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제5군단 예하 보병사단으로 별칭은 청성(靑星)부대이다.
대부분의 부대는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에 위치하며 몇몇 부대는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다. 철원군 지역 휴전선 최전방 GOP와 GP 경계임무를 맡는 사단이다. 흔히들 부르는 육군 메이커 사단 초창기 멤버로, 한국전쟁 당시 최다 전투, 최다 적 사살의 전공을 세우고, 유일하게 38선 방어 성공, 국군과 UN군 중, 가장 먼저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등 수많은 전쟁 성과를 쌓았고, 대통령부대표창도 받았다.
육군의 메이커 사단중에서도 과거가 매우 화려한 사단이다. 과거가 이렇다 보니 한국전쟁 당시의 사람들이나 1970-1980년대에 군생활을 한 기성세대들에게는 매우 유명한 사단이다.
2. 역사
이하 창설일 등 내용은 국방부 발행(1977년 12월 30일) 서울신문사 인쇄 한국전쟁사(개정판) 제1권을 참조하였다.
1946년 1월 15일, 미 군정하에서 국방경비대 발족과 동시에 제1연대(현재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 1기계화보병여단이다)가 창설되었고, 4월까지 제2·3·4·5·6·7·8연대가 각도에 창설되었다.
1946년 2월 7일, 충북 청주군에서 제7연대가 창설되었다. 제1연대 제5연대 이후 3번째로 창설된 연대이다.
1946년 2월 19일, 청원군의 농사 훈련소에서 미군 부사관들에 의해 7연대(충청북도 경비대) 1기 훈련병 205명이 신병훈련을 시작하였다.
1946년 2월 28일, 충남 대전 비행장에서 제2연대가 창설되었다. 前 2여단(48.12.1), 前 2사단(49.5.12), 現 6사단(50.6.20)
1946년 6월 15일, 국방경비대가 조선경비대로 개칭되었다.
1947년 1월 15일, 7연대의 창설식을 거행하고 초대 연대장에 민기식 소령이 취임하였다. 1대대는 충북 청주, 2대대는 충북 영동, 3대대는 충북 충주에 주둔했다.
1947년 12월 1일, 7연대가 채병덕 여단장의 조선경비대 제1여단에 소속되었다.
1948년 4월 29일, 국방부 일반명령 (육)제15호에 의거하여 경기도 수색리에서 조선경비대 제4여단(제7, 8, 10 연대, 초대 여단장 채병덕 대령) 창설이 명령되었다.
1948년 6월 14일, 조선경비대 제4여단이 충북 충주로 이동, 7연대가 조선경비대 제4여단으로 배치되었다. (6사단은 7연대가 배치된 이날을 창설일로 기념한다.
1948년 9월 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1948년 8월 15일)되면서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칭되었다.
1948년 9월 17일, 육군 제4여단이 충북 충주에서 청주로 이동하였다.
1948년 11월 20일, 육군 제4여단에서 '제6여단'으로 개칭하였다.
1948년 11월 20일, 전남 광주에서 제19연대가 창설되었다. 前 5여단(48.12.5), 前 2여단(49.2.1), 前 7사단(49.6.20), 前 5사단(50.1.3), 現 6사단(50.5.1)
1949년 2월 20일, 제6여단이 충북 청주에서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였다.
1949년 5월 12일, 제6여단이 제6사단(제 2연대 7연대 19연대)으로 승격되었다(초대 사단장 유재흥 대령).
제6사단은 최초 '제4여단'으로 7연대, 8연대, 10연대로 구성되어 창설되었다. 제6여단으로 개칭(1948년 11월 21일) 이후 1949년 8월 20일에 10연대는 제6여단에서 제8사단의 창설 연대로 예속변경 되었고, 1950년 5월 1일에 19연대가 예속변경되어 들어왔다. 제6사단으로 승격(1949년 5월 12일)한 이후 1950년 6월 20일에 8연대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변경되어 춘천으로 이동하였고, 같은 날 1950년 6월 20일에 2연대가 제6사단으로 배치되어 들어왔다. 그러므로 7연대가 제6사단 혈통의 적자(嫡子)격인 부대라고 하겠다.
한국군의 초창기 사단으로서 창설 당시의 구성과 편제를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단이다. 6사단 승격 후의 연대 편제. 한국전쟁 당시 6사단 19연대 예하였던 16포병대대는 전후 7사단으로 예속전환 되었다. 2020년대 이후에도 6.25 이전의 연대(보병여단 또는 기계화보병여단) 단대호를 그대로 가진 부대는 정말로 6사단 뿐이다. 8사단도 6.25편제를 유지하였으나 기동사단으로 개편되면서 기존 보병연대들이 해체되거나 타 부대로 다 건너가버렸고, 수도, 1, 2, 3, 5, 7사단은 전쟁 중에 격전을 겪으며 예하 연대들이 해체되거나 맞바뀌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나머지 부대들은 전쟁 중 또는 휴전 이후 창설되었다.
제6사단은 한국전쟁(6·25)직전에 현재의 편제를 구성(제 2, 7, 19 연대)하여 중부지역 요충지인 춘천 정면을 담당하였고 방어를 맡은 지역의 전선은 모두 84㎞에 이르렀다. 원주에 사단 사령부(사단장 김종오 대령)를 설치했으며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가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화천을, 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가 지휘소를 홍천에 두고 인제 전면을 담당하면서 전선을 지켰다. 19연대(연대장 민병권 중령)는 사단 예비연대로서 원주의 사단 사령부와 함께 교육훈련과 부대정비 중이었다. 한편 제6사단 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은 포병학교 OAC를 마치고 돌아온 후 즉각 3개 포대장을 입교시키고, 대대 장병으로부터 훈련이 너무 가혹하다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주야간 훈련을 강행하였는데 심지어는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였고, 개전 시에는 3개 포대장이 모두 교육에 파견되어 공석중이었음에도 결전에 있어서의 전투력 발휘에는 지장이 없었다.
