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벽 06시 수타원 법당에서 경종 타종소리에 눈을 떱니다,
순타원님의 목탁소리가 들려옵니다,
부지런히 일어나 세벽기도 마치고
(아침 밥 기분좋게 얻어 먹을려면 힘든 날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휴대폰 앱을 크릭하여 약 50분동안 나만의 고요한 마음으로 금강경속의 수보리가 되어봅니다,
그리고 반야심경도1독 합니다, 일원상 서원문 1독 하고 옥상에 올라가 무밭에 물주고 내려와
아침식사를 합니다, (이것이 제 하루를 시작하는 일과입니다.)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인터넷으로 오후 뉴스 와 경제뉴스 정리하고,
짬 나는 데로 금걍경 사경도 합니다,
잠자기 전에 심고 마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내 몸과 마음을 갈무리 하고,
금강경, 반야심경을 들으며 잠을 청합니다,
저의 마음공부는 수타원의 주지 보살이신 순타원 주지님과 함께
조석심고, 법회출석, 보은헌공, 입교연원의 네가지 사종의무를 이행합니다,
공부 길로 삼학팔조의 수행으로 뚜렷한 일원상의 본심을 찾습니다,
교도로서 주옥같은 교무님의 설법을 받들고 마음 공부하고 수행하고
사종의무를 잘 지켜야 교단이 발전하고 각자의 인격과 법위가 향상됩니다.
공부로는 요즘은 금강경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이라는 것이 우리 자성을 금강이라 하는데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 가운데
금강경과 반야심경이 최고 정수가 된다고 대산 종법사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대산종법사 법문집 제5집 제2부 연도 수덕편 2장 호념편. 74p)
대산 종사님께서는 금강경은 대종사님께서 몽중에 보셔서 일산 이재철 대봉도님께
불갑사에 가서 가져오도록 하셨다,
대종사님께서 금강경을 연원경으로 잡으셨고 정산종사님께서 표준을 잡아 주셨으니
그 뜻을 알아야 한다, 여래. 두 글자면 끝난다, 여여(如如)히 온다,
그것 알아 버리면 되는 것을 무엇을 알려고 하는가, 하셨습니다,
육조대사도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진리를 깨달았다,
금강경이 최존, 최고, 최귀의 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바로 그 '무엇'의 실체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내가 목숨 걸고 쟁취하려 했던 바로 그 '무엇'이
사실은 그렇게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바로 그 '무엇'에 대한 괴로움은 끝이 나는 것이다.
여여(如如)하게 무아로 돌아가는 공부를 하라고 대산종사님 말씀입니다,
육근(-안.이.비.설,신,의)과 육경(명색 名色-색.성,향,미,촉,법)이 접촉(촉 觸)함으로는
느낌(수 受)일어나고 그에 따라 좋고 싫은 애욕과 증오(애 愛)가 일어나고,
그럼으로써 집착(취 取)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온갖 업( 유 有)을 짓게되어
생로병사(생 生,노사 老死)의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저는 나의 마음에 이 경을 표준을 삼고 자성불의 마음 쓰는 길.
무념으로 들어가는 마음공부를 이 금강경 대의를 표준 잡아 활용하고.
또한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그 마음을 내고 있습니다,
是故로 須菩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生淸淨心이니
불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런고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색에 주하여 마음을 내지도 말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와 맛과 부딪침과 법에 주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금강경 제10분에 장엄정토분-
이 뜻은 ‘평소 생활 속에서 淸淨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청정한 마음은 곧 自性이다.
자성은 본래 청정하므로 그 청정한 자성을 바로 보아야 한다.
자성을 바로 보는 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며, 이것이 깨달음이다.’일 것입니다.
경은 이어서 청정한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색, 성, 향, 미, 촉, 법 즉 6境(塵)에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되므로,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이 순수한 平常心으로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평상심이란 무엇입니까?”
“졸리면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다.”
“더우면 부채질하고, 추우면 전기날로를 쬔다.”
사랑하고 삶에 열정은 가지되 집착하지 않고 자신을 비워내는 연습
이것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것이라 생각합니다.
조바심과 초초를 버리고 더욱 더 큰 고독을 선택하고 여유를 갖는다는 것
즉 현실적으로 이야기 하면
“싫다,좋다,내것이다,주관이다,객관이다,나쁜사람,착한사람”이라는 등등의 분별심을 버리는 것.
무상은 無我의 다른 표현입니다.
금강경에서도 四相에 젖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四相에 젖으면 자체가 無我와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육경(六境)에 주(住)하지 않고 그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육조혜능 스님이 견성한 문구입니다.
이 뜻은 진공에 바탕해서 마음을 내라는 것으로
〈정전)수행편 무시선법에서 진공(응무소주)으로 체를 삼고
묘유(이생기심)로 용을 삼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정전)상시훈련법 상시응용주의상항 1조 '응용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응무소주)
취사(이생기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가 있습니다.
진공이 되지 못하면 우리는 관념에 끌려 살게 됩니다.
관념은 자기도 모르게 형성된 마음의 집착입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원만한 사람이 되어 넓은 지견을 얻고자 하면 반드시 한편에 집착하지 말라.
(대종경 수행품 27장,)
한편에 집착하지 말라.
청정삼매. 무쟁삼매 이 부분을 상시응용주의사항 6조로 유무념 대조하여
최고 진리인 교화 일합상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절대 2015년부터 무쟁으로 생활해 보자로 계획을 잡고 현제까지 무쟁삼매의 목표로 있습니다,
무쟁삼매를 얻은 수행자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 수행자들 중에서 금강경의 수보리가 제일이라고 부처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수보리 자신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부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수보리가 기뻐하였다면 즉각 4상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의 상도 내지 않았을 때 비로소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합니다.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이룬 이는/화해(和解)를 빚어내어 상생(相生)의 길을 열 것이며/
탐욕 속에 들어 있는 이타(利他)의 덕성(德性)을 깨달은 이는/
평화와 안락(安樂)을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할 것'입니다, 無諍三昧(업을 무, 간을 쟁, 삼매-)
이처럼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의 상도 내지 않았을 때 비로소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합니다.
무쟁삼매 정신으로 중요한 것이 마음공부요,
마음공부가 바로 입교연원입니다,
우주만물 중에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기가 어렵고,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부처님의 정법회상을 만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아직도 대도 정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일원회상으로 인도해서
영생을 통한 혜복의 문로를 열어주는 것이 나의 소망이자 입교연원입니다.
입교연원은 그 사람의 영생길을 개척해 주는 것이요,
제도 받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복 중에서도 큰 복덕이 되는 것이다.
(금강경 제15분 지경공덕분.) 경을 지니는 공덕. -에도 있습니다,(참조하시고 독송하여 봅시다,)
입교연원은 함께 진급하는 길이요, 함께 성불하는 길이며,
상생상화의 선연을 맺어 가는 길입니다.
소태산대종사님의 구인제자에 근거해서 입교연원은
한 사람이 아홉 사람 이상씩
정법회상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도의 사종의무는 특히 교도가 지키기에 힘써 노력해야 하고,
모든 교도가 함께 잘 지켜갈 때,
구로교당은 무궁한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요,
일원세계가 건설될 것입니다,
저는 연원달기 자성불을 향해서 지성으로 법신불 일원상을 찾으며
늘 법신자리에 나의 마음을 머물게 하며 교화불이 되게 노력합니다,
그러면 사종의무 중 제일 어려운 입교연원을 저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첫째= 일합상 교화. (교화 2단과 함께 일합 상으로 만들자.)입니다,
둘째= 인보교화, (어느때 어느 곳에서 든지 인증받는 주인이 되자,)
셋째= 금강경의 대의 교화,(금강경과 사구게)를 설명 해 줍니다,
(폰 카톡으로 = 금강경, 반야심경, 청정주, 일원상 서원문과 법문)을 전송해 줍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교화에 응하면
넷째= 출석교도로 승화시킵니다,(일원상의 진리, 신앙, 수행,법어, 게송.서원문. 공부합니다, )
1)첫째 일합상 교화. (말씀드리겠습니다,)
–일합상이란 한이치를 뭉쳤다는 말이며 이는 일원상이지요,
열이 아니라 하나다, 하나가 아니라 열이 합한 일합상 자리다,
열이라는 것이 일합상이며 열이 합하는 것이 하나고
열이라는 것이 하나가 된 것이기 때문에 일합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한 사람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서로 힘을 합하여 성공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교화 현장에서도 한 사람이 한 명을 교화하기는 어렵지만
열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한명을 교화하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또 우리의 교화열정을 교화 2단을 중심으로 하여
구로교당 '원구로 300 의 비전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교화대불공의 핵심은 법회출석 향상입니다.
