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50대 후반의 작가가 회고록을 쓴다. 그리고 제목을 붙인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그가 친구에게 이 제목을 알려주었더니, 친구는 “문학은 누구의 삶도 구한 적 없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학은 정말로 데이비드 실즈의 삶을 구했다. 완전히는 아니고 가까스로, 라고 해야겠지만.
그는 어쩌다 문학에 구해지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처음은 말더듬이증이라는 타고난 결함 때문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면 더듬지 않을까부터 고민하다 보니. 그에게 감정이란 더 유창한 이들의 것, 자신은 결코 날것 그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육체나 내 입에 이입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그는 ‘글로 쓰인 언어만 통과할 수 있는 작은 빈틈을 냈다’. 그는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말을 더듬지 않았더라도, 그는 글쓰기를 자신이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종교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은 환영(幻影)이고, 모든 소통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뤄지는 불가능의 제스처라는 것을.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고, 현실은 기껏해야 모호하며, 슬픔은 모두의 삶에 상시적(일상적인)이다. 그는 그 이유도 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코앞에 둔 존재, 탄생하는 순간 사형 선고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 평범한 것이든 예술적인 것이든…. 모두 죽음의 전주곡, 혹은 죽음을 짐짓 외면하며 딴전을 부리는 짓일 뿐이다. 죽음이 눈앞일 때, 다른 어떤 행동보다 더 중요한 행동이 있을까? 좋은 질문이다. 그에게는 최소한 읽고 쓰는 일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썼다. 말 더듬는 소년에 관한 소설을, 대학 농구팀에 대한 소설을, 아흔 살 넘은 아버지를 비롯하여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에세이를. 그렇게 문학은 그를 구했다.
다만 한동안만. 네 번째 소설을 쓰려고 구상하던 중, 그는 점점 문학에 흥미를 잃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에, 전통적인 형식의 픽션에 흥미를 잃는다. 픽션에 따르는 인물이나 대화니 플롯이니 하는 온갖 장치가 점점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고, ‘마술사의 손재주로 의도된 장치들이 작가의 실제 의도로부터 시선을 앗아가는 결과만 낳는다,’고 여겨진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창작을 가르치는 형편이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과거에 열광했던 걸작들에 더 이상 감탄하지 못한다. 그가 관심있는 것은 자신의 문제이지 가상의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다. 참을성과 집중력은 점점 떨어지고, 세상에 대한 무감감은 점점 커진다. 그가 바라는 것은 거두절미하고 곧장 두뇌와 심장에 와서 박히는 문학인데 말이다. 그리하여 영영 한 글자도 못 쓸 것처럼 절망하던 무렵, 그는 벼락처럼 깨닫는다. 자신이 소설을 쓰려고 수집한 자료 자체가 책이라는 것, 자신이 전유하고 뒤섞고 재배열한 무수한 인용구자체가 더 이상 픽션의 허울을 씌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신의 입장을 잘 표현한 하나의 연설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그는 모든 책을 콜라주 형식의 논픽션으로 쓴다. 짧은 단락들을 나열하여 그 흐름에서 생기는 리듬으로 긴장을 조성하고 낱낱으로 보이는 단락들이 결국 더 큰 전체를 구성하게끔 만드는 콜라주 형식은 빠르고 압축적이다. 또한 그는 픽션에 품었던 미련을 마음에서 놓아버린다. 저자가 일인칭으로 자신을 이야기하는 문학, 저자가 완전히 벌거벗고 자신을 들어내는 문학, 저자와 독자 사이에 얇디얇은 막만 있는 문학이야말로 현대에 유일하게 가능한 문학의 방식이라고 결론 내린다.
새뮤얼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책은 각자의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거나, 그게 아니면 존재를 견딜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데이비드 실즈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의식하는 내게, 단순히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책은 엄청난 시간 낭비로 느껴진다(문학은 내게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이런 어정쩡함을 참을 수 없다).”