당시 국군 6사단 주요 직책 지휘관
제6사단장 대령 김종오
제2연대장 대령 함병선
제1대대장 소령 김병진
중령 박노규 (6월 25일부터)
소령 김주형 (6월 25일부터)
소령 김병진 (6월 30일부터)
제2대대장 소령 김상용
소령 문정식 (6월 25일부터)
중령 박노규 (6월 29일부터)
제3대대장 소령 이운산
대전차포중대장 중위 이훈
수색중대장 중위 문장욱
제7연대장 중령 임부택
제1대대장 소령 김용배
제2대대장 소령 김종수
제3대대장 소령 인성관 (6월 25일부터 사병학교 파견)
소령 이남호 (6월 25일부터)
수색중대장 소위 윤수용
대전차포중대장 대위 송광보[
제19연대장 중령 민병권
제1대대장 소령 최병묵
제2대대장 소령 최석낙
제3대대장 소령 김한덕
수색중대장 중위 박준수
제16포병대대장 소령 김성
사단직할대
사단공병대대장 소령 박정채
사단수색중대장 중위 김현환
당시의 사단의 병력은 T/O의 93%(9,300명)이었고, 장비는 105mm 야포 15문(이중 2문은 고장으로 후송)과 57mm 대전차포 12문, 그리고 2.36인치 로켓포 276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우측에는 제8사단(이정일 대령)과 좌측에는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과 각각 연계하고 있었다.
제6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에 효과적으로 대비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국군 가운데 유일하게 전선을 사수해 적의 남침을 저지한 사단이다.
개전 이전부터 평소 교육훈련, 진지공사 등을 철저히 하여 전투에 대비하였으며, 귀순한 북한병(자주포병)으로 부터 북한이 조만간 전면 남침을 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정보를 확보하고 그외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정황을 포착하여 육군본부에 보고하지만 육군본부가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하자 6사단 지휘관들은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개전 직후 국군의 사단들이 연달아 패전하며 북한군의 공격에 패주를 거듭할 때도 6사단만은 김종오 사단장의 직권으로 사단의 외출, 외박을 제한하고 유사시를 대비한 덕분에 춘천-홍천 전투에서 소양강과 말고개 등 험준한 천연 지형을 이용하여 3일간 북한군 제2군단의 2사단과 7사단, 106 전차연대의 공격을 저지하며, 오히려 역습을 노릴 정도로 훌륭하게 방어전에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15사단과 603모터찌크(싸이클)연대를 추가 배치하며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6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닷새 동안이나 발목을 잡혀있어야만 했다. 그 결과 북한군 2사단은 40%에 달하는 인력과 장비를 잃으며 전멸하였고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 2사단장 이청송, 7사단장 전우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북한 7사단은 12사단으로 서수가 바뀌었다. 6사단의 사상자는 407명이었고 인민군 제2군단의 사상자는 6,900여 명이었으며, 다수의 전차와 자주포가 격파되었다.
개전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자, 육군본부는 6사단에게 후퇴를 명령한다. 6사단은 제자리를 훌륭하게 지켜내며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유일하게 6사단만이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후방 북한군 전력에 의해 포위당할 우려도 있었고, 전선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6사단도 후방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6사단의 초기 활약은 북한군의 전략에 큰 차질을 불러왔다. 북한군은 춘천 점령에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 전 전선에서 남하가 지체되었으며 이로인해 단시간에 서울을 포위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고, 대한민국 국군은 김홍일 소장이 이끄는 시흥지구 전투사령부가 국군의 재편성을 통해 저지선을 확보할 시간 벌 수 있었다. 북한군은 국군의 재정비를 허용함으로서 UN군이 참전할 시간을 주고 말았다.
개전 당시 육군이 보유한 8개 사단 대부분이 한강 이북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후퇴하는 와중에도 제1보병사단, 제8보병사단과 함께 개전 이전 부대 건제를 유지한 부대로, 동락리 전투에서 7연대 2대대가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전멸(적 2,100여 명을 사살)시키며 명성을 떨쳤으며 국군 역사상 최초로 전 부대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진천 전투에서 19연대가 수도사단과 공동 작전을 했으며, 동 연대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난 뒤 제8사단에 임시로 배속된 상태로 영천 전투에 참전하여 북한군 15사단이 재기불능이 될 정도의 타격을 가한 승전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6사단 본대 역시 같은 기간 신녕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8사단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며 적 9월 공세를 저지했다.
그뒤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북진을 시작하여 1950년 7월21일 7연대 3대대가 평남 개천에서 북한군 보급열차를 습격하여 열차 안에서 8대의 T-34-85를 노획하였고, 7월22일에는 7연대 1대대가 청천강가에서 김일성의 승용차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50년 10월 26일 한만국경에 위치한 초산에 도착해 국군과 연합군 중 최초로 압록강 물을 마시며 전쟁종결의 상징이 될 뻔했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최전선에 위치한 것이었고, 결국 중공군이 개입하자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한다. 그리고 1951년 4월 사창리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대규모 춘계(春季)공세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기도 했다.
청성부대의 업적
이후 6사단은 가평에서 재편 후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 공세에 맞선 UN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작전명 - '썬더볼트 작전')의 일부인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낸 뒤 패주 행렬을 파로호까지 쫓아가 확인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어 사창리 전투를 설욕했다.
이후 한국전쟁 막바지, 금성돌출부 전투에서는 고전하기도 했다.
