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시를 사랑하는가 - 정호승 -
우리들은 누구나 가슴에서 치솟아 오르는 시의 덩어리들을 하나씩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순간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의 감격이 있는 시를 우리가 평생 동안에 한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것을 보면서 문득 몇 년 전 백두산 천지에 갔을 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1989년경 중국 땅을 통해서 백두산 천지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를 바라보면서 '아! 이 천지는 절대자가 쓴 시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우러났습니다.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면서, 북한이 우리들에게 준 어떤 감동과 같은 것이 가슴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화작가 정채봉 씨가 쓴 짧은 시가 있습니다. 그 역시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본 다음 '이렇게 큰 산도 눈물샘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노래했지요.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부제는 백두산 천지에서)는 제목의 시인데, '이렇게 크고 웅대한 산도 가슴속에 눈물샘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하는 감동이 표출된 시입니다. 어느 긴 시보다도 정채봉의 짧은 시가 제 가슴을 울렸던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백두산을 항상 민족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고 분단과 통일의 상징으로만 여겨 왔습니다. 시를 쓰는 제 경우에는 '절대자가 쓴 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천지는 백두산이 흘린 눈물샘이다'라고 노래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돌아보면 시의 소재는, 사실은 우리 일상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현재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급변하는 삶의 환경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저는 1970년대에 20대를 보냈고, 1960년대에 중학생이었고, 195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저의 중고등학생 시절과 지금 중고등학생들의 삶, 그리고 제가 이십대를 보낸 경험과 오늘 이십대들의 삶의 형태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필요 없으리라고 생각해 왔던 휴대폰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 출근길에 휴대폰을 집에 놔두고 왔을 때면 하루종일 마음이 불안합니다. 또 사무실 책상 위에 휴대폰을 놓아둔 채 퇴근이라도 했을 때에는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다시 가서 가지고 올까', '꼭 만나야 할 사람에게 걸려올 전화를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불안하고 허전합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 친화적인 삶을 철저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저는 팩스 세대였는데, 할 수 없이 저도 이메일(e-mail)을 통해서 원고를 보내고, 이메일로 원고가 도착된 것을 확인하는 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과의 채팅에도 도전하여, 야후(YAHOO) 사이트를 통해서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채팅 방에서 「'나는 오십대 아저씨입니다'라고 솔직하게 밝히면 쫓겨나겠지. 그러면 20대라고 그럴까. 이름을 뭐라고 대지」 하는 궁리에 부산한 적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삶의 형태는 짧은 기간 안에 너무나 바뀌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이 지나치게 기계 친화적이고 정보 친화적인 삶 속에 몰입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계에 매여 있는 삶에서 벗어날 때
제가 처음 전화를 걸어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갑자기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심부름을 시켰는데, "아무개 집에 가면 전화가 있다. 그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드려서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 집에 갔더니, 정말 안방에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심부름을 가면서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화를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르쳐준 대로 다이얼을 돌렸더니, 한참 후 수화기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호승입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제 목소리가 무지무지하게 컸습니다. 어찌나 크게 고함을 질렀던지 옆에 있던 주인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셨습니다. 제 목소리가 아버지한테 들리지 않을 것 같아 목청껏 높여 전화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이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제 소원은 줄곧 전화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가진 직장이 숭실고등학교 교사 자리였습니다. 시동인 활동을 하면서 주소와 이름을 교환했는데, 가장 기뻤던 것은 저의 연락처인 전화번호가 찍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각자 전화기를 하나씩 가지고 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화선을 통해서 인터넷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죠.
글만 쓰고 지내다가 얼마 전 '현대문학사' 출판부를 맡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제 직장에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직원이 두 명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오후 두세시만 되면, 그녀들이 자기 책상에 앉아서 휴대폰을 들고 막 누르는 거에요. 20분도 좋고 30분도 넘게 그러는 걸 보면서, "직장에 와서는 휴대폰을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다."고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제 말에 그들이 얼마쯤 야속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전화는 우리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전화기 저쪽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전화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요즈음에는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지척인 듯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화상 전화기까지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급변하는 기계 친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기계 친화적이고 정보 친화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얼마 전 중앙일보에 나온 한 기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이버 결혼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결혼한 지 1년 내지 2년 된 신혼부부인데 여자 쪽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혼 전에 남자가 컴퓨터에 미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 여자 쪽에서 제기한 이혼의 사유였어요. 그런데 남자는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어떤 여대생과 결혼해서, 사이버 공간 속에서 둘이 여행도 가고 같이 잠도 자고 하면서 꼬박 밤을 새우고 뜬눈으로 출근하는 게 다반사였답니다. 퇴근해 돌아오면 또 사이버 공간 속의 그 여대생과 만나서 신혼살림을 살고 애도 낳고 그렇다는 겁니다. 남자의 부인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참다못해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이혼 판결이 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듯 사이버라는 제3의 공간은 우리들에게 혁명의 공간입니다. 그 가상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에 사는 우리의 삶을 침범하여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유년 시절에 팽이도 직접 제 손으로 만들고 썰매도 만들었습니다. 전승현이라는 분이 우리 나라 최초로 스케이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분의 스케이트를 보고 얼마나 그게 타고싶었는지, 제가 직접 나무를 가지고 발 밑에 철사를 대어서 서서 탈 수 있는 스케이트를 만들어서 타곤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놀이기구를 직접 만들고 제기나 연도 직접 만들고, 여름에는 여치집조차도 만들었습니다. 자연 친화적인 놀이를 통해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변신 로봇을 갖고 놀기를 더 좋아하고, 좀더 나이가 들면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곤 하죠. 자동차만 해도 우리는 검정 고무신을 두 개 포개어서 자동차라고 생각하면서 앵앵하는 소리도 직접 내면서 놀았는데, 지금은 리모콘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가지고 놀지 않습니까. 또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서,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젊은 세대들이 부쩍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두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막내아들이 중학생입니다. 그 애가 노는 것을 보면 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심지어 아버지인 제가 쓴 책도 읽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른이 읽는 동화집 '항아리'를 내게 되어, '사랑하는 아들 후민에게'라는 사인과 함께 아들 방에 놓아 두었습니다. 어느 날 너 '항아리'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안 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 너무하다'며 섭섭한 마음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들녀석은 컴퓨터 게임은 자기 반에서 제일 잘한다고 저한테 자랑합니다. 녀석이 즐기는 스타크레프트 게임을 옆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게임의 내용이란 게 정조준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 살인입니다. 그리고 폭파하는 것을 즐기는 거예요. 그래서 한창 게임에 빠져 있을 때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면, 컴퓨터 앞을 떠나 총 쏘는 흉내를 내면서 옵니다. 거기에 젖어 있는 거예요. 한번은 아들녀석이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자고 해서 동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애니메이션이란 게 일본에서 밀수입된 CD 4개짜리였습니다. 「십지훈검」이라는 건데 굉장히 감동적이고 재미있다며 함께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빠도 고마워할 거라면서 부추기는 아이에게 이끌려 보기 시작했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첫 장면이 열리자마자 '이 애니메이션은 조금 잔인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극화(劇化)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므로 이해하고 보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자가 나왔어요. 내용은 일본의 어느 검객의 가족들이 몰살을 당했는데. 간신히 살아남은 한 소년이 나중에 검객이 되어서 원수를 갚는다는 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보고 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칼을 가지고 사람을 찌르면 장면을 너무 리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가슴을 찌르면 가슴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게임에서도 정조준해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그대로 나옵니다. 죽이면 굉장히 통쾌한가 봅니다. 사람의 목을 자르는 장면에서는, 목이 또르르 굴러가는 것을 이제까지의 영화에서는 본 적이 없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가득 차 있을까, 매우 염려스러웠습니다.
