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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그리웠으면
최원현
마른 참나리 대를 타고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나팔꽃이 앙증스럽다. 아는 수필가가 페북에 올린 사진과 글인데 첫 문장에서 그만 눈이 멈춘다. ‘밖이 얼마나 그리웠으면’이란다. 나팔꽃의 마음이 진정 그러할지는 모르겠지만 안에서 자란 나팔꽃 줄기의 새순이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을 포착하고 그걸 바깥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의 몸짓으로 본 것이다. 거기다 달린 댓글이 금상첨화다. ‘비바람 치는 세상이 그리도 그리웠나 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이 어떻든 그가 보지 않고 겪어보지 않은 세상은 그냥 아름다운 곳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겪어본 사람들은 안다. 얼마나 바깥이란 세상이 모질고 험하고 막되고 무섭고 더럽고 불편한 곳인가를. 물론 다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 더러운 물속에서도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 세상은 그런 곳일 수 있다. 악다구니가 펼쳐지는 세상이란 바깥에서 자신을 끝없이 희생하며 세상을 위해 사랑의 헌신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해서 그렇게 험한 세상이지만 사랑해야 하는 곳, 우리가 살고 살아야 하는 삶의 터다. 하니 미워하기보단 사랑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니 그런 걸 모르는 나팔꽃은 그런 세상이 보고싶고 가고싶은 곳일 게다. 안에 있는 그에겐 밖이 오직 가서 보고 싶은 동경의 곳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그리움에서일 수는 없잖을까. 그리움이란 겪어본 것에 대한 마음의 작용이 아닌가. 그런데도 ‘얼마나 그리웠으면’이라는 표현이 나까지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몰아간다.
사람이란 그리움의 존재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억조차 하기 싫은 것까지도, 너무나 슬퍼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조차도, 너무 원망스럽고 창피스럽던 일까지도, 절망의 깊이가 너무 깊어 들여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던 때까지도 이상하게도 지나 놓고 나면 그마저도 그리워질 때가 있다. 잊고 싶을 만큼 싫은데도 더 잊어지지 않는 것도 과거의 나를 지배하는 것들이 그런 한갓 그리움일 때가 있다. 그러면서 ‘얼마나 그리웠으면’이라고 더듬거린다.
그리움은 결코 큰 소리로 내가 돌아보게 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달려와 나를 아느냐고 혹시 나를 기억하느냐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살그머니 아주 살포시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다가와 수줍게 그것도 슬픈 눈으로 말을 건다. 그래서 그리움이다.
요즘 친구들과 만나면 자식 자랑 아니면 자식 욕이다. 둘 다 별로 듣기 좋은 말들이 아니다. 자랑도 듣기 역겹고 욕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면 얘기한다. 덕 보려고 자식을 낳았느냐고. 씨뿌리는 농사로 생각하면 당연히 무언가를 거두는 게 옳다. 자식 농사란 말도 있지만 그건 어쩌면 생명에 대한 큰 모욕이다. 특히 인간 생명에는 더더욱 그렇다. 물론 잘 지은 자식농사를 자랑하고 자신의 면류관으로 자식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열 달이나 엄마에게 불편스러움과 고통을 주고, 태어나는 순간에도 감당못할 큰 아픔을 겪게 하며 세상에 나온 새 생명의 눈을 부부가 내려다보는 순간 이미 모든 보상은 다 받은 걸로 된다. 그 작은 눈동자에 비친 눈부처를 확인하는 순간 모든 보상, 아니 앞으로 두고 두고도 다 갚지 못할 황홀한 기쁨의 행복이라는 사랑의 부채까지 안는다. 첫 대면의 그 순간만으로도 모든 것이 갚아지고도 남는다. 오히려 사랑의 빚만 남게 된다. 자라고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또 다른 덤의 행복이다.
커피포트를 잘 애용했는데 커피머신을 들여오고 나니 포트를 거의 사용치 않게 된다. 커피포트를 이용하여 난 카누를 즐겨 먹었는데 머신을 들이니 원두커피 쪽으로 더 마음이 가버린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라기보다 하나를 품으려면 다른 하나는 내놔야 한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둘을 다 품으려면 내 가슴이 너무 좁고, 둘을 다 가지려면 내 손이 모자란다. 그런데도 가슴으로만 안 되면 거기 손까지 합세하고, 손으로 모자라면 품에 안으면서까지 손을 끌어들여 욕심껏 채우려 한다. 과욕이다. 또한 크다고 다 좋고 비싼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작은 것을 사면 큰 것을 덤으로도 준다. 하지만 큰 것이라고 작은 것을 덤으로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것의 가치나 값이 큰 것의 몇 배가 될 수도 있다.
아기가 자랄 때는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으로 존재한다. 그게 미운 네 살, 여섯 살을 거쳐 장성하면 결혼을 안 해서 속이 상하고 해도 아이를 안 낳는다 하여 또 속이 상한다. 그러니 나이가 들면 다 할아버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들여다보면 편하고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안이라고 밖과 다를 건 없다. 그런데 자라기를 좋아하는 저 여린 작은 식물은 ‘때는 이때다’ 하고 바깥으로 전력을 다해 몸을 내밀었다. 그걸 본 페북의 주인은 ‘바깥이 얼마나 그리웠으면’이라며 그를 응원했다. 나도 동의하고 공감한다.
