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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주님오시는 소리 스크랩 홍60- 아미쉬(Amish)를 아시나요?
순례자 추천 1 조회 181 15.04.14 23: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미쉬(Amish)

재침례교도들, 이들은, 카톨릭의 유아세례가 마귀의 인을 어려서부터 쳐주고 마귀의 자녀로 만들기위함임을 알고 성인이 되어 16세이상돼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며 재침례를 요구한 사람들을 말하며, 성경 계12장의 여자의 남은자손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있는 사람들입니다.

 

왈덴스인들. 초대교회의 맥을 이은사람들입니다.

참기독교회사와 참진리를 알고나면, 이들이 가장 부럽고, 짐승의표를 당한세대가 되면 될수록 이들이 가장 부러운 사람들이 될것입니다. 이들을 좀 따라하는 곳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아이들교육도 모두 성경이 교과서가 되는 곳입니다.

참 부럽습니다. 이들의 생활이..

 

이들은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할 때 많이 도움과 지도해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미완성에 있던 루터나 칼빈이 믿음외엔 유아세례부터 대부분의 이교풍습, 그노시스 영지주의의 맥을 이은 카톨릭의 잔재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 이들과도 결별을 고합니다.

 

하여 카톨릭과 종교개혁세력 둘에게서 핍박과 순교를 당했습니다.

카톨릭기록엔 6800만명, 역사가들은 1억명까지 순교했다.

 

종교개혁 시대인 1693년 스위스의 야콥 암만이라는

재세례파(Anabaptists) 지도자를 따르던 사람들을 아미쉬라고 불렀는데,

18세기 초 미국 펜실바니아로 이민을 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도 미국에서 제일 큰 아미쉬 공동체다. 인구가 6만9천.

공용어는 펜실바니아 독일어 (Pennsylvania Dutch)다.

영어는 학교에서 따로 배운다.

아미쉬 학교는 원룸 교실인데, 8학년까지 밖에 없다.

8학년이면 생활에 필요한 기본 교육은 다 받았다고 생각한다.

전원생활과 노동, 겸손을 덕목으로 친다.

 

교회는 20-40 가구마다 한 개씩 있는데

16세가 넘어야 세례를 받을 수 있고

교인이 되면 결혼은 꼭 해야 한다.

공동체 생활을 중요시하고

교회가 이들의 생활규범을 정하고 지키도록 지도한다

잉글리시 타운 (외부, 그들은 외부사람을 '잉글리시'라고 부른다)의

건강식품점에 가면 아미쉬가 기른 농산물이나 축산물이 비싸다.

믿을 만한 자연산이기 때문이다.

일찍 가지 않으면 토마토나 낙농제품은 다 팔려 살수도 없다.

 

교통수단은 짐승표에 전혀 영향이 없는 마차다.

제대로 된 초대교회의 예배모습이다.

성경을 교과서로 하는 학교다.

교회모습

요즘 웰빙으로 인기있는 흙밟기다. 아이들은 신발을 안신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이러저리 쫓기며 신앙을 지킨 여자의 남은자손들(계12장)의 후예들이다.

이들이 무비료 무농약으로 키운 농산물은 일찍가지 않으면 못사는 웰빙식품이 됐다.

안식일을 함께하는 공동체

이들의 교통수단은 훌륭한 마차다. 널려있는 풀만 먹이면 된다.

 

 

종교개혁의 발발과 기독교(개신)의 시작

솔직히 개신교회라고 부르면 안 된다. 이는 영지주의의 후예 카톨릭이 만든 말이다. 자신들에게서 약간 고쳐서 믿는 교회, 라는 뜻이다.

우린 기독교라고 불러야 하며, 카톨릭은 ‘로마 카톨릭’ 이란 정식명칭이 있다.

 

12세기와 13세기에 걸쳐 유럽의 "왕중왕"이 된 교황은 미신처럼 된 성지순례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회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거짓십자군을 일으켜 엄청난

유혈과 오욕으로 얼룩진 십자군 전쟁을 수행했다 또한 1184 년 이후 잔인한 종교재판

(Inquisition)을 실시하여 이단 박멸에 무서운 힘을 드러냈으며, 이 일을 위해 자주 십자군을

동원했다.

 

십자군전쟁은 기독교가 아닌 카톨릭이 행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십자군은 사형수, 죄수들로 이뤄져, 면죄부를 주는대신 가서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을 죽여라. 이단으로 죽여라~ 였다. 회교도와 예루살렘은 하나의 명분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바티칸을 옮기는 것이 마귀와 마귀의 종자, 마귀의 보좌가 있는 바티칸과 카톨릭의 소원이다.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연옥 교리를 소개하여 속죄의 필요를 역설한 중세 교회는 고

백성사(告白聖事)와 함께 고행(苦行)을 강조했다 지금도 가르치는 대로 "고백성사로 일단의

죄의 용서를 받았으나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하는데 , 이 벌을 사후에 받는다면

연옥에서 받아야 할 것이고 세상에서 받는다면 고백성사 후 사제가 훈계를 한 후에 정해 준

기도나 희생 혹은 선행 을 하게 되면 받게되는것"을 속죄, 곧 보속(補贖)으로 가르쳤다 .

그리하여 보속의 수단이 된 면죄부는 자신의 죄의 형벌을 감면(減免) 할뿐 아니라 연옥

에 있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신속히 천국에 보낼 수 있다는 기괴(奇怪)한 가르침으로 발

전된 것이다.

 

 

종교개혁의 큰별 -루터와 루터교

 

이러한 면죄부의 공공연한 판매는 이미 허스가 일으킨 개혁에 자극을 받고 방금 믿음에

의한 구원을 체험한 젊은 신부요 신학 교수였던 루터(Martin Luther) 의 신앙 양심의 괴롭

혀 이를 성토하는 95개조 논 재를 1517년 10월31일 정오에 위턴베르그 성당 문에 게시함으

로써 세계를 바꾼 대 종교 개혁의 막이 올랐다. 그는 즉시 이단으로 고발되었으며, 신성로마

제국의 국회로 소환이 되어 1521년 4월18일 심문을 받고 그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요청받앗

으나 이를 담대히 거부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분수령을 넘었다.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와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하여 잡히면 화형에 처해지는 이단의. 선고

를 받은 루터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는,(1) 신앙의 최종 권위는 로마교 회의 전통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경"(sola scirptura)에 있으며, (2)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의 선행이

나 로마 교회의 사제가 성레전(聖禮典)을 통해 나누어주는 공덕(功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적으로 받다 들이는 "오직 믿음" (sola fides) 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義)며

(3) 구원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 누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 로 주신 선물임을 강조했다

. (4) 또한 신자들은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만인 사제직(萬人

司祭職)을 제창했고 . (5). 연옥 교리와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혼 불멸의 가르침을 부정

하고 조건적 불멸을 가르쳐 부활 신앙을 강조했다. 루터의 개혁은 개신교 신앙의 기초를

놓으며 칼빈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독일로부터 주로 북 유럽과 동유럽 , 영국과 러시아에

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철저한 개혁자들-스위스의 쯔윙글리와 재세레파

 

가. 독일에서 루터가 개혁을 시도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는 독일보다 더 철저한 개혁이 별도

로 진행되고 있었다. 경건한 로마 카톨릭의 사제요 학자며 애국자였던 쯔윙글리(Uoich

Zwingli d, 1531)는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얻은 확신에 따라, 로마 카톨릭의 이교 적인 예배

의 식과 면죄부 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 극도에 다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퇴폐를 공박하는

대담한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이라고 가르침으로써 루터의 성체공존설(聖體共存說)을 진일보(進一步) 시

켰다. 그러나 그의 개혁을 저지하기 위하여 북부 스위스의 카톨릭 자치주들이 외국의 힘까

지 빌어 무력으로 대응하자 이를 막다가 전하하고 말았다.

