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에 휘말려 평생을 유배 속에 산 이광사의 명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는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체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서예가이자, <원교필결>(圓嶠筆訣) <원교서결>(圓嶠書訣)이란 서예이론서를 저술한 이론가이다.
이광사는 조선의 정종(2대 임금)이 성빈 지(池)씨 사이에서 낳은 10남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李大成)이고, 부친은 대사헌을 지낸 이진검(李眞儉)으로 명가였으나, 당쟁에 휘말리면서 집안이 요동쳤다.
경종이 즉위하자, 거대당파 노론은 연잉군(이복동생,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압박하는 무혈 쿠데타를 자행했다. 경종의 왕위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자, 김일경(金一鏡, 소론 강경파)이 소두(疏頭·상소문 대표)로서 세제 대리청정을 강요하는 이이명(李?命) 등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으로 모는 강경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때 이광사의 백부(이진유李眞儒)는 박필몽(朴弼夢)·서종하(徐宗廈) 등 6명과 함께 소하(疏下·상소문 연명자)가 되었다.
과거 소론이 정권을 잡자 이진유는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독살설) 노론이 추대한 영조가 즉위하자 상황이 반전된다. 김일경은 사형당하고, 이진유(이광사의 백부)는 귀양길을 전전하다 영조 6년(1730) 서울로 끌려와 다시 국문을 받았다. ... 경종의 충신이던 그는 영조에겐 역적이 되어, 곤장을 맞다가 물고(物故, 타계)하고 만다. 글씨에 뛰어났던 이진검(이광사 부친)은 영조 즉위 뒤 강진(전라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 3년(1727) 죽고 말았다. 이후 이광사 가문에는 ‘역적 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가문 몰락의 계기가 된 영조 즉위(1724) 당시 이광사는 만 19세였다. 역적 집안으로 몰려 과거 응시자격이 주어지지 않자 이광사는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영조 8년(1732)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를 찾아 강화도로 가는데, 정제두는 유일사상(주자학)에 맞서 양명학을 공부한 학자였다.
정제두의 아들(정후일鄭厚一)이 이광사의 부친과 친했던 과거가 있어, 이광사는 정제두를 만날 수 있었다. 이광사는 정제두에 대해 “나는 학식이 얕아 선생이 이른 도가 어느 지경인지 알 순 없지만, 그분은 밖의 유혹은 떨쳐버리고 실리(實理)만 간직했을 뿐 그 밖의 경지는 없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양명학을 본격 공부하기 위해 영조 12년(1736)에 온 가족을 이끌고 강화로 향해 갑곶이 나루(甲津)에 이르자, 정제두의 부음을 들었다. 그 뒤 이광사는 영조 28년(1752) 정제두의 막내손녀를 자신의 막내아들(이영익李令翊)의 아내로 맞아, 사돈관계로 발전시켰다.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당대 명필이자 동국진체의 계보인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정제두의 아우 (정제태鄭齊泰)의 사위이자 정제두의 문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되자, 부인은 자결
양명학과 서예에 몰두하던 그는 만 50세(영조 31년, 1755) 때 발생한 소위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위기에 빠진다. 나주 객사에 영조의 치세를 비판하는 벽서가 붙으면서 시작된 것이 나주벽서 사건이다. 벽서 작성자인 윤지(尹志)는 곧 체포되고 만다.
윤지는 영조 즉위 뒤 김일경과 함께 죽은 훈련대장 윤취상(尹就商)의 아들로, 연좌죄에 걸려 31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영조는 수많은 관련자를 사형시켰다. 윤지는 물론 그의 아들(윤광철尹光哲)도 능지처참했고, 이미 사망한 소론 강경파 대신들에게 역률을 추가하고 이미 죽은 소론 온건파는 관작을 삭탈했다.
이광사는 윤지의 아들(윤광철)과 몇 차 서신을 주고받은 일 때문에 의금부에 하옥되었는데, 나주벽서와 전혀 무관한 내용들이었으나 이성을 잃은 국문에서 그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영조실록> 31년 3월6일자에는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광사 등을 신문하였는데, 그들이 윤지와 서로 교통한 자취가 있기 때문이다. 이광사는 이진유의 조카이다…”라고 나온다. 게다가 이광사는 이사상(李師尙)의 손자 이수범(李修範)이 국청에서 맞아죽기 전 “윤광철과 이광사는 서로 뜻이 맞는 절친한 사이”라고 자백했으므로 살아날 가망이 거의 없었다. 그가 3월 6일 체포되자, 6일 후 그의 부인(문화 유씨)은 42세 나이로 두 아들(긍익肯翊·영익)과 일곱 살 딸을 두고 자결한다.
