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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의 줄거리:
서울 시내 있는 4, 5층짜리 빌딩이 황금알 낳는 거위인가요? 아니면 든든한 노후 연금? 아닙니다. 내가 바로 황금알 낳는 거위입니다. 황금알을 낳기 위해서 이 세상으로부터는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나만 있으면 됩니다. 올 한 해 나는 사랑과 전지전능을 성분으로 하는 하나님 주권의 울타리 안에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입니다.
내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마태복음 15:1~20)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가 황금알 낳는 거위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가 황금알 낳는 거위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새해를 기쁨과 만족과 감사와 행복이 넘치는 복지로 살아가기 위해 중무장하기에 적합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몰랐던 특별한 무장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이 소나기처럼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허허벌판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눈으로 못 보는 몸의 오장육부 구석구석까지 하나님의 주권은 미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주권의 속성은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삶을 최고이자 최선으로 이끄십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원죄의 속성은 악하고 약하고 못돼먹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악하게 행동하고, 육체에 종속되고자 하는 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에서 못된 행실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최선에는 우리의 원죄의 속성이 고려되어 있습니다. 마치 내비게이션 같습니다. 목적지에 가던 중 경로에서 이탈하면 내비게이션은 이탈한 경로에서 다시 목적지로 가기 위한 최선의 경로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이렇게 개입하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는 것이며, 또한 소나기처럼 피할 수 없이 내게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로 표현되게 됩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통해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황금알이라는 힌트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최선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최선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가 가진 원죄의 성분 즉 악함과 약함과 못돼먹음의 양을 줄여야만 합니다. 19절을 보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이 원죄의 성분들을 줄여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이루고 싶으셨던 본래의 계획은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고 창의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원죄의 성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획은 계속해서 수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원죄의 성분들을 줄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가지셨던 본래의 아름답고 완전하고 창의적인 삶의 내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없는 주변의 상황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최선의 방향으로 움직여 갈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고 악함과 약함과 못돼먹음을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본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창의적인 삶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이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염려하시는 더러운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황금알로 비유되는 것으로 나오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황금알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권력과 건강 등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외부 요건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는 것이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우리의 행실로부터 무엇이 나오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합당한 마음을 가질 때에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황금알과 같이 가장 값진 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고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의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세상에 내놓는 것이 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는 일입니다.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세상에 표현하고, 감정으로는 하나님의 감정을 받아 세상에 표현하며, 의지로는 하나님의 의지를 받아서 세상에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보다도 가장 값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값진 이유는 그 자체로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100억이 있다면 하나님의 생각이 존중될 때에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대통령이 되어야만 한다면 하나님의 생각이 존중될 때에 대통령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손에 들어온 100억이나 대통령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우리에게 100억이 생기거나 대통령이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건이 100억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시지 않을 뿐입니다. 대통령 자리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대통령이 될 필요가 있다면 대통령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대통령 자리를 주시지 않는 이유는 내가 최고최선의 행복을 느끼며 살기에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값진 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감정이 값집니다. 우리는 평강을 자주 입에 담습니다만 평강이란 무엇일까요? 평강은 단순히 잠잠한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과 공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에 함께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이 슬퍼하실 때에 함께 슬퍼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분노하실 때에 함께 분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도 예수님께는 평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받아서 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감정을 받아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이것이 가장 귀한 황금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습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지를 가질 때에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 말하고 행동할 때에 나라와 민족도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가치보다 뛰어난 가치인 황금알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실제로 내게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가 문제라면 배우자를 하나님의 주권 하에 두시길 바랍니다. 배우자의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안에서 황금알을 낳으면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든지 소나기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나의 악함과 약함과 못돼먹음을 고려하여 최선을 향해 임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관련된 사람이나 일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아들여 황금알을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의 비난이 나옵니다. 유대사회에는 정결법이 있었습니다. 정결법에 따르자면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법은 신앙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위생적인 측면도 고려된 규정이었습니다. 정결법이란 성경에서 언급된 법은 아닙니다. 랍비나 유명한 종교지도자들이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덧붙인 규정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이 법을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언급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본래 결코 불필요하거나 불합리한 내용들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구체적으로 풀이하여 어디까지 적용하고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가려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생활화할 때에 성경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세세한 부분을 규정해 주는 것이 장로들의 전통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이 비난을 하면 굳이 이에 대해 반박할 이유는 없으셨습니다. 