신입교도나 기존교도의 법회출석으로 이끌며
법회를 통한 참다운 진리의 훈련을 받아 세상에 널리 활용하는데 참다운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교화단 활동을 통하여 공부와 친목을 도모하고,
교화단이 어떻게 활동하느냐의 여부가 교화대불공 성공의 열쇠가 됩니다.
미래의 교화단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할까?
단원이 합심하여 스스로 단원을 증가시키고,
스스로 연원단을 생산하여 살아 움직이는 교화 단으로 변하게 해 보자,
살아 움직이는 단이 나와야 다른 단에서 벤치마킹하여 분위기를 바꿀 수 있고,
우리 구로교당의 비전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종경 제15 부촉품 끝장인 19장에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스승이 법을 새로 내는 일이나,
제자들이 그 법을 받아서 후래 대중에게 전하는 일이나,
또 후래 대중이 그 법을 반가이 받들어 실행하는 일이 삼위 일체(三位一體)되는 일이라,
그 공덕도 또한 다름이 없나니라.」 고 하셨습니다,
또한 원기 100주년 월드컵 경기장에서
경산 종법사님께서 도 교화 대불공을 말씀하시었습니다,
2005년에 원불교 인구가 126.000명이였습니다,
2015년에 원불교 인구가 84.000명입니다,
삼분의 일이 줄었습니다,
원기 100주년 행사 준비 10년 동안 열심히 한 결과가 이것입니다,(분발해야 됩니다,)
# 대종경 서품 6장
대종사 앞으로 시방 세계(十方世界) 모든 사람을
두루 교화할 십인 일단(十人一團)의 단 조직 방법을 제정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오직 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모든 사람을 고루 훈련할 빠른 방법이니,
몇 억만의 많은 수라도 가히 지도할 수 있으나
그 공력은 항상 아홉 사람에게만 드리면 되는 간 이한 조직이니라.] 하시고,
앞서 고르신 구인 제자로 이 회상 최초의 단을 조직하신 후
[이 단은 곧 시방 세계를 응하여 조직된 것이니
단장은 하늘을 응하고 중앙(中央)은 땅을 응하였으며 팔인 단원은 팔방을 응한 것이라,
펴서 말하면 이 단이 곧 시방을 대표하고
거두어 말하면 시방을 곧 한 몸에 합한 이치니라.] 하시니,
저는 시방을 곧 한 봄에 합한 이치니라. 하신 법문을 받들어 교화 대불공으로
교화 제2단을 10인 1단으로 승화시켜 일합상으로 만들어 보렵니다,
우선 대산종사님 법문 인보 (人寶. 보배로운 사람, 신,)를 간직하며
내가 우선 훌륭한 인보가 되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연마하며 연원달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2)-(人寶 仁寶 忍寶 認寶)인보교화,
대산 종사께서 ‘인보(人寶)’를 말씀 하셨습니다.
대산 3집 법훈편 324~326
네 가지 인보〔人寶·仁寶·認寶·忍寶〕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보배〔人寶〕인 까닭은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주인이 없으면 세상은 공각(空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배다.
그런데 인보(人寶)의 자격은 인보(仁寶)·인보(認寶)·인보(忍寶)를 갖추어야 한다.』입니다,
원불교 정전 “대종경 서품5장에서 말씀하시었습니다,
대종사님 아홉사람을 먼저 고르시사 회상 창림의 표준 제자로 내정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요. 만물은 사람의 사용할 바이며, 인도는 인의가 주체요.
권모술수는 그 끝이니, 그 대들은 이 뜻을 잘 알아서
영원한 세상에 대 회상 창립의 주인들이 되라 하시었습니다,
그러면 주인은 아무나 되나요?
나 혼자 진급하자고 3종의무만 하면 교당이 영원하나요? (조석심고, 법회출석, 보은헌공, 입교연원)
바로 교화 즉 사종의무인 연원달기입니다,
=사람이 보배로워져야 한다, (신) 인보(人寶)-
음식점에 가면 ‘천객만래(千客萬來)’ 라는 글귀가 있는 곳이 있습니다.
‘천 사람의 손님이 만 번 왔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만 사람이 왔다가 천 사람으로 줄어들면 그 집은 문 닫는 것이고,
천명 손님이 왔는데 그 사람들이 만 번 오면 그 집은 흥하는 집입니다.
물건을 팔 때 그 사람을 진정으로 위해 주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만큼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로교당의 미래는 결국 사람에게 있습니다.
특히 장수시대에 어르신들을 주요고객으로 잘 모시고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나를 좋아하고 잘해주면 반대급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객을 보배로 여겨야 한다는 인보(人寶)법문을 늘 머리에 새겨야 합니다.
다음, ‘어질 인보(仁寶)’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본래 마음을 언제든지 챙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기관에 근무하면서도 늘 마음을 관리하고 도심을 키워 나가야 출가한 보람이 있습니다.
사람 되기 어려운데 이미 되었고, 불법 듣기 어려운데 이미 들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출가하기 어려운데 이미 출가 하였으니
이생에 자신을 제도하지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렸다가 제도 할 것인가?
어려운 출가를 단행하여 나도 구원 받고 다른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서 왔는데
고객 상대하고 이런 일 저런 일로 피곤하다고 밤 수양도 아침 수양도 제대로 못 하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가한 내 인생을 어떻게 잘 가꿔갈 것인가? 젊어서부터 길들이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인(仁)이란 도심(道心)입니다. 공자님의 ‘인(仁)’은 자비심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사실은 사(私)없는 마음 도심(道心)입니다. 사사(私邪)가 끊어진 본래 마음이 인(仁)입니다.
인보(忍寶), 참을 인보입니다,
무쟁삼매(無諍三昧)해야 합니다,
사심 잡념이 없는 그 마음이 바로 도심입니다.
그 마음을 소중한 보배로 여겨야 됩니다. 그 마음을 늘 챙겨야 합니다.
말씀하시기를 『인(忍)은 지도자의 인격이다.
죽음으로써 참고 또 참고 실천하라. 만번 참고 만한번째 못 참으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격이다. 그
러나 만번 못 참았다 하더라도 만한번째 참으면 새롭게 큰 인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남의 일하러 온 사람은 시비에 들면 못참고 넘어지나, 우리는 내일 하러 온 것이니,
어떤 시비도 참고 넘겨야 한다.』
‘참을 인보(忍寶)’(금강경에도 인욕바라밀.)
세상을 살면서 자기 절제를 잘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참는 것은 남을 위해서 참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참음입니다.
참음으로써 ‘나의 인격이 강강해지고 건강해진다’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 참아야 합니다.
인보(忍寶), 참는 것이 보배입니다.
또 하나, 인증 받는다는 ‘인보(認寶)’입니다. (인증,)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인증(認證)은 내가 남을 인증하기도 해야 하겠으나
남이 나를 인증하여 주어야 한다. 인증은 하늘의 인증을 받고, 땅의 인증을 받고,
사람〔大人〕의 인증을 받아야 한다.』
대산종사법어 공심편 6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우리에게 네 가지 인보가 있으니
그 하나는 사람 인자 인보(人寶)요, 둘은 어질 인자 인보(仁寶)요, 셋은 참을 인자 인보(忍寶)요,
넷은 인증할 인자 인보(認寶)니라.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고 바탕이 되는 보물은 바로 세상의 주인인 사람이니,
그 까닭은 크고 넓은 천지 가운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심오한 진리와 무한한 사물이 있지만
사람이 없으면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니라.
하지만 인보(人寶)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짊과 참음과 인증의 보배를 얻어야 하나니,
첫째 어짊의 보배를 갖추라 함은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인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면
천지 만물 일체 생령을 책임지고 구제할 수 없는 까닭이요,
둘째 참음의 보배를 갖추라 함은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비가 있다 하더라도
참고참고 또 참아야 참된 인격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이요,
셋째 인증의 보배를 갖추라 함은 하늘과 땅과 스승과 대중의 인증을 받아야
마침내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까닭이니라.