 

나, 루터나 쯔윙글리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하는 일단의 개혁자들이 스위스 의 쮜리히에

서 일어났다. 재세레파(Anabaptists) 혹은"형제들"(Breth-ren)로도 알려진 이들은 , 그 레벨

(Conead Crebel) 과 만쯔(Felix Manz)의 지도자 아래,(1)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깊은 성경

연구를 강조하고,(2)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다. (3)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

할 수도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베푸는 로마 카톨릭의 의식인 유아 세례(幼兒洗禮)가 비성경

적인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성인 신자에게 이를 다시 베풀었으므로. 이로써 재세례파

의 명칭을 얻었다. (4)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죽음을 수면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고 가르치고

부활과 신속한 재림 신앙을 강조했다. (5) 교회로부터 성상들과 이교적 의식들을 일체 제거

할 것을 주장하고, (6)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고 맹서를 금했으며,(7)전쟁을 반대

하고 무기 사용을 금했으며, 핍박을 받을지라도 대항하거나 원수를 갚지 않았으며, (8) 모

든 교회는 신자들이 자율적으로 믿고 다스려 나가는 회중제도(會衆制度)를 택했다.

 

다, 이들 가운데는 때로 극단과 광신에 기울어져 물의를 일으킨 분파들도 나타나 혼란을 일

으키기는 했지만 그들의 철저하고도 대담한 개혁은 후에 복음주의 적인 개신교들인 메노

나이트(Mennoeites), 아마쉬(Arrish), 후터파 (Hutterites) 침례교(Baptists), 퀘이커(Quakers)

등을 일으키는 뿌리가 되었다.

 

"메노나이트나 침례교 도가 재세레파를 자신들의 영적인 조상들 가운데 포함시키는 일 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자유로운 교회 개념은 독립주의적인 청교도와 침 례교, 퀘이

커에 영향을 끼쳤다.

 

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로마 카톨릭은 물론 획일적인 개혁을 추진한 루터, 쯔윙글리,

칼빈 에 의해서도 이단시되어 가혹한 핍박을 받아 카톨릭 지역에서는 화형에 처해지고, 개

신교 지역에서는 물에 빠뜨려 죽였다.

 

 

메노나이트, 아미쉬, 후터파

 

가. 핍박을 받은 많은 재세례파 신자들은 홀랜드[화란, 현재의 네달란드]로 도피했는데, 로마 카톨릭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Menno Simmons) 가 화체설에 의심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던 중 카톨릭 신앙

의 오류를 깨닫고 1536년 재세레파로 개종하여 그들의 유능한 지도자가 되었다.재세례파

의 모든 가르침과 함께 요한 복음 13장의 교훈에 다라 성만찬 전에 서로 발을 씻기는 세족

예식(洗足禮式)도 시작했다.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불리는 메노나이트 재게례파 신자들은

당시에 알려진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 들이 였으나 카톨릭과 개신교 양편으로부터 혹독

한 핍박을 받아 많은 순교자를 냈으나 때마침 열린 신대륙으로 건너가 1683년이래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같은 계통인 퀘이커 교도들과 하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비무장 평화주의, 의료 봉사를 통해 미국의 인권 옹호와 민주 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나. 본거지인 스위스로부터 내어 쫓겨 모라비아 쪽으로 피난한 또다른 재세레파 신자들은

경건한 지도자 후터(Jacob Hutter) 의지도 아래 중생과 변화된 생활을 강조하며 80퍼센트나

순교로 끝나는 값비싼 선교를 위해 퍼져 나갔으며, 후터 자신도 1536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후 신대륙으로 피난하여 옛날처럼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문명을 등진 농경 생활 을 계

속하고 잇다.

 

다. 또 다른 스위스의 재세레파는 암만(Jacob Ammsn)의 지도 아래 보다 철저한 신앙 개

혁을 부르짖으며 분리되어 나왔다.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아미쉬(Amish)로 불리며, 후터

파와 함께 현대 문명을 등지고 단순한 생활을 살고 있다. 유럽에서의 핍박을 피하여 신대륙

으로 건너온 뒤 시골 생활과 농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종교 개혁의 총아 -칼빈과 개혁[장로]교회

 

가. 독일이나 스위스에 앞서 프랑스에서도 빠리 대학의 레퍼브르(Jaques Lefevre d. 1536)

교수에 의해 개혁 신앙이 지식인들 사이에 확대되고 있었다.

 

나. 루터의 개혁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20세를 갖넘은 젊은이 칼빈은 핍박을 피해 스위스

로 피난하여 제네바를 중심으로 신정(神政)까지 베풀며 루터의 개혁과 양대 주류를 이루는

개혁을 추진 시켰다. 칼빈은 (1)신앙은 성서에 기초해야 하고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성

서 신앙을 강조하고, (2)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主權)과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강조했다. (3) 예배 의식에서 중세 로마교회의 우상적이고 이교

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여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놓았다. (4) 은총만을 치우치게 강조한 루

터와는 달리 의(義)와 성화의 표준으로 율법의 기능을 적절히 강조했다. (5) 교회 행정에서

감독 제도와 회중제도의 중간인 장로 제도를 채택했으며,(6)루터나 쯔윙글리보다 성만

찬의 영적 의미를 한층 깊게 했다. (7) 교육을 강조하고 직업을 소명(召命)으로 가르치는

등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한 것으로 평가된다.

칼빈의 기본적인 개혁 신앙은 루터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지만, [기독교 요강] 등 저서를 통

하여 이를 체게있게 조직하고 철저하게 규명하여 발전시킴으로서 종교개혁의 진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칼빈의 개혁 신앙 을 따르는 개신교를 유럽 대륙에서는 "개혁

교회"(the Reformed Churches)로 알려진다. 이렇게 섬나라 영국에 장로교 신앙이 뿌리를 박

게 된 되는, 하나님 외에는 두려워하지 않는 스크트랜드의 개혁자 낙스(John knox .

1514-1572)가, 프랑스의 힘을 빌어 카톨릭 신앙을 스코트랜드에 정착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메리(Stuart) 여왕의 시도를 용약(勇躍) 분쇄한 데 크게 힘을 입었다.