기계 친화적인 삶을 사는 오늘의 젊은이들과 달리 저는 물고기도 잡고 나무와 포옹하면서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만든 연도 날리고, 언 손을 불며 눈사람도 많이 만드는 등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았던 저와, 오늘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점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정보와 기계로 가득 차 있다고 할 때 과연 인간은 정보와 기계로만 만들어져 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상당히 늘어날 전망이라고 합니다. KBS에서 방영하는 '일요스페셜' 시간에 인간의 수명과 노인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국에서 나온 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평균 수명이 130에서 140세고, 현재의 40대나 50대는 평균 수명은 80이나 90세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앞으로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수명이 연장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형태는 보다 더 기계화되고 정보화되는데,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앞으로는 복제된 장기가 우리의 건강을 더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은 더 연장되는데 인간은 계속 기계화될 것인가. 제 견해로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인간에게는 육체만이 아닌 고귀한 영혼이 있다
인간은 육체만으로 존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영혼의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을 한 그루의 나무라고 생각해 본다면, 나무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땅 속에서 뿌리를 통해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야 인간이라는 나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나무의 수분과 영양분은 나무의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나무의 육체일까요? 그 나무의 영혼일까요? 그 나무의 육체를 통한 영혼이겠지요.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나무가 실뿌리를 통해서 필요한 정보만을 빨아올린다고 한다면 그 나무는 과연 살 수 있을까요? 인간은 기계로서의 삶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장차는 영혼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오늘의 삶에서 어느 부분에 중요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저는 그것은 서정(抒情)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용필도 좋아하고 최진희씨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조용필 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면 그 가사 속에는 서정이 있습니다. 부산항이라는 항구도 있고 갈매기도 있고 동백섬도 있고 서정이 있습니다. 오늘날 십대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보면 서정이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욕으로 이루어지는 노랫말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서정이 말살된 산문(散文)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제 견해로는 인간이 정보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정성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정성의 회복이 필요할 때에, 저로서는 시를 통한 서정성의 회복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쩌면 산문의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산문의 시대에도, 운문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건물의 벽돌이라는 고체화된 물질이 산문이죠. 담쟁이 넝쿨이라는 운문이 감싸고 어루만져 주고, 물을 공급하고 다시 생명의 피를 공급하는 것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름날의 나무 한 그루가 서울에 없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이 뜨거운 여름에 서울 시내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바로 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에 사람은 누구나 다 시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자 하는 기본적인 정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정서가 아름다운 것을 만나면 아름답다고 느끼는 서정을 갈구하는 마음의 바탕입니다.
저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봄날 아침에 일어나서 냉수를 한 잔 마시러 가다가 창밖을 봤더니, 갑자기 눈이 막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눈이 내릴 철이 아닌데 웬 눈이지 하면서 다시 보니까, 창 밖에 백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분부시게 하얀 백매화를 보고, 하얀 눈으로 착각했던 거지요. 말을 못하고 입만 탁 벌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 내가 저 백매화가 핀 것을 보고 봄눈이 내렸다고 생각했구나. 역시 인간은 형편없는 존재야.' 하는 탄식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왔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시인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지 그 시를 발견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계화된 인간, 산문화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시가 가득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누르기만 하면 시가 나올 것입니다. 물이 가득 들어 있는 통에 구멍을 내고, 약간의 자극만 주어도 물이 쫙 나오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온몸이 시로 가득 차 있는데, 여러분들은 자극을 주지 않고 그냥 눈과 마음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만 생각하기 때문에, 시심이 솟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시를 한번 자극해 보십시오. 그러면 한없이 많은 시들이 나올 것입니다. 시를 발견하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시를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속의 시를 끄집어내는 능력 있어야
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느 날 퇴근을 해서 집에 갔더니 제 처가 시장에서 무지개떡을 사왔습니다. 무지개떡을 보니까 '아! 무지개떡 옛날에 엄마가 많이 사주셨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으면서 '무지개떡 참 맛있다. 마누라가 사주니까 더 맛있다. 잘 먹었어.' 하고 말면 그 속에는 시가 없다는 거죠. 무지개떡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무지개가 들어 있지요. 무지개떡을 먹을 때는 무엇을 먹었습니까? 저는 무지개를 먹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짧은 시를 하나 썼습니다.