따라서 우리 모두는 이 네 가지 인보를 갖추어 스승님들께 보은하는 불보살이 되어야 할 것이니라.」
사업도 업소를 열어 놓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구로교당 하면 엄밀히 말해 장사입니다.
구매자의 필요조건에 응해주고 필요한 물건에 정성을 다하면 대중의 신망이 두터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대산 종사께서 말씀하신 인증 받는다는 것입니다.
대산 종사께서 처음에는 인보(人寶), 인보(仁寶)만 말씀하셨는데
다음에 갔더니 인보(忍寶)와 인보(認寶)를 더 해주셨습니다.
현장에서 이 법문을 늘 새기면서 최고의 보물은 연원달기이다. 하시면서 부탁하시였습니다.
(원기100년 2월 8일 보화연합회 신년하례時 내리신 법문)
보물 4가지(인보)로 내가 변해야 인증을 받고 교화가 된다고 생각하여
산악회나 비박이나 친목회나 어디에서도 내가 주인이 되는 인증인보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내가 우선 인증받는 인보로 타의 모범이 되며 어디에서나 주인으로 교화에 임할 것이다 ~ 라고요,
욕됨을 참는 덕행으로 성내기를 잘하는 사람을 교화하며
꾸준하게 정전공부와 지혜로서 마음 살란한 사람들과 어리석은 사람들을 교화하며
주옥같은 교무님의 법문을 받들고 청정한 계율을 받들어 지니며
항상 금강경과 반야심경 그리고 일원상 서원문을 읽으며 신입교도에게 다가가 봅니다,
금강경을 홍보용으로 제일먼저 사용하며.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인증 받는 것이
공양 중에 으뜸이 되며. 정각정행 지은보은 과 불법을 받아 가지므로.
자리이타 정신으로 여러사람을 구원하는 무아봉공으로 교화에 임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3)금강경으로 홍보.(금강경 대의.) 자료입니다,
사구게를 여의여야 백가지 비행이 끊어진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사상을 여의어야 일체 비행이 근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상이 들어 있고 보면 모든 차별관이 생기게 되고.
차별관이 생기고 보면 거침없이 탐. 진, 취의 만행을 감행하기 쉽기 때문이다,
도에 드는 근원은 상을 때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이 사상 외에도 무엇이든 얽매이는 상을 떼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비행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금강경 대의. 가 재료입니다,
1. 제1장. 여래께서 차별 없는 평등 행을 보이심이요,
2. 제2장. 여래께서 호념의 도를 보이심이요,
(언제나 알뜰히 아껴 주시고, 살펴 주시고, 북돋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마음으로 ) 교화상대를 대합니다,
3. 제3장. 여래의 대 원력을 보이심이요,
4. 제3장. 여래께서 상이 없고 흔적 없는 행을 보이심이요
5. 제5장. 여래께서 여래의 실상 자리를 직접 들어 보이심이요,
♥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형상이 있는 바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상이 상(相)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제5분)
6. 제6장. 여래께서 세세생생 삼세 모든 부처님과 심심상연하신 심법을 보이심이요,
7. 제6장. 여래께서 앎이 없이 아시고 봄이 없이 보시는 대 혜안을 나투어 보이심이요,
8. 제7장. 여래께서 오직 하염없는 법으로 차별하심을 보이심이요,
9. 제14장,여래께서
욕됨을 참고 끊임없이 적공하신 대 인욕행을 보이심이요, (성냄,모욕)승화시킴,
10. 제14장. 여래께서 오직 참되고 거짓 없는 행을 보이심이요,
제15장. (금강경 제15분 지경공덕분.) 경을 지니는 공덕. ~법을 전해준다,
11. 제16장, 여래께서 일마다 불공하신 솔성의 도를 보이심이요, (환자, 등 고통받는 분)
12. 제22장, 여래께서 광대무량한 대법량을 보이심이요,
13.제 30장, 천지미분전의 실체와 일념미생전의 소식을 들어 보이심이요,
14. 제10장. 세상을 장엄하다,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제10분)
15. 제26분. 법신은 형상이 아니다,
♥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여래(如來)는 보지 못하리라.(제26분)
16. 제32분. 응화비진분, 응화신은 진실이 아니다,
♥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잠깐이기에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여길지니라.(제32분)
이상은 여래의 참뜻을 밣혀 간추린 글입니다,
이 15장으로 교화에 응하며 나 자신의 마음에 표준을 삼고 활용하고
상시 응용 주의사항 육조 공부로 닦아 나가며
연원달기 = 9인 1단으로 만들기 계속 될 것입니다,
사구게를 수지한다는 것은 복덕제조기(自性)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4)넷째= 출석교도로 승화시키자.
교육은=법신불 일원상에 대한 교육입니다,
신입교도에게 법신불 일원상에 대한 자기 확신을 심어주어야 하는 데
어떻게 심어줄 것인가? 우선 편하게 합니다,
법회출석하여 일원상에 사배부터 ~ 시킵니다,
하나 하나 절대 강요하지 말고 꾸준히 지켜보며 자연적으로 주입시킵니다,
모두가 단의 주인이 되고,
이 회상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의견을 제안하고 서로 지혜를 모아 단을 운영하고
이 회상을 이끌어가는 주인으로 살아가자는 것이 출석교화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단원들의 합력으로 교화하고 세상을 위해 보은하고 봉공하게 이끄는 공부,
시방이 한봄이 되고. (十方一身). 열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의 자각을 하여
형제같은 마음으로 오직 사없는 마음으로 형제같이 운영하자, (모임하고 있습니다,)
법신불 일원상이 무엇입니까?
일원은 법신불이니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자리이며.
나의 참마음이기 때문에 나의 참마음을 알고, 나의 참마음 지키고,
나의 참마음을 잘 쓰면 그것이 바로 [법신불 일원상O]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쉽게 깨닫게 하고 신앙의 대상이고 수행의 표본이라고 외칠 수 있게
진리관이 확립될 수 있는 교육을 확실하게 심어 준다면
구로교당이 살아나고 교단이 살 것입니다,
아무리 바쁜 세상이라 하지만(교당 내왕시 주의사항 5조)
“매 예회 날에는 모든 일을 미리 처결하여 놓고.
그 날은 교당에 와서 공부에만 전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6조=교당에 다녀갈 때에는 어떠한 감각이 되었는지
어떠한 의심이 밝아졌는지 소득 유무를 반조하여 본 후에
반드시 실생할에 활용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가 생활화 되도록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화에 문의가 제일 많은 부분은=
(@.원불교는 뭘 믿나요?
원불교 교표 (圓佛敎 敎標)
동그라미 밖에 있는 건 '연꽃'으로
팔방으로 꽃잎이 펼쳐 있는 건 일원의 진리가
사방팔방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
안에 동그라미는 ' 법신불 일원상 (法身佛 一圓相) '
동그라미 가운데 비어 있는 건 '허공법계 (虛空法界)'를 상징,
동그란 틀은 허공법계를 따라 끊임없이 돌고 도는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인과보응(因果報應)의 진리를 나타냄.
다른 의미에서는 '모나지 않는 둥근 부처님의 마음'이기도 하다.
법신불 일원상을 원불교의 최고 종지로 하여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다.
◈ 원불교가 뭔가요?
마음 밝히고 복 짓는 곳입니다.
마음 공부를 통해서 지혜를 얻어 마음의 자유를 누리고
복 짓는 삶으로 복락이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정신수양(定, 養性, 마음을 맑히는 공부), 사리연구(慧, 見性, 마음을 밝히는 공부),
작업취사(戒, 率性, 마 음을 바루는 공부)
세가지 마음 공부를 통해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고자 합니다. (삼학공부 입니다,)
또한 네가지 은혜(천지님 은혜, 부모님 은혜, 동포님 은혜, 법률님 은혜)를
깨달아 보은하는 것이 곧 불공이 되며
복을 장만하는 길이 되어 복락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제 생각에는 가장 쉽고, 넓고, 깊은 그리고 진보된 종교라고 봅니다.
쉽다-일상생활 속에서 진리와의 하나됨,
깨달음을 구하고 안전한 인격완성을 추구합니다.
