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종에서의 사상적 위치
2)수용 및 사상적 위치
한국에서 『능엄경』이 고려중기 이전에 읽혀졌던 기록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미미하다. 사실 선종에서 『능엄경』이 알려지게 된 계기를 마련한 이는 고려 후기에 선종이 부활할 수 있는 일종의 거사선의 토양을 마련한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그가 선에 심취된 계기는 『능엄경』이었으며, 그는 항상 이 경을 중요시하고 강의하면서 적극 권장하였다.
청평사문수원기(淸平寺文殊院記)에 의하면 이자현은 『설봉어록(雪峰語錄)』과 『능엄경』을 중시했으며 『설봉어록』을 읽고 깨친 바 있다고 한다. 또한 대장경을 다 읽고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았으나 『능엄경』 만큼 마음의 근본을 밝힌 것이 없다 하여 제자들에게 『능엄경』을 읽을 것을 권하니, 이후 고려중기 이래 보편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 경이 선사상이나 선수행에 있어 사상적 기반으로서 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시기는 왕실과 밀착된 화엄종이나 법상종과 대각국사 의천에 의한 천태종의 창립으로 선종은 침체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때 선종에서는 새로운 선사상의 경향이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었는데, 하나는 선사상의 이론과 실천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서 『능엄경』이 성행되었던 것이고, 또 하나는 북송대 임제종과의 직·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문학적인 선의 흐름과 간화선이 수용되고 있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학일(學一, 1052-1144)과 왕사에 책봉된 도굴산문(闍崛山門)의 대감국사(大鑑國師) 묵암탄연(黙庵坦然, 1069-1159)에 의해 꺼져 가는 선종계의 맥락이 유지된다. 그 중 탄연은 스승인 혜소국사(慧炤國師)와 거사로서 선에 심취하여 선세(禪勢)의 부흥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던 진락공(眞樂公) 이자현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능엄선과 임제선으로 선종을 일으켰다.
이자현은 보조지눌이 선종부활을 하기 전 이미 거사로서 고려시대에 꺼져가는 선종의 맥을 이어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지눌에 앞선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으며, 수선사 계통에서 간화선이 수용될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고려중기에는 거사들이 스님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상적 영향을 주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의 자료에서 이러한 경향을 잘 알 수 있다.
더욱 선설(禪說)을 좋아하여 학자가 이르면 더불어 깊은 방에 들어가 종일 단정히 앉아 말을 잊고, 때때로 고덕의 종지를 들어 자세히 의논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심법(心法)이 해동에 널리 퍼지니 혜조(惠照)·대감(大鑑) 두 국사가 모두 그 문하에서 놀았다.
위의 글에서 이자현은 혜조국사 담진(曇眞), 탄연 등과 교류하면서 사상적 영향을 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청평산 문수원기에 의하면 혜소국사가 문수원에 가까운 백운산의 화악사에 머물 때 이자현이 왕래하면서 선리를 자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거사 이자현은 그 당시 선승들과 교류가 잦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자현은 고려 선종계에서 처음으로 『능엄경』을 중시하여, 이를 선사상의 이론과 실천에 적용함으로써 선문에 널리 성행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능엄경』을 통한 선풍의 진작이 당시 선종계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탄현 이후 거사 이자현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고 널리 드날린 이가 바로 고려 중기 희양산문의 원진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 1187-1221)이다. 승형은 조계산의 지눌을 찾아 법요를 받고, 청평산 이자현의 유적을 찾아 순례하다가 「문수원기(文殊院記)」에 기록된, '능엄경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대목을 보다가 느낀 바가 있어 거기에 머물면서 『능엄경』을 공부하여 제상(諸相)이 환망(幻妄)하고 자심(自心)이 광대함을 알아 발원하기를 법교(法敎)를 홍양(弘揚)함에는 반드시 이 『능엄경』으로 으뜸을 삼으리라 했으니 『능엄경』이 세상에 성행하게 된 것은 사(師)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승형은 이자현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능엄경』을 중시하였으며, 이를 선문에 널리 유포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입적하던 해인 1221년 강회에서 『능엄경』을 강의하고, 몇 달후에 입적할 만큼 『능엄경』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13세기 수선사 계통에서도 『능엄경』은 『화엄경』, 『금강경』, 『원각경』 등과 함께 선 관계 경전으로 중시되었다.
