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 이 구절은 여호야김의 후계자이며 아들인 여고냐(B.C. 598년)의 통치하에 전달된 말씀으로 여겨진다. 그는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 즈음에 갈대아인 장군들은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러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 같다.(왕하 24:8-11). 그러나 예루살렘 포위 공격은 느부갓네살이 그 주력군을 이끌고 왔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했던 것이며, 썩은 띠를 허리에 두르는 상징적 행위로써 그들에게 임할 파국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Clarke).
=====13:2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 '띠'란 일반인들의 허리띠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특히 제사장들이 에봇 위에 두르던 띠를 가리키는 듯하다(출 28:8). 이 띠는 에봇, 흉패, 관과 함께 거룩과 영화로움을 상징했다(출 28:40-43).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유다를 상징한다 하겠다.
=====13: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지는 두 번째 지침이 하달되었다. 한편, 1-11절까지는 본장에 들어 있는 다섯 개의 경고들 중의 첫 번째 것으로서, 비유적 행위에 의한 메시지로 전달된다(R.K. Harrison).
=====13:4,5
이 두 번째 지침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브라데'로 번역된 히브리어 '페라트'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아나돗에서 북동쪽으로 약 25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유브라데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다(46:2;창2:14;15:18;신1:7;11:24;왕하23:29;24:7). 이처럼 이 말이 유브라데 강을 의미하면서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수세대에 걸쳐 많은 주석가들은 예레미야가 왕복 500마일 정도 되는 거리를 두 번에 걸쳐 여행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4, 6절 참조). 첫 번째 여행은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를 피해 석 달 동안 은거 했을 때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두 번째 여행은 내버린 그 띠를 되찾으러 갈 때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나님이 그토록 먼 거리를 왕래하게 하셨던 것은 아마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경고를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Clarke). 한편 어떤 학자는 '페트라'를 아나돗 북동쪽 4마일에 위치한 '와디 파라'(Wadi Farah) 혹은 '에브랏'(베들레헴, Hitzig) 등으로 보거나, 아예 본문의 내용을 우화나 알레고리로 해석하기도 한다(Graf, Rudolph).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그다지 풍부하지 못하다.
=====13:6,7
여호와의 세 번째 명령과 예레미야의 실행에 관한 내용이다. 물가에 숨겨둔 천이 썩었다는 것은 처음 숨기던 때와 그것을 찾으러 갔던 때 어간에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말한다. 아무튼 유브라데의 진흙이 그 '띠'를 썩게 만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은 어떤 특별한 상징을 나타낸다. 이는 유다인들의 현상황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썩은 띠처럼 비참하게 연명해 가야 할 것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Clarke, Delitzsch).
=====13:8
여호와의 말씀이 - 유다인들의 치욕스럽고 비참한 상태에 대한 말씀이 계속 이어진다. 그들은 바위 틈에서 썩어짐과 같은 유배지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Calvin).
=====13:9
유다의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교만'이나 '오만'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탁월함'이란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고대 역본들중 70인역(LXX)이나 벌게이트역(Vulgate), 그리고 시리아역(Syriac Version) 등은 전자로 번역하였고, 아람어 탈굼역(Targum)은 '힘'이라고 번역하여 후자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이 단어를 개역 성경처럼 번역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유다의 교만을 징벌하신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반면에, 이를 '힘', '영광', '탁월함' 등의 긍정적 의미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나(사 60:15) 그들은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의미가 강조된다(Blayney, Calvin, Horsley).
=====13:10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 예레미야는 앞에서도 유다가 애굽이나 앗수르를 의존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2:18). 이처럼 유다는 주변 열강들의 틈새에 끼여 때로는 이쪽을 또 때로는 저쪽을 의뢰하면서, 정녕 의뢰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앙을 저버리는 형태를 거듭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외세 의존 정책은 이방 신들이 국내로 유입되어 들어와서 악하고 부패한 영향력을 끼치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며, 하나님 백성의 부패와 타락을 더욱 확장시켰다. 아마 선지자는 이런 사실을 본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13:11
본절과 10절에 대해서 어떤 주석가들은 앞의 행동화된 비유를 입증하고자 하는 후대의 편집자 해설이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부분의 배경상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단정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것으로 종종 판명되며 설령 앞의 내용이 포로기에 대한 언급이라고 하더라도 이 구절이 포로기 작품임을 나타내는 단서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살던 고대 근동 전역에는 이미 이 같은 파국적 사건의 가능성이 잘 알려져 있었고, 더구나 전지하신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굳이 후대의 기술(記述)로 볼 이유가 없다 하겠다.