 

 

종교개혁의 신생아 -헨리 8세와 영국 국교회

 

가. 16세기 종교개혁이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루터파(Lutheran), 스위스의 재세례파

(Anabaptist), 칼빈의 개혁 교회( the reformed Cherch)등 세 주류를 이루며 진전되고 있는

동안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별도의 이유로 별도의 개혁이 전개되고 있었다. 14세기 옥스포드

의 학자인 위클립이 일으킨 개혁의 파문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허스를 통하여 루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막상 영국에서는 카톨릭 교회가 주도한 정치적 여건으로 개혁이 진전되지

못하였다.

 

나. 옥스포드 출신의 학자 틴데 일(William Tyndale)이 핍박을 피하여 유럽에 은둔하면서

최초로 원어에서 번역한 영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여 본국으로 밀수하여 종교개혁에 연료를

공급했다. 그러나 본인은 성경을 번역, 출판한 죄로 카톨릭이 지배한 벨지웅에서 체포되어

42세의 젊은 나이로 1536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화형 주에 묶인 채 큰소리로 "주님이시

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

 

다.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개혁사상 이 영국에서 문서로 소개되자. 헨리 8세는 이를 글과

힘으로 분쇄하여 교황으로부터 "믿음의 옹호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왕

녀요 죽은 형의 미망인인 황후 캐더린(Cathe-rine)이 아들을 낳지 못하여 이혼하려 했으나

허락하지 않자, 1534년 영국 교회를 로마 카톨릭으로 부터 독립시켜 국왕이 영국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수장령(首長領)을 발표했다.이리하여 성공회(聖公會)의 모체인 영국 국교

회가 탄생했으나 머리가 바뀐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라. 그러나 헨리 8세의 카톨릭 황후 캐더린이 낳은 딸 메리(Mary)가 왕위에 오르면서 개혁

은 역전되었다. 개혁 신앙을 가진 300명의 학자와 성직자가 화형에 처해졌고 8백명은 대륙

으로 피난했으며 10200명의 성직자들은 직분을 빼앗겼다.경건한 학자요 감독이 였던 리

들리(Ridley),와 라티머(Lati-mer)는 카톨릭의 화체설과 예배가 아니라 제사인 미사 (Mass)

를 끝까지 반대한 죄로 1555년 10월 16일 화형에 처해졌다. 집행전 두사림이 나눈 대화는

오래 기억되고 있다. "리들리 선생 용기를 가지고 사내답게 처신합시다. 오늘 우리는 확신하

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영국에 붙이게 될 것이요"

화형이 두려워 개혁 신앙을 취소했던 크랜머 대주교도 다음 해 자신의 개혁 신앙을 재쳔

명한뒤 화형 주에 올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요, 그의 거짓 교리와 함께 적 그리스도로

서 그를 거절한다." 고 선언한 다음 지난날 개혁 신앙 포기를 자술했던 오른손을 먼저 불

속에 넣어 태우면서, "이 손이 범죄하였도다."라고 부르짖으며 불꽃에 사루어졌다.

이러한 뼈저린 희생을 치르며 지켜 온 한 가닥 개혁 신앙의 귀중함을 망각하고, 성경 적으

로 명백한 오류임을 깨닫고도 개혁의 의지를 상시한 채, 신앙 양심에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개혁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원치 않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인 들은 진정한 종교개

혁의 후예들인가?

 

 

6 청교도 운동과 개혁의 진전

 

칼빈주의 개혁 신앙의 진수- 청교도

그 잔인함 때문에 "유혈(流血)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은 메리 여왕이 재위5

년만에 급서한 뒤 1558년 에 즉위한 그의 이복 동생 엘리자벳(Elixabeth I) 여왕은 자신을

합법적인 후사로 인정치 않는 교황권에 맞서 살아남기 위하여 정치적 이유로 개혁 신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지난 날 대륙으로 피신했던 개혁자들이 대부분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가지고 속속 귀국하였다. 그들을 카톨릭 배경에 칼빈과 루터의 개핵신

앙을 혼합한 국교회(Ahglican Church) 신앙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히 개혁하여 순결하게 (Purity)하려는 칼빈주의 청교도(淸敎徒 . Puritan)들이 일어났다.

1648년 칼빈주의 개혁 신앙의 헌장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rssion)의 구

성을 주도한 것도 청교도들이었다.그들이야말로 칼빈주의 개혁 신앙의 진수였다.

그들은 이교적인 예배 의식, 사제들의 복장, 성경에 근거가 없는 각종 제일(祭日)들 사제의

면죄(免罪)행위, 십자가 사용, 대부모(代父母) 제도의 폐지와 함께 성일로 간주된 일요일의

철저한 준수들을 요구했다.

그들은 교황 대신 교회의 머리가 된 국왕이 감독들을 앞세워 교회를 다스리는 성공회의 감

독 제도를 반대했다 국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칼빈의 장로제도만 채택하자는 장로회파

(Presbyterian) 청교도에 남아 있기는 하되 외부의 간섭을 일체 받지 않겠다는 독립주의

(the Independents) 청교도도 나타났다.

 

 

청교도 신앙의 진수- 회중교

 

국왕이 머리로 남아 있는 국교회가 완전한 개혁을 받아들일 전망이 어두워지자, 국교회를

떠나 완전한 분리(分離)를 원하는 보다 철저한 청교도들이 1581년 캠브리지 출신의 지도자

브라운(Robert Browne .d. 1633)에 의하여 국왕이 머리가 된 국교회(聖公會)를 부정하고, 여

러 가지 속박을 가져오는 칼빈의 장로제 도도 배제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언약으로 연합된 회중이 자율적으로 목사 등 지도자들을 선출하고, 성경에 의하여 계

발된 신앙 양심에 따라 믿음을 행사하도록 촉구했다. 이리하여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의 진

수로 골격을 이룬 최초의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탄생한 것이다.이들 역시

핍박을 받아 홀랜드로 피난했으나 브라운을 계승한 그린우드(John Greenwood)와 바로우

(Henry Brrow)는 본국에서 1593년 회중교회 신앙을 싹틔우기 위한 순교의 피를 흘렸다.

회중교회의 장자 -침레교

 

엘리자벳 여왕 이후 영국 황들도 국교 주의를 고집하며 분리 주의 회중파 청교도들[회중교]

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자. 대부분이 산 자들은 고국을 떠나 보다 나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홀랜드로 피난했다 당시 영국의 게인스보로(Gaonsborongh)에 있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들

은 국교회의 목사였다가 개종한 스미스(John Smyth . d. 1612)목사의 지도 아래 1608년 홀

랜드의 암스테르담에 정착했다 그들은 경건한 생활에 감명을 받았으며, 동시에 카톨릭의 의

식인 유아세레가 비성경적임을 깨닫고, 1609년 스미스 목사는 자신을 비롯하여 동료 헬위스

(Thomas Helwys)등 36명에게 세례를 줌으로서 세례를 베풀고 회중정치를 하는 최초의 침

례교가 홀랜드에 세워졌다.

