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부안면 수동리 대동마을에서 61년도에 태어났다 부모님이 정읍으로 이사를 하셔서 짜장면집을 하셨다 시골집에는 할머니와 우리 형제간 4명은 남겨져 있었다 3살 먹은 동생도 같이 남겨둔 채로 가끔 정읍 가서 엄마·아빠보고 오곤 했다 가을쯤 됐을 땐 나는 정읍으로 먼저 왔다 심부름도 할 겸 해서 그 뒤로 부모님은 더 확장해서 역전 쪽으로 이사를 친구분과 함께 동업을 하셨는데 친구분이 무언가 잘못 하신 것 같았다
다시 시내 터미널 쪽으로 이사를 하셨다 커다란 요정 집을 차리신 것이다 그때 시골에 있던 나머지 식구들이 다 옮겨왔다 가게를 하시기에 우리 형제간들은 할머니랑 같이 생활을 했다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부지런한 난 심부름을 해주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통지서가 나왔는데 4살 차이가 난 언니하고 학교가 달라서 한 살 차이 나는 동생과 같이 다니라고 입학을 안 했다 다음 해에 천방지축인 여동생과 함께 다니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그림 그리기 대회만 나가면 상장은 휩쓸어 왔다 4학년 2학기 때부터 남달리 키가 컸기에 배구부로 가게 됐다 형제들이 많다 보니 모든 걸 양보하는 습성이 있어서 운동 쪽으로 갈려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림대회 안 간다고 4학년 때 담임선생님한테 혼난 적도 있었다 참가비도 내준다고 했는데도 안 나갔다 그때부터 그림은 안 그렸다 어디를 가리 감각은 그래도 남아있는 것을 전국소년체전 전북예선전 3차전에서 우린 부안초등학교에 져서 2명만 그쪽으로 가야 하는데 나 대신 할머니 하고같이살고있는 전주에서 온 애가 대신 갔다 결국 다들 시합도 참석 못 하고 다시 돌아왔다ㆍ나이제한에 걸린것이다 난 희생양만 된 것 그때는 늦게 간 사람들이 많은시절 이었다 후배들을 데리고 한 명씩 가르치기도 했다 어찌 보면 후배 양성한 것이다 운동하고 싶어서 중학교도 미리 이쪽저쪽 갔는데도 못가고 특기생으로 각 학교에서 받아들이는데 한계가 있어서다 정읍여중 특기생으로 들어갔다 정읍여중은 핸드볼이 유명한 곳이다 선수들이 부족해서 우린 그쪽으로 투입됐다 1년여 연습 도중 아무리해도 기초를 먼저 배운 같은 동급생들을 따라 잡기도전에 밀쳐내야하기에 도저히 그쪽은 하기가 싫어서 1학년 2학기 가을에 독한 감기가 걸려서 결석을 하게 됐다 때는 이때다 하고 빠지게 됐다 2학년 때부터는 후배들과 동기생들을 데리고 연습하다 시합 나가서 운 좋게 2등을 했다 그때는 생활 체육들이 엄청 많았다 고창ㆍ부안ㆍ정읍ㆍ 삼군체육대회도 있었다 어찌나 잘했던지 부정선수라고 오해도 받곤 했다 초등시절 꽤 잘했다 키도 크고 선생님들도 다들 인정했었다 고등학교 때도 하고 싶어 이리저리 세 군데를 다녔는데 이미 그때는 운동선수로는 단신이어서 설령 초보자라도 키 큰 사람들을 선택한다 키가 크다 보면 블로킹이라도 할 수 있기에 결국은 운동으로써 학교는 포기했다 중학교 졸업하고 놀고 있던 중 호남고등학교에 야간이 생겨서 그쪽으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주경야독에 꿈을 실었다 8남매였기에 부모님 심정을 헤아려서 부담 안 드리고 혼자 해결 하기로 한 것이다 동생과 같은 동급생이다 보니 수학여행을 한 번도 못 갔다 나는 안 갈 테니 동생은 보내주라고 하고 옷도 나 대신 동생이나 언니를 사주라고 했다 일찍 성숙한 탓에 난 언니 옷을 같이 입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멋쟁이란 소릴 자주 듣곤 했다 아가씨인 언니 옷을 입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요식업조합 수금사원 다니면서 저녁에는 학교에 갔다 