=====13:12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는 말은 그 당시 유행하던 속담이었던 것같다(Thompson).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다 알고 있는 뻔한 소리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70인역(LXX)은 '그러므로 이르기를'을 '그들이 너에게 이른다 할지라도'라고 읽고 있다. 즉, 그들의 대답은 조소 섞인 투로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라고 말할 것은 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술취한 사람이 흥청거리면서 내뱉는 농담 같은 대답을 볼 수 있다.
=====13:13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잔뜩 취하게 하고 - 클라크(Clarke)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 '너희들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상징적인 말이다. 너희들과 왕 그리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이들 병들로 대표되고 있다. 그리고 포도주는 너희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분노이다.
=====13:14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 하나님의 영광이 일단 유다에게서 떠난 이상, 이제 이 백성은 아무 쓸모가 없는 빈 항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선택하사 은혜를 주셨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 스스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해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특권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제 무책임한 이 백성이 여호와의 은혜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들은 불순종과 방종, 또 교만과 배도로 인하여 운명의 날을 맞게 된다. 결국 그들의 멸망은 갈대아인들의 주도 면밀한 침략 계획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야기시킨 사건이다.
=====13:15
너희는 들을지어다 - 수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에 의해 전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였던 이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백성에게 다시 한번 순종할 것을 호소한다(Nicho lson). 본절에는 두 동사, 즉 '듣다'(솨마)와 '귀를 기울이다'(아잔)란 동사가 대칭적인 위치에 놓여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27절까지는 두 가지 비유에 이어 임박한 심판에 관한 세 가지 경고를 싣고 있다. 그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15-17절은 하나님께 대한 교만과 자만심을 버릴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13:16
'흑암'의 강도가 점차적으로 심해져가는 묘사를 통해 유다의 멸망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나아가는 사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여기서 '흑암'은 재앙의 전조적인 현상임과 아울러, 유다 백성의 죄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어둠과 빛의 대립은 성경 전체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인데, 이러한 대립 속에서 어둠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내포한다. (1) 중생하지 않은 자에게 내재한 자연적 어둠(엡 4:18). (2) 의도적으로 빛을 거부하는 고의적 어둠(요 3:19, 20). (3) 완고한 죄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로서의 어둠(Feinberg).
=====13: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통곡하리라 - 신약 성경은 교만을 인생의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죄성(罪性)들과 나란히 기술하고 있다(막 7:22). 그리고 이것은 또한 온유나 겸손과 정반대된다(약4:6;벧전5:5:). 바울에게 있어서 교만이란 타락한 이교 사회에서 오염되는 전형적인 산물로 여겨졌으며, 예레미야가 지적하는 것도 바로 이런 관점이다(R.K. Harrison). 한편, 클라크(Clarke)는 본절을 '너희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구제책이 없다. 그리고 파멸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이제 나에게는 너희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은밀히 슬퍼하고 곡하는 것 외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설명한다.
=====13:18
본절과 19절은 두 번째 경고의 말씀으로서 왕과 왕후에 대한 애도의 노래가 주조를 이룬다.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 이는 여고냐와 그의 모친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고냐는 어려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친의 섭정을 받았던 것 같다(Clarke). 그녀 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의 어린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유다의 왕후란 것이 공식적인 직책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왕후 역시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왕상 2:19에 의하면 왕좌 곁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Nicholson). 한편 본절의 역사적 정황에 관해서는 왕하 24:8-12을 보라.
=====13:19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 남방이란 원어로 '네게브'인데, 아마 유다 남쪽의 메마른 넓은 광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Nicholson). 원어의 원래 뜻은 '건조하다'인데, 그 위치는 가사-브엘세바에 이르는 도상에 있었고 시내 반도 고원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성읍들은 침략자들을 피해 유입해 들어오는 피난민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차단될 것이다(R.K. Harrison). 반면에 클라크(Clarke)는 이를 유다의 남쪽까지 갈대아인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말 그대로 끝에서 끝까지 파괴될 것을 말한다고 보기도 한다.
=====13:20
본절에서부터 27절까지는 유다의 처벌이 그들의 죄에 대한 완고한 성향에 따르는 불가피한 결과일 것임을 최종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내용이다.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냐 -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전달되고 있다. '거기 살던 수많은 부유한 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양떼들이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슬프게도 그들은 바벨론 군대 앞에서 쫓겨나 포로로 잡혀 가버린 것이 아닌가 ?'(Clarke).