엄마가 사오신 무지개떡을 먹었다
떡은 먹고 무지개는 남겨 놓았다
북한산에 무지개가 걸렸다
마누라가 사온 무지개떡을 먹었다고 하면 재미가 없는데, '엄마가 사온 무지개떡을 먹었다'라고 표현한 데 시의 비밀이 있습니다. 시적 화자가 소년의 마음이 된 거죠. 떡은 먹고 무지개를 남겨놓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는 시를 그냥 자연스럽게 밖으로 내보낸 거죠. 제가 무지개떡을 먹으면서 시를 발견한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눈 속에도 시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이 다 있는데, 스스로 가지고 있는 마음의 눈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시를 발견하지 못한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즉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의 눈을 가진 때에는, 모든 사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지개떡이니까 분명히 그 속에는 무지개가 있듯이….
얼마 전에 '종이학'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종이학은 저의 큰 아이가 군에 입대를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씌어졌습니다. 녀석은 군에 입대하기 전날 술에 취해서 제 방에 천 마리의 종이학이 담긴 커다란 유리 항아리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아빠, 제가 제대할 때까지 이걸 잘 좀 보관해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이 종이학을 제대하는 그날까지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잘 보관했다가 너한테 돌려주겠다." 그런데 녀석이 입대한 후 천 마리의 종이학이 유리 항아리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아! 저 종이학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갑갑한 항아리 속을 뛰쳐나가서 저 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가고 싶을 텐데…. 종이학은 비상의 꿈을 끊임없이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잘 간직하라는 말만 듣고, 명색이 시인인 아버지가 종이학들을 날려보내지도 않고 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직무를 방기(放棄)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리 항아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종이학을 날려 보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으로서 가장 치졸한 방법이었습니다. 아주 물리적인 방법이라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시인이 종이학들을 날려 보내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시였습니다.
시를 썼는데 어떻게 하면 종이학이 날아갈까요? 시인이 종이학이 날아간다고 하면 날아가는 거에요. 시인이 꽃이 웃는다고 하면 꽃이 활짝 웃는 거에요. 꽃이 핀 것을 보고 시인이 '꽃이 운다.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을 떨군다.' 하면 꽃이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것은 시인의 힘입니다. 그래서 내가 '종이학이 날아간다'고 썼더니 종이학들이 막 날아갔습니다. 유리 항아리를 뛰쳐나와서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왕이면 멀리 날려 보냈으면 해서, '관악산을 넘어서' 하고 생각하다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아서, '지리산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지리산을 향해서 날개에 힘을 싣고 천마리나 되는 종이학이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걱정이 되었습니다. 비가 오면 어떡하지? 종이학이 날아가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종이학이 다 젖어서 떨어져서 죽을 것 아닙니까? 종이학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간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두고 날아간다.' 라고 쓴 거죠. 그러자 비가 와도 아무런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좁은 항아리 속에 갇혀 있던 종이학 천 마리를 날려보냈습니다.
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여러분들과 제 가슴속에는 누구에게나 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 가득 들어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가 무지개떡과 종이학을 빌어 말씀드렸습니다.
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골목에서 '고등어 사려. 금방 바다에서 가져온 싱싱한 고등어 사려!' 하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저녁에 고등어나 좀 지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등어를 사러 나갔는데, 자기 아들이 골목 쪽 창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고등어 장사 아저씨한테 "아저씨, 고등어 얼굴 예쁜 걸로 주세요." 하고 말하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제 친구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고등어의 얼굴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이 "얼굴이 예쁜 고등어로 달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친구는 너무너무 감동을 받아서 이 아이를 낳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답니다. 친구는 자기 아들의 말 한마디가 바로 시라고 했습니다. 금방 양념이 발라지거나 해서 죽어버릴 고등어이지만, 소년의 마음속에서 이왕이면 예쁜 얼굴인 걸로 달라고 하는 마음이 바로 시의 마음입니다.
어느 봄날 여수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여수역에 내렸습니다. 역에 내린 순간 '아니 왜 기차가 여수역에서 더 가지 않고 멈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수역에서 기차가 멈추지 않고 여수 앞바다에서 오동도로 한 바퀴 휙 돌고 저쪽 바다로 기차가 계속 가면 될 텐데 왜 여기서 멈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제 머리 속에서는 기차가 여수역에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다속으로 달리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탄 승객들이 기분이 좋아서 창문을 열고 갈매기들과 손짓도 하고 바다 속으로도 기차가 은하철도 999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물고기들도 함께 타고….
기차를 타고 수평선 위를 달리는 기차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현실 속의 기차는 부산역이나 목포역이나 여수역에서 더 이상 앞으로 달리지 못하지만, 우리 마음속의 시는 그 기차를 얼마든지 수평선 위로 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내리고 빈 기차가 달리면,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전부 자기들이 승객이 되어 차창에 기대어 애인 물고기들끼리 서로 손을 잡고 서로 사랑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시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시를 표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인간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를 어떻게 하면 잘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보다 자극을 주어서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그 가장 좋은 방법은 눈이 아닌 인간의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는 어떤 현상만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씀을 여러분들한테 드리고 싶습니다. 시계가 있다고 하면, 이 시계의 마음으로 인간을 바라보면은 인간의 모습이 달라지고 시계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안도현이 쓴 「연탄재」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아마 이런 내용이었을 겁니다.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아라.
당신은 언제 이 연탄재만큼
뜨겁게 누구를 사랑해 봤느냐?'
그런데 이 시에 감동이 있습니다. 이 시는 어떻게 쓰여졌을까요? 인간의 눈으로 연탄재를 바라보고 썼을까요? 아닙니다. 연탄재의 눈으로 연탄재의 마음으로 쓴 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탄재가 뜨겁게 누구를 사랑했다'고 쓴 겁니다. 항상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지 말고 사물의 마음이 되어서 인간을 바라보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 마음속에 가득 들어있는 시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고 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시는 은유의 세계입니다. 시는 은유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기본입니다. 은유는 시의 본질입니다. 은유를 이해해야만 시가 쉬워집니다. 먼저 국어사전에서 은유를 찾아보면 '비유법의 하나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은 전봇대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키가 큰 것을 전봇대로 비유한 것이 바로 은유입니다.