 

그들은 또한 칼빈의 예정론의 모순을 깨닫고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신자

들의 일부는 메노나이트 교회로 연합하였으나 휄위스를 따르는 회중은 1611년 영국으로 돌

아와 1612년 영국에서는 최초로 런던에 침례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칼빈주의 신앙은 받아들

였지만 유아세레를 반대하고 장로제 도가 아닌 회중제도를 택했으며, 홀랜드에 있을 때 확

신한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따라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선택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반을 위한 것임을 믿기 때문에 일반침레교(General

Brptists)나 자유의지 침례교(Free Will Baptists)로 불린다. 이처럼 최초의 침레교는 분리

주의 청교도들인 회중교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1633년 스필즈버리(John Spilsbury)의 지도를 받는 일단의 독립 주의 청교도들이 성경을

연구한 끝에 본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그들 역시 일반 침례교와 같이 회중제도를 유지

하며, 유아세레는 물론 물을 뿌리는 세례까지도 비 성경 적임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보존

과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물에 잠기는 침례(浸禮)만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속

죄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칼빈의 "제한된 속죄"룰 그대로 유지했기 때

문에 특별 침례교(the Particular Baptisis)라고 부른다.

 

이렇게 두단게의 개혁으로 서로의 약점이 보강된 침례교는 17세기 영국의 신앙 부흥과 신

대륙에서의 신앙과 양심이 자유등 개신교 신앙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을 설교한

죄로 12년간 옥살이를 하며 「철로 역정」(天露歷程)을 쓴 죤 번연(John Bunyan .

1628-1688), 흑암과 빈곤의 대륙 인도 선교를 위해 몸을 사룬 캐리(William Carrey .

1761-1834), 신대륙 미국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의 원칙을 심어 준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 Miller. 1782-1849)등이 모두 자랑스런 침레교인들이다.

 

오늘날 미국에만도 2.900만의 신자를 가진 최대의 교파인 침례교는 개혁 교회들 처럼 고정

된 신앙고백이 없이 신자들이 계발된 신앙 양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확신한 바대로 살

도록 권장하고 있어 새로운 진리에 대해 개방적이다. 기본적인 교리는 일반 개신교와 같지

만. 그밖에도 (1)유아세레와 물을 뿌리는 세례를 비성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신자(信者)의

물에 잠기는 침례만 을 인정하며, (2)회중제도의 교회 조직과 (3)국가와 교회의 완전 분리,

(4)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극도로 존중히 여기는 점들은 루터나 칼빈등이 추진한 개

혁을 더욱 진전시켰음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 근원에 제세레파의 신앙이 포함돼 있음도 분

명히 하고 있다.이러한 침례교의 근원으로부터 후에 종교개혁의 절정인 안식일 진리를

발견한 제칠일 침례교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회중교의 장녀- 필 그림 파아더즈

 

1611년 침례교라는 맏아들을 낳은 소수의 분리 주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곧 이어 또 다른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영국의 스크루비(Scrooby)에 살던 성실한 평신도인 브루스터

(William Brewster)의 집에 모이며, 국교회 목사 였다가 개종한 경건한 지도자 로빈슨(John

Robinson)목사의 지도를 받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 [회중교]들은 1609년 핍박을 피하여 홀

랜드로 건너가 레이든 에 정착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자녀 교육 등 생활의 안정이 어려워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국왕도 없고

교황도 없는 땅인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어려운 협상 끝

에 1620년 9월 평신도 지도자 브루스타(Brewster)의 인도 아래 102명의 신자가 돛배인 메이

플라워(Mayfliwer)호를 세내 여 위험한 항로인 대서양을 건너 11월 21일 마사츄세츠주의 플

라머스(Pl-ymouth)항에 도착했다. 그들중 절반은 추위와 질병으로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갔는데 이들이 바로 미국의 건국 조상이 된 "필 그림 파아더즈"(Pilgrim Fathers)들이

다. 회중교회가 신대륙에 출가시킨 위대한 맏딸이었다.

 

 

청교도 운동과 안식일 회복

 

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청교도들이 창조한 역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회중교와

침례교의 산모가 되었으며 신대륙에 이룩한 신앙과 양심의 요람인 미국을 건설한 조상을 낳

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청교도들은 "오래 황폐된 곳을 다시 세"우며, "역대의 파괴된 기

초"인 안식일을 다시 "수축"(修築)하는(사58:12. 13)역군이 된 것이다.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율법은 언약

임을 이해하게 되었다(출19:5.6).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 유

지의 수단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을 깨달았다.또한 인간의 죄된 본성은 율법을 기

뻐하지 않지만(롬 7:19,20)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은 율법에 순종함으로 속박이 아니라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음도 깨달았다(약 2:12). 왜냐하면 십계명은,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

도하여 내신"(출 20:2)후에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십계명]을 언약의 내용으로 이해하게 되자, 언약을 보증하는 인(印)곧, "표징"이 되는

안식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출 31:13,16,17)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헨리 8세 때 영국 교회가 로마 카톨릭에서 독립한 후, 자제의 예

배 의식을 위한 기도서(litany)를 마련하면서였다. 대주교 크랜머(Cranmer)가 1549년과 1552

년에 펴낸 [영국 국교회 기도서]에는 십계명이 포함돼 있었는데, 특히 넷째 계명인 안식일을

교창(交唱)할 때 성직자가 먼저 그것을 읽고나면 회중은, "이 율법에 우리의 마음을 기울이

겠나이다"라고 응창(應唱)했다.

 

이렇게 응창하면서 청교도 조상다운 냉철한 지성과 예민한 신앙 양심이 깨우쳐졌다. "그렇

다면 우리가 이 분명한 말씀을 따라 제칠일 안식일로 준수해야 함을 뜻하지 않는가?" "첫째

날인 일요일을 안식일 대신 준수하면서도 성경 말씀을 그대로 순종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기도 서를 펴낸 크랜머는 칼빈이 그랬던 것처럼, 안식일이 구태여 어느

특정한 날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엘리자벳 시대에 이르러 존재와 영향력이 뚜렷해진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마침내 칼빈의 가르침처럼, 주일 중 하루가 특별히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 중에서

질서를 보존함에 필요한 방도로서 그 날을 지킨다"는 해석이 성경에 어긋남을 깨달았다. 조

상보다 나은 자손이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청교도 지도자 바운드(Nicholas Bownd)의 저술과 가르침에 나타나 있다.

그는 사람이 범죄하기 전인 창조시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창

2:3)다는 말씀과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이라고 선언된 십계명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그는 또한,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스스로 실천함으로 그 날을 일으켜

세웠음을 상기시키고, "만약 아담이 범죄 하기 전이라도 안식일이 필요로 했다면 죄로

잃어버린 바된 세상을 더욱 더 필요로 한다"고 설파(說破)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일요일에는 칼빈의 가르침처럼 단순히 예배하는 데 편리한 아무 하루

로서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안식일처럼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날로 믿고, 일요일에

는 각종 오락을 금하고 속된 일을 삼가는 등 성수(聖守)규정까지 마련했다.안타깝게도 그

들은 인간의 전통에 따라 주일로 부르는 일요일이 성경에 명시된 제칠 일 안식일이 아니라

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인 경건한 고신 계통의 장로교

신자들의 일요일 성수와 흡사하다. 그러나 자신들이 깨달은 만큼의 진리를 옹호하고 실천하

는 일에 최선을 다한 청교도들은, 개신교라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였던 종교개혁 시대를 나타낸 "사데[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3:4)임

에 틀림없다. 지금 받은 빛과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만 더 크고 온전한 빛과 진리가 주

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16세기의 청교도들은 칼빈의 한계를 벗어나. 회중 교회를 통하여

그들의 가문을 잇는 또 다른 자손인 침례교에서 17세기에 참된 제칠 일 안식일을 쉽사리 싹

틔울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였다.

