 강으로 건너가는 것 말이다. “저쪽 세상은 어머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계시는 세상입니다. 미지의 세계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매일 보는 사람들도 처음 보듯 대한다면 전혀 느낌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 하더라도 그분과는 내일이면 헤어질 것이라고 여기고 바라보면 무척 사랑스러워질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남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풍요로운 보물을 자기 내면에서 길어 내야 합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내면의 바닥이 드러나지 않도록 채워 나가는 노력도 해야 하고요. 결국은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고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흔히 ‘매사에 감사하며 살라’고 말한다. 감사가 그저 고마워하는 것일까? 이혜인 수녀는 말했다. “겸손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신뢰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하게 됩니다. 절대로 건방져서는 안 되지요. 설사 탁월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들을 끌어 올려 함께 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감동스러운 좋은 것을 보여주면 ‘나도 닮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반대로 누군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 ‘반면교사(反面敎師)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좋은 것은 좋아서 감사하고, 나쁜 것은 거기에서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하지요.” 이혜인 수녀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험담하면 ‘꽃부터 보고 오세오’라고 말한다고 한다. 꽃의 마음, 별의 마음으로 살자고 권한다고 한다. 〈꽃의 말〉 - 이혜인 고통을 그렇게 낭만적으로 말하면 저는 슬퍼요 필 때도 아프고 질 때도 아파요 당신이 나를 자꾸 바라보면 부끄럽고 떠나가면 서운하고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더 많아 미안하고 미안해요 삶은 늘 신기하고 배울 게 많아 울다가도 웃지요 예쁘다고 말해 주는 당신에 곁에 있어 행복하고 고마워요 앉아서도 멀리 갈게요 노래를 멈추지 않는 삶으로 겸손한 향기가 될게요 이혜인 수녀는 1945년생으로 핀리핀 성루이스 대학 영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부산 광안리 성베네딕도회 수녀이며 1970년 시인으로 등단해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펴낸 이래 오늘도꾸준히 시와 수필을 써오고 있다. ― 김용택 시인 김용택 시인은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퇴직 후에는 ‘섬진강 시인’이 되었지만 교사가 평생직이었다. 그는 학교에 대해 더불어 살고 노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하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행복이란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있을 때 온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행복은 그냥 주어지지 않으며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관심을 갖고 자세히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아야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되어야 지식이 내 것이 되고 인격으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인격이 형성되어야 관계가 맺어집니다. 관계가 맺어져야 생각이 변하지요.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입니다. 결국 생각을 키워주고 생각을 일어나게 해 주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는 또 말한다. “인간에게는 놀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특히 엄마와 놀게 해야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위대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와 아이들이 놀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와 노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어머니 또한 엄마이기를 포기했습니다 . 아이들을 학원에 맡겨버렸습니다. 어머니의 입에서 하루 종일 무슨 말이 나오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공부와 점수로만 따지니 아이들이 온전한 인간이 되겠어요? 점수 벌레가 되는 것이지요.” 요즘 아이들은 어머니 대신 컴퓨터와 휴대폰과 장난감과 놀기는 한다. 하지만 김 시인은 사람과 놀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놀이는 상대가 있어야 하고 상대와 놀기 위해서는 상대를 인정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 놀아야 하는데 놀이는 상대를 인정하는 훈련인 것이라고 한다. 놀이 상대가 없는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과 놀기도 한다.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무식한 공부다. 공부를 왜 잘하려고 하는가는 분명하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말하고 공부를 잘하는 것과 인격을 갖춘 것과는 전혀 상관 없게 되어버린 지 오래다. 공부를 잘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존경하고 있지 않다. 꼭 도둑놈 취급하고 있다. “공부를 잘해서 대기업에 들어가고 변호사,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는 사라집니다. 고민하고 생각하는 자기 말입니다. 인생과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자기는 실종되었습니다. 자기가 없으니 이웃에 대한 고민도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직장을 자기 인생의 터전으로 소중히 가꾸지 않습니다. 직장은 오직 돈 벌고, 출세하는 곳입니다. 불행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잘 놀게 해야 합니다. 