문학은 한동안 그의 삶을 구했고, 그러다가 ‘문학’ 중 끔찍하게 많은 것들이 그에게 삶의 완전한 대립형으로 보이게 되면서 더 이상 어떤 식으로든 그의 삶을 구할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았지만, 지금 그는 다시 문학이 다른 방식으로 그의 삶을 구하기를 바라고 있다.
다만 불완전하게, 왜냐하면 이제 그는 삶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품지 않는 것처럼 문학/예술에 대해서도 결코 환상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결론을 담은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은-처음부터 읽어온 독자에게- 망치로 머리를 때리듯이 예상치 못한 충격을 안긴다.
문학으로 우리의 필멸성을 잠시나마 잊어보려는 '의식 말소' 계획은 가망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히려 그 의식을 더욱 또렷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것, 아픈 상처를 자꾸 찌르는 것이다.
그 일을 해내는 문학의 사례가 궁금하다면 이 책의 6장을 펼치면 된다. 레나타 애들러의 《쾌속정》부터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까지, 데이비드 실즈가 '온 마음으로 믿는 55편의 작품이 나열되어 있다. 산문이 51편, 시집이 2편, 다큐멘터리와 텔레비전 시트콤이 각각 1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부터 몽테뉴의 《수상록》, 알퐁스 도데의 《고통의 땅에서》,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 W. G.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까지 아우르는 이 목록은 실즈가 독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요컨대, 이 책은 비평적 회고록 혹은 자전적 문학론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가지런하게, 시간순으로, 인과적으로 이 책을 소개한 것은 사실 저자에게 실례일지 모른다. 그는 바로 그런 식의 이야기가 재미도 효과도 없음을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가 좋아하는) 콜라주 형식 논픽션의 한 사례인 이 책은 특정 형식이나 분야로의 분류를 거부한다('장르를 정의할 수 없다' '경계를 넘나든다'는 표현은 실즈의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말들이다. 나 또한 그의 전작<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의 옮긴이 후기를 “이 책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자전적 에세이? 보고서?"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 책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의 기억, 경험, 책과 음악과 영화에 관한 비평과 분석, 출처를 밝힌 것보다 밝히지 않은 것이 더 많은 무수한 인용구가 짜깁기되어 있다. 요약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그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홀로그램처럼 홀연히 그의 삶과 문학론이 떠오른다. 그가 이런 형식의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새로운 독서 체험이다.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이다'라는 책의 첫 문장을, 독자는 책을 다 읽은 뒤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독서도 일종의 자서전이다.‘ 우리는 각자 자의식의 짐을 지고 혼자 걷는 사람들이지만 그 처지만큼은 다들 같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타인의 글에서만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대한의 위안이다.
옮긴이 김명남
KAIST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환경정책을 공부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편집팀장을 지냈고,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크릿 하우스》 《세계를 삼킨 숫자 이야기> 《이보디보》> 《불편한 진실》 《특이점이 온다》 《버자이너 문화사》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블러디 머더》 《포크를 생각하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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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실즈(David Shields) 지음 김영남 옮김
초판 1쇄 2014년 11월 28일
초판 2쇄 2015년 1월 25일
목차
프롤로그 9
1장 스스로 제 무덤을 파다 17
2장 사랑은 오랫동안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 51
3장 인간이라는 동물은 왜 이렇게 슬픈가83
4장 우리가 지상에 체류하는 시간은 잠시뿐이니 97
5장 상처와 활 123
6장 모든 훌륭한 책은 결국 작가의 이가 깨지는 것으로 끝난다 149
7장 삶 vs. 예술 177
8장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207
옮긴이의 말 233
첫댓글 데이비드 실즈(David Shields)는 모든 책을 '콜라주 형식'의 논픽션으로 쓴다. 짧은 단락들을 나열하여 그 흐름에서 생기는 리듬으로 긴장을 조성하고 낱낱으로 보이는 단락들이 결국 더 큰 전체를 구성하게끔 만드는 '콜라주 형식'은 빠르고 압축적이다. 또한 그는 픽션에 품었던 미련을 마음에서 놓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