 

 

7. 종교개혁의 진전과 안식일 회복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왈덴스인과 제세레파

 

4세기이래 1천년 이상 중세의 암흑 속에 갇혔던 안식일 진리에 새벽을 가져다 준 것은 12세

기에 일어난 왈덴스인들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22개국에 확신된 일부 왈덴스인들

의 개혁의 숨결 속에서 이미 안식일의 모습이 나타났음을 역사가들은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청교도와 함께 침례교의 영적 조상이 되고 있는 16세기의 충성스럽고 철저했

던 개혁자들이었던 재세례파에게서 한충 뚜렷해졌다. 성경만을 신조로 삼으며 유아세례를

비롯한 중세 카톨릭의 모든 의식과 전통을 철저히 배격한 재세례파 가운에는 안식일을 준수

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지도자들로는 카톨릭 사제였다가 루터의 개혁신앙으

로 깨우침을 받고 재세례파에 연합한 글레이트(Oswald Glait)와 피숴(Andreas Fischer)부부

였다.

다니엘서를 깊이 연구한 끝에 그들은 안식일이 변경될 수 없는 계명이었음을 깨달았고. 그

것이 일요일로 바뀐 것은 다니엘서(7:25)에 예언된 대로, "때와 법의 변개"하고자 한 작은

뿔인 교황권에 의한 것임을 확신했다. 피숴는 이렇게 글로 증언 했다.

 

 

증언 피숴

"성경에는 안식일에 대하여 그토록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만약 일요일에 관하여도 그만큼

언급한 구절들이 있으면 나는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겠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신약

성경은 십계명의 준수를 명령하고 있으므로 안식일도 포함해야 한다. 야고보나 바을에 의하

여 율법이 언급되었을 때, 그 율법은 안식일을 포함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믿음은 율법을 세

우기 때문에[롬3:31] 안식일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의 로마 카톨릭이나 개신교 이란에게 모두 위협적인 것으로서 피숴부

부는 1529년 즉시 이단으로 체포되어 부인은 산 채로 익사시켰고, 피숴는 1539년 성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글레이트는 1546년 풀려나는 안식일의 광복을 위해 값비싼 희생을 치뤘

다.

 

 

침레교의 상속자- 제칠일 침레교 (영국)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다. 일요일을 제칠일 안식일로 믿고 성수하는 등 받은 바 빛에 충실하

며 최선껏 살아온 청교도들에게 참빗이 이르러 온 것이다. 국교회(聖公會)를 떠나 회중파 청

교도 목사로 활약하던 트레스크(John Tra-ske . 1583-1636)는 1616년 런던의 「밀 야드」

(Mill Yard)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그를 따르던 회중 가운데 한사람인 잭슨(Hamlet

Jackson)에게서 제칠일 안식일 을 소개받고 상당수의 회중과 함께 안식일을 준수하게 되었

다. 결과로 1617년 밀 야드 교회는 회중제도를 유지하며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제칠일 안식

일을 준수하는 최초의 제칠일 침례교(Seventh Day Baptists)가 된 것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극히 중시하고, 각 사람이 성령의 인도로 계발된 양심을 따라 자유

롭게 성경을 연구하고 스스로 의 믿음을 지켜 나가며. 신자에게 물에 잠기는 침례를 베푸는

등 정통 침례교의 모든 신조에 충실하면서 성경상의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제칠일 침례

교야말로 침례교가 낳은 장한 맏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단으로 고발된 트레스크 목

사는 혹독한 고문과 해상 감옥에서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신념을 굽혔으나 그의 회중은 흩

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Dorothy Traske)는 16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참으로 고결한 신

앙을 지키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역사의 기록에 남아 있는 밀 야드 제칠일 침례교의 두 번째 목사는 영국의 새 국왕, 제임스

1세와 찰스1세와 2세의 궁중 의사였던 챔불린(Peter Chamberlin)이었다.제3대 목사는 제

임스(John James)였는데, 그는 1661년 10월 19일 안식일 설교 중에 체포되어 다음달 26일

교수형에 처해진 뒤 목을 잘라 장대에 꽂은 뒤, 시무하던 밀 야드 교회 뜰에 전시하여 안식

일 준수의 대가로 위협했다."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

고 바다 모래 위에"선 (계12:17)사단의 분노가 표현된 것이다.

 

다음 해인 1662년 개혁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던 국교회 목사 뱀필드(Francis Bampfield)는

개인적인 성경 연구 끝에 제칠일이 성경적인 안식일임을 깨닫고, 9년간의 복형기간 동안 계

속 전도하여, "제칠일 침례교 도르체스터 감옥 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출감 후 또 다시

안식일을 가르친 죄목으로 세 차례나 투옥된 후 1684년 70세의 고령으로 춥고 습한 뉴게이

트(Newgate)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안식일

 

순교자의 죽음은 언제나 진리의 씨앗이 되어 더욱 불어나게 마련이다. 뱀필드 목사가 목회

하전던 교회로부터 나온 열성 있는 신자인 멈포드(Stephen Mumford)일어나 인식일 기별을

가지고 1664년 미국의 로드아일랜드로 건너갔다.그는 그곳에 있는 침례교에 나가며 십계

명의 불변성과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열심히 가르친 결과 몇 명의 청교도 신자들을 이끌었

다, 그러나 이 곳의 침례교회마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핍박하자 1671년 12월 23일 멈

포드 내외를 비롯한 7명의 신자들이 거기서 나와 신앙 공동체의 언약을 맺고 신대륙에서 첫

번째가 되는 제칠일 침례교를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Newport)에 세웠다. 마침내 신대륙에

안식일의 진리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1802년에 9명의 목사와 10130명의 신자로 총회를 구성한 제 칠일 침례교는 곧 일어날 초교

파적인 재림 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일단의 재림신자들에게 그들이 목숨을 바쳐 수호한 안식

일 진리를 전달함으로써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출현을 뒷바라지 한 것은 16세기에

일어난 미완성의 종교개혁을 마무리하시라는 섭리였음이 구속의 역사에서 자명해진다.

 

 

8. 17, 18세기의 종교개혁의 진전

 

반 종교개혁과 예수회

 

16세기 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초반에 기선(機先)을 잡는 듯 했으나 개혁자들이 예

배의식, 성만찬, 예정론등 교리 문제에 이견을 드러내고, 재세레파에 대한 자체 핍박을 가하

는 등 분파주의에 기울어져 중심을 잃고 있었다. 반면 개혁의 최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로마 교황권은 잠시 자성(自省)의 빛을 보였으나,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반(反)종교개혁(the

Counter - Reformation)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 일이 바로 1545년에서 1563년까지 세 차

례에 걸쳐 열린 역사적인 트렌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ent)에서 이루어졌다. 이태리와

스페인의 강경론자들이 압도한 이 회의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한 면죄제도, 연옥, 화체

설, 성자 및 유물 숭배동 모든 교리들은 재확인되었고, 전통(傳統)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

진다는 결의와 함께 상당수의 외경(外經)이 인가되었다. 그리고 루터, 쯔윙글리. 칼빈등 개혁

자들은 박멸되어야 할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이러한 종교회의의 결과를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선택된 단체가 바로 스페인의 전상(戰傷)

퇴역 장교인 로욜라(Ignitions Loyala)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을 다짐한 후

1534년 8월 15일 6명의 다른 회원 과 함께 창립한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였다.