직장을 자기 삶으로 귀하게 생각하고 가꿀 줄 아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시골 아이는 죽어도 서울 강남에 갈 수 없습니다. 이제 개천에서 절대로 용이 못 나옵니다. 어쩌다가 나오는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만 구조적으로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 시인’으로 불린다.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무수한 시를 썼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 시인은 말한다. “과거에는 섬진강에 공동체가 살아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없고 강도 썩었다.”고 한다. 그래도 비가 많이 올 때는 조금 괜찮지만 비가 안 오면 강이 썩고 봄이 왔는데도 강에 물고기가 없다고 한다. “섬진강에서 배운 점은 무엇입니까?” “거창한 거 없어요. 그냥 강변을 걸으면 강물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물에 달이 뜨고 별이 뜨고,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섬진강은 사람들 몸속에 흐르는 핏줄과 같습니다. 지금은 잘 안 가지만 과거에는 사계절 강에서 살았습니다. 강은 우리였고 나였습니다. 우리 마음과 강물의 마음이 같았습니다. 우리 삶이 맑고 깨끗하면 강물도 맑았습니다. 우리 삶이 혼탁해지면서 강물도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래요. 섬진강에서 자연을 보았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집에서 40분 걸어서 학교에 갔습니다. 강가 길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강변에 노루와 토끼가 살았고 수없는 풀꽃이 피고 졌지요. 눈 내린 강과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지금은 그런 강이 다 사라졌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자신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서란다. 그는 어린 시절 태어난 곳에서 평생 선생을 하면서 살겠다고 하고는 그것을 실천했다. 섬진강을 바라보면서 강물만큼 맑은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농사지으면서 자연과 생태, 순환의 논리를 배웠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다.
가난한 6남매로 청년기에 담배를 원 없이 피워 보고, 책을 마음껏 읽고 영화를 지겨울 때까지 보는 것을 꿈을 꾸었지만 담배와 책을 외상으로 사야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꿈은 이루어졌다. 시인이 되었고, 광고 촬영도 했다. 자연과 더불어 놀고, 지금의 나를 귀하게 가꾸다 보니 예상치 않은 일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순창에서 태어나 순창농립학교를 졸업하고 스물한 살 때 덕치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1982년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시집, 산문집, 동요집 등을 두루 펴내면서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 한비야(여행가)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그건 사랑이었네》등 베스트 셀러 작가로도,‘바람의 딸’로도 알려진 한비야는 2009년 52세 때 미국 터프츠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백두대간을 종주했고, 2010년에는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어 공부를 했다. 2011년에는 유엔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직을 맡았고, 현재는 월드비전 세계 시민학교 교장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는 토끼의 규칙에 따라서 펼쳐졌다고 말한다. 토끼가 이길 수밖에 없었던 경주라는 것이다. 만약에 거북이 규칙에 따라 물 속에서 경주를 했다면, 토끼는 백전백패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부턴가 “세상의 규칙이 아니라 ‘나의 규칙’에 따라서 ‘나만의 시간표’대로 가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이 토끼인지 거북인지 알아야 한다고도 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한비야의 대표 저서 가운데 하나다. “경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회에는 지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지도 안에서 묵묵히 머무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지도를 지리적인 경계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 지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고, 나가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지도란 자기 생각의 틀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멋집니다. 훨씬 가능성이 많아요. 해 보는 데까지가 자기 가능성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나는 여기까지’라며 포기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비야는 1958년생으로 홍익대 영어영문과를 나오고 미국 유타대학에서 석사가 된 뒤, 보험회사에 근무하다 7년간 세계여행 경험을 담은 에세이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작가가 되었다. 국제 NGO 월드비전에서 전문 구호활동가로 일하고 있고,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지구 밖으로 행군하라〉등을 많은 책을 썼다. ― 이어령 교수 지난 2.26. 향년 89세로 타개한 이어령 교수는 우리 시대의 석학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수셨다. 나도 무척 존경한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생전에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는 “남들은 나를 보고 성공했다고 말하겠지요. 문필가로, 교수로, 장관으로 활동했으니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실패한 삶을 살았습니다. 겸손이 아닙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의외다. 20대 30대에 이미 많은 일을 하셨고, 그것을 노년이 되어서도 해냈던 그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평가했다니 정말 의외다. 