젊다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은 새로운 모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비바람이 치는 것을 몰라도 가야 하고 안다고 해도 가야 한다. 내가 이길만하다고 해도 가야 하고 이길 수 없을 것 같아도 일단 부딪쳐 봐야 한다. 그게 삶에 대한 진지한 방향성이고 거룩한 삶에의 태도다. 모르는 곳 안 가본 곳에 대한 동경은 내가 겪어서 좋았던 것보다도 더 본능적인 그리움이다. 그러나 나팔꽃에 대한 생각도 맞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바깥으로 얼마나 나가고 싶었으면 저렇게 온몸을 허공으로까지 내던지는 것인가. 너무 햇볕이 따가와 이내 시들게 될지도, 갑자기 드센 바람에 목이나 몸이 꺾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생명이라는 것은 늘 진지한 도전이다. 무모해 보이더라도 거룩하게 도전한다. 오늘 페북의 꽃이파리 하나가 내게 ‘당신에겐 그리움이 있기나 하나요?’하며 당돌한 질문을 던진다. 글쎄, 난 그냥 네가 부럽기만 하다. 그리움이 있다는 건, 그립다는 것은 멋지게 아름답게 진실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보다 내 사는 것으로 그리움을 만들어 내며 사는 게 삶이지 않을까. (2023.10월호 월간 수필과비평)
창작과 이해의 키워드 - 유한근
하나의 집필 노하우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어떤 장르의 글이든 키워드가 잡히면 술술 풀린다.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많은 작가들도 그러할 것이다. 키워드의 사전적 의미는 ① (주된 사상·주제를 나타내는 핵심어, ② (컴퓨터에서 정보를 찾거나 지시사항을 입력하는 키워드 즉 '열쇠가 되는 언어'이다. 문학에서의 차용 의미도 다르지 않다. 문학작품에게 있어서 키워드는 모티브(창작 계기) 혹은 모티프(화소 혹은 주제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독의 가능성이 많은 작품의 경우에는 그 작품의 키워드를 탐색하는 일은 유익하다. 난해한 작품, 혹은 구조가 입체적으로 은유나 상징구조가 강한 작품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를 전제로 하고 이달의 작품 최원현의 <얼마나 그리웠으면>을 읽으려 한다.
이 수필은 이렇게 시작한다. "마른 참나리 대를 타고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나팔꽃이 앙증스럽다. 아는 수필기가 페북에 올린 사진과 글인데 첫 문장에서 그만 눈이 멈춘다. '밖이 얼마나 그리웠으면‘이란다."가 그것인데, 이 서두 문장을 보면 이 수필의 키워드는 '나팔꽃과 '그리움'이다. 이것이 곧 글감이 되고 모티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읽어 보자.
나팔꽃의 마음이 진정 그러할지는 모르겠지만 안에서 자란 나팔꽃 줄기의 새순이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을 포착하고 그걸 바깥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의 몸짓으로 본 것이다. 거기다 달린 댓글이 금상첨화다. "비바람 치는 세상이 그리도 그리웠나 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이 어떻든 그가 보지 않고 겪어보지 않은 세상은 그냥 아름다운 곳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겪어본 사람들은 안다. 얼마나 바깥이란 세상이 모질고 험하고 막되고 무섭고 더럽고 불편한 곳인가를 물론 다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 더러운 물속에서도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 세상은 그런 곳일 수 있다. - 최원현의 <얼마나 그리웠으면> 서두 부분
위의 인용문을 읽으면 우리의 예측이 비켜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질고 추악하고 험한 바깥세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단락의 문장을 읽으면 우리의 생각은 반전된다.
"사람이란 그리움의 존재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억조차 하기싫은 것까지도 너무나 슬퍼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조차도, 너무 원망스럽고 창피스럽던 일까지도, 절망의 깊이가 너무 깊어 들여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던 때까지도 이상하게도 지나고 나면 그마저도 그리워질 때가 있다. 잊고 싶을 만큼 싫은데도 더 잊히지 않는 것도 과거의 나를 지배하는 것들이 그런 한갓 그리움일 때가 있다. 그러면서 '얼마나 그리웠으면'이라고 더듬거린다"까지 읽으면 이 수필의 키워드는 '그리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움'은 낯익어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사유한 결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그리움을 이렇게 감각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움은 결코 큰 소리로 돌아보게 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달려와 나를 아느냐고 혹시 나를 기억하느냐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살그머니 아주 살포시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다가와 수줍게 그것도 슬픈 눈으로 말을 건다. 그래서 그리움이다."가 그것이다. 이 인식을 독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설명을 부가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이 새롭게 인식한 것을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는 수미상관법칙이 아니라 해도 마무리하기 위해 나팔꽃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나팔꽃에 대한 생각도 맞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바깥으로 얼마나 나가고 싶었으면 저렇게 온몸을 허공으로까지 내던지는 것인가. 너무 햇볕이 따가워 이내 시들게 될지도 갑자기 드센 바람에 목이나 몸이 꺾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생명이라는 것은 늘 진지한 도전이다. 무모해 보이더라도 거룩하게 도전한다. 오늘 페북의 꽃이파리 하나가 내게 '당신에겐 그리움이 있기나 하나요? 하며 당돌한 질문을 던진다. 글쎄, 난 그냥 네가 부럽기만 하다. 그리움이 있다는 건, 그립다는 것은 멋지게 아름답게 진실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얼마나 그리웠으면보다 내 사는 것으로 그리움을 만들어 내며 사는 게 삶이지 않을까."가 그것이다.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생명이라는 가치로 동일화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수필의 모범적인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최원현 수필의 하나의 유형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수필의 본 월평문의 주제와는 별개로도 주목된다. <2023. 11월. 수필과비평>
최원현 nulsaem@hdaum.net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월간 한국수필 발행인 겸 편집인⋅재)국립세계문자박물관 이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역임),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펜문학상⋅대한민국예술문화공로상 수상 외,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누름돌》《고요, 그 후》등 18권, 문학평론집《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 중학교《국어1》《도덕2》중국 동북3성 《중학생작문》등에 수필 작품이,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등에 수필 이론이, 대입 모의고사 문제집 등에 수필이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