=====13:21
너의 친구삼았던 자 - '친구'에 해당하는 '알루핌'을 영역 성경 KJ V는 '두령'(captains)으로 번역한 반면, '친구'(friends)로 '각별한 동료'(spe cial allies)로 각각 옮겼다. 실제로 이 단어는 '족장'(창 36:15) 혹은 '두목'(슥 9:7 )의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가족'이나 '친한 벗'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잠 16:28;미7:5). 여기서는 문맥상 후자의 뜻이 자연스럽겠다. 유다는 바벨론이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기 전, 당시 중근동을 주름잡았던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과 동맹을 맺은 적이 있다(왕하 20:12-15). 그리고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이 애굽을 격파했을 때에도, 유다는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치며 동맹을 맺은 바 있다(왕하 24:1).
=====13:22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 자기 만족과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자들의 물음이다. 그들은 감각이 무디어져서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심판이 임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다른 구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파멸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이스라엘의 적이나 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질문으로 언급되어 있으며(22:8,9;애 2:15, 16;겔 5:14, 15 등), 예레미야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언약 파기'란 말을 사용하여 이렇게 지적한다.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22:9). 한편, 유다에 임한 심판이 본절 하반절에서 치마를 걷어올려 치부를 노출시키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는데 이는 곧 민족의 참사를 벌거벗고 강간당한 육체에다 비유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치마가 들린다'는 말은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성폭행 당한 것에 대한 완곡 어법으로 쓰였다(레 20:17;신 22:30;사 47:3 등).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있느뇨 - 굳어질 대로 굳어지고 패역할 대로 패역하여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유다의 죄악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이다. 검은 피부가 원한다고 해서 흰 피부로 될 수 없고 표범의 얼룩 점들이 바뀔 수 없는 것과 같이 유다의 죄악은 이제 변할 수 없는 제2의 천성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죄악에 익숙해 있었으며, 습관화된 그것이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취득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Cla rke).
=====13:24
사막 바람 - 이 바람은 광야에서 유다 남쪽으로 불어오는 폭풍우를 동반한 광풍이다.
=====13:25
이는 네 응득(應得)이요 -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결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진 유다의 분깃이며,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며 몫이다(Thompson).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 '거짓'이란 바알을 위시한 이방 신들 혹은 유다가 의뢰했던 이방 열강들을 지칭한다.
=====13:26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 유다가 거짓 것에 골몰하고 집착한 것은 여호와에 대한 배신이며 영적 간음 행위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서 이제 여호와는 유다의 수치스러운 부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13:27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 유다의 가증스러운 죄악을 지적하는 세 가지 어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은 언덕과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가증스러운 일들을 하여 왔다. 이 구절은 전체적 내용은 이교신들에 대한 종교 의식과 그 의식에 수반되는 부도덕한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다. 요시야는 B.C. 622년의 개혁 운동을 통하여 이런 악습들을 뿌리 뽑으려고 하였다(왕하 23:1-20; 대하 34:1-7). 그러나 그의 개혁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 이내 예전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며, 요시야 이전의 아사 왕(왕상 15:9-15)이나 히스기야 왕(왕하 18:1-6)의 개혁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외적인 개혁만으로는 결코 인간의 내부에 있는 부패한 심령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자발적이고도 전폭적인 회개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외적인 압력을 사용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본장은 심판에 관한 9가지의 일반적 예언(2-20장) 중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곳으로
서 고도의 상징성과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는 대표적인 두 가지의 비유(썩은 베띠, 포
도주병)를 통하여 유다의 임박한 심판과 과난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 가지의 짧은 경고(흑암한 산, 왕과 왕후의 화, 구스인의 피부)를 통하여 동
정과 호소어린 심정으로 회개를 촉구한다. 이러한 본장은 (1) 썩은 베띠의 비유를 서
술하고 있는 전반부(1-11절)와 (2) 포도주 병의 비유를 서술하는 중반부(12-14절), 그