스토리텔링과 레토릭*의 달인인 그가 실패라는 말속에 깃든 레토릭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실패자’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인생 실패를 선언하게 된 것은 ‘동행자가 없어서’라고 그는 말했다. *레토릭 :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 의미 전달에 효과적인 문장과 어휘를 사용해서 설득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표현. “내게는 친구가 없어요.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습니다. 혼자서 나의 그림자만을 보면서 동행자 없이 숨 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더러는 동행자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모두 경쟁자였습니다.” 가족이 들으면 섭섭해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자신이 선택하고 창조한 인간관계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생래적으로 주어진 가족 관계에서도 실패했을지도 모른다고 부연(敷衍)했다. “집에서는 언제나 글을 썼습니다. 머리속은 24시간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요. 애들과 야구 구경 간다거나, 아내와 오붓하게 영화감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면서 그는 인생의 동행자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동행자가 없다는 건 사랑에 실패했다는 의미지요. 그것이 이성이건 동성이건…” 이어령 교수는 스스로 동행자가 없어서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무수히 많은 성취를 경험한 사람이다. 성공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모두가 성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태를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성공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아브라함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를 보면 가장 꼭대기에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자아실편의 욕구는 존경받고 싶은 욕구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성공이란 어떤 면에서는 자기실현이 된 상태입니다. 자기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대학입시와 마찬가지로 인생이라는 입시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은 절대화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자기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흔히 말하는 성공은 타자의 기준, 사회의 기준에 따른 성취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에 ‘남 보라는 듯’‘여보라는 듯’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그 말대로 타자의 기준과 목표에 자기를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싶지 않아도 남들이 원하는 트로피, 남들이 만들어준 트로피를 위해서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실현적 성공의 측면보다는 타인 지향적인 성공이 더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성공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성공자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말은 모두가 금석문과 같다. “누가 ‘사랑해요’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정말 사랑하면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 말이 거짓이기에 계속 상대를 붙잡으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고 글 쓰는 지성인은 결코 성자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두 극점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것과 같이 끝없이 변신하는 삶을 살았기에 실제로는 성공하지 못한 삶이지만, 평생을 그렇게 했기에 역설적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는 자신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물을 파는 사람이기에 일단 물이 나오면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또 다른 우물을 파러 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성공은 갈증을 끝없이 채워가는 마음이 지속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 갈증은 결코 채워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어령은 죽을 때까지 새로운 우물을 팠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우물을 파게 했을까. 그것은 창조적 갈증이었다. 그에게는 갈증을 끝없이 채워가는 정열이 지속되고 있었다.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세속적으로 성공한 그가 인생의 최후반기에 더욱 완벽한 내면으로 영원한 성공을 꿈꾸며 실현하려 했던 것, 그것은 영원히 성공을 꿈꾸며 사는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에게 삶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창조적 갈증이 있다면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늙어도 영원한 청춘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설사 실패감에 젖은 사람이라도 낙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 평생을 지탱해 줄 동행이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일 수는 없다. 이어령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와 대학원을 나오고 20대에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논객으로 활약했다. 1967년 이화여대 교수가 되었고, 노태우 정부 때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했다. 내가 읽고 감명을 받은 그의 글은 〈흙 속에 저 바람속에〉〈축소지향의 일본인〉〈지의 최전선〉등이다. 그가 만년에 기독교에 귀의하여 썼다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꼭 읽어야겠다. ― 마우라 미쓰요 선생 ‘마우라 미쓰요’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작가인 마우라 아야코의 남편이라고 하는데, 이 여자부터 알아야 이야기가 될 것 같다. 1964년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1,000만 엔을 걸고 작품을 현상 공모한 결과, 1위로 뽑힌 《빙점》이라는 소설의 저자가 아야코다. 출간 즉시 일본에