1년여 다닌 후 학교에 자리가 생겨서 다시 학교로 옮기게 됐다 선생님들 사소한 일까지 해주는 일이다 원광 보건전문대 임상병리과 야간에 들어갔다 1학년 때는 놀면서 다니게 됐다 2학년 올라가기 전에 언니가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학교를 포기할까 했는데 교수님께서 학교 일자리를 해줘서 다시 다니게 됐다 다음 해 2월 임상병리사 시험이 있었다 나는 여군부사관에 들어가려고 준비를 안 했다 두 번이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교수님이 제약회사에 추천해서 갈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다 할 수 없이 보험회사에 발을 디뎠다 해동화재보험에 화재보험 일반대리점을 교육을 이수하고 취득했다 한동안 다녔다 어느 날 핸드볼 코치를 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체육관에를 갔다 한쪽은 핸드볼 한쪽은 검도 그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몇 번의 만남 끝에 86년 보금 자리를 만들었다 전주에서 3개월 살다가 친정 부모님이 세차장을 하고 계시는데 종업원이 부족해서 운동을 정리하고 전세금마련 하자고 내려와서 3년만 도움주자고 한것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7년동안 임신이 안됐다 3년뒤에 임신했는데 유산이 3번이나 됐다 7년만에 생일달에 임신했다 귀한 자식은 늦게 본다고 했는데 어떻게 7년을 보냈는지 모른다 33살 전에는 품안에 자식은 없다고 했는데 설령 낳은다해도 32살동지를 지내야 한다고 무속인이 말했다 난 믿질 않았다 근데 어찌하오리 그말이 맞았다 92년12월28일 출생했다 모 산부인과친척의사선생님이 하도 이상체질이니 예수병원을 특진받아서 다니라고 해서 정읍에서 전주까지 한달에 한번씩 진찰을 받으러 다녔다 유산경험이 있는 상황이다며16주돼면 수술하자고 했다 수술하면 100퍼센트자신있냐고 물었다 자기네들도 자신할수가 없다고 했다 낳은때까지 누워있고 조심해야한다고 난 안하고 조심한다고 했다 다른사람보다 애기보가 약해서 좀 빨리 출산한다고 했다 날달 다됐을때다 특진하시던 의사선생님께서 덕진쪽에 산부인과를 오픈했다 그쪽으로 진찰받으러 갔는데 애가 이상하다고 예수병원으로 빨리 가라고했다 울면서 부랴부랴 가서 진찰을 했는데 정상으로 돌아왔다 결국에는 12월28일날 출산한 것이다 전에 5개월된 아기도 유산한 쓰라린경험도 있던 병원이다 4ㆍ3kg 건실한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8개월부터 자궁문이 열려서 빨리 출산한다고 했는데 예정일까지 꼬박 채운것이다 3일만 있다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을것을 애무살을 먹은것이다 임신하고 난뒤 세차장은 정리했다 친정 부모님이 벽돌공장을 하고 계셨다 다시 그쪽일을 거두워줬다 아이8개월때 부모님과말다툼하고 난뒤 우린 독립을 했다 동전세탁체인점을 차리게 됐다 셀프식으로 된 것 정읍은 지역이 작아서 다마스를 구입 앞뒤로 광고스티커를 붙히고 수거에서 배달까지 해드렸다 빨래방했을때 딸을 출산했다 남편이 혼자 세탁과배달을 같이 했다 세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날때즈음 검도관을 개관하게 됐다 후배들도 검도관을 하는데 이쪽저쪽 빛을 내서 챙겨줬다 셋째를 출산하고 난뒤 3주때부터 어린애를 데리고 빨래방을 혼자하기 시작했다 차마 시끄럽고 먼지투성인곳에 두질 못해서 옆집 문방구 조그마한방에 잠시 맡겨두기로 했다 울면 지저귀보고 똥을안쌌으면 날 부르라고 했다 배가 고파서 우는것이니깐 순하고 착한아이는먹고자고 잘 자라주었다 두명의자녀는고등학교은사님사문님이 운영하시는 미술학원에 보냈다 그때는 경기가 좋은편이다 지금이 더 어려운것 