백마디의 말보다 한 송이 장미가
한번은 신사역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가다가 어떤 젊은 남녀를 보았습니다. 여학생이 개찰구 표를 넣은 다음 남학생을 쳐다보면서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남학생이 "선영아!" 하고 불렀어요. 그러자 여학생은 "서로 인사해놓고 왜 불러?"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남학생 쪽으로 갔습니다. 이윽고 그 남학생은 감추어 놓았던 한 송이의 장미꽃을 내밀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눈만 쳐다보면서 주었더니, 갑자기 선영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막 피어나면서 아무 말 없이 장미꽃을 받아든 채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남학생은 기분이 좋은지 입이 벌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남자가 선영이한테 장미꽃을 전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와 말 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을 했을 때는 산문의 세계고 말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는 운문의 세계, 즉 시의 세계입니다. 그 장미꽃을 건네주는 행위 자체는 은유(隱喩)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것에 대한 은유죠. 그리고 그 장미는 하나의 은유물입니다. 그런 은유의 행위를 여러분들의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유의 세계이고 시의 바탕이 되는 세계입니다.
건물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와 같은 것이 시입니다. 여름날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바로 시입니다. 만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창이 하나도 없는 곳에 있으면서, 바닷가에 있는 건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닷가에 있을 때,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물이 말을 하게 할 때 시심은 무르익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의 꽃은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
도합 15년의 外道…결국은 詩뿐이었다
나는 스스로 시를 버린 적이 세 번이나 있다. 1982년에 시집 ‘서울의 예수’가 나오고 87년 ‘새벽편지’가 나올 때까지 5년 동안, 90년에 ‘별들은 따뜻하다’가 나오고 97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나올 때까지 7년 동안, 그리고 99년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가 나오고 지금까지 3년 동안, 나는 철저하게 시를 버리고 살아왔다.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등단한 지 3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도합 15년 동안이나 시 한 편 쓰지 않고 시를 버리고 살아왔으나 시는 지금까지도 나를 버리지 않고 있다. 마치 ‘돌아온 탕아’를 둔 아버지처럼, 내가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 따뜻하게 맞이하고 돼지를 잡고 잔치를 벌인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집’을 떠날 생각이 없다. 이제는 시가 나를 버려도 내가 시를 열심히 찾아가 효도할 생각이다. 이제 느린 것은 두렵지 않으나 멈추어 서는 것은 두렵다.
나는 일찍이 마흔 하나에 ‘월간조선’에서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10년 동안 ‘수절’을 하다가, 21세기가 시작되는 벽두에 ‘현대문학북스’라는 출판사를 창업하고 위탁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지난 연말에 그만두고 다시 내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출판인이 아니고 시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물론 친소유무를 떠나 이해득실과 손익계산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표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그들을 이제 내 스승으로 삼고 있지만, 나는 늘 이렇게 깨닫는 일이 늦어 막대한 시간을 그 대가로 지불한다. 월간조선을 그만뒀을 때도 마찬가지다.
실은 그때 나는 문청 시절부터 쓰고 싶었던 소설을 쓰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그러나 나는 결국 문학의 장르 중에서 나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만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인생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죄가 가장 크다는데, 나는 이렇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뒤늦게 깨달아 인생을 허비하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용서하시라. 지금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다시 시의 자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은빛 니켈로 만든 십자고상이 하나 놓여 있다. 평생 십자가에만 매달려 살아온 청년 예수를 바라본다.
그가 잠시 고개를 들고 나를 보더니 “짜식!” 하고는 싱긋 웃는다. 나는 그 맑은 웃음에 그만 고개를 숙이고 묵상한다. 예수의 손에는 십자가의 못 자국이 나기 전에 먼저 목수 일로 생긴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내 삶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시를 쓸 수 없었다. 나의 삶 또한 만남과 헤어짐의 모자이크라는 것을,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과 시련이란 해가 떠서 지는 일만큼이나 불가피하다는 것을, 불행이 인간을 향한 신의 가장 확실한 표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나는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다.
그 동안 내가 쓴 시들은 고통이 잠깐 잠잠해지고 난 다음에 집중해서 쓴 시들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문예지에 꾸준히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벼락치듯이 한 권 분량의 시를 써서 급하게 시집을 내곤 하였다.
깊은 사색의 사막을 건너지 못하고 무슨 자위하듯이 시를 썼으니 그 시들이 오죽하랴. 그 동안의 고통을 위로 받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다 보니 나로서는 자연히 그런 방법으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괴테는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이해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름다운 색채는 바로 빛의 고통이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결과다. 고통과 시련과 역경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인간이 아름다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자 어느덧 50대 중년의 사내가 되고 말았다.
상처 없는 사람은 결코 먼 길을 떠날 수 없고, 이미 먼 길을 떠난 사람에겐 오히려 그 상처가 힘이 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나는 이제 그 상처의 힘으로 다시 시의 길을 가려고 한다. 세상에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있지만 꼭 가야 할 길이 있다. 이제 그 길이 시의 길임을 확신한다.
어린 시절 나는 시를 내 현실적 삶의 한 방편이나 도구로 활용했다. 시의 본질적 가치를 중요시하기보다 시가 왜 나의 현실에 필요한가 하는 데에 먼저 시의 가치와 효용을 두었다.
고3 때는 문예장학생을 모집하는 유일한 대학인 경희대학교에 무시험 입학하기 위하여 시를 썼으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문단에 등단해야만 졸업 때까지 문예장학금을 계속 받을 수 있어서, 그 장학금을 받기 위하여 또 열심히 시를 섰다. 이렇게 나는 시를 무기 삼아 현실적 난관을 타개해 왔고, 그때마다 시는 기꺼이 나를 도와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시는 나로 하여금 시대와 현실을 제대로 보는 밝은 눈을 지니게 해주었다. 내가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의 말석에 엉덩이를 디밀었을 때는 ‘10월 유신’이 선포된 지 불과 석 달 뒤였으며, 이후 1979년 유신정권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나의 20대는 줄곧 유신시대와 그 시기를 같이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그 겁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약한 나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으며, 긴급조치가 선포될 때마다 국가가 국민에게 자행하는 그 거대한 테러 앞에 쥐새끼처럼 벌벌 떨었다.
그때 나는 70년대의 젊은 시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용기 있는 자는 행동하였으며, 나처럼 용기 없는 자는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스스로 비굴하게 느껴졌다. 한두 해도 아니고 70년대를 온통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김지하 시인을 감옥 밖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나의 심정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것이었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70년대의 모든 시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것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지금도 김지하 시인에게 감사와 부채 의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래도 그때 시는 섬약하고 용기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 그나마 시를 쓰게 해주었다.