.

"선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방법이 악해도 무방하다"는 위험한 도덕관에 기초하여 교황

과 로마 카톨릭 교회를 위하여는 무슨 일이 든지 불사하겠다는 서약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

들에 의하여 각처에 고등교육 기관이 설립되었고 개신교에 앞서 아시아. 남미. 캐나다 등지

에 카톨릭 신앙을 성공적으로 전파했다.

로마 카톨릭교 회의 반종교개혁이 유럽과 신대륙, 아시아를 휩쓰는 동안 개신교에는 어떠

한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예수회를 주목하는 것은, 마지막 짐승의표 666을 가지고 종교재판할 주역이기 때문이다. 벌써 한국 미국을 비롯한 대다수 기독교국가를 점령하고, 세계교회(wcc)를 굳건히 했습니다.

또한, 한국에는, 양화진에 그들의 컴파스 직각자(프리메이슨 표식)묘비들이 즐비하며, 이때부터 활약하던 예수회가 한국은 2014.5월에 신앙직제라는 이름으로 천주교가 메인이 되는 교회일치운동, 즉 세계교회와 세계교회 신학교, 일치교리, 교리집등을 출발시켰다.

 

이들이 세운 단체는 일루미나티 부터 로타리클럽, ymca, ccc 대학생선교회, 대한적십자사 , 걸스카웃 보이스카웃 부터 대다수 비밀단체들을 이끌며, 미국을 부채로 장악하고, 미국cia는 예수회 출신이 아니면 들어가지도 못하며, 미국책은행인 미준비제도은행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유엔과 각종 국제기구, 세계은행, imf 등을 점령하고, 세계국가와 사회주의 건설을 계획하고 수장권에 교황권을 두며, 이들은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있다. 깨어있는 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루터 교의 쇠퇴와 경견운동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백년이 못되어, 30년에 걸친 종교전쟁(1618-1648)을 치르는

동안 산만해진 루터교는 오직 성경만을 신앙의 전부로 삼겠다는 본래의 대의 명분을 망각하

고 새로운 빛을 거절한 채 냉담한 형식주의에 빠져 영적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이에 경각

심을 가지고 일어난 것이 루터교 목사였던 스패너(Philip Saner . 1635-1705)와 프랑케(A.

H. Fran-cke . 1663-1727)교수가 독일의 할레(Halle)대학교를 중심으로 일으킨 경건주의

(Pietism)부흥 운동이었다. 평신 자들이 중심이 된 소그룹 성경 연구와 기도회를 통하여 실

생활의 경건을 강조하여, 각종 오락을 금하고 절제를 강조하여 당시의 편 만한 악을 견책했

다. 단순한 예배 의식과 속죄의 필요를 강조하는 복음이 중심이 된 설교로 죽은 듯했던 교

회에 새 생명이 넘쳐 들어왔다.

 

이러한 경건주의 부흥은 지적 기반의 결함으로 불행하게도 유럽을 휩쓴 파멸적인 영국의

자연신론 [이신론(理神論. Deism)과 대륙의 합리주의(合理主義)를 막지 못하고 휩쓸렸지만

경건주의의 중심지였던 할레(Halle)대학에서 교육받고 부흥을 체험한 독일 색슨(Saxony)출

신의 루터교신자 진젠돌프(Zinzendorf. 1700-1760)백작이 그 결과로 1727년 모라비아교회

(the Moravians)를 탄생시킴으로서 그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

 

 

루터교의 양자- 모라비아 교회

 

진젠돌프 백작은 자신의 넓은 땅을 로마 카톨릭의 핍박으로 내어쫓긴 보헤미야인들과 모

라비아인들,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선 개신교도들에게 피난처로 제공했다. 1727년 서

로 주장이 다른 각 파의 신자들은 성령을 하나가 되게 하여 형제 연합(Unity of the

Brethren)이라 부르는 모라비아 교회를 조직했다.처음에는 6백명으로 시작한 이 작은 교

회는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며, 1727년 8월 26일 부터 24시간 계속하는 기도를 백년간 계

속했는데, 그후 150년간 2,170명의 선교사를 신대륙을 비롯하여 서인도 제도, 그린 랜드 등

으로 파견하여 개신교로서는 최초로 세계 선교를 시작했다.자신은 루터교인이면서 보헤

미아의 개혁자 허스의 후예들인 보헤미아-모라비아 형제회 감독의 안수를 받고 모라비아

교회를 조직함으로써 루터교의 진수인 경건주의와 허스파 신앙의 진수인 보헤미아-모라비

아 형제회 의 신앙이 진젠돌푸 감독에게서 결집되어, 루터교의 양자(養子)격인 모라비아 교

회가 탄생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보헤미아에 거주했던 왈덴스인들(Bohemian Walden-ses)의 상당수

가 14세기 이전에 사도 시대의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과 함께,보헤미아 형제 회에도 안식

일을 지키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들과 접촉한 진젠돌프 감독이 1738년 이전부터 30년 가

까이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켰다는 역사적 확증을 제공하고 있어,안식일이 그리스도인 신

앙 양심의 시금석(試金石)이요 종교개혁의 극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

 

 

모라비아 교회의 아우- 감리교

 

진젠돌프 백작이 이끌어 간 경건하고 능력이 넘치는 모라비아 교회가 개신교에 끼친 영적

감화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91)의 회심이다. 당시 옥스퍼드 출신의 영국 국교회 신부였던 웨스리가 미국의 인디언

을 위한 선교사로 부름 받아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와 함께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대 배에 함께 탔던 모라비아 평신도 선교사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인디안 전도에 실패하고 돌아온 웨슬리는 자신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고민하던 중, 1738

년 5월 24일 저녁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거리에 있는 모라비아 교회의 집회에 참

석하여 마침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마음으로 뜨겁게 체험하고 회심(回心)과 신생(新

生)을 경험했다.

 

이리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진 웨슬리 형제와 친구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으로 영국은 일대 부흥을 경험했고 웨슬리 형제에 의하여 교회 역사를 바꾼 감

리회가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모라비아 교회에 부속되었다가 1740년 최초의 자립 감리회

(The Methodist Society)가 런던에 형성되었다.