가난한 6남매로 청년기에 담배를 원 없이 피워 보고, 책을 마음껏 읽고 영화를 지겨울 때까지 보는 것을 꿈을 꾸었지만 담배와 책을 외상으로 사야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꿈은 이루어졌다. 시인이 되었고, 광고 촬영도 했다. 자연과 더불어 놀고, 지금의 나를 귀하게 가꾸다 보니 예상치 않은 일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순창에서 태어나 순창농립학교를 졸업하고 스물한 살 때 덕치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1982년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시집, 산문집, 동요집 등을 두루 펴내면서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 한비야(여행가)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그건 사랑이었네》등 베스트 셀러 작가로도,‘바람의 딸’로도 알려진 한비야는 2009년 52세 때 미국 터프츠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백두대간을 종주했고, 2010년에는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어 공부를 했다. 2011년에는 유엔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직을 맡았고, 현재는 월드비전 세계 시민학교 교장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는 토끼의 규칙에 따라서 펼쳐졌다고 말한다. 토끼가 이길 수밖에 없었던 경주라는 것이다. 만약에 거북이 규칙에 따라 물 속에서 경주를 했다면, 토끼는 백전백패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부턴가 “세상의 규칙이 아니라 ‘나의 규칙’에 따라서 ‘나만의 시간표’대로 가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이 토끼인지 거북인지 알아야 한다고도 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한비야의 대표 저서 가운데 하나다. “경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회에는 지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지도 안에서 묵묵히 머무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지도를 지리적인 경계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 지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고, 나가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지도란 자기 생각의 틀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멋집니다. 훨씬 가능성이 많아요. 해 보는 데까지가 자기 가능성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나는 여기까지’라며 포기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비야는 1958년생으로 홍익대 영어영문과를 나오고 미국 유타대학에서 석사가 된 뒤, 보험회사에 근무하다 7년간 세계여행 경험을 담은 에세이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작가가 되었다. 국제 NGO 월드비전에서 전문 구호활동가로 일하고 있고,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지구 밖으로 행군하라〉등을 많은 책을 썼다. ― 이어령 교수 지난 2.26. 향년 89세로 타개한 이어령 교수는 우리 시대의 석학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수셨다. 나도 무척 존경한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생전에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는 “남들은 나를 보고 성공했다고 말하겠지요. 문필가로, 교수로, 장관으로 활동했으니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실패한 삶을 살았습니다. 겸손이 아닙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의외다. 20대 30대에 이미 많은 일을 하셨고, 그것을 노년이 되어서도 해냈던 그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평가했다니 정말 의외다. 스토리텔링과 레토릭*의 달인인 그가 실패라는 말속에 깃든 레토릭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실패자’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인생 실패를 선언하게 된 것은 ‘동행자가 없어서’라고 그는 말했다. *레토릭 :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 의미 전달에 효과적인 문장과 어휘를 사용해서 설득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표현. “내게는 친구가 없어요.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습니다. 혼자서 나의 그림자만을 보면서 동행자 없이 숨 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더러는 동행자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모두 경쟁자였습니다.” 가족이 들으면 섭섭해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자신이 선택하고 창조한 인간관계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생래적으로 주어진 가족 관계에서도 실패했을지도 모른다고 부연(敷衍)했다. “집에서는 언제나 글을 썼습니다. 머리속은 24시간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요. 애들과 야구 구경 간다거나, 아내와 오붓하게 영화감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면서 그는 인생의 동행자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동행자가 없다는 건 사랑에 실패했다는 의미지요. 그것이 이성이건 동성이건…” 이어령 교수는 스스로 동행자가 없어서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무수히 많은 성취를 경험한 사람이다. 