비록 목소리는 작고 여리고 부드럽고 잔잔하나 그래도 그러한 목소리로 한 시대의 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만일 시가 없었더라면 유신시대를 사는 동안, 나는 더욱 부끄럽고 비참했을 것이다. 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군사독재시대의 한 모퉁이에서 숨을 할딱거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때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시인들, 김창완 김명인 등과 함께 시동인지 ‘반시’를 결성, 소위 현실참여시의 기치를 높이 들 수 있었던 것도 시가 내게 베푼 은혜 중의 하나다. ‘민중의 차원 속에 동화하지 못한 오만한 언어에 대하여, 시의 본질인 정신보다는 수단일 뿐인 언어세공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맥락으로부터 이탈해 버린 관념적인 세계성에 대하여 부정의 입장에 서고자 한다’고 천명하던 ‘반시’ 창간사의 한 구절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이제 탕아의 심정으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인 시의 가슴에 안기니 평화롭다. 시가 배불리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순수한 내 피와 살이 되어 내 영혼을 맑게 해주는 것만은 자명하다.
석수장이가 망치질을 백 번을 해도 돌덩이에 금 하나 가지 않다가 백 한 번째 내리치자 돌덩이가 둘로 갈라지는 경우, 그것은 백 한 번째의 망치질 때문에 돌덩이가 쪼개진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망치질 횟수가 모두 합쳐져 쪼개진 것이다. 나는 이제 백 번을 하고 백한 번째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는 백한 번째의 망치질에서 돌이 깨어지는 순간에 태어나는 그 무엇이다.
무엇보다도 내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의 그릇이, 나라는 한 인간의 그릇이 간장종지만큼 작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고 그 그릇에 시라는 간장을 조금 담아 남들이 밥 먹을 때 조금씩 찍어먹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시로서 무엇을 이룰 생각은 버릴 것이다. 산다는 일이 무엇을 이루는 일이 아니듯, 시 또한 현실적으로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흙탕물이 질퍽한 연못에 떠 있는 아름다운 수련과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수련은 더러운 오물들이 떠다니고 온갖 쓰레기들이 가라앉아 있는 진흙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자신을 멋진 꽃으로 만들어줄 요소들만을 뽑아 올려 백색과 홍색의 꽃을 피운다. 주위의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없는, 그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을 꽃으로 만들어줄 요소들만 뽑아 올리는 수련의 뿌리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싶다. 그런 뿌리의 마음이 되어야만 현재의 악에서 미래의 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하되 사랑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제 시를 열심히 쓰되 시에 얽매이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몇 차례나 시를 버리는 ‘탕아’는 되지 않을 것이다. 물새는 물에 젖지 않고 물에 뛰어든다. 나는 시를 쓰는 물새가 되어 물에 뛰어들다가 그만 물에 젖어버려도 좋다. 물에 젖지 않고 물에 뛰어드는 물새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어떤가. 그래도 물새는 물새가 아닌가.
한국일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2003/02/05
***
커버스토리 / 정호승
세상의 모든 뿌리를 적시는 눈물
1.
4월의 꽃들은 경계도 없다.
경계를 지우며 피고 진다.
천지간을 넘나들며 자적하던 시인들도 4월의 도원 앞에서만큼은 몽유로서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고 무릉으로서 스스로의 빗장을 푼다. 아직 영육(靈肉)의 일치 없이 꿈의 존재인가 싶으면 현실의 존재이고 현실의 존재인가 싶으면 꿈의 존재임을 4월은, 장자의 나비를 띄워 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침묵을 지키게 한다.
나비가 날아가 앉는 꽃잎마다 꽃은 자기 온몸을 흔들고, 나비가 날듯이 마냥 스치기만 하여도 시인은 자기 온몸을 떨고, 그 온몸들의 떨고 흔들림으로 인해 삶과 죽음은 서로 껴안은 채 바다처럼 출렁거리고, 출렁거림으로써 그 무게도 똑같아져 마침내 공명을 불러 일으킨다. 이와 동시에 4월의 꽃과 시인도 하나로 포개져 서로 심연이 같아지듯 공명도 같아져 비로소 삶의 절정인 소멸, 바로 그 ‘울창한 미립’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 미립을 목전에 둔 어느 시인의 마지막 객혈 같은 동백꽃 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진달래가 수의를 연분홍으로 채색하고 그에 질세라 산천의 산수유꽃들도 급히 내려와 시인의 상여 그림자를 샛노랗게 단청한다.
땅에서는 또 이름 없는 온갖 풀꽃들과 쑥들이 지천으로 솟아나 먼 길 가는 님들의 발목 풀어주는가 하면, 넋을 실어가는 훈풍마다 여울지는 붉은 자운영이며 앵두꽃, 배꽃, 무꽃, 유채꽃, 민들레꽃 그리고 먼 발치 뒷짐지고 있다 한순간, 화끈하게 피었다가 화끈하게 지는 벚꽃들이며, 한겨울 눈보라에도 결코 팔지 않는다던 향기를 오늘따라 무상으로 뿜어대는 매화꽃들이 여기저기, 저 아득한 상여 그림자를 만장기처럼 뒤따른다.
그리하여 그 만장기들 물결 사이로 성급한 나비들이 향기에 취해 혼몽스런 천지간을 단숨에 넘나들고, 길섶 외진 구석에서는 쇠똥구리 한 마리가 탁구공만하게 똘똘 뭉친 쇠똥을 뒷발로 분주히 굴려가고 있다면, 굴려가다 잠시 숨을 고르며 무심히 일몰을 쳐다보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장려한 봄날의 화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 삼엄한 봄날의 게송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4월은, 나에게, 나비같은 나의 生과 더불어 쇠똥구리 같은 침묵을 주었지만, 내가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다른 한 발이 벌써 허공을 짚고 있다는 사실에서, 난 이미 경계를 지운 꽃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내가 흔들리고 있음을, 흔들리며 떨고 있음을, 떨며 출렁이고 있음을 척살의 심정으로 확인하곤 한다. 나비도 쇠똥구리도 내 안에서는 경계가 삼엄한데 나는, 그 경계선에서 늘 흔들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의 감지는 또 얼마나 끔찍한 영육(靈肉)의 분리인가.