교리구조와 내용이 이보다 더 쉬울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으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 분들의 판단 기준은 아마도 서양 종교의 그 것에 집착되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넓다 - 원불교에만 진리가 있고 다른 종교는 모두 열등하다는 식의 주장은
발붙일 수 없는 곳이 원불교입 니다.
원불교 또한 진리표현의 한 노력이며 진리구현의 또 다른 운동입니다.
진리에 근거한 건전한 종교들, 사람들과 낙원건설을 위해 땀흘리며 손잡고 나아갈 뿐입니다.
원불교라는 것이 또 다른 인간의 굴레가 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깊다-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신앙 수행을 통해 들어가다 보면
원불교에서 제시하는 완전한 인격완성,
진리 에 대한 깨달음의 궁극적 목표가 대단히 심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보적이다-다른 종교를 편하하려는 표현은 아니고
다만 102년의 역사를 가진 젊은 종교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교사상적으로 원용회통하며 모든 종교의 장점들을 수용해내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이라는 말을 사용했습 니다.
왜 법당에 불상이 없고 일원상이 있나요? 답=(금강경 제26분)을 설명합니다,
내 스토리에 있는 삼신일불-청화스님글.
청화스님 니르바나 법문을 보내줍니다,
도올 김용옥 스투파. 대승의 기점,(제18장 대승의 기점. ) 영상물도 보내 줍니다,-
쌍민-반야지혜 지니고 중생에게 나아가다,(파일을 보내줍니다,,)
일원상은 = 원불교에서 믿고 닮아 나가는 이 우주의 진리를 모양새로 표현한 것입니다.
말로 이를 때는 '한 둥그런 모양'이라는 뜻으로 '일원상(一圓相)'이라고 하며,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 '법신불 일원상(法身佛一圓相)'이라고도 합니다. 궁극적 진리를 표상했다고 보면 되겠지요.
원불교 창시자인 대종사님의 언행록인 대종경 교의품 3장에 수록된 말씀입니다.
광전(光田)이 여쭙기를「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떠하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네가 큰 진리를 물었도다.
우리 회상에서 일원상을 모시는 것은 과거 불가에서 불상을 모시는 것과 같으나,
불상은 부처님의 형체(形體)를 나타낸 것이요,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心體)를 나타낸 것이므로,
형체라 하는 것은 한 인형에 불과한 것이요,
심체라 하는 것은 광대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하였나니,
곧 천지 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라,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太極) 혹은무극(無極)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혹은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 법신불이라 하였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바로서 비록 어떠한 방면 어떠한 길을 통한다 할지라도
최후 구경에 들어가서는 다 이 일원의 진리에 돌아가나니,
만일 종교라 이름하여 이러한 진리에 근원을 세운 바가 없다면 그것은 곧 사도(邪道)라,
그러므로 우리 회상에서는 이 일원상의 진리로써 우리의 현실 생활과 연락시키는 표준을 삼았으며,
또는 신앙과 수행의 두 문을 밝히었나니라.」
그리고 "이뭣코" 을 참구합니다,
"검기는 칠漆보다 더 검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으니 천지 우주를 두루 비추는 광명光明의 생명生命이여,
또한 하늘을 떠받치고 당幢을 괴고 있는 것,
천지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그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데,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한 그것이 무엇인가를 참구하자는 겁니다.
‘이뭣고’는 나에게 있는 ‘오직 하나의 도리,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 그것이 무엇인가’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이.뭣.고’가 아닙니다.
부처란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상相에 의지해서 공부하면 참공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상相에 의지하지 않고, 자취나 모양도 없고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그 자리,
우리의 본래 성품性品자리에 마음을 고정 시키고 있어야 참선 참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고 보면 참선은 선방禪房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집 안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운전運轉을 하든 밥을 먹든 언제나 우리 마음이 상相에
걸리지 않고 우리 마음이 일체 존재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실상자리,
이른바 생명의 실상자리에 입각立脚하면서 공부하면 어느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교회 다니던 사람이 교화될때는-
비록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어 와서 ‘주님!’ ‘하나님!’ 하는 것이 더 좋은 사람들은 말은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모든
상을 떠나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에 두고‘오 주여!’ 해도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른 똥 막대기’라는 화두에서도 입증立證 됩니다.
운문雲門 스님한테 가서
‘여하시 불[如何是佛]잇고’ 하니,
‘똥 마른 막대기라[乾屎橛]!’ 하였는데,
상相을 떠나버린 자리에서는 마른 똥 막대기가 되었든
또는 쇠막대기가 되었든 상관相關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느 경을 제일 좋아하나요?
-청정주를 매일 기쁠때나 괴로울때나 독송합니다,
법신청정 본무애 아득회광 역보여. 태화원기 성일단 사마악취 자소멸,
법신불은 청정하여 본래 걸림이 없으니. 나 또한 회광반조하여 보니 청정법신불이네,
태초에 신령 스러운 기운이 둥글게 하나로 뭉쳤으니. 삿된 마귀와 지옥 중생이 자연히 소멸되는구나,
금강경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은 어느 부문인가요?
-금강경 제 28분 -(불수불탐불. 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는다,)
만약에 보살이 황하의 가득찬 모래와 같은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 보시하드라도
일체법이 무아임을 알고 또 인욕바라밀을 성취한다면 이 공덕이 휠씬 뛰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수보리야, 보살은 지은 바 복덕을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 청정 무쟁삼매입니다,
◈ 누굴 믿나요?
인격체, 신격체를 믿지 않기 때문에 '누구를' 믿는다는 말보다는 '무엇을' 믿는다는 말이 맞겠지요.
【원리편6장】말씀하시기를「사람도 보지 못한 사람을 이름으로만 있다고 일러 주면 허허해서 알기가 어려우나
사진으로 보여 주면 더 절실히 알게 되는 것 같이 대종사께서는 일원상으로 진리 그 당체의 사진을 직접 보여 주셨으므로
학인들이 그 지경을 더우잡기가 훨씬 편리하게 되었나니라. 일원상은 곧 진리 전체의 사진이니,
이 진리의 사진으로써 연구의 대상을 삼고 정성을 쌓으면 누구나 참 진리 자리를 쉽게 터득할지라,
대종사께서 "과거 회상은 일여래 천보살 시대였으나 앞으로는 천여래 만보살이 출현하리라"하셨나니라.」
【경의편40장】객이 묻기를「귀교는 무신입니까,유신입니까.」 답하시기를
「우리는 어디에 따로 계시는 인격적 신은 인정하지 아니하나,
우주를 관통하여 두루 있는 신령한 진리는 이을 인정하나니,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여 우주의 그 진리를 이용하며 그 위력을 얻자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니라.」
또 묻기를「귀교는 유심입니까,유물입니까.」
답하시기를「물심일여으로 보나니, 우주만유의 본체는 물과 심이 둘이 아닌 동일체이나
운용하는 데 있어서는 심이 체가 되고 물이 용이 되나니라.」
@. 교당에서 뭘 하나요?
교당은 한마디로 마음 공부를 하는 곳이다,
대종경 교의품 29장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물으시기를
[그대들은 여기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하시니,
한 선원(禪員)은 [삼대력 공부를 한다 하겠나이다.]하고,
또 한 선원은 인생의 요도를 배운다 하겠나이다.]하며,
그 밖에도 여러 사람의 대답이 한결같지 아니한지라,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말이 다 그럴 듯 하나 나도 또한 거기에 부연하여 한 말 하여 주리니
자세히 들으라. 무릇 무슨 문답이나 그 상대편의 인물과 태도에 따라
그 때에 적당한 대답을 하여야 할 것이나,
대체적으로 대답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작용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할 것이며,
거기에 다시 부분적으로 말하자면 지식 있는 사람에게는 지식 사용하는 방식을,
권리 있는 사람에게는 권리 사용하는 방식을,
물질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 사용하는 방식을,
원망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감사 생활하는 방식을, 복 없는 사람에게는 복 짓는 방식을,
타력 생활 하는 사람에게는 자력 생활하는 방식을,
배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배우는 방식을,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방식을,
공익심 없는 사람에게는 공익심이 생겨나는 방식을 가르쳐 준다고 하겠노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모든 재주와 모든 물질과 모든 환경을 오직 바른 도로 이용하도록 가르친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마음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공부시키는 곳이라는 말씀이다.