성공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모두가 성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태를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성공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아브라함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를 보면 가장 꼭대기에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자아실편의 욕구는 존경받고 싶은 욕구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성공이란 어떤 면에서는 자기실현이 된 상태입니다. 자기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대학입시와 마찬가지로 인생이라는 입시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은 절대화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자기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흔히 말하는 성공은 타자의 기준, 사회의 기준에 따른 성취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에 ‘남 보라는 듯’‘여보라는 듯’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그 말대로 타자의 기준과 목표에 자기를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싶지 않아도 남들이 원하는 트로피, 남들이 만들어준 트로피를 위해서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실현적 성공의 측면보다는 타인 지향적인 성공이 더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성공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성공자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말은 모두가 금석문과 같다. “누가 ‘사랑해요’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정말 사랑하면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 말이 거짓이기에 계속 상대를 붙잡으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고 글 쓰는 지성인은 결코 성자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두 극점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것과 같이 끝없이 변신하는 삶을 살았기에 실제로는 성공하지 못한 삶이지만, 평생을 그렇게 했기에 역설적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는 자신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물을 파는 사람이기에 일단 물이 나오면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또 다른 우물을 파러 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성공은 갈증을 끝없이 채워가는 마음이 지속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 갈증은 결코 채워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어령은 죽을 때까지 새로운 우물을 팠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우물을 파게 했을까. 그것은 창조적 갈증이었다. 그에게는 갈증을 끝없이 채워가는 정열이 지속되고 있었다.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세속적으로 성공한 그가 인생의 최후반기에 더욱 완벽한 내면으로 영원한 성공을 꿈꾸며 실현하려 했던 것, 그것은 영원히 성공을 꿈꾸며 사는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에게 삶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창조적 갈증이 있다면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늙어도 영원한 청춘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설사 실패감에 젖은 사람이라도 낙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 평생을 지탱해 줄 동행이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일 수는 없다. 이어령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와 대학원을 나오고 20대에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논객으로 활약했다. 1967년 이화여대 교수가 되었고, 노태우 정부 때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했다. 내가 읽고 감명을 받은 그의 글은 〈흙 속에 저 바람속에〉〈축소지향의 일본인〉〈지의 최전선〉등이다. 그가 만년에 기독교에 귀의하여 썼다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꼭 읽어야겠다. ― 마우라 미쓰요 선생 ‘마우라 미쓰요’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작가인 마우라 아야코의 남편이라고 하는데, 이 여자부터 알아야 이야기가 될 것 같다. 1964년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1,000만 엔을 걸고 작품을 현상 공모한 결과, 1위로 뽑힌 《빙점》이라는 소설의 저자가 아야코다. 출간 즉시 일본에서, 한국에서 아야코 붐이 일어났다. 그녀는 1922년 아사히카와(旭川, 인구 36만의 홋카이도 북부의 중심도시)에서 태어나 19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96편의 소설을 썼다. 《길은 여기에》《양치는 언덕》등 그녀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이전까지
‘미우라 아야코’가 대세였고 인기였다.
작가로서는 화려했지만, 그녀는 폐결핵과 척추 질병 등으로 24세부터 13년간 병상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아야 했던 비참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허물어지지는 않았으나 처절한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녀의 고통을 함께 지고 간 간 이가 반려자였던 미우라 미쓰요다. 미쓰요의 희생이야말로 아야코의 삶을 지탱해준 원동력이었다. 1955년 공무원이던 미쓰요는 우연히 투병 중인 아야코를 병문안하게 되었고, 병상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 14장을 읽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는 ‘마야코를 낳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진심이 담긴 기도가 아야코의 마음을 움직였고, 5년 뒤 둘은 결혼했다.