리고 (3) 유다 백성의 회개를 간절히 촉구하고 있는 후반부(15-27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가) 썩은 베띠의 비유(1-11절), (나) 포도주 병의
비유(12-14절), (다) 최후의 경고(15-17절), (라) 왕과 왕후에 대한 경고(18, 19절),
(마) 예루살렘의 운명(20-27절) 등이다. 이사으이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언약을 파
기한 유다로 하여금 아직은 하나님의 긍휼이 상존(常存)함을 제시함으로써 지금이라도
임박한 재앙으로 부터 피할 수 있도록 유다하고 있다. 특히 본 장은 몇 개의 핵심 단
어를 통하여 각 부분을 연결시키고 있다. 즉 '썩다', '상하다'(7, 9, 14절)의 표현이
(가), (나)을 연결시켜 주고 있고, '듣다'(10, 11, 15절)가 (가), (다)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낮추다'(17, 18절)는 (다), (라)을 연결시켜 주며, '아름다운'(18, 20
절)이라는 표현은 (라), (마)을 연결짓고 있다. 이상의 핵심적인 단어들의 중복 현상
을 통하여 본장은 유다 백성들의 영광과 교만이 심각한 손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본장에서는 상징적 용법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상징적 용법이 주로 사용되
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깨어진 토기'(19:1-12), '줄과 멍에'(27장자), '벽돌
깔린 곳의 큰 돌'(43:8-13) 등과 같이 선지자가 선포한 메시지의 중요 부분에서 사용
되고 있어 본서 전체 문학적 특성이기도 하다. 이처럼 몇 가지 비유로 구성되어 있는
본장은 전체를 언뜻 살펴보면 서로 관련이 없는 단편들의 모음집으로 구성된 듯한 느
낌을 주나 한 가지의 주제를 증폭시키기 위하여 없는 단편들의 모음집으로 구성된 듯
한 느낌을 주나 한 가지의 주제를 증폭시키기 위하여 면밀하게 구성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사실을 토대로 본장의 구조적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형 태 | 내용상 특징 | 문 체 |
+-------------------+-----------------+-------------------+--------------------+
| 1-11절 | 산문체 | 상징적 표현 | 자서전체 |
+-------------------+-----------------+-------------------+--------------------+
| 12-14절 | 산문체 | 풍자적 표현 | 신언체(神言體) |
+-------------------+-----------------+-------------------+--------------------+
| 15-27절 | 시(詩)체 | 상징적 표현 | 예언체 |
+-------------------+-----------------+-------------------+--------------------+
또한, 본장은 B.C. 597년 제 2차 바벧론 포로 시대 직전에 작성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18, 19절에 나타나는 왕과 왕후에 관한 언급이 여호야긴과 그의 모친이 예루
살렘에사 바벧론으로 붙잡혀간 사건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22:26;29:2;왕하
24:8-17). 예레미야는 눈앞에 다가온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간절한 심정으로 유다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배경으로 본장에 나타난 내용상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썩은 베띠(1-11절)와 포도주 병(12-14절)의 비유를 통하여 멸망당한 유다의 현
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값을 주고 산 허리
띠의 부패 상태를 통하여 범죄한 유다가 썩은 베띠와 같이 쓸모가 없어서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받는다는 사실을 시청각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가 지금까지와 동
일한 내용의 예언을 또다시 상징적 행동을 통하여 나타내는 까닭은 단순한 메시지만으
로 깨우치지 못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들 앞에 제시된 예언의 내용을 좀더 실감있
게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저자는 술의 속성을 이용한 빙를 통하여(12-14
절;시 6:3;잠 20:1) 마치 술에 만취된 자가 사리를 분별치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과 같
이 유다 백성들이 진리를 분별치 못하고 서슴없이 죄악을 저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욜 3:13). 사람이 술에 취하면 자신의 육신뿐만 아니라 사고 작용도 제대로 통제
하지 못하게 된다(사 28:7). 결국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판단치 못하는 유
다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멸망의 필연성을 보여주고 있다(사 51:17). 이처럼 예레미
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사용하여 부패한 유다 백성들을 깨우치려고 노
력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자르 본받아 현재 말씀을 맡은 자들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의 말씀이 전달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세 가지의 경고적 진술을 통하여 다가오는 심판을 겸손히 수용하도록 권면함과
아울러 그 심판이 초래할 심각한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예레미야는 심판의 가두
움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선포하고 있다(15-17절). 만일 그들이 완고함으로 인하여 이 말씀을 거부한
다면 끝내 포로가 되어 통곡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14:17). 이어서 저자는 대중이
아닌 왕과 왕후에게 겸손하게 권좌에서 내려오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들의 왕관은 이
방의 침입으로 박탈당하고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같이 유배될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유다 백성이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었음을 밝히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
을 잘 분별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마 16:3).