정호승 선배 시인을 찾아가는 길은, 4월의 꽃들에게 들키며 가는 그 길은, 그렇게, ‘도저한’ 길이었다.
서두의 우중 천지간 같은 수사의 글 역시, 실은 그런 내 마음 속의 난세 하나 평정하지 못한 검산검수(劒山劒樹)의 난맥상 탓이리라. 그래서 오늘 나는 ‘나비의 날개’가 아니라 ‘쇠똥구리의 뒷발’ 같은 마음으로 정호승 시인을 만난다면, 행여 돌아올 때엔 장자(壯子)처럼 나비의 등을 타고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날아다니는 ‘푸른툭눈 飛魚’를 타고 올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벌써, 나의 눈에는 4월의 꽃들이 지운 경계선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또한 얼마나 끔찍한 무릉인가.
“사랑할 원수가 없어서 슬픈” 정호승 시인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늘 한결같다. 몇 해 전에 마련한 대청역 근처의 집필실도 주인만큼이나 단정하고 정제되어 있다. 그 집필실 안에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난(蘭)처럼 단아한 기품이 변함없고 밖으로 나오면 매화처럼 은은한 향기가 멀리 퍼져 사람들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것 또한 내가 10여년 전에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변함이 없다.(나는 정호승 시인이 나온 경희대 국문과의 10년 후배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엔 시 이외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어 보이며 큰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안으로 거둘 뿐 밖으로 흘러나가게는 하지 않을 듯이 보인다.
물론 누구나 겪는 큰 상처 몇 개 쯤은 50년이나 살아온 그에게도 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은, 그의 시나 소설에서 보듯 극한의 고통으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특히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 7년만에 낸 5번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보면, 어디를 펼치더라도 사랑의 고통과 절망으로 자신의 살점을 저며내고 있는데, 거의 ‘자학적’이라할 만큼 그 핏자국이 깊다.
사랑은 언제나 어머니를 천만 번 죽이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으나
때로는 실패한 사랑도 아름다움을 남긴다
─ <늙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부분
사랑이 깊으면 증오도 깊다
─ <갈대를 위하여> 부분
아직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지
미나리 다듬듯 내 마음의 뼈다귀들을 다듬어
그대의 차디찬 술잔 곁에 놓아 드리리
마지막 남은 한 방울 눈물까지도
말라버린 나의 검은 혓바닥까지도
그대의 식탁 위에 토막토막 잘라 드리리
─ <모두 드리리> 부분
이제는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 <새벽 기도> 부분
나는 이혼하고 병들어 술 한 잔도 못 먹는데
죽음이 없으면 삶이 없구나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사랑해야 하는구나
사랑이 희생인 줄 모르는구나
─ <壽衣를 만드시는 어머니> 부분
미안하다
나도 내 인생이 박살이 날 줄은 몰랐다
─ <겨울밤> 부분
삶의 형식에는 기어이 참여하지 않아야 옳았던 것일까
─ <첫눈> 부분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 <폭포 앞에서> 부분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거짓 앞에 서 있다
─ <洗足式을 위하여> 부분
멀리 첫눈을 뒤집어쓰고 바다에 빠지는 나의 기차가 보인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미움이 끝난 뒤에도 다시 나를 미워한 것은 잘못이었다
─ <첫눈> 부분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
─ <칼날> 부분
나도 이제 나를 속일 수 있는 놈이 되었다
─ <거리에서> 부분
다소 길게 인용한 이 시들은 정호승 시인의 후배이자 나의 동기인 문학평론가 하응백 교수의 지적대로 시인의 “내면이 사랑의 이율배반성으로 인해 얼마나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고통은, 그로 하여금, 시적 대상을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등과 같은 초기 시집에서 노래했던 소외된 도시 빈민이나 가난하지만 들풀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민초들로부터 이제 사랑의 벼랑에 처한 시인 자신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도록 채찍질 했을 것이다.
그 채찍은 “달빛 아래……칼끝을 치켜세우고 / 자기의 목을 찌르는”(<개미>) 개미처럼 “뼈다귀를 다듬고 검은 혓바닥까지 토막토막 잘라내며”(<모두 드리리>) 마침내 섬세한 시인의 영혼마저 난도질 했을 것이다. 그 난도질 당한 영혼의 살점들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의 시집 도처에 흩어져 있고 그 ‘누더기’(<누더기별>) 같은 살점들을 하나씩 주워 모으며 다시 일어서려는 시인의 몸부림은 “어머니를 천만 번 죽이는 것”(<늙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이상으로 처절하다.
그렇다.
그 처절한 무늬들이 다시 온전하게 봉합이야 되겠는가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상처는 정면으로 보아야 한다. 정면으로 보지 않으면 또 다른 상처를 낳거나 더 큰 상처를 낳기 마련이다. 그럴 때야 비로소 “상처는 스승이”(<상처는 스승이다>) 되어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고 다시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그리운 부석사>) 지어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같은”(<안개꽃>) 무게로 시인의 영혼에 새 살을 돋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돋아나는 새 살을 보는 것은 또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눈물겹도록 할 것인가.
사실 난 그게 더 가슴 아리다.
3.
‘팔자는 끌로도 못 판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팔자가 귀신처럼 집념이 강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정호승 시인의 시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때 동인지 《반시》를 통해서였다. 숨어서 김지하의 <오적>을 몰래 돌려가며 보던 유신 시절이었고, 스스로, 감히, ‘프로’라고 자부하며 되려 점잖게 ‘위엄’을 갖추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적당한’ 정치적 수위에 민중적 감성을 바탕으로한 정호승 시인의 빼어난 서정시들이 발표되었는데 그 ‘슬픔과 기다림의 시’들 중 몇 편은(이때는 아직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가 나오기 1~2년 전이다) 백여우처럼 나를 홀려놓았다. 아마도 ‘슬픔……’으로 시작되는 제목의 시들과 <혼혈아에게> <눈사람> <맹인 부부 가수> 등일 성싶다.