 

웨스리가 감리회 운동을 일으킨 18세기 전반의 영국은 영적인 일대 위기를 겪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진수였던 청교도 정신은 신대륙으로 자리를 옮기고 영국 국교 회는 생명이 없는

형식주의로 퇴화한 데다가 성직자들의 퇴폐는 극에 달했다.남아 있던 장로교와 침례교는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안(Uniterian)신학에

잠식당하고 있었으며, 때마침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자연신론(自然神論), 곧 하나님의 인

간과 약사에서 분리시켜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 파멸적인 철학 사조에 휩싸여 있었다 이것이

유럽 대륙에서는 무신론적인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로 나타났고, 인간 위주의 합리

주의(Rationalim)로 발전하여,마침내 프랑스에서는 현대 무신론 탄생한 혁명으로 표현되

었다. 18세기의 영국을 프랑스와 같은 무신론적 혁명에 서 벗어나게 한 것은 웨슬리의 감리

회 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웨슬리 형제가 이룩한 감리회는 대부분의 신조를 일반 개신교와 함께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와 함께, 성령의 역사에 의한 중생(重生), 곧 성화(聖化)와 성결(聖潔)

을 특히 강조했다. 웨슬리의 경험과 가르침에 따라 킬빈의 절대적인 예정론을 거부하고

아르미나우스의 예지 예정(豫知豫定)을 따르며 신자의 세례와 함께 유아세례도 인정하고,

감독 제도의 교회 행정을 영위한다. 칼빈주의 교회들처럼 다른 신조를 가진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이 거의 없는 반면,현대에 글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크게 받

아 본래의 성서적 신앙에서 크게 멀어진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감리교의 아우들 -성결파 교회들

 

중생과 성결을 강조해온 감리회로부터 다른 성결파 교회들이 나타났는데, 사회사업과 구

제를 강조하는 구세군(救世軍)교회가 1865년 부드(William Booth)에 의해 설립되었고, 성화

된 생애와 성령의 충만을 강조하며 물에 잠기는 침례와 세족 예식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교

회(Church of God)가 몇 분파와 함께 19세기말에 나타났다.1895년 미국에서 형성된 나사

렛 교회(Church of Nazarene),1914년 역시 미국 [Arkansas] 에서 형성된 하나님의 성회

(Assemblies of god)로 대표되는 오순절파 교회(Pentecostalism)들도 모드 웨슬리의 성결 운

동과 침레교적 배경에 직접, 간접으로 근원을 둔 변형된 성결파 교회들이다.

 

 

 

9. 19세기 종교개혁의 진전

 

종교개혁의 열등아 프랑스

종교개혁으로 치명상을 입었던 중세 카톨릭 교회가 제수잇(Jesuit)이 주도한 반(反)종교개혁

으로 세계 각처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개혁 신앙이 거의 죽어 가던 18세기 독일에서는 경

건주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며 결과로 1727년 세계 선교의 문을 연 모라비아 교회가 탄생

했다. 그리고 청교도의 개혁 정신이 낡아져 버리고, 유니테리안(Unitarian)신조와 파멸적인

자연신론[理神論]마저 번져 형체만 남은 성공회는 물론 장로교와 침례교가 모두 개혁의 의

지를 상실한 채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졌던 18세기의 영국에서웨슬리 형제들이 일으킨

부흥 운동은 1740년 감리회를 탄생시켰으며, 같은 때 신대륙에서는 대 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이 일어나 개신교의 일대 확장과 부흥을 초래했다.

 

그러나 같은 18세기에 무신론적인 합리주의에 노출된 프랑스는 영적 부흥 대신 1789년 공

포와 유혈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오히려 19세기를 휩쓴 무신론과 회의론의 요람이 되었

다. 그것은 프랑스 지방의 요람이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카톨릭 세력이 1545년 남 프랑스

지방의 왈덴스인들 4천여 명을 집단 학살하고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 제일(祭日)밤,

화해를 모색한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인 위그노(Huguenots)들을 속임수로 모은 뒤 파리에서

2천명, 지방에서 2만 명을 무참히 학살한 사실과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혁명 직전까지 계

속된 비인도적인 핍박으로 대부분의 위그노들은 국외로 추방하는 등 개혁을 거부하고 신앙

양심을 짖밝은 행동의 열매를 거둔 것이 였다. 인간인 이성(理性)을 위주로 한 무신론적인

프랑스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세(近世)의 시작인 19세기가 펼쳐지면서 1848년에는 칼맑스

(Karl Marx)는 이념적 무신론인 공산주의 선언을 했고, 1859년에는 다윈 (charls Darwin)이

과학적 무신론인 진화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각각 1844년 태어난 벨하우센 (Julius

Welhausen)은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신학적인 무신론인 고등 비평(Higher Criticism)내놓

았으며, 니체(Friedrich Nietzzsche)는 철학적인 무신론인 초인 주의(超人主義)를 소개하였다.

모두 성서 신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조들이 였다.

 

게다가 1848년 3월 31일 뉴욕주 하이데스빌 (Hydesville)의 외딴 곳에 있는 감리교인 존

폭스(John Fox)의 집에서 그의 두 딸과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위장한 사단의 거짓 영과의

영계(靈交)가 시작되어. 사단의 태고의 속임수인 영혼 불멸 신앙을 진실인 것처럼 위장한 현

대의 심령 과학, 즉 강신술(降神術 . Spiriualism)까지 문을 열었다.바야흐로 면면이 이어

온 성서 신앙은 세상과 교회 안팎으로부터 근본을 위협하는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방금 종교개혁의 정신을 등져 버린 현대 신학 사조가 밀물처럼 교회에 넘쳐 들러 온 것이

다. 오늘날 이러한 자유주의 적인 현대 신학 사조에 영향을 받지 않은 신학교와 교회가 있

는가 둘러보라.

 

 

무신론과 불신 사상에 대한 대응

 

이 비상(非常)한 시기인 19세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대책을 강구하셨는가? "저희가 주의

법을 페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시119:126)

 

가 성경의 영감(靈感)과 역사성을 불신하는 파멸적인 현대 신학이 고등 비평에 맞서 이를

반증하는 성서 고고학의 열쇠인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1822년에,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설형[쐐기]문자가 1847년에 각각 판독(判讀)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역사적 진실을 증

거 하도록 "돌들이 소리지르게"(눅19:40)하셨다.

 

나. 1864년 세균의 아버지인 프랑스 학자인 파스테르(Lois Pasteur)는 실험을 통하여 기원전

4세기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이래 믿어 온 생명의 자연발생설이 거짓임을 입증하고, 생명은

생명 에 의해서만 발생된다는 창조 신앙을 뒷받침했다.

 

다. 1865년에는 진화론이 비과학적임을 드러내는 멘델의 법칙이 발표되어, 다윈이 무질서한

것으로 관찰한 종(種)의 변이(變異)가 결코 전혀 새로운 종(種)을 만들어 낼 수 없도록 법칙

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라. 1804년에는 대영(大英)및 해외 성서 공회가 발족되고 1816년에는 미국 성공회가 발족되

어 세계 적인 성경 보급이 촉진됨으로써 개인적인 성경 연구, 특별히 예언에 관한 연구가

고조되었다.

1800년으로부터 1830년 사이에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의 수 (86개 말)는, 그 이전의

1800년 동안 번역된 수(71개 말)보다 더 많았다는 놀란 운 사실이다.