이상의 본장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은 결코 자신의 죄를 개조시킬 수 있을 만큼 선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의 시청각적 교훈조차도 외면하고 죄악
을 계속 저질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
입을 통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1. 썩은 베띠의 비유(13:1-11)
마치 한 편의 시극(詩劇)을 연상시키는 비유로 이루어진 본 단락은 하나님의 명령
에 의한 선지자 자신의 체험적인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상징화시키고 있다. 예
레미야는 하나의 베띠가 썩어진 모습을 통하여 현재 유다의 부패 상태를 전달함으로써
그 역동성을 가미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1) 하나님의 명령
에 따른 예레미야의 상징적인 행동을 현장감있는 기법으로 기술한 전반부(1-7절)와,
(2) 선지자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해석적으로 서술한 후반부(8-11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현재 유다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
의 판정을 소개하고, 이어질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한편, 본서 전체에는 본 단락과 동일한 형태의 상징적 행위가 다수 언급되어 있다
(18:1-12;19:1, 2,10, 17, 11;27, 28장;32:1-15;43:8-13). 대개 이 비유들은 일반적
상징 행위, 꿈, 환상, 설명적 상징 등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예언서들과는
달리 본문에서의 상징적 행위는 선지자로 하여금 현실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묘사하도
록 만드는 동시에 하나님과 선지자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확증하는 이중적 역할을 감
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본 단락의 구조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 A. 하나님의 명령(1, 3, 4, 6, 8절) |
| B. 예레미야의 상징적 행위(2, 5, 7절) |
| A'.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그 자신의 해석(9-11절) |
+----------------------------------------------------+
이상의 사실들을 배경으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
다.
(1) 예레미야 자신의 상징적 행위가 기술되어 있다(1-7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에게 베띠를 사서 허리에 두르고 물이 닿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 사실 베띠는 대제사
장의 착용하던 허리띠로서(출 28:39-42) 유다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은 유
다 백성을 사랑하는 의미로 베띠를 허리에 두르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
허리에 두른 띠를 유브라데로 가지고 가서 바위틈에 숨겨 놓으라고 하셨다. 어떤 이들
은 예레미야가 장식 띠를 묻기 위해서 유브라데 강가까지 왕복 500마일 정도를 여행했
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여러 날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묻어 두었던
그 띠를 다시 찾으라고 하셨다. 예레미야가 장식 띠를 파내었을 때 그 띠는 썩어서 거
의 못쓰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통해 선지자는 유다를 멸망시킬 하나님
의 뜻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레미야에게 명했던 상징적 행위들을 직접 해석해 주셨
다(8-11절). 그 메시지의 핵심은 마치 베띠가 썩게 된 것과 동일하게 유다와 예루살렘
의 엄청난 교만과 자랑이 파멸되고 만다는 점이다. 즉, 언약 백성이 처음 부름받았을
때에는 허리에 둘려진 띠처럼 순수하고 변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2:2, 3). 마치 띠가
한 사람의 허리에 매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집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명예와 영광과 찬송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허리에서 벗겨져 땅에 묻힌 띠처럼 이스라엘과 유다가 거짓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 하
나님을 떠났을 때 비참한 파멸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자세한 해
석을 통해 유다가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심판을 기정 사실화 하고 있다.