그리고 아야코는 기적적으로 치유돼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쓰요는 공무원을 청산하고 아내가 구술한 소설을 필기했다
. 남편은 충실한 비서였다. 사랑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결혼할 때는 35세와 37세였지만, 몇 년 전에 86세이던 미쓰요를 저자가 면담하면서 ‘사랑이 무엇인지?’하고 물었다. “사랑이라, 사랑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싶네요. 사랑의 조건과 환경은 시시때때로 달라집니다. 인간의 마음도 변화하지요. 끝까지 죽도록 사랑하겠다는 사람들도 갈라서곤 합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 어떤 조건일지라도 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야코는 언제나 ‘일어나서 빛을 비추라’고 말했습니다. 빛을 향하라고 했어요. 빛이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의 불길한 그림자만 보지만, 빛 쪽을 향했을 때는 그림자는 사라지고 성스러운 따뜻한 빛만 남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살아 간다는 것은 생명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 말대로 저도 생명 자체를 기뻐하려고 합니다. 이제 너무나 늙었지만 이 늙음 자체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 빛을 향하여 기뻐하며 살다가 아야코 곁으로 가는 것이지요.” 그는 아야코를 추억하며 추억이 담긴 책을 쓰고 있다고 했고, 지금도 아내의 채취가 담긴 2층 다다미방에서 잔다고 한다. ‘내게도 그런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지,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저자의 말이다. 미쓰요는 인터뷰를 한 지 4년 후 2015년 10월 30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아야코 곁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으리라. ― 김남조 시인 노천명, 모윤숙 계보를 잇는 한국의 여류 시인하면 김남조 시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녀는 192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5년 조각가 김세중(1928∼1986) 전 서울대 미대 학장과 결혼했고, 38년 동안 숙명여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인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각종 문학상과 국민훈장 모란장, 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 16권의 시집과 12권의 수필집, 콩트집을 냈으며 80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발표했다. 팔순을 넘긴 시인에게 이 땅의 늙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나는 젊었을 때 팔팔하게 살았지만, 팔순을 넘기고 나선 ‘다 소용없어 필요 없어’를 되 내며 사는 노인들을 알고 있다며, 구순을 향해가는 자신의 ‘삶에는 결코 무료가 있을 수 없다’고 외친다. 그러면서 독일의 시인 마리아 릴케 이야기를 해 줬다. 말년에 백혈병으로 고생하던 릴케가 장미를 손질하다 손가락을 가시에 찔렸고, 상처가 낳지 않고 화농이 생겼다. 결국 상처로 인해 릴케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의사는 고통스러워하던 릴케를 위해 여러 차례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릴케가 죽은 후 침대 밑에 진통제가 가득 쌓여 있었다. 진통제를 먹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릴케는 죽는 순간까지 고통의 맛을 음미했을 겁니다. 고통과 슬픔은 막는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찾아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 아무리 신앙이 있다 하더라도
더 큰 고통이 찾아오면 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슬픈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처럼 위로받고 견디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은 풍요로워졌지만 삶은 팍팍해진 것이
사실이다. 감수성을 느낄 겨를도 없고,
그러다 보니 감동도 없다. 감정이 메말라졌다는
말이다. 이 시대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하고 묻었다. “잘 보는 것은 자세히 보
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닌 것,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청춘의 장기는 팔팔합니
다. 위,폐,장 모두 건강합니다. 피도 젊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라는 보물 창고도 있습니다.
위태하고 절망스러울 때도 전체 안에서 내게 허
락된 것들을 보고 그 풍요에 감사하는 것이 필요합
니다.” 내 입장에서도 와 닿는 시가 있다. 〈
노약자〉라는 제목의 시다. 그 이름도 나쁘지 않
아 그간에 십만 번 가까이는 해돋이를 보고 해 아
래 살아 해의 덕성과 은공을 웬만큼은 일깨
웠는지라 사랑의 마음도 십만 번의 열 갑절은
밝거나 흐린 음표들의 악보로써 나의 심연에
흘러 닿아 사람의 노래를 아는 웬만큼은 되었는지라. (후략) 사람의 마음을 음표라고 한다면, 노년은 인생의 오묘한 음표를 헤아릴 줄 아는 시기라는 말인 것 같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고 무엇보다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 고은 시인 2018년 미투로 모든 직에서 제명된 고은 시인은 이제 90살이 되었다. 늙어서 참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는 해마다 노벨상을 발표될 때가 되면 대상에 오르기도 하던 인물이다. 저자는 그를 여러 차례, 그것도 미투 전에 만났다. 1952년 19살 나이에 효봉선사의 상좌가 되었고, 10년 후에 환속했다. 19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 참여로 삶보다 죽음이, 환희보다 비탄이 드리워진 인생을 살았다. 애주가인 그는 지방에 갈 때면 그곳의 토산주를 마신다고 하는데, 술을 ‘기가 막힌 액체’라고 하기도 했다. “조상들이 제사를 지낼 때 머리를 조아리며 차 한잔, 술 한잔 올립니다. 얼마나 신성한 행위입니까. 국가원수들이 만찬 때 취기 있는 액체를 마시고 축하합니다. 얼마나 경건합니까. 결혼한 첫날 밤에 부부가 몸을 섞기 전에 합환주(合歡酒)를 마십니다. 기가 막힌 액체가 아닙니까? 