그저 “다음부터는 제자들에게 손을 씻고 음식을 먹도록 주의를 주겠다.”라고 대답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절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이들을 대적하십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이를 의아하게 여기며 12절에서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제자들 보기에도 예수님의 반응은 의아했습니다. 정작 규정을 어긴 것은 자신들이었기에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실 이유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목하셨던 것은 장로들의 전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규정을 들이대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상태였습니다. 본래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 덧붙여진 내용이라면 마땅히 존중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29장 13절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8~9절에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가까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을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된 규정을 따라 행동한 결과 속에서 나오는 것은 다 더럽고 추악한 열매가 되었습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 소나기처럼 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우리에게서는 무엇이 나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마음에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마태는 이 점에 주목하여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위치이고 거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가 인격을 결정합니다. 나의 마음에서 돈이 제일 가깝다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은 돈에 귀속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배설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한 대상은 비단 돈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자녀를 가장 가까이에 하면 자녀를 열매 맺는 나무가 됩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가장 가까운 자녀에 의해 규정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의 본래 모습과는 다르기에 더러운 배설물과 같습니다. 마음으로 자녀를 사랑해서 한다는 말이 실은 입으로 배설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자녀를 사랑한답시고 어루만지는 손은 자녀에게 배설물을 묻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의 우리의 삶이 이러한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러움은 곧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을 빗겨가서 돈이나 자녀를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삼는다면 더러움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더러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애국심과 같은 마음가짐도 이러한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나라사랑은 고귀한 것이지만 하나님보다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배설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6장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나 마음으로는 돈을 가장 가까이 여기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가장 가까운 상태에서 생각하고 감정과 의지를 발동하니 그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 또한 아무리 깨끗한 척을 해도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밖에 있는 세상의 가치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아 살아갈 때에 세상의 어떤 가치가 없더라도 황금알을 낳는 삶은 시작됩니다.
물론 삶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내게 외제차를 주시지 않는 이유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 속에 외제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외제차가 대단해 보여도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쓸모없는 것을 받고자 기대할 사람은 없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손해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100억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이 나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좌우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돈을 허락하시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대통령이나 장관 자리에 오를 필요가 없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마음 사이에 다른 대상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는 물론이고 심지어 몸조차 하나님보다 가까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십자가 생활화를 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도 없습니다.
오랫동안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전하다보니 몇 가지 뚜렷한 윤곽이 드러남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 생활화를 기준으로 성경이 새롭게 해석됨을 느끼시고 달갑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들 중에서 끝까지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포기하고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구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만 십자가 생활화는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다보면 점차적으로 악함과 약함과 못돼먹음은 줄어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게 되고 그로부터 황금알을 낳는 말과 행동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아르헨티나에 계신 집사님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분께서는 소뇌위축증을 앓고 계신다고 합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유전질환으로써 형과 조카 두 분이 이미 이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본인도 20년 전에 발병하신 후로 전신이 점차 마비되어 가시는 중이신 것 같습니다. 한편 어제는 미국에 계신 집사님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는데 늦둥이로 애지중지 키워온 딸에게서 갑상선 암의 징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닥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뇌위축증이나 암의 징후는 하나님의 주권이 피해가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선이 임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최선이 왜 이렇게 임해야만 할까요? 하나님과 천국을 그리워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함과 약함과 못돼먹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악하고 약하고 못돼먹은 사람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그리워하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계기를 제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허락하심으로써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소뇌위축증이나 딸에게 생긴 암의 징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 일들을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한 유리한 조건으로 삼는 것입니다. 몸이 아픈 환경은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을 속성으로 하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두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기에 총력을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마음에서 몸이 하나님보다 가까울 수 없고 딸조차도 하나님과 사이에 끼어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소중히 여기던 딸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마음에서 딸을 떼어낼 기회가 제공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께 마음을 가까이 붙임으로써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씨를 받아서 말과 행동으로 황금알을 낳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의 주권 하에 두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면 올 한 해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으로 채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기 필요한 것은 세상의 조건이 아니라 오직 나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고, 가까이 가야 할 목표로써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황금알 낳는 거위로써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단 1cm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여 주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아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한 해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