이상의 본 단락을 통해서 우리는 (1) 하나님의 백성은 그 자신이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만으로 특권 의식을 가져서는 안되며, (2) 언약 백성으로서의 성결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표현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2. 포도주 병의 비유(13:12-14)
본 단락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의미하는 포도주를 행복과 열락의
포도주로 잘못 알고 마심으로 결국은 그 술에 취하여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문맥상으로볼 때 전 단락(1-11절)과 동일하게 산문 형식
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두 단락은 모두 어떤 실패나 의무에 대한 부주의로 인해서 이
백성에게 심판이 임할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런에 여기서 예레미야는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12절)는 당시 유행하던 속
담을 끄집어냈다. 이에 대해 백성들은 포도주 병에 포도주를 채운다는 사실은 포도주
병의 당연한 기능이고 원래 그런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대답한다. 그 후에 예레미야는
유다에 임할 가혹한 파괴를 계시한다. 즉, 포도주 병이 포도주를 채우는 기능을 가지
고 있는 것과 마찬기지로 유다는 자신들에게 의도되어 있던 기능을 다하게 된다는 것
이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는 하나님께 대한 영광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제 범죄한 유다는 분노의 포도주로써 채워지며, 포도주 병들이 산산 조각나고 말듯이
(14절;48:12;사 30:14) 차례차례 몰려드는 적들에 가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철저히
파괴된다는 것이다. 결국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전민족으로 하여금 술에 취하도록 만
들고 심판의 때에 자신들을 방어하지 못하도록 무력화 시킴으로써 무자비하고 가혹한
파멸이 불가피하게 임할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이상의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만약 불순종하여 무책임한 행위를 하게 되면 하가님
의 은혜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최선
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3. 최종 경고와 애가들(13:15-27)
본 단락은 유다 백성들의 교만을 경고하면서 닥쳐올 재앙들을 피할 길은 오직 죄에
서 돌이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임을 지적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돌이킬 수 없
는 유다의 죄악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유다 백성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경고를 서술하고 있는 전반
부(15-17절)와 (2) 왕과 왕후에 대한 애가를 진술하고 있는 중반부(18, 19절), 그리고
(3) 예루살렘의 철저한 배도적 성격과 그에 따른 처벌을 설명하고 있는 후반부(20-27
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통하여 저자는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통첩을 전달하고 덧붙여 다가올 심판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편, 본 단락은 이전의 두 단락(1-11, 12-14절)이 산문 형태로 기술된 것과 달리
시적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앞의 단락들이 상징적 비유를 통하여 유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 반면, 본문은 현재 유다의 상태를 경고함으로써 장래의 유다의
멸망을 예견케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본 단락의 구조적 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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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이스라엘의 과거를 회상하라(20절) |
| B. 유다의 현실을 직시하라(21절) |
| C. 유다의 자기 이해(22절) |
| B'. 유다의 현실을 직시하라(23절) |
| A'. 유다의 장래(24-27절) |
+---------------------------------------------------+
이제 본 단락에 나타난 내용적 특성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는 유다에게 다가오는 새벽 빛이 심판의 전조가 된다고 밝힌다(15-17
절). 일반적으로 흑암 속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행위는 희망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
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유다에게는 오히려 멸망의 서곡으로 등장할 뿐이다. 유
다 백성에게는 일체의 희망이 단절되어 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응답
만이 그 재앙을 유보시킬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전
국토는 침략과 다가올 추방을 상징하고 있는 캄캄한 어둠 속에 내던져지게 된다(사
5:20;8:22;;9:1;암 8:9). 언약을 어긴 유다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재앙과 진노의 날에
불과하다. 이처럼 완고한 유다 백성의 운명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끼며 통곡하게 된다
(4:19, 20;8:18, 19;9:1).
(2) 예레미야는 왕과 왕후를 향해 겸손하도록 권고한다. 여기서 왕과 왕후가 구체
적으로 누구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호야긴과 그 모친 느후스다로 추정된다(29:2;왕
하 24:8, 12, 15). 선지자는 그들에게 느부갓네살 왕이 지위를 박탈할 때 파멸될 것이
므로 미리 권좌에서 내려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권유를 무시한 왕은 바벧론으
로 사로잡혀 가서 수욕을 당하게 된다(왕하 24:15).
(3) 예레미야는 지도자들에게 북방으로부터 다가오는 군대들을(1:14;4:6;6:1,
22;10:22) 직시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유다가 맹방(盟邦)으로 제휴하려 했던 바벧론은
결국 유다의 잔인한 감독들이 되어 고난과 모욕을 안겨주게 된다(사 39:1-7;겔
23:14-35). 이제 그 결과로 유다는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과 같이 고통을 경험하게 된
다(4:31). 이러한 심판의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유다의 죄악이다. 유다는 마치 검은
피부를 가진 구스인이 그 색소를 변케 하거나 표범이 반점을 제거할 수 없는 것처럼,
너무나 깊이 죄악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개조할 능력이 없었다. 그 결
과 하나님은 그들을 사막의 바람으로 사방에서 불어온 왕겨처럼 흩으실 것이다
(4:11-12). 이와 같은 심판은 우상 숭배에 대한 대가로 유다에 내려진 분깃이 되며,
자신의 부끄러움도 모르고 영적 매춘 행위를 한 유다의 간음이 수치임을 만방에 보여
준다. 그러므로 유다는 바벧론 군대의 도래를 분명히 인삭하고 적절한 대응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증스러운 행위를 일삼게 된다.
이상의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의 철저함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의 타락한 생활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원받은 자들로서 부끄러움 없는 생활을 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후 2:14, 15;빌 1:20; 벧젠 4:16;요일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