영조는 3월30일 이광사를 사형 대신에 유배형에 처한다. .. 영조가 그를 살려준 것은 아마도 종친의 후예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친형제와 종형제 대부분이 유배형에 처해져, 가문은 풍비박산 났다. 이광사의 5형제 중 막내형(이광정李匡鼎)만 살아 있었는데, 이광사가 체포되자 의금부 밖에서 울부짖었다가 그도 투옥되었다. 그후 동생의 생사를 모른 채 길주(함경도)로 귀양 갔다. 그곳에서 이광정은 매일 새벽, 하늘에 절하며 동생 목숨을 건져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이광사가 부령(함경도)에 유배되면서 길주에서 상봉하기도 했다. 이광사는 유배를 떠나며 ‘죽은 부인을 애도함’(悼亡)이란 시를 써서 부인의 영혼을 달랬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번을 윤회한대도/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지리. …
내 한이 이와 같으니/ 당신 한도 정녕 이러하리라/ 두 한이 오래토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이광사는 부령에 유배되었어도 의기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두만강의 남쪽’이란 뜻의 ‘두남’(斗南)으로 자호(自號)하고 학문, 서예에 정진했다. 갑산(부령 근처)에 유배된 종형(이광찬李匡贊)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에 대해 토론하면서도 ...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이광사는 늘그막에 낳은 막내딸을 얼마나 예뻐했는지를 절절하게 토로하며 “아! 이승에서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헤어진 후의 뒷이야기를 모두 다 들려주겠다”라는 편지를 쓰고, ‘딸에게 주는 편지’에선 식사예절 등을 자세히 일러준 뒤 “그런 다음 한글 두 줄과 한자 한 줄을 베껴 쓰는데, 벼루는 항상 같은 자리에 놓아라. 두 오빠에게 문자를 약간씩 가르쳐달라 하고, 바느질 등 배운 것을 복습하여라”라고 당부하고 있다. (딸에게 한글, 한자를 가르치는 데서 기존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성품이 느껴진다.)
그는 영조 8년(1732) 진도로 유배지가 바뀐다. 그의 문집 <원교집선>의 ‘은혜에 대해 서술하다’(述恩幷序)에 따르면, 지평 윤면동(尹冕東)이 장계를 올려 “북쪽 변방에 있는 이광사가 사인(士人)들을 다수 모아 글씨를 가르친다”며 “민심을 선동할 우려가 있으니 작은 절도(絶島)로 유배지를 바꿀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변경의 유배객에게 수많은 문인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영조실록> 38년(1762) 7월25일자는, “이광사는 진도(珍島)에 안치하고 그 학도들은 부사(府使)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했다”고 한다. 그는 진도를 거쳐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면서 다시 친형 이광정을 잠시 만났다(이것이 형제의 영이별이 되었다). 이광정은 영조 49년(1773) 유배 19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광사도 정조 1년(1777) 유배 23년 만에 신지도에서 숨을 거둔다.
- 이광사의 글씨에 대한 일화
전남 구례의 ‘지리산 천은사’는 원래 이름이 '감로사(甘露寺)'인데, 숙종 때 중건하면서 샘가의 구렁이를 잡아 죽이자 샘이 사라졌다고 해서 ‘샘이 숨었다’는 천은사(泉隱寺)로 개명했다. 그 뒤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일자,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들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광사가 물 흐르는 듯한 수체(水體)로 ‘智異山泉隱寺’(지리산 천은사)라고 써준 글을 일주문에 건 뒤부터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고요한 새벽,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에서 신운(神韻)의 물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또한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가객(歌客)에게 노래를 시켜서,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이면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쓰고, 평조(平調)이면 글씨도 평조의 분위기로 썼다고 전한다. 그만큼 그의 글에는 온몸과 영혼이 실린 신기(神氣)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역사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국조(國祖) 단군부터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충신들 이야기까지 30가지 일화를 30수로 읊은 ‘동국악부’(東國樂府)를 지었다.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정약용은 ‘발문’에서 “문장이 깨끗해서 즐길 만하다”라고 호평했다.