특히 <슬픔을 위하여>라는 시에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와 같은 귀절은, 무시무시하고 무지막지한 제목만으로 보기엔 언뜻 ‘백정’이나 ‘조폭’ 출신 시인이 썼으리라 오해받을 소지가 충분한, 조태일 시인의 <식칼론>과 같은 ‘과격한’ 시들에 비해 얼마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가. 칼은 칼이되 하나는 꼬부린 낫을 편 칼이었고, 또 하나는 슬픔을 꼬부린 칼이었다. 쇠로 만든 칼과 눈물로 만든 칼은, 같은 칼이지만 그 칼날과 찌르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그때부터 난 정호승 시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결국 그의 대학 후배 시인까지 되어 20여 년의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선배 시인에 대한 ‘커버스토리’마저 쓰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귀신같이 집념이 센 ‘팔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늘 정제되어 있고 시인으로서든 생활인으로서든 자기 관리 역시 엄격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대하는 모습은 늘 진지하고 자상하다. 그는 술을 잘 못하기도 하지만, 화기애애한 술자리 같은 데서 의당 있을 법한 그 흔한 농담이나 허튼소리 하나 하지 않는다.
경희대 국문과 출신의 선후배 작가들이 스승인 황순원 선생님을 계절마다 모시는 자리가 있는데, 거기서 난 그를 정기적으로 만난다. 그는 주로 황 선생님과 사모님 앞에 앉아 두 분의 건강을 염려하며 궁금한 것들을 묻곤 하는데, 황 선생님이 미처 하지 못한 내면의 소리에까지 귀 기울이려는 듯 시종 진지한 표정이다. 황 선생님과 사모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그의 ‘젖은 눈’에서 난 팔순이 넘은 그의 ‘들깻잎 같던 아버지’와 ‘그날이 오면 입고 갈 수의(壽衣)를 손수 만드시는’ 어머니의 밭고랑처럼 주름진 얼굴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것을 본다.
……이태 만에
고향으로 밤기차의 차창에 마음을 기대고
나는 왠지 눈앞이 흐려왔다
고구마 넝쿨을 북돋우어 주다가 고개를 들면
고추 모종에 대를 세우고 계시던 아버지
논물을 대시느라 밤샘하신 얼굴이
키가 불쑥 큰 들깻잎 같던 아버지
태풍에 쓰러진 벼포기를 일으켜 세우며
개흙 묻은 하늘을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이 가을 빈손으로 찾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 <컬러텔레비전> 부분
낡은 재봉틀 앞에 앉아
늙은 어머니 수의를 만드신다
……
몇날 며칠째 정성들여 그날이 오면
아, 그날이 오면 입고 갈 옷 손수 만드신다
……
죽으면 썩을 것 좋은 거 하면 뭐하노
내 죽으면 장의사한테 비싸게 사지 마라
사람은 죽는 일이 더 큰 일이다
숨 끊어지면 그만인데 오래 살아 주책이다
처녀 때처럼 신나게 재봉틀을 돌리신다
─ <壽衣를 만드시는 어머니> 부분
막걸리에 취한 아버지와 산을 내려와
앞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 말씀
얘야, 돌과 쥐똥이 아니면
곡식이라면 뭐든지 버리지 말아라
─ <어머니> 부분
내가 그의 집필실에 들러 서로 얘기하고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니, 아무 걱정 마시고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조금도 염려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아무 문제 없도록 제가 잘 알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걱정이 많아지고 큰 일 보다 작은 일에 더 신경 쓰게 된다. 사소한 문제 어느 것 하나 마음 놓이지 않는다. 아마 정호승 시인의 노부모님들도 그런 듯 전화가 잦다. 대치동에 사는 그는 분당에 사시는 부모님을 일주일에 한번 꼴로 찾아뵙는다. 가까이서 보살펴드릴 수 없는 그로서는 늘 걱정이고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집필실 바로 근처에 모시려는 준비를 해왔는데, IMF로 인해 늦어졌고 이제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얼마 후면, 그는 수시로 부모님댁에 들러 무료한 부모님의 말동무도 되어 드리고 어깨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가려운 등도 시원하게 긁어 드리고, 그리고 날씨 좋은 날을 골라 양 팔에 두 분을 부축한 채 주위 공원 등지로 산보하는 모습을 그려보니, 그렇지 못한 나로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온다.
4.
정호승 시인은 1982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의 연보에 따르면 그는 원래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으나 성장은 대구에서 했다. 대구 계성중과 대륜고를 졸업하고 1968년 경희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들어갔다. 당시 그는 경희대 주최 전국 남녀고교 문예현상 모집에 <고교문예의 성찰>이란 평론이 당선되었는데 수필 부문 당선자인 박해석 시인과 함께 입학하게 된다. 이후 박해석 시인은 지금까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지음(知音)이기도 했다.
군에서 제대해 복학한 1972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고 김요섭 시인에 의해 《현대시학》에 시가 추천되었다. 다음 해 그는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고 곧이어 동인지 《1973》에 동인으로 참여해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경희대를 졸업하던 1976년부터는 숭실고 교사로 있으면서 다시 《반시》 동인으로 참여해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한다.
그 결과 1979년 봄 마침내 그의 첫 시집인 《슬픔이 기쁨에게》가 출간되고 3년 뒤인 1982년에는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가 나온다. 그는 이 해에 장르를 넓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기도 했다. 1986년 경희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집 《새벽편지》가 나온 다음 해에는 《월간조선》 기자로 직장을 옮긴다. 2년 뒤인 1989년에는 제3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고 8년 후 <동서문학상>까지 수상하므로써 빼어난 서정 시인으로서의 위치가 재확인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그는 《별들은 따뜻하다》를 낸 이 후, 무려 7년만에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를 1년 간격으로 연달아 내면서 산문 작업을 왕성하게 한다. 물론 그 사이에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와 장편동화 《에밀레종의 슬픔》을 내기도 했다.
지난 해에 낸 《당신의 마음에 창을 달아드립니다》는 시나 잠언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오히려 우화에 가까운 듯한 독특한 형식의 글모음인데,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빛이 들어올 창을 만들어 준다는 내용들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뒤이어 나온 《연인》은 진실을 찾아 세상 속으로 길 떠난 한 물고기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외로움의 본질을 맑고 잔잔하게 담은 ‘어른이 읽는 동화’다.