원불교의 수많은 교당과 기관들도 그 존재 이유는 용심법,
즉 마음 사용하는 법을 모든 이들에게 가르쳐 주는 데 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려면 그들이 각자 마음의 정체를 깨닫고
마음 작용의 원리를 깨달아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각 교당들이 우리들 곁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또 교당은 지은보은과 무아봉공 정신을 배우는 곳이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요?"라고 말하기 마련이다.
원불교에선 모든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다고 말한다.
곧 은혜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우리가 입고 살아온 은혜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네 가지 은혜는 원불교 신앙의 내용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천지 자연의 환경에,
자신을 낳아준 조상님들과 부모님들에게,
그리고 수많은 가지를 뻗은 한 그루 나무처럼 서로 도움을 주고 살아가는 동포님들에게,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알려주는 법률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고 보은해야 한다.
이 은혜를 깊이 느끼고 갚아 가는 기쁨의 과정이 바로 보은이고 신앙인 셈이다.
앞에서 말한 "마음공부"가 원불교 수행의 다른 표현이라면
"보은봉공"은 원불교 신앙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은혜를 갚는 방법으로 쉽게 물질적인 보은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보은의 참 의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정신 육신 물질)으로 은혜를 갚아 나가는 데 있다.
자신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소리 없이 기도하는 것도 훌륭한 보은이다.
아울러 교당이 위치한 지역사회를 위한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전개하는 것도
훌륭한 보은봉공임에 틀림없다.
땀흘려 일한 노력의 대가를 희사하여 좋은 목적 사업에 쓰일 수 있도록 하는 행위도 역시 보은봉공이다.
@.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마음공부"를 해야하고
"나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보은봉공"을 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하는 곳이 원불교 구로교당이다.
@원불교에 오면 행복해 진다.= 왜 그런가?
행복의 공식1입니다.
건축하는 이야기
연애편지를 써 보셨나요? 썼다가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하는 편지
대종사님의 연애편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쓰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돈일 것입니다.
일을 하고 돈을 받고, 그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사고.
그러면 우리는 돈을 쓰는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을 쓰는 것일까요?
칼이 요리사에게 쥐어지면 사람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주지만,
강도에게 쥐어지면 해악을 주고 결국은 자신도 다치게 됩니다.
그 칼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요리사나 강도가 사실 칼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나의 공부 강령은 마음의 원리를 알아 마음을 잘 쓰라는 것이다
(선외록 생사인과장11)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사서 처음 사용하려면 먼저 사용설명서를 봅니다.
그러나 두꺼운 사용설명서를 처음부터 꼼꼼히 읽기 시작하다가 지쳐버리고
던져 버린 경험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래서 요즘 대기업 제품들은 고객 중심으로 주로 사용하는 키포인트만 모아서
한 장으로 만들어 코팅을 해서 제품 옆에 항상 두고 수시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종사님도 고객 중심으로 새 시대의 성자이기에 이와 같은 배려를
『정전(正典)』속에 해 놓으셨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리 전체가 마음공부이지만,
일상수행의 요법은 경계마다 바로 쓸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행복의 공식입니다.
그 속에서도 마음의 성질과 사용법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어떻게 생겼나요?
진짜 우리 마음은 어떤 것인가요?
언제 행복합니까? 내 마음대로 되었을 때라고 말씀드렸구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요?
한 번 마음을 찾아봅시다. 내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가슴에 있나? 머리에 있나?
그럼 먼저 지금 느낌을 말해봅시다.
마음은 작용하는데 있습니다.
즉 마음은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우리의 마음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입니다.
밉고, 예쁘고, 옳고, 그르고, 화나고, 짜증나고, 즐겁고 등등으로 변화무쌍하고 다양하게 나타나는 마음은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스스로가 마음의 주시자가 되면
일어난 마음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깨어있는 주의심은 마음과 그 속의 사념들,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몰아냅니다.
마음을 보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라본다는 게 뭘까요?
바라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마음이 일어날 때,
그것에 관해 생각한다면
그 때는
그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일어나고 있는 그 마음을
간섭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는 것.
일어나는 마음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경계를 따라 있어질 뿐입니다.
그 경계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면
내가 그 경계를 붙들고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수행품 1장에서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미묘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챙기지 아니하고 어찌 그 마음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또한 이 챙기는 마음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상시 응용 주의사항과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을 정하였고, 그대 들은 이 법대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하루 속히 초범. 입성의 큰 일을 성취할지어다, 하였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에서
심지는 마음땅! 선은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인가?
@.불상에 절하지 않고 동그라미에 절하면 복과 소원을 들어주나요?
답1=대종경 교의품제6장,
대종사님께서도 법당에 모셔진 일원상은 참 일원이 아니요
오직 일원의 상징이라 하시고 그 상징의 일원상을 통하여
참 일원을 깨쳐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답2=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
옛 부처님 나기 전에도 응연하게 한 상은 둥글었네.
석가모니 부처님도 알지 못하는걸 어찌 가섭이 전할까?
@.원불교에서는 신부, 스님 같은 분을 무엇이라 부르나요?
문답=원불교 교무를 비롯해 스님, 신부, 목사 등은
그 종교의 교리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온전하게 하는~
답1=
교무님은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며
千手와 天眼으로 돕고 거드는 관세음보살이세요.
‘
답2=원불교도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씀은 뭘까?
“사람들이 가진 것 가운데 무엇보다도 시간이 소중해요.
저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한 번도 보지 않았어요. 일평생 시간을 잘못 쓴 일이 없어요.”
큰 어른들은 어쩌면 이리 한결같을까.
법정 스님도 ‘시간은 목숨이다.’고 하셨다. 같은 수도 길을 가는 후학들한테는 어떤 얘기를 할까?
“성공이 거저 오지 않아요. 잘 가꾼 벼를 거둬들이는 농부는 부지런히 피땀을 흘렸기 때문에 알곡을 거둬들이죠.
원불교 대종사님께서는 사람 가운데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이 있는데,
땅 사람은 늘 욕심이 성하고 생각이 비열하고 탁한 기운이 아래로 처지는 사람이고,
하늘 사람은 욕심이 없이 맑고 생각이 고상하고 맑은 기운을 지녔다고 하셨어요. 하늘 사람이 되어야죠.”
그리고 하늘사람이 되려면 교화가 바로 최고의 공부입니다,
~영원한 현역 박청수 교무.
@.시주 돈은 얼마나 내야하나요? 답=유지비 와 자기 취향에 맞추어서요,
@.원불교를 TV에서 봤는데 사드를 반대하드라? 무슨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느냐?
이상한 사이비 아니냐?
@.전라도 종교 아니냐?
@.불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도 아닌 무슨 동그라미 그려놓고 절하고
기도하고 참 이상하드라,)등등,,,,,
교화해보면 별 예기가 다 나옵니다,
그래도 절대 얼굴하나 변하지 않고 고요하게 답을 주면서 슬기롭게 승화시키고 이해시키는 공부
이 공부가 바로 인욕바라밀을 덤으로 공부하는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공부를 느끼는 순간
나는 넘 기쁘게 이 행복을 만끽합니다,
금강경 제32절.(응화비진분=신수봉행입니다,)은 전부 무상의 뜻을 총 결산하고 있습니다,
처음은 이 경을 수지 독송하고 해설하는 공덕을 찬탄하고,
중간은 설법하는 궤칙을 밝히고
끝에는 실상을 제대로 보는 묘한 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디에 머물든 벽을 쌓은 상을 쌓지 말며
한결같이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 이 금강경의 천체의 뜻이라 생각이 듭니다,
~~~~~~~~~~~~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무량 아승지 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가지고 보시한다면
그 얻는 복덕이 매우 많다 하리라.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어 뭇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한다면
이 금강경 혹은 금강경 안에 있는 4구게 등을 믿고 실천하고 염송하고,
이미 수지 독송하여 스스로 그 자성을 보고 타인을 위해 부연 강설하여 사람마다
자성을 보게 하여 자타가 함께 이롭게 한다면 그 복이 저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해야 하는가?
이 경을 설하는 자는 일체의 법이 본래 공적함을 깨달아 상을 취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참 마음이란 본래 무상보리의 지혜로운 마음을 뜻하며 볼 수 있는 형적도 없고 구할 수 있는
소리나 색상도 없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도 메이지 않고,
색성향미촉법 6진에 머물지도 않는다.