용문산 전투
제6사단의 주요 작전 및 전투경력
1950년
6월 25일∼6월 30일: 춘천-홍천 전투
7월 1일∼7월 4일: 횡성-원주(일부 이천)-충주로 철수
7월 5일∼7월 8일: 음성(동락리 및 무극리)지구에서 지연전 전개
7월 13일∼7월 15일: 문경(조령, 이화령)지구에서 지연전 전개
7월 16일∼8월 12일: 문경-점촌-안계(의성)-옥연동으로 철수
8월 12일∼8월 30일: 군위-조림산-신녕으로 철수
8월 30일∼9월 15일: 영천·신녕전투
9월 15일∼10월 3일: 조림산-의흥-함창-충주-원주-횡성-춘천으로 진격
10월 6일: 38도선상의 모진교 도하
10월 8일∼10월 20일: 화천-김화-금성-회양-신고산-원산-덕원-양덕-성천으로 진격
10월 20일: 성천에서 순천으로 진격, 적전에 낙하한 미 제187공수연대와 연결
10월 21일∼10월 25일: 순천-개천-희천-온정-고장-초산으로 진격
10월 26일: 국군 및 유엔군 중 최선봉 부대로서 10월 26일 한·만국경선 상의 초산 점령
10월 24일∼10월 29일: 중공군 개입으로 사단의 퇴로 차단, 부대 분산
10월 29일∼12월 12일: 초산-북창-운산-평양-상원-수안·동두천으로 철수
12월 14일∼12월 31일: 동두천 북방에서 38도선 방어
1951년
1월 1일∼1월 5일: 동두천-창동-광주-안성(죽산)으로 철수
2월 14일∼4월 6일: 죽산-여주-마석우리-가평(캔사스 선)으로 진격
4월 20일∼4월 25일: 사창리 전투
5월 17일∼5월 23일: 용문산 전투
5월 24일∼5월 28일: 용문산-가평-춘천-화천(캔사스 선)으로 진격
6월 7일∼6월 13일: 화천-백암산(어민선)으로 진격
6월 13일∼8월 30일: 수리봉-재안산에서 어민 선 방어
8월 30일∼11월 18일: 백암산-동대리-여문리(금성천 노메드 선)-949고지(미조리 선)로 진격
1월 9일: 용호동-949고지에서 미조리 선 방어
1월 9일: 미 제9군단에서 육본 직할로 배속 전환, 작전지역을 제3사단에 인계
1월 12일∼3월 20일: 양구에서 12주간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 실시
3월 23일∼3월 29일: 교암산-봉화산 지역으로 이동, 미 제40사단과 교대
3월 30일∼
1953년
∼3월 4일: 575고지, A·B고지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전개
3월 5일∼7월 9일: 금성 돌출부 전투 및 백암산 전투(8사단 및 5사단에 배속되어 투입된 7연대만 해당)
7월 10일∼7월 14일: 중공군의 최후 공세를 맞아 교암산으로부터 금성천 남안(삼현)으로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철수
7월 15일: 제11사단이 사단 진지를 초월하여 반격한 후 군단예비로 전환
자주국방 네트워크 신인균 대표는 2013년 7월 모 종편의 정전 60주년 기념특집방송에서 한국전쟁 중 가장 잘 싸운 국군 부대로 6사단 청성부대를 꼽았다. (신인균씨의 신뢰도는 사실 밀덕들 사이에 낮다.)
1위-육군 제6사단
2위-육군 제1사단(전진부대. 백선엽 장군 지휘. 다부동 전투, 평양 탈환전 등)
3위-해병대(진동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도솔산 전투 등)
4위-육군 제3사단(백골부대. 38선 첫 돌파, 원산 최초 입성, 현리 전투 등)
5위-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원산 최초 입성)
6사단 - 6.25 전쟁 때 ...
또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한국전쟁 초기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국군 부대로 육군의 6사단, 8사단, 1사단을 꼽은 바 있다.
현재는 제5군단 예하 사단으로 중부전선 철원 지역에서 GOP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제2땅굴을 발견했다. 좌측에 제5보병사단, 우측에 제3보병사단, 아래에는 국군 최초의 기갑여단인 제1기갑여단과 국군 최강급 화력을 자랑하는 제5포병여단이 있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메이커 사단이다.
현재 6사단이 2018년 9월부터 19연대를 시작으로 8사단이 주둔하던 포천으로 이전하기 시작하였고 2024년까지 6사단 전 부대가 포천 지역으로 이전한다고 한다. 6사단이 방어하던 GOP 지역은 6군단 해체 후 5군단으로 편입되는 5사단과 현 5군단 예하 3사단이 1개 여단씩 주둔[20]하여 나누어 맡게 될 것이며, 앞으로는 6사단이 포천에서 5군단의 예비사단으로서 철원의 5사단과 3사단의 뒤를 맡게 된다.
3. 신병교육대
대한민국 육군 마크투명 대한민국 육군
신병교육대
3.1. 위치
제6보병사단 신병교육대 (청성신병교육대)
第六步兵師團 新兵敎育隊 (靑星新兵敎育隊)
The 6th Infantry Division Recruit Training Center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리
3.2. 상세 내용
제6보병사단/신병교육대 문서 참고.
4. 예하부대
제6보병사단투명 제6보병사단의 예하부대
제2보병여단
제7보병여단
제19보병여단
포병여단
2020년 12월 1일, 국방개혁 2.0 기본계획에 의거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부대 규모가 격상되었다.
4.1. 사단 직할대
사령부 본부근무대
- 본부근무대장에는 소령이 부임한다. 수송부, 경비소대, 군악대, 참모소대 등이 편제되어 있다. 사단 본부인 만큼 시설이 매우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공병대대
- 각종 공병 장비를 유지 보수 및 관리하며, 훈련 및 유사시 보병에 대한 공병 지원이 주 임무이다. 최전방 사단 공병대대인 만큼, 불모지(지뢰제거) 작전이 활발하다. 철원군 동송읍에 있다가 22년 12월에 포천시 이동면 초입으로 부대를 이전하였다.
정비대대
- 신병교육대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소상 포천시이지만 사실상 철원이나 다름없는 위치이다. 부대 입구에 남창고개라는 언덕이 있는데, 겨울이 되면 헬게이트가 열린다. 정비대대로 운행가는 운전병들의 최대 난관.
보급수송대대
- 포천과 철원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시설은 매우 낙후되었다. 보급부대인 만큼 영내에 부식과 보급품을 받아가려는 군용 트럭이 줄지어있다.
수색대대
- 철원 평화전망대와 제2땅굴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 수색 흉장이 매우 멋지다.
의무근무대대
- 사단 사령부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의무지원부대이다. 응급실을 24시간 운영한다.