그 뒤 승형은 이자현의 선을 더욱 개발하여 '능엄선(楞嚴禪)'을 확립하여 한때 경기일대에 '능엄선풍'을드날렸으며 또한 불법을 선양할 때는 언제나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았으니, 이자현에 의해서 개창된 '능엄선'이 승형에게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또한 『능엄경』이 한국 선종의 필수교과서로 존중받게 된 것도 승형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 백련결사 지류에 속하는 선승 한암보환(閑庵普幻)도 '능엄도량'을 개설하는 등 일평생을 『능엄경』을 수행의 전거로 삼았다. 사(師)는 고종 32년(1245)에 「홍전수능엄경발원문(弘傳首楞嚴經發願文)」을 짓고, 원종 5년(1264)에는 「구결도우문(求結道友文)」을 발표하여 자기가 깨달은 『능엄경』의 참뜻을 세세생생에 전법할 결의를 보이고 있다. 원종 6년(1265)에 귀로암(歸老庵)에서 『능엄경』을 강설하였고, 충렬왕 2년(1276)에는 강양(江陽) 몽계사(夢溪寺)에서 '능엄도량'의 주맹(主盟)이 되고 충렬왕 4년(1278)에 왕명으로 백련사에서 『능엄경』을 강설하기도 했다. 또한 사(師)는 송나라 『계환해(戒環解)』에서 잘못된 곳을 정정하고 자기 견해를 보태며, 여기에 다시 송나라 인악의 『능엄경집해』(1059)에서 이치에 맞는 것들을 뽑아다 『능엄경환해산보기(楞嚴經環解刪補記)』(1279) 2권과 『능엄경신과(楞嚴經新科)』 2권을 지었다. 우리나라의 『능엄경』 주석서 중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이며, 불교 강원의 교과서가 되는데 한몫을 하였다.
이후 고려 선사들의 어록에서『능엄경』은 상당부분 인용되고 있다. 보조지눌(158-1210)도 『수심결(修心訣)』에서『능엄경』의 25원통 중 '관음보살의 이근원통'을꺠달음에 들어가는 수행의 중요한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진심직설(眞心直說)』의 '진심이명(眞心異名)'에 "능엄경에 이 마음을 밝히고 있다"라고 하였고, 보조지눌의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은 『선문염송(禪門拈頌)』에서 제49칙인 불견(不見), 50칙인 견견(見見), 51칙 지견(知見), 52칙 수인(水因), 53칙 가환(可還) 등 『능엄경』과 관련된 공안을 5개를 채택하기도 하였다.
지눌 이후 고려 불교계는 점차 선 일변도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면은 이 시기에 이르러 『인천안목(人天眼目)』,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선림보훈(禪林寶訓)』, 『고봉화상어록(高峰和尙語錄)』, 『벽암록』, 『선원청규(禪院淸規)』 등 다양한 선서가 새로이 도입되고 유포되었으며, 백운경한(白雲景閑, 1298-1374), 태고보우(1301-1382), 나옹혜근(1320-1376) 등에 의한 임제선 수용으로 간화선풍이 사상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간화선의 이론적 기반으로서 당시 선종계에서 『능엄경』이 성행하였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백운경한(1298-1374)은 그의 어록에서 각종 선어록 이외에도 『화엄경』,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 등의 다양한 경전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원각경』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동시에 『능엄경』에 대한 관심과 이해 역시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그는 법어에서 아난의 다문(多聞)을 경책한 부처님의 설법을 인용한다든지, 『답신광장로구능엄경서(答神光長老求楞嚴經書)』에서 『능엄경』의 일면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운은 특히 『능엄경』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중 「조사선(祖師禪)」, 「송인낙가산(送人洛迦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첫 번째 깨달음의 체험을 『원각경』에서 하였는데, 이는 그의 선수행 과정에서 차지하는 『원각경』의 비중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보우 역시 『능엄경』의 이근원통에 대해서는 깊이 이해했음이 그의 어록에서 보여지고 있다.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은 무문(無聞)에게 주는 게송에서 "텅비어 형상 없는 곳에서 몸을 뒤집어버리면 개짓는 소리, 나귀 울음소리가 모두 도를 깨침이네"라고 하여 이근원통의 경지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이근원통에 대한 표현은 『나옹화상가송』에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옹 역시 이근원통의 경지를 체득하고 이러한 의미를 다양한 게송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나옹에게 깊은 사상적 영향을 미친 지공(418-514)은 직접 『원각경』을 사경할 만큼 이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어에서 3장4마(三障四魔)를 거론하면서 3가지 장애중 두 번째의 사견장(邪見障)을 설명하면서 『능엄경』의 50마경을 인용하여 풀이하고 있다.
