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는 학교 안과 밖에서 교육을 개혁하고, 어린이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솟구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 때다. 학교 안에서는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정부와 보수 세력한테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치는 참교육 실천’을 내세워 교사들은 물론 학부모들 지지를 받았다. 학교 밖에서는 국가와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교육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대안 교육이나 대안 학교라고 이름을 붙인 비제도권 교육이다. 학교에 꼭 가야 하고, 학교 졸업장을 받아야 한다는 관념을 깨뜨린 것이다. 제도 교육 안에서 활동하는 전교조나 제도 교육 밖에서 일어나던 대안 학교나 그 지향점은 같았다. 국가나 정부 같은 일부 지배 계층에서 교육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교육의 세 주체인 학생, 학부모, 교사가 모두 참여해서 함께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무한 경쟁에서 벗어나 다른 아이들과 함께 크는 문화를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학교 밖에서 새로운 교육과 생활 방식을 만들어 낸 단체로 사단 법인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을 손꼽을 수 있다. 이 단체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바람직한 공동체 육아, 교육, 문화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과 정책을 연구 개발하고, 그 확산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어린이 복지와 지역사회 복지 증진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목적을 세우고 출발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함께하는 교육, 함께 크는 아이’를 지향하는 단체다. ‘공동육아 협동조합 어린이집’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지금은 공동육아 협동조합 어린이집 60곳을 비롯해 공동 직장 공동육아어린이집, 국공립 공동육아어린이집, 민간 공동육아어린이집, 공동육아 방과후 교실, 지역아동센터, 대안 초등학교를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함께하는 교육’을 여러 곳에서, 여러 부모와 교사들이, 여러 방법으로 시도하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바람직한 모범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다. 비제도권 대안 교육에서는 그 참여 학부모나 교사, 어린이 수, 걸어온 발자취, 어느 측면에서 보나 우리 사회에 단연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가 제도권 교육 정책이나 학교 운영에 학부모가 교육 주체로 참여하고자 한다면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은 학부모들이 직접 교육 주체로 비제도권 교육 공간을 만들어서 함께 교육 과정과 교육 방법은 물론 학교 운영까지 참여한다. 이런 생각은 그 당시에 아주 앞선 생각이었다. 그 뜻을 실천하는 많은 학부모들 덕분에 학교 밖에서 제도 교육과 다른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러 퍼져 나갔다. 이러한 생각이 1990년대에 접어든 뒤, 학부모들이 제도 교육에서 벗어나 스스로 교육 주체로 서겠다는 용기를 내게 했다. 그러면서 이때 여러 대안 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함께하는 교육, 함께 크는 아이’를 지향하는 공동체 교육 운동의 시작은 1978년에 생긴 ‘어린이 걱정모임’이다. 도시 빈민 지역 저소득층 어린이들 삶을 걱정하는 대학생들이 만든 모임이다. 1970년대 하반기는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민주화 운동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때였다. 전태일 열사 이야기가 퍼지면서 노동자와 학생 연대가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노동자, 농민과 전문직을 비롯한 사회 모든 계층으로 사회 변혁 운동이 퍼져 나갔다. 학생 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이 공장이나 탄광에 취직하거나 농민 운동이나 환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서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어린이, 그중에서도 가난한 집 아이들 삶에 관심을 갖는 모임이 생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78년에는 서울 난곡동에 ‘해송유아원’을 세웠다. 난곡동은 서울에서도 손꼽을 만한 빈민 지역이었다. 유아원 이름을 ‘해송’이라고 붙인 까닭은 1920년대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고, 어린이 문학가인 마해송 선생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1984년에는 창신동으로 터를 옮겨 ‘해송아기둥지’라 이름을 바꿔 달았다. 지금은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부설 해송지역아동센터’로 저소득층 자녀 방과후 교실 운영과 교육 모델을 만들어 널리 알리고 있다. ‘해송유아원’이나 ‘해송아기둥지’는 1980년대 빈민 지역 탁아방 정책이나 공부방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방과후 교실’의 개념을 세우는 일과 그 필요성도 1990년대 후반에 이 단체에서 처음 만들어 쓰면서 널리 퍼졌다. 취지나 내용은 좀 다르지만 그 뒤에 제도 교육에서도 방과후 교실을 받아들였다.
이 단체는 세 요소를 조화롭게 운영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책을 제안하고, 그 제안을 먼저 실천해서 모범 사례를 만든다. 또 끊임없이 구성원들을 교육하면서 한데 뭉치게 만들 뿐 아니라 활동가로 키워 낸다. 1990년, ‘탁아제도와 미래의 어린이 양육을 걱정하는 모임’으로 단체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연구 성과를 정책 제안 형태로 발표하였다. 그 정책 제안 발표 내용을 엮은 책이 《우리 아이들의 육아현실과 미래》(탁아 제도와 미래의 어린이 양육을 걱정하는 모임 엮음, 한울, 1991)이다. 많은 학자들처럼 정부 용역을 받아 정책 제안을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안 내용을 직접 실천하였다. 그런 뒤 1992년에 공동육아연구회를 세우고 몇 년 동안 의논을 거친 뒤, 1995년에 서울 연남동에 ‘우리어린이집’이 문을 열었다. 공동육아 협동조합에서 처음 세운 어린이집이다. 당시 나는 준비 모임 때부터 참여해 독일 슈타니어 학교 설립 사례를 소개했다. 슈타이너 학교 초기처럼 우리도 학부모들이 교육 주체가 돼서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교육 공간을 만들어 참여할 학부모들을 한겨레신문에 광고를 내서 공개 모집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한겨레신문에 작은 생활 광고를 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한겨레신문에서 기사로 다뤄 주었다. 이런 까닭에 초기 공동육아 협동조합 어린이집을 설립하는 데 참여한 학부모들 가운데는 한겨레독자와 어린이도서연구회 지역 동화읽는어른모임 관련자들이 많았다. 광고나 기사를 보거나 직접 찾아와 살펴보고, ‘우리도 우리 손으로 우리 아이들을 함께 키울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젊은 부모들이 작은 집으로 옮기거나 전셋값을 줄이면서 참여하였다. 공동육아 협동조합 어린이집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1996년에 사단 법인 공동육아연구원으로 인가를 냈다. 2002년에 사단법인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으로 단체 이름을 바꾼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도 교육이 아이들을 무한 경쟁으로 몰아간다. 우리 소중한 아이들을 사람이 아닌 국가 경제와 특정 계층이 자본을 쌓는 데 이바지하게 만드는 산업 로봇이나 괴물로 키우려고 온갖 술수를 쓰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나고 서글프기도 하다. 그래서 더 공동체육아와 공동체교육 활동가들과 공동체 교육 운동에 함께하는 학부모들이 밝은 희망의 꽃으로 다가온다. 우리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지역 사회를 바탕으로 하는 작은 교육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더욱 빛난다. 그리고 그 열정과 사랑이 담긴 터전에서 함께 크는 우리 아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