정보통신대대
- 사령부 영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전에는 운용중대만 사단 사령부에 있었고 대대본부 무선중대 가설소대는 따로 이격되어 있었으나, 2018년 11월부로 사단 사령부 내에 있던 방공중대가 빠진 위치로 정보통신대대가 모두 이전하였다.
제22전차대대
- 본래 1기갑여단 소속이었다가 제6보병사단으로 예속전환. 1979년 11월 1일 창설. 원래 2연대 1대대 바로옆 월하리(1, 3중대)와 오지리(본부, 2중대)에 위치해 있었으나 2019년부 포천으로 부대이전을(제5군단 방공단과 공유) 하여 현재 사단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있는 직할대이다.
군사경찰대
- 제5군단사령부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화생방대대
- 제5군단사령부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2023년 후반에 화생방지원대에서 화생방대대로 격상하여 중대급 부대에서 대대급 부대로 개편이 되었다. 지휘관은 중령.
방공중대
- 독립중대로 중대장은 소령이다.
보충중대
- 신병교육대 영내에서 빈 생활관을 전환하여 사용중이다. 소속 간부는 단 3명. 거의 매주 보충병을 배출한다.
4.2. 제2보병여단 용문산
여단본부
본부대
수색중대 - 황룡
포병대
통신중대
의무중대
군수지원대대
1대대 - 흑룡
2대대 - 백호(GOP)
3대대 - 용호
4.3. 제7보병여단 초산
여단본부
본부대
수색중대 - 흑표
포병대
통신중대
의무중대
군수지원대대
1대대 - 초산진격
2대대 - 음성무극전승
3대대 - 개천돌진(GOP)
4.4. 제19보병여단 육탄독수리
여단본부
본부대
수색중대 - 독수리
포병대
통신중대
의무중대
군수지원대대
1대대 - 진격
2대대 - 돌격
3대대 - 신병교육대대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제19보병여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5. 포병여단 청포
여단본부
- 본부포대
- 표적획득포대[31]
- 천무사격대[32]
제27포병대대 포성(K-55A1)
제88포병대대 충정(K-9)
제98포병대대 황소(K-55A1)
제638포병대대 화율(K-55A1)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제6보병사단 포병여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출신인물
5.1. 장교/부사관
고시복
예)준장
육사 2기,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 6.25 전쟁 당시 참모장.
조달진
소위
(1922.11∼2008.10)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 28일 강원도 홍천지구 말고개 전투에 참전해 북한군 자주포 10문을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25일 경북 상주군 유곡전투에서 특공대 7명과 함께 4대의 적 전차를 파괴하는 공을 세워 '불사조', '탱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0년 을지무공훈장, 1951년 화랑무공훈장을 각각 받았다. 2011년에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고, 한국군 최초로 미국 동성무공훈장(Bronze Star)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2020년 '6월의 호국인물'
김병주
예)대장
육사 40기, 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대령 시절 사단 포병연대장 역임.
소영민
예)중장
학사 11기, 전 육군특수전사령관. 대령 시절 19연대장 역임.
강신철
대장
육사 46기, 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위 시절 2연대 1대대 1소대장 역임.
엄용진
중장
육사 46기, 현 육군군수사령관. 대령 시절 부사단장 역임.
고태남
소장
육사 46기, 현 육군인사사령관. 대령 시절 7연대장 역임.
양태봉
소장
육사 47기, 현 육군포병학교장. 중령 시절 사단 포병연대 예하 27포병대대장과 사단 작전참모를 지내고 대령시절 사단 포병연대장 역임.
김봉수
중장
육사 47기, 현 제3군단장. 중령 시절 사단 2연대 3대대장 역임.
박성제
소장
학사 17기, 현 제37보병사단장. 중령 시절 7연대 2대대장 역임.
김동수
소장
육사 48기, 현 제2작전사령부 참모장. 대위 시절 2연대에서 중대장 역임.
권대원
소장
학군 30기, 현 합동참모본부 민군작전부장. 중령 시절 7연대 3대대장 역임.
김흥준
소장
육사 49기, 현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 대령 시절 7연대장 역임.
문병삼
소장
육사 49기, 현 합동참모본부 작전기획부장. 중령 시절 19연대 1대대장 역임.
이상렬
소장
학군 31기, 현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장. 대령 시절 포병연대장 역임.
윤봉희
소장
육사 50기, 현 국방부 정책기획관. 대위 시절 19연대 3대대 9중대장 역임.
한기성
소장
학군 33기, 현 제25보병사단장. 대령 시절 2연대장과 사단 참모장 역임.
손상혁
준장
학군 33기, 현 제1포병여단장. 대령 시절 포병연대장과 참모장 역임.
강필수
원사
현 대한민국 육군주임원사. 원사 시절 7연대 연대주임원사와 6사단 사단주임원사 역임.
5.2. 병
강승윤 WINNER 멤버
공유 배우
권영재 前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Helper"
김석훈 한화 이글스 포수
김성모 만화가. 같은 부대원들에게 그려 준 추억록에 6사단 27포병대대가 언급되어 있다.
김승리 대성마이맥의 국어 강사. 2연대 통신병 출신.
김태현 딕펑스의 보컬
김정훈 2연대 2대대 6중대에서 복무하였다.
김한근 사업가.
노우진 코미디언
박남현 탤런트
박준 시인
배영빈 야구선수
빈지노 래퍼
설영호 BJ
송광원 배우
송래퍼 래퍼
싸이 6사단 토우중대에서 복무
아날로그 소년 가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 사단에서 복무하였다.
에투샤 아프리카tv, 유튜브 포켓몬 크리에이터
옹성우 가수
요리왕비룡 자주 입고 나오는 야전상의에 6사단 마크가 부착되어 있다.
윤다훈 배우
윤문식 배우
이승윤 개그맨
장민호 트로트 가수
장동우 인피니트 멤버. 88포병대대에서 복무 했었다.
