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청 기독신우회 메시지
일자: 2023년 10월 04일 수요일
제목: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https://youtu.be/YlF9UElVIvY?feature=shared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누가복음 16: 19~21
설교를 위한 묵상
도구의 법칙
도구의 법칙(The Law of the Instrument) 또는 망치의 법칙(The Law of the Hammer)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다시 매슬로우의 망치나 황금망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인식론적 편견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신에게 너무 익숙해진 도구를 지나치게 의지하는 현상을 지적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 법칙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1966년에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H. Maslow, 1908~1970)가 다음과 같이 정리한 말이 대표적이다:
“만약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망치뿐이라면, 모든 것이 두드려 박아야 할 못으로 보일 수도 있다.” (If the only tool you have is a hammer, it is tempting to treat everything as if it were a nail.)
성경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So they shall eat of the fruit of their own way, And be filled with their own schemes. – 잠언 1:31)
꾀로 번역된 영어 단어 스킴(Scheme)은 본래 헬라어 단어 에케인(echein, to have, hold)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어떤 것을 굳게 잡아 가지고 있으면 특정한 모습을 띠게 되며 어떤 일정한 형태로 굳어지게 되며, 경향성을 띠게 된다. 그래서 점성술에서 이 단어는 하늘에 배치된 별자리의 그림인 천상도(天象圖)가 되며, 정부나 회사 같은 단체가 어떤 일을 어떻게 배치하며 진행할지를 미리 보여주는 계획(計劃)이나 설계(設計)를 뜻하게 된다.
아래의 웹스터사전은 위와 같은 상상을 하게 하는 자료를 제공한다:
Scheme: Latin schemat-, schema arrangement, figure, from Greek schēmat-, schēma, from echein to have, hold, be in (such) a condition
성경해석의 문제
인도의 철학자들은 인식론적인 한계상황을 나타내기 위하여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가 빚어내는 오해를 지적했다. 현상들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고정된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읽는다. 계속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는 그 이야기의 배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왜 그 이야기를 소개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계속 성경 이야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런 발견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교훈이나 안목을 제시하여 영향을 끼친다.
성서해석학의 권위자였던 앤써니 티슬턴(Anthony Thiselton, 1937 – 2023)은 두 지평(Two Horizons)이라는 방대한 책을 통해서 성경 본문과 독자의 삶이라는 두 지평의 융합을 추구하는 길을 제시했다. 결국 성서해석은 이 두 지평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와 융합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를 가지고 성경을 읽으며 동시에 성경에서 발견한 것으로 우리의 삶을 진단한다. 구도의 길은 이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내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설교해야 하겠다고 다짐한 계기는 이 본문을 기반으로 전도에 대한 열심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으며 결국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리킬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는 일종의 권선징악적인 요소가 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이집트인들의 사자의 서라는 책에는 사후에 인간이 심판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 책에서 들려주는 심판에는 깃털로 양심을 달아보는 저울이 있다고 한다. 현생에서 사람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사후에 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의 인류에게 공통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교훈을 담고 있다. 재산이 많아서 풍족하게 살면서도 자기 집 앞에서 구걸하는 병든 사람을 외면한 사람에게 사후에 심판의 형벌이 임하고 이생에서 괴로움을 겪은 사람은 사후에 안식하게 된다는 이 이야기는 어느 시대의 누가 읽어도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측은지심을 일깨워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 교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의도가 왜곡되면
그런데 이 이야기를 사후세계에 방점을 두면 어떻게 될까? 즉, 사후세계는 분명히 있으며 지옥과 천국 중 하나로 들어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강조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자와 같이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크게 부각된다. 이 이야기를 그대로 보면 이웃사랑을 실천하면 되겠구나 정도로 끝나면 문제가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더하여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교리를 덧붙이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이 이야기는 약간 왜곡된다. 즉,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았기 때문이고 나사로가 구원을 받은 이유는 가난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으려면 지금 살아 있을 때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누가 지옥에 있고 누가 천국에 있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까를 생각할 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그 결과 우리는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즉, 아무개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므로 지옥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거나, 누가 지옥에 가고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처음에 매우 간단하고 단순한 이야기가 결국 해답을 알 수 없는 이야기로 끝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처음에 분명했던 교훈은 사라진다. 전형적인 본문 왜곡이다.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누구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이야기를 주로 가르치셨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슨 의도를 전달하고자 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셨고 언제 사셨으며 어떻게 자라셨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연구는 결국 성경 본문의 배경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 우리는 본문을 그대로 읽는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의 배경 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간다.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새로운 시대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누가복음 16장에서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누가복음 16:16).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는 복음의 전령이심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새 시대의 개막을 전하시고 그 정신에 맞는 생활을 삶으로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당시에 사회적으로 아웃사이더에 있던 사람들을 가까이하신 까닭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부합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화자(話者)의 의도
그런데 예수님의 새 시대 선언과 행동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그 대목을 엿볼 수 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누가복음 15:1~2
새 시대가 왔으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낡은 생각과 완고한 고집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를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세 가지를 찾은 이야기다. 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았고, 한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으며, 한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기뻐하며 잔치를 벌였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이제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들려주신다(1~9절).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의 해고가 임박했음을 알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 빚을 깎아 주었다. 요새 같으면 배임죄(背任罪)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야기 속에서 그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를 지혜롭다고 평가하셨다. 그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고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미리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당시의 지도자들을 일깨우려고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
이렇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생각해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즉,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가 왔으며 그 시대는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이 성취되는 때이다(누가복음 4:16~21).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새 시대에 걸맞은 생활을 하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셨다. 그것은 자신이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을 다시 살펴보고 그들이 어떤 형편에 있는지를 보고 돌아보라는 교훈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핵심 가르침이며,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지만, 양심이 화인맞은 사람들은 설령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진실을 들려줄 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성경을 읽고 그 교훈을 기쁨으로 받는 것이 옳은 길임을 다시금 확신할 것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 교훈적이다.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것과 나사로가 안식에 들어간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비를 실천해야 할까? 물론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물려받을 세상이 바로 그와 같이 상생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아우르는 틀
우리는 이제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게 된다.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질문 아래서 성경 본문을 다시금 이해하고 우리의 실천과제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에서부터 이 세상을 경영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이야기와 장차 이 세상을 어떻게 만드실지에 대하여 예언자들에게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하나님의 청사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성경본문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우리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단지 어떤 규율과 지침을 알려주는 당위의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가 바라보고 꿈꾸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그려주는 책이 된다. 그런 종합적인 이해 속에서 우리는 더 본질적인 확신을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바른 의미를 파악하고 해석의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이런 영역에서 성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성경 이야기로 스스로를 얽어 매고 그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인류의 미래는 인류의 마음 속에 어떤 이야기가 자리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인류를 이끄는 지도가 된 것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문제는 이제 예수님의 이야기를 바르게 읽어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우리를 두려움과 무지의 족쇄에서 풀려나게 할 것이며, 우리를 격려하여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하고 무엇을 위해 현실에서 노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즉, 우리의 재물과 노력을 어디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할지를 일깨워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풍성해지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