 

마. 18세기 전 후반에 걸쳐 일어난 부흥과 대각 성은, 19세기에 이르러 세계 선교의 열정으

로 이어져 온 세상에 복음이 급속히 전파되었다. 이 일을 위해 미국의 해외 선교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810년)잇달아 회중교 총회(1810년)침례교 선교 연합회(1814년)장로회(1837년)

등도 세계 선교를 위한 조직을 갖추었다.

 

바, 이러한 분위기에서 19세기초 미국을 비롯한 유럽, 남미, 아시아 등 복음이 전도된 세계

각 곳에서는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니 재림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재림 운동(the Advent

Movement)이 일제히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웨이(Lewis Way)와 드루먼드(Henry

Deummond)등이 일어 낫고, 독일 태생 유대인 울프(Joseph Wolff)는 8개국 언어를 구사하

며 근동 지방과 중앙 아시아, 인도에 이르러 재림 기별을 전했고 1837년에는 미국 상원에

초빙되어 기별을 전했다.스코틀랜드의 어빙(Edward Urving)과 커닝햄(William

Cuninghame), 스위스의 가우센(Francois gausen), 독일의 리히터 (Johann Richter). 호주의

플레이 포드(Thomas Playford),특히 저술을 통해 스페인 과 남미에 재림 기별을 전한 전직

예수회 신부 라쿤자(Manuel de Lacunza), 미국 전역에서 10만 이상 이참 여한 재림 운동을

주도한 침례교 신자[ 후에 목사 가됨]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등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온 세상에 전한 기수들이 였다.

 

이러한 재림은 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마지막 심판을 알리는 일

곱째 나팔이 불기 적전에 (계11:15)있을 것으로 예언된 (계10장)숙명적인 운동(Movement of

Destiny)이었다. 예언을 통하여 이들에게 주어진 다음의 기별은 근세를 시작한 프랑스 혁명

을 계기로 발판을 굳힌 무신론 적인 합리주의 풍조가 넘쳐 온 세상과 교계에 얼마나 시의

적절한 하나님의 대응이었는가?

 

 

하나님의 대응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 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14:7)

 

 

예언에 나타난 개신교 국인 미국

 

18세기말 (1789-1799)의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 발판을 굳힌 파멸적

인 무신론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즉각 적이고도 단호한 것이었다. 10년간이

나 계속된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정치적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루이 16세 부처가 1793년 로

마의 시스틴 성당에서 제위 23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던 중 프랑스 혁명 군사 정권에 의하여

체포되어 교황직은 박탈당하고 치욕적인 굴복을 당한 후, 그 이듬해 8월 29일 발렌스

(Valence)감옥에서 옥사함으로써 중세 교황 권이 몰락함과 동시에 기나긴 중세기도 끝나고

근세사(近世史)로 접어든다.

 

그것은 6세기(538년)교황 권의 확립으로부터 18세기(1798년)몰락까지 정확히 1798 538

1260년간의 기간으로써, 열 뿔 가진 짐승으로 상징된 로마제국(단 7:8, 23~25; 계12:2)을 이

어서,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쓴 여인으로 상징된 하나님의 참 백성을 핍박한 중세 로마 교회

를 정확하게 예언하고 잇다.(단 7:25 ; 계12: 6, 13).

 

그 동안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으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를 공동으로 개혁하

려 나섰던 개신교는, 내분과 함께 카톨릭의 반(反)종교개혁 공세와 영국 등의 국교(國敎)정

책 에 부딪혀 고전을 계속하다가 때 마침 개방된 신대륙 미국에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보

장받는 피난처를 찾았다. 이 사실에 관하여, 요한 계시록 12장은 중세 교회에 의한 1260년간

의 핍박을 예언한 후에 (6, 14절),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

를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16

절)켰다는 정확한 예언을 구사하고 있다. 또 다시 계시록 13장은 여자를 도와 준 땅이 바로

"42개월"(계13:5)에 해당하는 중세기 1260년간 (42 30 1260일)활동하던 중세 교황 권의 몰

락을 전후하여(계13:5-10), "땅에서 올라"온 "새끼 양같이 두뿐이 있"는 짐승으로 상징된 북

미 합중국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예언이다.

 

역사상 최초의 개신교 국가인 미국이 이전의 다른 나라들처럼 (단7:2-7)맹수라 아닌 그리

스도 교 국인 "새끼 양"같은 나라로 상징된 것과, 기존 국가가 없는 신대륙인 "땅"에서 전쟁

을 상징하는 "바람"도 없이 (단 7:2)올라올 것으로 묘사한 것과 함께,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이 실제로 교호작용(交互作用)을 했다는 사실은 이 예언의 역사적 성취를 뚜렷하게 하

고 있다 이렇게 예언에 의하여 섭리된 나라 미국에서, 역시 계시록 10장에 예언된 재림 운

동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둘" (계12:17)이 출현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예언된 재림 운동

 

1800년대 초반에 신속히 보급된 성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신된 선교의 열정, 그리고 1800

년에 1700만에 이르게 된 일대 변화는미국 개신교 세력의 신속한 확장을 가져왔다. 1800

년부터 1830년까지 30년동안 미국의 회중교,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는 110만의 신자가 증가

하였고 특히 1826년부터 1830년동안 20만이 증가하였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경의 예언 연구에 몰두했던 미국 동부의 성실한 침례교 신자 윌

리암 밀러(William Millier. 1782-1849)는 1816년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후,더욱 깊은 성

경 연구에 전념하였다, 1818년 그는 다니엘서 연구를 통하여, "2.300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

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8:14)는 말씀의 뜻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그 기

간이 기원전 457년에 시작되어 1843년경에 끝나게 되며 그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성경과 역사에서 예언 해석의 근거와 타당성을 거듭 확인한 후, 그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

졌으며, 1831년부터 그는 견딜 수 없는 사명감을 가지고 말과 글로 그의 깨달음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즉시로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1833년 그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격을 인정받

아 침례교의 지방 목사로 인준을 받았으며, 1835년에는 초 교파 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목

사로서의 심임 서를 받았다.조직적이고 빈틈없는 다니엘서의 예언들에 기초한 밀러의 가

르침은 각 교회들로부터 대대적인 호응을 얻어, 이름이 확인된 숫자만도 174명이나 되는 목

사들이 재림 운동의 지도자로 참가했는데 감리교와 침례교 개혁 교회 퀘이커교 출신도 포함

되어 있었다.밀러는 이들과 함께 13년간 (1831-1844)지칠 줄 모르고 재림의 임박함을 전

파한 결과 최고 13만 5천명으로 추산되는 재림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

다.

 

그러나 그들이 거듭 확인했던 1844년 10월 22일에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지 않으셨으며 그

결과는 예언된 대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서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계10:10)는 쓰디쓴 대실 망이었다. [자세한 배경과 해석은 전장의 성소

제도와 구속의 계획, 6, 7참조] 그러나 그것은 쓰디쓴 실망으로 끝날 성질의 우발적인 운동

이 아니 였고,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백성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계10:11)는

숙명적인 운동 이였기 때문에 역사는 다시 계속되었다.

 

내용출처 : 신계훈저 어둠이 빛일 이기지 못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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