최하영 TRCNG 멤버이자 프로듀서
코드 쿤스트 프로듀서
하성운 가수 복무 중
항제 트위치 카트라이더 스트리머
G.Soul 가수
J.Seph 7여단 3대대 GOP 본부중대에서 복무하였다.
6. 특징
한국군 건군 모체 부대이며 한국전쟁 이전에 창설된 사단 중에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초창기의 구성 및 편성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사단이다. 또한 한국전쟁 중 사창리 전투 외에는 패한 적이 없으며 한국전쟁 중 가장 화려한 전과를 자랑하는 부대이다.
한국전쟁 개전 후, 가장 먼저 승전보를 전한 부대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의 대대적인 기습 공세에 다른 사단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후방으로 후퇴할 때, 유일하게 6사단만은 춘천 전선 방어에 성공하며 3일간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였다. 이후 북한군에게 서울이 함락되고서야 명령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전술상 후퇴를 하게 되지만, 그 뒤 무극리 전투(동락리 전투)에서는 1개 대대 병력으로 북한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며 전 부대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는 기록을 세웠고 용문산 전투에서는 1개 연대가 중공군의 군단급 3개 사단을 괴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1950년 10월 26일에 국군과 연합군 중 최초로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격에 성공하여 압록강 물을 떠다 이승만 前대통령에게 헌수하였다.
한국전쟁에서 국군 부대 중 최다 전투(154회)와 최다 적 사살(92,669명)의 기록을 세웠으며, 한국군 최초, 최다 대통령 부대표창(17회 2019. 10)을 받았다.
부대마크는 6사단을 상징하는 파란 육망성으로, 현재는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중부전선의 심장부 철원에 주둔하고 있다.
경례구호
청성(靑星), 과거에는 '필승'
사단구호
雖死不敗(수사불패) 靑星鬪魂(청성투혼)
청성혼
하나, 우리는 천하에 제일 가는 청성의 용사다!
하나, 우리는 압록강 물을 마신 청성의 용사다!
하나, 우리는 싸우면 필승 하는 청성의 용사다!
하나, 우리는 조국을 수호 하는 청성의 용사다!
용문산부대 구호
수사불패 용문투혼
청포부대 구호
구국의 청성포 초탄명중 일격격멸 준비 쏴!
GOP대대 구호
잊지말자 청성투혼 다시쓰자 결사철모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승격되었다.
6.1. 근무환경
6사단은 2여단과 7여단이 GOP를 맡고 있는데, 다른 사단과는 다르게 한 대대가 고정적으로 GOP 경계작전을 수행하고 있다.[64] 만약 FEBA로 갈 줄 알았는데 GOP로 갑자기 차출이라도 되었다면 멘탈붕괴할지도 모른다. 군인밖에 없는 강원도에서 그것도 민간인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철책선 북쪽의 국방색과 갈색과 녹색만이 있는 세상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참 쉬울지도 모른다. 2여단은 완벽한 평야지대인 반면 7여단은 평야가 있긴 하지만 GOP 하면 생각하는 전형적인 급경사가 존재한다.
그나마 후방인 사단 본부대, 포병연대, 2연대라고 해서 한겨울의 칼바람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말도록 하자. 초소에 바람을 막아줄 지형물이나 건물이 없기 때문에 바람이 더럽게 강하다. 실제 기온이 영하 20~30도면 체감온도는 영하 45도까지도 내려간다. 정말 살을 에는 추위가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다. 혹한의 대명사로 통하는 철원 지역답게 무지막지하게 춥다. 귀가 얼음장처럼 굳어 깨지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굳이 GOP가 아니어도 사단 예하 어느 부대에 배치받게 되건 변함이 없다. 평야는 칼바람 때문에, 산이라면 기온 자체가 낮아서 일기예보에 나오는 최저기온에서 대충 5도 정도 빼면 된다. 1월 중에는 웬만해선 최저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왔다 갔다 한다. 더불어 5월 초에 눈 내리는 진풍경을 볼 수 도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렇다고 여름에는 시원할 거란 생각은 오산이다. 타 신교대에서 이 곳으로 전입 온 신병들이 주로하는 착각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겠지'가 있는데, 산골이 많은 경기도 북부지역이나 강원도 전방지역은 심할 때는 35도를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철원 시내 주변에서 철원 쿨포크 ±66이라고 써있는 홍보 문구를 가끔 볼 수 있는데, 이건 연교차가 66도라는 의미이다. 혹한기와 혹서기의 체감 연교차는 거진 80도에 육박한다. 이 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철원은 여름 - 한여름 - 겨울 - 빙하기의 4계절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게 마냥 농담으로 웃어 넘길 수준이 아니다.
6사단 장병들이 외출 및 외박을 나와서 놀 곳이라면 철원의 신시가지이자 실질적인 경제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동송읍이다. 전방에 위치한 도시들이 다 그렇듯이 동송도 전형적인 군인도시이다. 휴가나 외박을 얻어 동송 시내에서 군복을 입고 다니다 보면 어디든지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경례를 할 상황이 많다. 군장점부터 식당에 이르기까지 예외란 없다.
늦은 오후까지도 업무를 보느라 옆에 행정병을 데리고 왔다갔다 하는 중령급 이상의 고급 장교들도 심심찮게 보이는 이 때문에 동송읍 시내 곳곳에서 우렁찬 경례가 울려퍼지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그리고 휴가 출발자가 버스를 타는 이른 아침이나 복귀자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초저녁 쯤이면 큰길가에 군용차가 한 대 지나갈 때마다 수십 명의 장병들이 지나가는 방향 따라 도미노식으로 경례를 촤자작! 하고 또다시 촤자작! 내리는 진풍경을 구경할 수도 있다! 직접 보면 가히 장관이다. 동송 모텔값이 너무 비싸서(7만원) 외박 나오면 차라리 팬션에 간다. 피씨방은 평일에만 회원가입이 가능해서 대부분 주말에만 출타가 가능한 군인들은 그저 호갱이 됐다.