정호승 시인이 어느 날, 전남 화순의 운주사에 들렀을 때 의당 대웅전 서쪽 처마 끝에 매달려 있어야할 풍경의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당연히 궁금증을 낳게 했고 그 궁금증은 또 ‘연인’이라는 이 아름다운 동화 한 편을 낳게 했던 것이다.
“내 삶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날 사랑하는 너에 의해 형성된 거야”
주인공인 하늘을 날아다니는 ‘푸른툭눈 飛魚’가 고통스런 세상 순례를 마치고 결국 다시 대웅전 처마 끝으로 돌아와 연인인 ‘검은툭눈’에게 하는 말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깨달음의 ‘미립’이다. 다음의 시는 또 어떤가.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풍경 달다> 전문
5.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닌 생각의 크기만큼 세상을 보듯 시인도 마찬가지다. 그 생각의 크기는 사물을 보는 눈의 깊이와 마음의 넓이에서 온다. 그리고 그 생각이 담긴 그릇의 모양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고 또한 시를 쓴다.
정호승 시인 역시 생각의 크기만큼 세상을 보고 그릇의 모양대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의 빛깔과 그 그릇의 무늬가 겉으로는 맑고 화사해 보이지만 껍질을 벗기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속살은 너무 어둡다. 너무 어두워 어둠조차 복면을 하고 있다.
“인간이 이루는 삶의 비극성에 나는 관심을 갖고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인 존재이고 시도 인간의 비극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다만, 시를 통해 인간의 비극을 무위의 심정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와 더불어 진정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이해를 통해 혹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김종길 선생이 말씀하신 ‘비극적 황홀’이라는 표현에 기대어 ‘비극적 기쁨’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인간이 이루는 그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물을 이해하기 위한 ‘그 무엇’이 바로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그의 두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시적 지평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과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외로운 것이고 그 외로움은 존재의 깊은 우물 속에 사랑과 포개져 있어 두레박이 내려와도 서로 떨어지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의미와 무관하게 삶은 악착같이 삶이고 이해와 무관하게 인간은 악착같이 인간이다. 정호승 시의 본질에 닿으려면 깊은우물 속에 드리워져 있는 그 두레박의 ‘악착같은’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렇다.
두레박은 무엇을 담거나 건져내기 위한 그릇이 아니라 무엇을 보여주거나 무엇을 통과시켜 주기 위한 ‘거울’이자 ‘창’이다. 그의 시에 나오는 ‘죽음’의 이미지들은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다듬고 그 창을 통해 ‘삶’과 껴앉는다. 사랑, 슬픔, 그리움, 눈물, 외로움 등은 그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같은 것이고 설령, 그 시계추가 멈추더라도 시간이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은, 본질적으로 하나였던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시계추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한다. 변주는 변주하는 자의 몫이고 그 몫을 게을리하면 시계추는 멈춘다. 그의 시가 다소 대중지향적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 까닭은 이완된 변주의 탓도 있겠지만 그 변주의 속살에 ‘코드’를 맞추지 못한, 듣는 자의 탓도 크다.
코드는 삶과 죽음이라는 이 ‘불가해한 상징의 힘’에 맞춰져야 한다. 시간을 멈출 수 없는 정호승 시인으로서는, 그래서 비극적이고,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그래서 내가 서두에서 “정호승 선배 시인을 찾아가는 길은, 4월의 꽃들에게 들키며 가는 그 길은, 그렇게, ‘도저한’ 길이었다”고 미리 고해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홀연, 그의 ‘게송’이 들려오는 사태는 또 무슨 조화인가.
침묵하라는 뜻일까,
일몰하라는 뜻일까,
사람은 죽을 때에
한번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새들도 죽을 때에
푸른 하늘을 향해
한번은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나 죽을 때에
한번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길에 핏방울만 남기게 될까봐 두려워라
풀잎도 죽을 때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남기고 죽는다는데
─<종소리> 전문
돌아오는 길.
4월의 꽃들에게 들키며 돌아오는 길.
‘비어’(飛魚)를 타고 돌아오는 길.
정 선배님,
선배님은 이미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산하 (시인)
월간 현대시
***
순결한 동심의 정서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
평론가 하응백의 간명한 표현처럼 정호승은 '사랑'의 시인이다. 눈사람처럼 순백한, 그래서 눈사람과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순도 높은 서정 세계는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서부터 다채롭게 펼쳐진다. 시인 특유의 순결한 동심의 정서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을 일관되게 유지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는 값싼 감성을 자극하는 싸구려 산파극이나 요즘 베스트셀러 순위를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시와는 자못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의 순정한 사랑과 동화적 시심의 뒤란에는 가난과 소외, 불행과 고통에 대한 동정과 타자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 생채기를 치료하는 어머니 젖가슴과 같은 '따뜻한 슬픔'!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에서도 사랑을 위한 기다림의 끈기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아직도 사랑할 자유밖에 없는/너희는 날마다 해 뜨는 곳에/그리움과 기다림의 씨를 뿌려라"('서울 복음 2'). 세 번째 시집 <새벽 편지>에서 시인의 사랑은 사회 전체로 확대 ·변주 ·일반화된다. 그는 전태일의 고귀한 희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허연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홀로 울고 있는 꽃다발 하나"('꽃다발')을 영전에 바친다. 네 번째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에서 시인은 역사와 시대에 대한 좌절과 절망에서 촉발된 통렬한 자기 반성을 시작한다. 엇갈리는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어떤 사랑').
이후 7년만에 상자한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서 시인은 사랑의 본성과 존재 원리에 대한 체득이 외로움과 숙명적으로 결합하여 우주적인 교감의 세계로 확산되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외로움이 내재된 슬픔 사랑을 그의 시적 영토로 이주시켜 다음 같은 절창을 낳는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수선화에게').
최근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간행했다. 사랑의 본질은 비움과 채움, 감춤과 드러냄의 끝임 없는 길항(拮抗)임을 간결한 시행에 담아 낸, 그야말로 이 시집에 진주처럼 박혀 있는 빛나는 소품 하나.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반달') 어쨌든, 그는 문학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조화를 누리는 시인이다.
류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