마음에 취할 것이 없어 향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며 상주하여 동요하지 않는다.
중생을 제도하고도 제도한 중생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 장엄을 하고도 보시 장엄했다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왜 상에 머물지 말고 설법을 해야 하느냐 하면
일체 함이 있는 법은 모두가 허망하여
꿈같아 참되지 않고 환상 같아 실답지 않고,
물거품 같아 쉽게 흩어지고 그림자 같아
잡기 어렵고 이슬 같아 사라지고, 또한 번개와도
같아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응당 일체법을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금강경 제32분-"응화비진분"
◈ 사이비 아닌가요?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을 쉽게 풀어보면 '그럴 듯 한데 사실은 아닌 것'쯤 될까요?
남들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하면서 소수 집단의 배만 불린다.
헌금을 강조하면서 그 헌금을 헛되이 써버린다.
절제와 규범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는 도덕적 해이와 일탈을 일삼는다.
건전한 사회규범에 반한다. 상식을 너무나 벗어난다. ...
뭐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는 길을 제시한다든지...
원불교가 사이비가 아닌가 궁금하시다면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직접 관찰하고 체험해봐야 할 것 같네요.
물론 시간 낭비를 줄이시려면 믿어볼 만한 종교라는 제 말씀을 한 번 믿어보시는 것도 좋구요.
【교의품3장】광전(光田)이 여쭙기를「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떠하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네가 큰 진리를 물었도다.
우리 회상에서 일원상을 모시는 것은 과거 불가에서 불상을 모시는 것과 같으나,
불상은 부처님의 형체(形體)를 나타낸 것이요,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心體)를 나타낸 것이므로,
형체라 하는 것은 한 인형에 불과한 것이요,
심체라 하는 것은 광대 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하였나니,
곧 천지 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라,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혹은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 법신불이라 하였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바로서 비록 어떠한 방면 어떠한 길을 통한다 할지라도
최후 구경에 들어가서는 다이 일원의 진리에 돌아가나니,
만일 종교라 이름하여 이러한 진리에 근원을 세운 바가 없다면 그것은 곧 사도(邪道)라,
그러므로 우리 회상에서는 이 일원상의 진리로써 우리의 현실 생활과 연락시키는 표준을 삼았으며,
또는 신앙과 수행의 두 문을 밝히었나니라.」
원불교를 미신이라 하면?
답=14장에 보면 "미신이 따로 없나니라.
모르고 믿으면 미신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원상의 신앙을 그냥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의 차이점과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정산종사님의 본의가 궁금합니다.
정법을 만나는 것은 인연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서로 자기가 정법이라고 합니다. 정법이냐 아니냐는 딱 판가름이 납니다.
혹세무민(세상을 혹하게 만들고 어리석게 만듦)하는 종교는 정법이 아닙니다.
한편 기인취재(사람을 속이고 재물을 취함)하는 종교도 정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처음 만난사람이 다짜고짜 돈에 관한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의 말을 신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알고 만나야 제대로 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모르고 믿는 경우가 많기에 결국은 인연에 따라 종교를 믿게 됩니다.
원불교는 ‘신(믿고)-해(해석하고)-행(실천해서)-증(증득한다)’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은 감정으로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이성이 동반된 신앙입니다.
감정에만 치우친 신앙은 편착된 신앙입니다.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는 내용을 알고 공부를 해야지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응용이 되지 않습니다
◈ 원불교는 몇개나 되나요?
교화사업을 주로 전개하는 교당은 국내에 506개, 해외 11개국에 46개, 복지관, 어린이집, 교육기관, 문화기관, 단체등 기관이 190개가 있습니다.
◈ 수행법은요?
원불교의 수행법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다양합니다. 마음의 자유와 완전한 인격완성을 목적하는 우리 원불교는 마음공부를 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는 데, 그 마음공부에는 세 가지가 있지요. 마음을 고요히 가라 앉히고 맑히는 정신수양(精神修養), 지혜를 밝히는 사리연구(事理硏究), 몸과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는 작업취사(作業取捨)가 그 것입니다.
각각의 과목들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정신수양을 위해서는 좌선과 염불을 하며, 사리연구를 위해서는 경전·강연·회화·의두·성리·정기일기를 하며, 작업취를 위해서는 상시일기·주의·조행 등의 가목이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정신수양를 하고 낮에는 자신과 공익을 위해 보은노력하며 밤에는 참회반성하는 일과를 지킵니다. 그리고 일정기간을 정해서 전문적인 자기 충전의 시간, 정기훈련을 합니다.
【서품19장】대종사 또 말씀하시기를「과거 불가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혹경전을 가르치며, 혹은 화두(話頭)를 들고 좌선하는 법을 가르치며, 혹은 염불하는 법을 가르치며, 혹은 주문을 가르치며, 혹은 불공하는 법을 가르치는데, 그 가르치는 본의가 모든 경전을 가르쳐서는 불교에 대한 교리나 제도나 역사를 알리기 위함이요, 화두를 들려서 좌선을 시키는 것은 경전으로 가르치기도 어렵고 말고 가르치기도 어려운 현묘한 진리를 깨치게 함이요, 염불과 주문을 읽게 하는 것은 번거한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애착 탐착이 많아서 정도(正道)에 들기가 어려운 고로 처음 불문에 오고 보면 번거한 정신을 통일 시키기 위하여 가르치는 법이요, 불공법은 신자의 소원 성취와 불사(佛事)에 도움울 얻기 위하여 가르치나니, 신자에 있어서는 이 과목을 한 사람이 다 배워야 할 것인데 이 과목 중에서 한 과목이나 혹은 두 과목을 가지고 거기에 집착하여 편벽된 수행 길로써 서로 파당을 지어 신자의 신앙과 수행에 장애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이 모든 과목을 통일하여 선종의 많은 화두와 교종의 모든 경전을 단련하여, 번거한 화두와 번거한 경전은 다 놓아 버리고 그 중에 제일 강령과 요지을 밝힌 화두와 경전으로 일과 이치에 연구력 얻는 과목을 정하고, 염불·좌선·주문을 단련하여 정신 통일하는 수양 과목을 정하고, 모든 계율과 과보 받는 내역과 사은의 도를 단련하여 세간 생활에 적절한 작업 취사의 과목을 정하고, 모든 신자로 하여금 이 삼대 과목을 병진하게 하였으니, 연구 과목을 단련하여서는 부처님과 같이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 하는 연구력을 얻게 하며, 수양 과목을 단련하여서는 부처님과 같이 사물에 끌리지 않는 수양력을 얻게 하며, 취사 과목을 단련하여서는 부처님과 같이 불의와 정의를 분석하고 실행하는 데 취사력을 얻게 하여, 이 삼대력(三大力)으로써 일상 생활에 불공하는 자료을 삼아 모든 서원을 달성하는 원동력을 삼게 하면 교리가 자연 통일될 것이요 신자의 수행도 또한 원만하게 될 것이니라.」
◈ 불교인가요?
불교적 진리를 공유하고 기본적인 사상의 토대를 함께 한다는 면에서는 당연히 불교입니다.
그러나 기본 교리와 제도, 교단, 교조, 교전(경전)등 내용적인 면을 보면 전통적인 불교를 혁신한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한 새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종교라는 면에서는 민족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모든 종교의 교지도 통합 활용한다'는 입장과 현대사회에 맞는 교리와 미래지향적 교리 등은 독자적인 세계 종교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경의편39장】시자 사뢰기를「우리 회상을 과거 회상의 한 종파로 아는 이가 있나이다.」
말씀하시기를「과거 부처님께서 바라문의 교리를 인순(因循)하신 점이 있고,
예수께서 구약(舊約)을 연원하시었으되,
불교나 기독교를 과거의 한 종파라 하지는 않나니라.」
또 사뢰기를「과거 교법과 우리 교법과의 관계는 어떠하나이까.」
말씀하시기를「주로 창조하시고,혹 혁신,혹 인용(因用) 하셨나니라.」
◈ 다니면 뭐가 좋은가요?