2018년 12월 3일 45대 사단장인 이진형 소장 (육사 44기)이 떠나고 46대 사단장인 심진선 소장 (육사 46기)이 취임하면서 이임 사단장인 이진형 소장의 전원 동기제가 19년 1월 1일부터 폐지되고 6개월 동기제로 바뀌게 되는데, 이전 입대자들은 전원 동기제가 그대로 적용되고, 19년 1월 입대자(19년 1월 군번)들부터 6개월 동기제가 적용되고 있다.(5월까지 눈이 온다)
6.2. 사단가
(1절)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맹호의 기세로 싸우고 이겨
새 세기 선두에 이름을 떨치며 강철로 뭉쳐진 6사단이다
(2절)
내 겨레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악랄한 오랑캐 휘몰아치며
초산의 용문산 적들을 소탕한 전공에 빛나는 6사단이다
(3절)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내 조국 삼천만 내 겨레 방패가 되어
생명을 바쳐서 오늘도 싸우는 백전백승의 6사단이다
(후렴)
승리의 청성기를 높이 날리며 부르자 우렁차게 우리의 개가를
물과 불을 가리랴 우리는 용감히 싸운다
6사단! 6사단! 대한의 6사단
6.3. 청성 영광의 10대 자랑
모든 육군의 부대들이 고유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6사단도 "청성 영광의 10대 자랑"이라는 부대의 10가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다.
#1
창군 이전에 창설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부대
제6보병사단은 1948년 4월 29일 제4여단으로 창설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 육군이 정식으로 발족한 1948년 9월 5일보다 이전에 창설된 것이다. 이후 11월 20일 제6여단으로 개칭, 1949년 5월 12일 제6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보병연대 기준으로 창설 당시의 편성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단이기도 하다.[69]
#2
유일하게 38선 방어에 성공한 부대
#3
최초로 적 전차를 육탄공격으로 파괴한 부대
6.25전쟁 당시 춘천-홍천 전투중 춘천 옥산포에서는 심일 소위와 부사관의 육탄공격으로 적 자주포 3문을 파괴하였고, 홍천 말고개에서는 조달진 일병을 비롯한 육탄 11용사가
육탄공격으로 적 전차 10대를 파괴하였다.
#4
최초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은 부대
1950년 7월, 7연대가 북한군 15사단을 상대로 음성 무극리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는 도중, 7월 7일에 국민학교 교사의 제보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7연대 2대대가 동락리국민학교에 모여있던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이 일로 부대는 국군 창설 최초로 연대 전 장병이 1계급씩 특진하게 되었고, 대통령 부대표창 1호를 수여받았다. 이후 2대대는
이 전공으로 음성무극전승부대로 명명하게 된다.
#5
국군과 UN군 중 가장 먼저 압록강까지 진격한 부대
1950년 10월 26일, 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을 탈환하여 전군 최초로 한만 국경선에 도달한 부대가 되었다. 부대는 이날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헌수하였다.
#6
중공군 3개 사단을 괴멸시킨 사주방어 신화창조 부대
#7
6.25 전쟁 최다 전투, 최다 적 사살의 전공을 세운 부대
총 154회의 전투에 참가하여 92,669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8
초병의 철통경계로 제2땅굴을 발견한 부대
1973년 11월 20일 새벽, GOP 경계 중이던 이기태 상병과 김효섭 일병이 미세한 진동과 원인 미상의 폭음을 듣고 상부에 보고한 것을 처음으로 이후 지속적인 지하의 폭음이 보고되자 땅굴 탐지 전담반을 편성하여 시추작업을 벌인 끝에
1975년 3월 19일에 제2땅굴을 발견하였다.
#9
전략적 요충지 철원축선을 방어하며,
적 침투를 한번도 허용하지 않은 부대
1966년 철원 축선 담당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한번의 적 침투를 허용하지 않았다.
#10
늘 푸른 병영운동으로 새로운 군대문화를 선도하는 부대
늘 푸른 병영 운동을 통하여 상호 존중과 배려, 자율과 창의의 정신으로 전우애가 넘치고, 미래를 꿈꾸며 준비하는
21세기형 병영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부대.
7. 사건 사고
7.1. 전쟁 범죄
6사단은 국군 창설 당시부터 존재하였던 가장 오래된 사단들 중 하나이며, 한국전쟁 개전 초반에 국군에 의해 저질러졌던 여러 학살에도 깊이 관여되어 있다. 강원도 횡성, 경기도 여주와 이천, 충북 음성, 청원, 괴산, 충주, 제천, 경북 영주와 상주 등 6사단이 퇴각한 경로상의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졌는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학살 조사단 일원이었던 신기철은 저서 《전쟁범죄》에서 이 지역들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부분 6사단 헌병대가 관여되어 있다고 파악한다. 특히 충북 지역에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학살은 경찰이 관여한 비중이 적으며 대부분 국군, 그 중에서도 6사단과 2사단이 저질렀다. 당시 사단장은 김종오 대장(당시 대령)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9년 상반기 보고서에 수록된 6사단 헌병대 상사 김만식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개전 이틀 후인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헌병사령부를 통해 6사단 헌병대에 하달한 명령에 따라 벌어진 일이었다.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사살하라"는 것이었다. 김만식 상사 역시 이 명령을 받은 바로 다음날(6월 28일)부터 학살에 가담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
횡성 보도연맹 학살 사건
강원도 횡성군에서는 1950년 6월 28일 최소 120명의 주민들이 6사단 헌병대에 의해 보도연맹원으로 낙인찍혀 살해당했다. 6사단에 의해 벌어진 최초의 학살이다.
오창 양곡창고 학살 사건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 양곡창고에서 1950년 6월부터 7월까지, 국군이 두 차례에 걸쳐 민간인들을 보도연맹원으로 몰면서 벌어졌던 학살 사건이다. 6사단 19연대가 주도하였으며 수도사단 1연대와 육본 직할 17연대, 그리고 미국 공군이 가담했다. 희생자 약 223명. 구덩이에서 총살당한 이들 대부분은 17연대가 6사단 헌병대의 지휘를 받아 학살했다. 수도사단 헌병대는 10명은 확실히 총살했으며, 학살이 얼추 종료된 후에는 확인사살을 위해 미국 공군의 항공 지원을 불러 일대의 민간인 거주구를 초토화했다.