- 장남은 <연려실기술>의 이긍익
이광사의 장남은 바로 방대한 역사서 <연려실기술>을 쓴 이긍익이다. '연려실(燃藜室)'이란 호는 이광사가 서실 벽에 써준 것으로, 한(漢)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명아주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춰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이긍익이 평생 고초 속에 산 부친을 얼마나 흠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
[ 일부는 그를 박하게 평가하는데, 대부분 추사 김정희의 악평(惡評)에 기반한 것이다.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초의(草衣) 선사에게 쓴 편지에서 김정희는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전(大雄殿) 편액(扁額)에 대해 혹평했다.
“원교가 쓴 대웅전 편액(大雄扁)을 다행히 관람하며 지나쳤는데 이는 후배의 천박한 자들이 판별할 만한 것은 아니나, 만약 원교가 자처하는 것으로 논한다면 전해들은 것과 같지 않아 조송설(趙松雪·조맹부)의 형식 속으로 타락했음을 면치 못했으니, 나도 모르게 아연하며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초희에게 드립니다’, <완당집>)
김정희는 ‘잡지’(雜識)에서도 “옛 선백(禪佰)의 이른바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으니 다시 이를 보라’는 말도 있는데, 동쪽 사람들이 원교의 필에 묶여 있고, 또 왕허주(王虛舟·청나라 서예가) 등 여러 거장이 있음을 모르고 함부로 붓을 일컫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한 번 웃음이 나온다”고 비판했다.
왕허주를 예로 들었듯이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던 김정희는 청에서 습득한 서예이론으로 이광사를 비평했던 것이다. 또 이광사는 소론이었음에 비해 김정희는 노론으로, 반대 당파에 대한 당파심도 개재돼 있었다. 8년 유배생활을 제하면 순탄하고 화려한 인생길을 걸은 추사로선 전 인생이 쓰라렸던 이광사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러니 그의 글씨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출처; 한겨레 2007년 8월 30일 (오래되어 필자는 알 수 없음)
https://cafe.daum.net/gycenter/EdoS/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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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광사(李匡師)
이광사(李匡師, 숙종 31년(1705) ~ 정조 1년(1777))는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며, 현대 한국학의 시조이다. 조선시대의 양명학자(강화학파)로 육진팔광(六眞八匡) 중 한 사람이며 ,서예가로서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였다. 이 서체는 중국서체의 범주에서 벗어나 조선화(朝鮮化) 되었다는 의미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 불린다.
경종 1년(1721) 부친 예조판서 이진검은 노론 4대신을 탄핵하던 중 밀양으로 유배(이광사는 당시 17세)되었다가 죽었고, 영조 31년(1755) 나주 괘서사건으로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처벌 당할 때, 그는 이에 연좌되어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유배(51세)되었다. 사건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부인(문화 류씨)는 자살하였다.
이후 유배지 부령에서 문인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薪智島,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이배(58세)되었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향년73세). 그 이듬해 2월 아들 형제는 선조가 묻힌 경기도 장단 송남(長湍 松南) 거창지에 어머니 류씨와 합장하였다. 현재 그의 묘역은 비무장지대(DMZ) 속에 있어 발길을 막고 있다.
일찍 전(前) 공조판서 백하 윤순(白下 尹淳)에게서 글씨를 공부하여 진서(眞書),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했으며,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이룩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 풀과 벌레를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元體畵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 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代表作)으로는 <행서 4언시>(行書四言詩, 서울대 박물관 소장), 1746년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흠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 간송미술관 소장), <산수도>(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한편 저술을 통해 후진을 위한 귀중한 자료(資料)들을 남겼다. 서예 이론을 체계화한 <원교서결>(圓嶠書訣), <원교집선>(圓嶠集選), <동국악부>(東國樂府)가 있다. 작품(作品)으로는 '영의정 리경석(李景奭) 표(表)',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지(誌)', '병조판서 윤지인(尹趾仁) 비', '김이원(金履元) 신도비', '형조판서 이신의(李愼儀) 표(表)'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덧글>
원교 선생의 글씨에 대해 유홍준 교수는 "획이 삐짝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것 같지만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지는 황토색 짙은 작품"이라 했고, 서예가 김병기 교수는 "원교의 글씨는 신지도 앞바다의 잔잔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거친 파도를 닮아 노기(怒氣)를 띠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원교 선생은 당대 최고의 신필(神筆)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선생의 글씨를 보면서 거기 담긴 신운(神韻)과 영기(靈氣)를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