불치병이 낫고 갑자기 큰 행운이 찾아오고 모든 고통이 일시에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깊은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삶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며
마음과 몸을 진리에 맞게 사용할 줄 알게 되어 생활 전반이 안정되고 지혜로와 지며
바르게 전개되어 결국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마음공부로 자유를 맛보게 되며 복을 짓는 방법을 알게 되어 심신간에 복락이 넉넉한 살림살이를 하게 됩니다.
나무아미타불은 무슨 뜻일까?
길을 걷다 보면 손에 염주를 찬 사람을 제법 많이 본다. 종교가 불교인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단순히 장신구로서, 혹은 무사(無事)를 바라는 마음으로 걸고 다니기도 한다. 염주, 108배, 나무아미타불.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진짜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염주는 어디 쓰는 물건인고?
염주는 ‘수주’라고도 한다.
실에 보리수 열매나 수정 구슬 등을 여러 개 꿰어 그 끝을 맞맨 것으로 불보살에게 절하거나 염불할 때 엄지손가락 끝으로 한 알씩 넘기면서 그 횟수를 세기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힐 때 엄지손가락 끝으로 한 알씩 넘기기도 한다.
구슬 수는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개를 비롯해서 다양한데 15개 남짓한 것을 단주, 합장주라고 한다
원불교에 가면 보이는 ‘원(o’)자는 무엇을 뜻할까?
원불교 교법과 사상의 근간이 되는 일원의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동그라미 모습으로 형상화시킨 종교적 상징입니다.
원불교의 원은 원만하고 두렷하고 온전하다는 의미와 하나로 통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이고 우주 만물에 두루 통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법신불 일원상이라 하여 세상의 진리를 상징합니다.
법이란 우주의 진리 또는 부처의 가르침을 말하고
신이란 육신을 말하며 불은 부처,즉 깨달음을 말합니다.
원불교의 원은 법, 신, 불이 각각 다른 것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원상은 상징이며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마치 기독교에서 십자가 상은 걸어두나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상징하는 예수를 믿는 것처럼 일원상을 걸어 두지만 이는 우주의 진리를 상징화 한것일 뿐 이를 신앙하지 않고 일원상이 상징하는 법신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여 믿고 있습니다. 저 일원상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는 의미에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을 뜻합니다.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라고 밝혀집니다. 이 말인 즉슨, 우주만유의 본원이라면, 곧, 나의 본원, 곧, 성품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제불 제성의 심인이라면, 일체 모든 부처님과 성현님의 마음이되겠지요, 그리고,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면, 부처와 중생의 자리에서 보면 깨닫지 못한 사람을 중생이라고 할텐데, 이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본성이 일원의 자리입니다.
Q. 왜 원불교인가?
원은 불생불멸 인과보응의 진리
불은 깨달음
교는 가르치고 배운다는 뜻입니다.
Q. 불상이 없는 불교?
석가모니부처님은 신이 아니기에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형상을 만들지도 않습니다. 다른 부처님이나 보살님,
신장 들도 마찬가지죠.
원불교에선
○ <일원상>이라는 원형을 걸어놓는데,
이는 불생불멸-나고 없었지는 것은 없고 오로지 변화할 뿐,
모든 것은 돌고 돈다.(화학과 물리의 질량보존의 법칙, 에너지보존법칙을 생각하시면 쉬울 듯),
인과보응. 그리고 모나지 않는 부처님의 둥근마음을 표현한 심볼입니다. 또한 만물의 본원이고 등등 여러가지 정의가 있지만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쉽게 하겠습니다.
○ 은 개교 후 4년째 되는 해 처음 구상 하셨고, 정식으로 봉안 된 것은 개교 20년째 되는 해 입니다. 원불교라는 교명은 개교 후 33년 되는 해 공식으로 선포됩니다.
Q. 원불교의 내세관
이 점이 다른 종교와 가장 대비되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내세관
대종사께선 사람들이 이승/저승으로 세상을 나누지만, 실은 사람이 죽어서 어디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서 있으면 이승이요, 죽어서 있으면 저승이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이 육신과 갈릴 때는 육신의 기식이 완전히 끊어진 뒤에 뜨는 것이 보통이나, 아직 육신의 기식이 남아 있는데 영혼만 먼저 뜨는 수도 있으며(요즘 말로 '뇌사'), 영혼이 육신에서 뜨면 보통 칠칠일(49일) 동안 중음으로 꿈꾸듯이 돌아다니다가 임신 3개월쯤되는 태아에 탁태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임신 3개월은 임신기간의 3할로 현대 생물학에선 모든 동물이 임신기간 중 3할의 기간이 지나면 모든 형체가 갖춰지고 이 다음 성장만 한다고 합니다.
Q. 원불교의 천국과 지옥
불교의 육도처럼 원불교에서도 육도가 있습니다. 천상-인간-축생-수라-아귀-지옥
그중에서 천국(극락,천상,천도)과 지옥을 많이 알고 계셔서 이를 설명하겠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승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에 천국과 지옥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이 곧 천국과 지옥입니다.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상한 부모 밑에서 사랑 받으며 사는 것이 천국이고,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나 무책임한 부모 밑에서 학대 받으면서 사는 것이 지옥입니다.
이 세상에 잘 사는 사람의 비율이 적은 이유는 그 만큼 살아 생전에 착한 일하면서 복 지으며 사는 사람의 비율이 적기 때문입니다.
Q. 그러면 돈많지만 못된 사람와 가난하지만 선량한 사람은?
기독교는 성악설로 모든 이가 원죄를 안고 태어나지만,
원불교에선 사람의 최후 일념을 중요시 합니다.
한 평생 남을 도우면 착한 일을 하며 복을 짓는 사람이 늙어 죽음을 기다릴 때,
'그동안 착하게 살았는데, 남 좋은 일만 하다가 내 인생 끝나는구나.
좀 약삭빠르게 익속 챙기며 즐겨보고 살아볼 걸 너무 바보처럼 살았구나 덧없는 인생이여'하고
죽으면 그 사람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하여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지만,
마지막에 악한 마음을 품고 죽었기에 새로 태어났었도 그 마음에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반대로 온갖 나쁜 짓 하다가 마지막에 그 잘못을 뉘우치며 죽으면
그 나쁜 짓으로 인해 궁핍한 환경에서 태어나지만,
최후 일념을 선한 마음을 갖고 죽었기에 내생에서 받는 몸에서도 선한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선 아무리 살인강도 하였어도 마지막에 눈물로써 진실되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한평생 착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좀 억울하지 않을까요?
이상 입니다.
대한민국에 하도 종교가 많아서 기성종교들과 원불교와의 차이를 쉽게 알아보기 위해
다른 종교와 비교도 하였으나 이는 비판이 아닌 비교로만 봐 주셨으면 합니다.
아! 중요한 교리를 빼먹었네요.
교리 중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처처불상 사사불공>입니다.
뜻은 곳곳마다 부처님이니 모든 일을 불공 드리듯이 하라 입니다.
이는 제 설명보다 경전 속에 나오는 법문이 좋을 듯 하네요.
원불교 교전 대종경 제2교의품 15장
대종사 봉래 정사(蓬萊精舍) 에 계실 때에 하루는 어떤 노인 부부가 지나가다 말하기를, 자기들의 자부(子婦-며느리)가 성질이 불순하여 불효가 막심하므로 실상사(實相寺) 부처님께 불공이나 올려 볼까 하고 가는 중이라고 하는지라,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어찌 등상불 에게는 불공할 줄을 알면서 산 부처에게는 불공할 줄을 모르는가.] 그 부부 여쭙기를 [산 부처가 어디 계시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집에 있는 자부가 곧 산 부처이니, 그대들에게 효도하고 불효할 직접 권능이 그 사람에게 있는 연고라, 거기에 먼저 공을 드려 봄이 어떠하겠는가.] 그들이 다시 여쭙기를 [어떻게 공을 드리오리까. ]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불공할 비용으로 자부의 뜻에 맞을 물건도 사다 주며 자부를 오직 부처님 공경하듯 위해 주어 보라. 그러하면, 그대들의 정성을 따라 불공한 효과가 나타나리라.] 그들이 집에돌아가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몇 달 안에 효부가 되는지라 그들이 다시 와서 무수히 감사를 올리거늘, 대종사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곧 죄복을 직접 당처에 비는 실지불공(實地佛供)이니라.]