또한 나옹 문하에서는 『능엄경』을 열람한 기록이 보이는데, 나옹의 법맥을 계승한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1392)의 경우 수행과정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맛보게 되는 계기가 『능엄경』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선원사(禪源寺)에서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으로부터 『능엄경』을 배워 그 진리를 깊이 터득하였다. 그리고 재상 조공(趙公) 쌍중(雙重)이 휴휴암을 새로 짓고 그에게 『능엄경』을 강연해 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3년간 주석하면서 『능엄경』의 요지를 강연하였는데,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길 만큼 경에 밝았다.
다음으로 나옹의 제자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 1324-1395)과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도 『능엄경』으로 선적인 깨달음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중 무학은 조선 건국 후 태조의 왕사로서 개국과정에 참여했으며, 태조 4년 태조의 후원으로 '능엄법회'를 개최하였다. 태조는 자주 능엄법회를 개설하였으며, 법회의 규모도 성대하였다.
『능엄경』의 영향은 고려후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선승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유학자들에게까지도 널리 영향을 미쳤음을 볼 수 있다. 성리학을 크게 일으킨 이색(李穡, 1328-1396), 주자성리학뿐 아니라 불교, 도교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 이숭인(李崇仁, 1349-1392), 동방이학의 조로 추숭될 정도로 당시의 대표적인 정통성리학자로 평가받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팔은(八隱)의 한사람으로 역성혁명이 이루어지자 조선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던 성리학자 박익(朴翊, 1332-1398), 종래 척불론자로 알려진 권근(權近, 1352-1409), 고려말의 대표적인 철불론자인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같은 신유학자들에까지도 광범위하게 선호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조의 대표적 유학자인 이율곡도 『능엄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율곡은 선조대왕께 글을 올릴 때 4행(四行)의 글을 많이 썼는데 한 번은 선조대왕께서 "경은 왜 4행의 글을 즐겨 쓰는가"하고 물었을 때 율곡이 답하기를, "신(臣)이 석재산중(昔在山中)하야 다독능엄(多讀楞嚴)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능엄경』의 문장은 4행시(四行詩)와 같이 4자체(四字體)의 유려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탄허택성(呑虛宅成, 1913-1983)도 『현토역주능엄경(懸吐譯註楞嚴經)』의 서문에서 『사익경(思益經)』과 아울러 능엄·사익은 귀신의 문장이라는 고인(古人)의 평도 있거니와 과연 문장이 잠명(箴銘)과 같은 4자체식(四字体式)으로 되어서 세밀히 저작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으로 볼 때 사대부나 유학자들에게 『능엄경』이 많이 읽힌 까닭은 깊은 선지(禪旨)뿐만 아니라 그 문장의 유려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고려 말부터 시작되던 억불숭유 정책은 더 강화되고 숭유정책의 일환으로 불교의 종파는 통합되어 쇠운의 길을 걷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때 문정황후의 후원아래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1515-1565)가 중앙에 진출하여 선교양종의 승과제도가 부활됨으로써 휴정이 등용된다. 휴정은 임진왜란의 국난을 당해 구국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교단을 유지하기조차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그 법맥을 면면히 계승하고, 선종과 교종의 양립에서 선교합일(禪敎合一)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사교입선(捨敎入禪)의 교지가 널리 보급되었다고 보여진다.