충주 보도연맹 학살 사건
충청북도 충주시에서도 1950년 7월 경 2차례의 학살이 벌어졌다. 7월 3일에서 5일 사이, 그리고 7월 8일에 대략 50 ~ 73명이 6사단 헌병대와 차일혁 경감이 이끌던 충주경찰에 의해 싸리재 고개에서 살해당했다. 사건 현장은 2023년부터 발굴에 들어갔다.
괴산 보도연맹 학살 사건
충청북도 괴산군은 훨씬 심각하여 약 1,000명이 살해당했다. 개전 당일인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에 의해 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에 대한 예비검속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렇게 연행된 예비검속자들은 6사단 7연대 헌병대와 충북 CIC 지부, 그리고 괴산과 청주 경찰에 의해 분류되고 학살당했다.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이승만의 수족이었던 CIC였고, 6사단 헌병은 연행과 실제 총살 집행을 맡았다. 한편 경찰은 연행을 도맡았는데, 대부분은 명령에 따랐으나 증평지서주임 안대용과 같은 양심을 지킨 일부 경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권에 따라 일부 처형 대상자들을 몰래 풀어주기도 했다. 공포탄을 쏘아 마치 처형한 것처럼 위장하며 이들을 풀어주었던 안대용 주임은 이 사실이 들통나 6사단 헌병들에게 살해당했다.
확인된 매장 지역만 청원군 옥녀봉, 감물면 공동묘지, 청안면 솔티재, 그리고 괴산읍 남산 총 네 곳이다. 이 중 옥녀봉에서 희생된 이들이 도합 약 700 ~ 800명이며 그 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자결한 대한제국 시기 관료 홍범식의 두 번째 아내이자 초대 북한 부수상 홍명희의 새어머니인 조경식도 있었다. 목격자인 의용소방대원 윤기병에 따르면, 당시 74세였던 조경식은 현장에서 따로 불러내여 권총으로 총살당했으며 유품은 군인들에게 약탈당했다.#[80] 관련 조사 결과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1기 2009년 보고서에서 볼 수 있다.
음성 보도연맹 학살 사건 (?)
충청북도 음성군에서도 동락리 전투가 한창이던 7월 5일부터 2차례에 걸쳐 약 60명의 주민들이 살해당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학살 조사단 일원이었던 신기철은 6사단 9연대가 주도하였으며 지역 경찰이 조력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문제는 9연대는 6사단에 예속되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19연대의 오기(誤記)인지, 아니면 당시 7사단 9연대가 개입하여 벌어진 일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원주 군 형무소 학살 사건
1950년 6월 30일 강원도 원주시의 군 형무소에서 벌어진 재소자 학살 사건으로, 6사단 헌병대가 주도했다. 희생자 약 180명.
7.2. 가혹행위
2001년에는 사단장이 여군을 성추행하여 불명예 전역을 당하기도 했다.
2008년 병사가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는 일이 있었다.
2014년, 6사단 포병연대 예하 포병대대 의무중대에서 임모 상병이 구타 및 성추행 등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정신병으로 의병 전역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82] 그러나 조사 과정과 결과가 매우 어이 없는 것이, 지속적으로 심한 구타를 당했는데 땅콩 몇 대 때린 것으로 취급하거나, 가해자들을 불기소처분해서 빠져나가게 했다. 28사단 의무대 폭행치사 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인데 뒤늦게 알려지면서 파장이 컸다. 사건 피해자는 의병전역 후, 현재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있다.
2014년 8월 다른 포병대대에서 복무 중인 5선 국회의원 출신 현직 광역 자치단체장 남경필 도지사의 아들 남주성(92년생)이 후임병을 폭행, 성추행하여 수사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더구나 자신이 한 행동이 가족같아서 그랬다고 말해 놀림감이 되었다. 하지만 그 높으신 분의 빽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옘병 선거 전에 알려졌다면, 남경필의 도지사 당선은 실패했을 정도로 파장이 컸음에도 쉬쉬한 것은 육군이 정권으로부터 비호를 받은 것이 아닌가란 의혹이 상당하다.
2016년 2월 7일 7연대 소속 GP에서 박모 일병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7연대의 수색중대, 특히 박일병이 속한 소대는 그중 극악의 부조리를 행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구타와 폭언욕설로 인한 선택이라고 한다. 해당 소대는 해체되고 다른 부대에서 새로운 인원들을 차출하여 편성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24일 군인권센터에 의해 6사단 7연대 GP에서 구타 및 가혹행위로 인해 박모 일병에 대한 긴급기자회견이 열렸다.
2022년 4월 7일 군인권센터에서 5군단 파견 전방 OP지역에서 식고문과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7.3. 화기관련 사건
1968년 휴가를 받은 이 부대의 하사 분대장이 경상북도 안동에 수류탄을 던져 살상한 사건이 있었다.
2002년 모 대대 중화기 중대 행정보급관이 총기(K1)를 영외 반출 후 포천 농협 총기 강도사건을 벌인 적이 있다.
2008년 GP에서 수류탄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다.관련 기사
2017년 9월 26일 강원도 철원군에 주둔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 19연대 1대대 소속 이 모 일병(당시 만 22세)이 인근 사격장으로부터 날아온 실탄을 목 경동맥에 직격으로 맞고 사망한 사건이다.
7.4. 양파 사건
2020년 1월말 경 민간요법이라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예방을 위해 부대에 생양파를 잘라 실내에 비치하라는 지침을 내린 적이 있다.관련 기사(이는 코로나가 아니라 당시 유행한 독감때문이다) 이러고서는 정작 싸지방, 헬스장, 피시방은 전부 금지했으나 아침 점호, 사단 훈련 그리고 민간구역에서의 40km 행군일정은 그대로라고 한다(이 또한 사단 지시는 아님).
7.5. 코로나-19 군부대 집단 감염 사건
자세한 내용은 군부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문서 참고.