대종사께선 불공을 진리불공과 실지불공으로 나누셨는데, 진리불공은 허공법계(세상 모든 기운이 얽히고 통해 있다고 믿음)를 통해 정성을 드리는 것(기도)이고, 또 하나 실지불공은 한마디로 엄한데 가서 수고하지 말고 직접 당처에 정성을 드리라는 것 입니다.
*원불교에선 재가출가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일반재가교도도 법력이 높으면 '법사'나 '종사'도 될 수 있고요.
.*자기에게 이익 되는 바 있으면 자연히 오게 되나니.... [대종경 말씀]
가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오지 않습니다. 몇주 안 나가도 왜 안 나오냐고 전화도 없음. 그런데, 다음 예회 때 나가면 다 기억하시고 그간 바빴냐고 안부를 물어보십니다.
108번뇌에서 왜 하필 108?
108은 중생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마음 작용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108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두 가지를 소개한다.
안, 이, 비, 설, 신, 의의 6근이 색, 성, 향, 미, 촉, 법의 6경을 대상으로 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분별 작용을 일으킬 때, 각각 좋음, 나쁨, 좋음도 나쁨도 아님이 있어 18, 여기에 각각 더러움, 깨끗함이 있어 36, 다시 여기에 각각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 합이 108이다.
또 6근에 각각 괴로움, 즐거움,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님이 있고 또 각각 좋음, 나쁨, 좋음도 나쁨도 아님이 있어 합이 36,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 108이다
○원불교 교전 대종경 제14 전망품 14장
조 송광이 처음 와 뵈오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보통 사람보다 다른 점이 보이니 어떠한 믿음이 있는가.]
송광이 사뢰기를 [여러 십년 동안 하나님을 신앙하온 예수교 장로이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다 하니 하나님이 어디 계시던가.]
송광이 사뢰기를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사 계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대가 늘 하나님을 뵈옵고 말씀도 듣고 가르침도 받았는가.]
송광이 사뢰기를 [아직까지는 뵈온 일도 없사옵고 말하여 본 적도 없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대가 아직 예수의 심통(心通) 제자는 못 되지 아니하였는가.]
송광 여쭙기를 [어떻게 하오면 하나님을 뵈올 수도 있고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길[그대가 공부를 잘하여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그리할 수 있나니라.]
송광 다시 여쭙기를 [성경에 예수께서 말세에 다시 오시되 도둑 같이 왔다 가리라 하였고
그 때에는 여러 가지 증거도 나타날 것이라 하였사오니 참으로 오시는 날이 있사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성현은 거짓이 없나니 그대가 공부를 잘하여 심령(心靈)이 열리고 보면
예수의 다녀가는 것도 또한 알리라.]
송광이 사뢰기를 [제가 오랫동안 저를 직접 지도하여 주실 큰 스승님을 기다렸삽더니,
오늘 대종사를 뵈오니 마음이 흡연(洽然)하여 곧 제자가 되고 싶나이다.
그러하오나, 한 편으로는 변절 같사와 양심에 자극이 되나이다.]
대종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교에서도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이요,
내게서도 나의 심통 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은 저 교 이 교의 간격을 두어 마음에 변절한 것 같이 생각하고 교회 사이에 서로 적대시하는 일도 있지마는, 참으로 아는 사람은 때와 곳을 따라서 이름만 다를 뿐이요 다 한 집안으로 알게 되나니, 그대의 가고 오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이 알아서 하라.]
송광이 일어나 절하고 제자되기를 다시 발원하거늘, 대종사 허락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제자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좀 느끼는 바 있으신지? 스케일 자체가 다릅니다.
다른 종교 배척하지도 않고, 이해하고 인정만 하는 선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과연 누가 저런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의 뜻은?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Snamas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고 귀명, 경례라고 번역한다. 아미타는 amitayus amitabha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인데, 아미타유스는 무량수, 아미타바는 무량광이라 번역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의지하고 예배한다’는 뜻이다.
■ 나무아미타불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
서산대사
(서산대사(西山大師)의『선가귀감』중에서
염불(念佛)에 대한 가르침일부 발췌)
육조 혜능스님께서는
"부처는 자기 성품 속에서 이룰 것이지
자기 밖에서 구하지 말라" 고 가르치신 바가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본심(本心)을 바로 가르친 것이다.
이치대로만 말한다면 참으로 그렇지만,
현상으로는 아미타불의 사십팔원(四十八願)이 분명히 있고,
극락세계가 확실히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일심으로 열 번만 염불하는 이도
그 원의 힘으로 연꽃 태속에 가서 나고
쉽사리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삼세의 부처님들이 다같이 말씀하시고,
시방세계의 보살들도
모두 그 곳에 태어나기를 발원했던 것이다.
더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한 사람들의 행적이
분명하게 전해오고 있으니
공부하는 이들이 잘못 알아서는 아니된다.
아미타(阿彌陀)란 우리말로 "끝없는 목숨(無量壽)"
또는 "끝없는 광명(無量光)"이란 뜻으로,
시방삼세에 첫째가는 부처님의 명호이다.
수행시의 이름은 법장비구였다.
세자재왕(世自在王) 부처님앞에서
마흔여덟 가지 원을 세우고 말하기를
"제가 성불할 때에는
시방세계의 무수한 하늘과 인간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작은 벌레까지도 일심으로 제 이름을 열번만 부를지라도
반드시 저의 세계에 와서 나게 하여지이다.
만약 이 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저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옛 어른이 말씀하기를
"염불 한 소리에 악마들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그 이름이 저승의 문서에서 지워지며
연꽃이 금못에 나온다"하였으며,
또한 "어린애가 물이나 불에 쫓기어 큰 소리로 부르짖게 되면
부모들이 듣고 급히 달려와 구원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임종할 때에 큰 소리로 염불하면,
부처님은 신통을 갖추었으므로
반드시 오셔서 맞아갈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부모보다 더 지극하고,
중생의 나고 죽는 고통은
물이나 불의 피해보다도 더 심하다." 라고 하였다.
만일 누가 말하기를
"자기 마음이 정토 (淨土)인데
새삼스레 정토에 가서 날 것이 무엇이며,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인데
따로 아미타불을 보려고 애쓸 것이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이말이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저 부처님은 탐하거나 성내는 일이 없는데,
그럼 나도 탐하거나 성내는 마음이 일지 않는가?
저 부처님은 지옥을 연화세계로 바꾸기를
손바닥 젖히듯 하신다는데,
나는 죄업으로 지옥에 떨어질까 오히려 겁을 내면서
어찌 그걸 바꾸어 연화세계가 되게 한단 말인가?
저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세계를 눈앞에 놓인 듯 보시는데,
우리는 담벼락 너머의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시방세계를 눈 앞에 본단 말인가.
그러므로 사람마다 성품은 비록 부처이지만
실제 행동은 중생이다.
그 이치와 현실을 말한다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아득하다.
규봉선사가 말하기를
"가령 단박 깨쳤다 할지라도 결국은 점차로 닦아가야 한다."
고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그러면 다시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이라는 사람에게 물어보자.
어찌 천생으로 된 석가여래와
자연히 생긴 아미타불이 있는가?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냥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임종을 당해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큰 고통이 일어날 때에
자유자재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한 때에 만용을 부리다가
길이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후회막급의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이 이미 다 조사이면서도
분명히 말씀하여 왕생하는 길을 간절히 권했거늘,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왕생을 부정하겠는가?"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 법문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세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똑똑히 불러
산란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합치되는 것이 염불(念佛)이다.
◈ 구로교당은 어디에 있나요?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329-14번지 고려대학병원 후문옆 후문약국 담 사이 도로로 진입하여
약 100m 넘어오면 오른쪽에 원불교 구로교당이 있습니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에 일반법회을 보고 있으며 또한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구일어린이집도 운영하고 있어요,
늘 생할속에서 은혜를 느끼며 보은하는 생활,
마음공부로 마음의 자유를 얻는 생활이 되는데 도움을 주는 은혜의 터전이 되도록 하고 싶은 교당입니다,
|
첫댓글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변의품 13장에서 “어떠한 주문을 외고 무슨 방법으로 하여야 심령이 열리어 도를 속히 통할 수 있사오리까”하고 묻는 제자에게 “큰 공부는 주문 여하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사람의 정성 여하에 있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