성서에도 예수께서 포도주를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고은 시인은 저자와 술과 사랑, 죽음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1980년대 초 내란 음모를 기도했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형당할 분위기였습니다. ‘그때 죽을 때 뭐라고 하면 좋을까’를 잠시 생각했습니다. ‘민주주의 만세’를 외칠까 ‘멋진 시 한 수를 읊고 떠날까.’등의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다 부질없었어요. 무슨 말을 남긴들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그냥 쏘아라 나 이제 가노라.’고 말하려 했었지요. 죽음은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지요. 죽음과 관련해서 내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냥요.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죽음의 의미를 만들어 반추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에게 죽음일랑 묻지 마세요.” 1933년생인 고은은 중학교 다닐 때 한하운 시인의 시집을 읽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58년 〈폐결핵〉이란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한 작품활동으로 지금까지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140여 권의 책을 내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가 되면 그의 집 앞은 기자들이 진을 쳤다. 그러데 요즘은… ― 함민복 시인 시인의 시를 읽은 기억은 거의 없다. 그는 시에 대해 “시는 감정이 출렁거림을 기록한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지요.”라고 한다. 시는 본질적으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1962년생으로 수도공고를 졸업하고 월성원자력발전소에 취직해 4년간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에 반해 동막해수욕장 근처의 폐가에서 어렵게 살면서 시를 쓰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하며 쓴 시가 〈성선설〉이라는 시로 아주 간단한 시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 엄마 뱃속에서 손가락을 헤아리는 태아의 모습이 다가온다. 시인은 시적인 삶을 살고 있다.그에게 시적인 삶은 어떤 것인가하고 물었다. ‘게을러야 한다. 열심히 안 살아야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결혼하고 자식 생기면 그렇게 살 수는 없지요. 어린 시절 반항기에는 ‘차라리 고아였으면 뭐든지 해 볼 텐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부모님마저 부담스런 시절이었지요. 나이가 들면서 가족 등 감당해야 할 세계가 넓어집니다. 나는 혼자 사는 방법을 택했기에 시적인 삶이 가능했습니다. 내 목숨 하나만 생각했습니다. 이기적인 생각이었지요. 저 역시 남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서 집에 보태고 살았어야 했습니다. 적어도 책임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시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쓰는 것은 그 같은 부담감 때문입니다.” 그가 51살 때 늦깎이로 올린 결혼식은 화제를 모았다. 소설가 김훈이 주례를 서고, 안치환이 축가를 부르고… “저나 아내나 평생 혼자 살 작정이었는데, 자유인으로 살다가 결혼하니 가족 관계가 확 달라졌습니다. 이제 술을 마셔도 눈치가 보입니다. 분명 구속이지요. 그러나 그런 구속이 행복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가족은 김치국물 자국 같아요. 서로 간에 근심도 되고 즐거움도 나누는, 그래서 김치국물이 흘러내린 신문지 같지만 정겨운….” 책의 저자인 이태형 선생은 26년간 언론인으로 살고 있으면서 함민복 시인과 자신은 같은 ‘동갑네기’라고 하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왔다. 어떤 삶이 더 정답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각 삶에는 나름의 희로애락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너무 한쪽 삶을 정답이라고 가르치는 사회 속에서 자랐다.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와 나는 동년배로서 다른 삶을 살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도 쉰을 넘겼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 이철환 작가 이철환의 소설 〈연탄길〉은 요즘처럼 메마른 세상에 빛을 던져준다. 혹독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따스함과, 희망, 용서, 사랑과 참을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소설이다. 2000년에 출간되어 400만 부 이상 팔렸다.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15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그는 1999년 우울증이 찾아와 심하면 보름 동안 머리도 감지 않고 방구석에 처박혀 살았다고 한다.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시절에는 가족과 신앙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우울증을 앓아본 사람만이 그것을 알 것이라고도 한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것은 ‘운동’과 ‘약’이었다. 그는 도시건 시골이건 따스함과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통되어야 배려할 수 있고, 소통한다는 것은 ‘나의 중심’을 ‘너의 중심’으로 가져간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소통은 내 것의 절반쯤은 네게 주겠다.”는 희생의 마음이 있을 때 이뤄진다고 했다. “한 사람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요. 믿음과 신뢰의 관계를 지탱해줍니다. 그 관계를 발전시켜 주는 요소가 배려입니다. 배려하면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한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됩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옆 사람의 기분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도 높인다. 이철환은 1962년생으로 서울에서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다 창작활동에 뛰어들어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