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눈으로 보다
탐구가 시작되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루카 1,29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했다.
루카 24,41
'이상하게 여김(놀라워함)'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다.
믿기지 않은 채 서있음
질문 자체를 생각하며 서있음
무언가에 경외심을 느끼며 서있음
이 세 가지 '서있음'이 당신 안에 있게 하라.
이 세 가지 '서있음' 은 단순한 허무주의나 부정성否定性을 넘어서기만 하면,
당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아주 좋은 방편이 된다.
스콜라 철학이 절정에 달했을 때(12, 13세기),
어떤 하나의 생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교사들이 questio('찾다'는 뜻의
라틴 어)라고 부른 절차를 따랐다.
영어 quest(묻다)가 거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티베트 수도승들의 끝장 토론에서처럼, 조직적인 질문은 그 답에 대한 찬반을
끌어냄으로써 영적 호기심을 촉발하고 경이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완벽한 정답을 찾는 대신 질문 자체를 정제한 것이다.
그 무렵 가톨릭의 양대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거의 모든 문제에
의견이 대립되는 가톨릭 토론반 같았는데, 그러면서도 같은 가톨릭의 품에 안겨있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토론 문화가 단지 답을 찾는 쪽으로 퇴보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도 모든 문제에 대한 완벽한 정답을!
덕분에 '이상하게 여김'에서 '답하기'로 옮겨갔고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흐름의 극치를 오늘 우리는 거의 모든 종교에 공통으로 있는 이른바 '근본주의'에서 본다.
이제 위에서 묘사한 방식으로, 다시 한번 이상하게 여겨보자.
어째서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평화의 일꾼들을 많이 배출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그게 참 이상하다.
어째서 무신론이 그리스도교와 서구 문화에서 극성한 걸까?
어째서 종교를 가졌던 사람이 종교를 반대하는 열성분자로 바뀌는 걸까?
나는 그게 참 이상하다.
어째서 많은 사람이 위협적인 토론을 '그러나'라는 한마디를 재빨리 내뱉음으로써
마감하려 드는 걸까?
(기자가 반대되는 논거를 한 가지만 들어도,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을
피하거나 의심하는 데 그것을 이용한다는 사실은 널리 입증된 바 있다.)
나는 그게 참 이상하다.
어째서 정치인들의 사고가 주전론主戰論으로 치닫고, 의견 일치나 공동선을
위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걸까?
나는 그게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역사의 한 시대에는 그토록 정당하게 여겨지던 전쟁의 원인들이 나중 세대에
이르면 어리석고 그릇되고 어이없는 것으로 보이는 걸까?
나는 그게 참 이상하다.
아마도 비슷한 질문들을 당신도 스스로 해보았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사람들은 어느 한 정당이나 관습에 그토록 집착하여 자기 이익과 신념을
거스르면서까지 그곳에 한 표를 던지는 걸까?
어째서 많은 사람이 자기가 무엇에 찬성하는지보다 무엇에 반대 하는지에 대하여
더 분명한 생각을 갖는 걸까?
정치판에서 자기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고 고집하는 사람을 어째서 우리는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까?
어째서 모든 소설, 연극, 영화, 오페라에 착한 주인공과 악당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등장하여 비슷한 스토리를 엮어나가는 걸까?
어째서 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기네가 그토록 싫다는 바로 그 교조주의로
종교를 공격하는 걸까?
이상하고 놀라운 일 아닌가?
한 번이라도 이런 것들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의 그 '이상하게 여김'에 머물러 보길 바란다.
당신의 불신이 회의론이나 부정적 성향으로 고착되게 하지 말고,
그 통찰들 앞에서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놀라워해 보라.
도대체 이 같은 이원성이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것이 당신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