7.6. 천재지변
1996년 7월 26일 새벽4시25분께 강원도 철원읍 동송읍 대마리 소재 청송부대에서 호우로 인한 산사태가 발생, 내무반 2개동을 덮쳐 잠자던 군인 20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당시 내무반에는 모두 47명이 있었는데 내무반 뒤쪽에 있던 야산이 무너져 조립식 막사를 덮쳐 이중 19명이 긴급대피하거나 구조됐으나 20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8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8. 여담
미국 제6보병사단과 마크가 거의 똑같이 생겼다. 다만 미국 제6보병사단의 마크는 빨강색이고 흰 테두리가 없다.
마크 형상이 마동왕 그랑조트의 마법진과 유사해 그랑조 부대로 불리거나 다윗의 별 같아서 한국계 유대인 들을 모아 편성한 부대[86]로 오해받거나 숙명여자대학교의 교표와도 매우 비슷해 엮이기도 한다. 또한 마크 생김새가 표창(...) 같아서 청성부대에 있었던 사람들 중 사단 마크를 박음질이나 벨크로에 붙이기 전 표창처럼 날려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96년 7월 1일부터 8월 27일까지(17부작) 방영한 KBS 병영드라마 '신고합니다'의 배경이 제6보병사단이었다. 차인표, 이휘재, 구본승 등 당시 군 복무중인 스타들이 출연하여 5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가 되었다. 당시 연예인이 군대 입대를 기피하는 형태가 만연하였는데 이들의 군 입대 독려를 위하여 연예사병이라는 직책을 만들고 입대 권유를 하여 이때 당시 군 기피자들이 많이 입대를 하였다.
1999년 4월 26일 및 2000년 1월 17일 KBS1 <TV 내무반 신고합니다>를 비롯, 2003년 5월 11일 <청춘 신고합니다>, 2016년 6월 5일 MBC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 2>에 각각 소개된 바 있다.
김재규가 제15대 제6보병사단장을 맡기도 했으나 육군에선 흑역사 취급을 하고 있다. 역대 사단장 명단에서도 유일하게 사진이 없었을 뿐더러 아예 검은 색으로 칠해놨다. 인트라넷으로는 역대지휘관 메뉴를 열람하면 김재규의 사단장 시절 사진을 볼 수 있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저격사건의 주범이었다. 군 장성 출신의 간부가 대통령 암살을 했다는 것을 감추고, 아직 군부가 건재하다는 명목을 세우기 위해 언론통제를 하던 중 사단장을 맡은 이력이 있는 제6보병사단이 총대를 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제18대 제3군단장을 맡은 경력도 있으나, 당시 제3군단은 유사시 최대 전략적 요충지, 철원평야에 있는 군단이었기에 파급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3군단장이라는 경력을 가리고 제6보병사단장을 맡은 경력만을 부각시켜 제6보병사단에 대한 언론매체의 보도를 막는 등의 사후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제6보병사단은 메이커 부대로서 가장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목에서 멀어져 갔다는 썰이다. 그러나 최근 국방부가 관련 훈령을 개정하면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출신 부대의 지휘관 명단에 복권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중앙일보 2019.05.02
본부대 및 보병여단은 신 막사가 완공 또는 막사 리모델링이 완료되었다. 보병여단의 경우 각각 여단본부 및 예비 2개 대대는 신막사를 사용하고 있고, 전방 대대 또한 대부분 침대를 쓰는 신막사형 소초 및 통문에 거주하고 있다. 예비여단 또한 여단본부 및 신병교육대대는 신막사를 사용하며, 1개 대대는 2012년부로 막사 리모델링이 완공되었다.
'필승'을 경례 구호로 사용하다가, 2012년 경례 구호가 해군, 공군, 해병대와 겹친다는 이유로 '구국' 등으로 바꾸려다가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경례 구호를 구태여 바꿀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무산되었고 그대로 필승을 경례 구호로 사용하였다.[87] 2017년 4월 1일부로 45대 사단장인 이진형 소장이 경례 구호를 '필승'에서 '청성'으로 바꾸었다. 복무하는 장병들에 의하면 '청성' 경례 구호가 '충성'과 초성도 같고 어감도 비슷해서 편하다는 의견이 많다.
중국 영화 집결호에서 주인공 구지디는 관측반을 자처해 국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적지로 침투하는데, 군복에 바로 제6보병사단의 마크가 붙어 있다. 사실 중국 내에서도 제6보병사단은 꽤 유명한데, 용문산 전투의 영향이 크다.
주둔지가 철원이고 GOP 경계임무를 수행하는 사단이지만 다른 사단에 비해 한 가지 그나마 좋은 점은 사단 담당 구역의 절반이 완벽한 평지이고 나머지 절반마저 지옥의 산간구역 빼고는 평탄한 지형이 많다. 하지만 이 동네 출신 최전방 수호병에게 그 동네 근무 어땠냐고 물어보면 다들 힘들었다고 치를 떤다.
2016년 2월 7연대 D GP에서 선임들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해 한 일병이 자살하는 사건 이후, 7연대 수색중대의 해당 소대는 해체되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인터넷 밈화 된 웃음벨을 처음 시행한 사단이다.
영화 <강철비>의 노동당사 및 인근 추격전이 제6보병사단 관할로, 촬영 당시 협조하였었다.
국방TV 선진강군 24시에서 전투지휘자과정에 관한 영상이 방영되었다.
국방개혁 2.0 계획에 따라 현재 제6보병사단 자리인 포천 관인에 백골 제3보병사단이, (구)제6군단 자리인 포천 자작에 제6보병사단이 새로 배치될 계획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제보를 받고 있는 장기 탈영병이 있는데, 이 사람은 조○○ 일병(2003년 8월 14일 탈영)으로, 5년이상 검거되지 않은 장기 탈영병 중 탈영 기간이 2번째로 길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사항은 그것이 알고싶다/2021년 방영
한 때 토우중대가 있었으나 2019년 11월을 끝으로 폐지되었는데 일자 단층막사 그대로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