휴정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는 『능엄경』의 인용이 보이고 있으나 수많은 제자 중 선을 충실히 전하고 선학에 조예가 깊어 서산오족(西山五足)이라고 불리는 뛰어난 제자들인 정관일선(情觀一禪, 1488-1568),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644), 중관해안(中觀海眼, 1567-?) 등에게서는 『능엄경』에 대한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휴정의 사교입선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사교입선의 바탕에서 선수행을 하면서도 대승경전을 열람한 흔적이 보인다. 사명은 대승경전 중 『화엄경』을, 편양은 주로 『법화경』을, 소요는 규봉의 『원각경소초』를, 정관은 『법화경』을 주로 교학적 근거로 삼고 있으며, 중관은 『화엄경』과 천태지관을 교학적 근거로 삼아 수행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능엄경』에 대하여는 선승 인악의첨(仁岳義沾, 1746-1796)이 지은 『능엄경사기(楞嚴經私記)』와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이 지은 『능엄경사기』가 있다. 이 중 의첨의 『능엄경사기』는 지금까지 불교 전문강원에서 『능엄경』 연구의 기본 지침서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중기 이후 이른바 이력과정이 정비되었는데 조선중기 월담운제(月潭雲霽, 1632- 1704)스님이 이력과정을 조직하였다고 본다. 강원의 학제는 사미과(沙彌科), 사집과(四集科), 사교과(四敎科), 대교과(大敎科)의 4단계 이외의 수의과(隨意科)가 있다. 교과목의 선정에 관해서 유추해 보면 이력과정 중 『능엄경』을 사교과의 맨 처음에 둔 것은 『능엄경』이 심종을 부인(符印)한 것으로 선학인의 필독서로 규정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근대에 들어와선 선승인 용성진종(龍城震鍾, 1864-1940)이저서 『각해일륜』 가운데 수심정로(修心正路)에서 주로 선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는데 있어 먼저 공부길을 잘 선택하여야 함을 강조하면서 화두를 참구할 때 생기는 10종병과 마음이 동요함에 나타나는 마경(魔境)에 대해 잘 알아서 속지 말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이 가운데 공부할 때는 불가불 마군이를 잘 알아야 한다면서 주로 『능엄경』의 50마경에 준하여 설명을 한 대목이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대의 선사 중에서는 퇴옹성철(退翁性徹, 1912-1993)이 여러 대승경전 중 『능엄경』을 가장 중시하였던 듯하다. 그 이유는 저서 『선문정로평석(禪門正路評釋)』, 『백일법문』, 『영원한 자유』 등에서 『능엄경』을 자주 인용하였고, 특히 『능엄경』 10권에 나오는 '오매항일(寤寐恒一)'에 대해서는 "오매일여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서 돈오견성을 자부한다면 이는 자신을 그르치고 남까지 그르치는 커다란 죄과를 짓는 것으로, 수도하는 과정에 있어서 무서운 병통이며 장애이다."라고 하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다시 오매일여를 다시 몽중일여(夢中一如)와 숙면일여(熟眠一如)로 나누어 제8식인 아뢰야식의 미세한 망상을 여의어야 불지(佛地)의 진여항일(眞如恒一)이 되므로 '몽중일여'는 깨달음의 경지라 할 수 없고 오직 '숙면일여'의 경지라야 견성(見性)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제8아뢰야인 식음(識陰)이 다 없어지면 안팎이 한 번 뛰어 곧바로 여래 지위에 들어간다"고하였으니 이는 『능엄경』 10권의 식음이 멸진한 내용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의 저서 가운데 '오매항일'이나 '식음 멸진'에 대하여는 나의 깨달음의 준칙으로 삼아 중요시여겼으며, 일관성있게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종에서의 능엄경의 사상적 위치/ 박영희 전자불전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