같다 가끔 출장가면 빨래방일은 잠시 멈추고 검도관 아이들을 태우러 다녔다 학교에서 끝나는대로 시간대 별로 데리러 가야했기에 3년정도 검도관운영한뒤 남편은 전문대를갔다 학비를대주며 다니라고 했다 대학4년 대학원3년을 지원해줬다 그 뒤 시청검도 감독으로 들어갔다 빨래방하면서 애들이 컸다 학교자모활동도 하면서 어머니 배구단을 결성 10년간 운영했다 농협주부봉사활동도 해가면서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일이 터졌다 검도관 리모델링한다며잠시 비워주라고 해서 비워준것이 잘못됐다 사람을 믿었기에 졸지에 쫒겨난것이다 사람말을 믿고 잠시 친정에 3개월만 산다고 했던것이 지금도 친정에 산다 다행히 친정부모님 두분만 살고 계셨기에 가능했다 어수선한 자녀들이라서 할아버지는 짜증을 자주 내셨지만 할머니가 많이 보호해주셨다 다행히 다 키운상태라서 막내가 3살때라 그래도 나았다 빨래를 아파트로 배달하다보면 또래의 아이들 옷이 많이 나왔다 거의 맞을것같은 옷들만 주워와서 세탁해서 입혀서 애들온값은 안들어갔다 아이들도 아예 면역이 된지라 애들도 뒤져서 가져오기도 했다 아니면 주위사람들한테 말해서 얻어 입히기도 했다 어딜갈려면 애들 셋을 데리고 다녔다 어찌나 예쁘던지 힘들줄도 모르고 다녔다 초년시절 배운 배구덕에 자모활동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보냈다 정읍어머니배구 발전을 도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이 순식간에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검도관도 5천만원 들여서 해놓았는데 다른곳으로 옮겨야만했다 저질러만 놓았지 수습이 불과했다 다행히 전문대졸업하고 ㅇㅇ대로 편입하고 코치겸학생으로 들어가서 5년간 다녔다 보증섰던것이 터지는 바람에 또 한번의 위기를 맞아야 했다 8천만원ㆍ2천만원 두사람한테 고스란히 당한 것이다 돈은 돈대로 빌려주고 보증은 보증대로 당하고 검도관도 쫒겨나고 나역시 빨래방위 태권도체육관 관장 편리를 바준다는것이 고스란히 당한 것이다 하나씩 수습과정에서 가을에 여관언니 도우려다 또 한번의멍에를 썼다 동생돈까지 35백만원 날렸다 정신이 없었다 어찌할줄 몰라 (화장품사무실 출근할때다 ) 저질렀다 천만원물품구매해서 지점장간다음 물건을 팔고 다녔다 그때 동거동락했던 그렇게 좋아했던 배구를 접게 됐다 막상 내가 어려우니 그 누구도 도움은 커녕 냉대했다 오히려 모르시는분들이 물건을 사줘서 다 팔았다 그 뒤로 봉사활동으로 노래로 재능기부를 해주고 있었다 노래라도 불러야 살것같아서 같이 운동하던 동생친구가 노래는 좀 했었다 잘해서 노래자랑에 보내면 떨어지곤했는데 어찌나 우쭐돼던지 나도 한번 도전을 해봐야겠다고 하고 참가했다 세정열 린음악회 예선참가 본선에 진출했다 그때 마임화장품사원들이 피켓들고 응원나왔다 떨어졌다ㆍ그럴 수밖에 무대에서 나갈때부터 어찌나 떨었던지 다시 한달뒤 정읍시민가요제에 도전을 또했다 예선통과본선진출 혹여 그때 처럼 떨릴까봐 아는지인분이 복분자를 줘서 두컵을 먹고 나가서 춤도 추고 마음껏 불렀더니 장려상을 줬다 그 다음 해에 태인에서 kbs네트워크정읍시민 노래자랑 변재웅mc로 진행한 곳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농촌살리기 테마로 그뒤 우리것이 잘나왔는지 1년간 각지역 돌아다니면서 하는 노래자랑 광고물로 썼다 몰랐는데 노래자랑 또 나가랴고 하길래 아니다고 했더니 TV에 나온것 봤다고 해서봤더니 정읍에서 한것을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대상이나 인기상까지 모든상은 제목만 다를뿐 상품은 똑같이 줬다 이때가 2004년도 였다 그뒤로 노래자랑은 못나갔다 그러고 있다 동해비치발리볼 선수들데리고 가서 전국비치발리볼선수임원노래자랑에서 대상을 받았다 배구를 해서 생활체육으로 일본까지 원정여행을 갔었던 화려했던그때도 있었다 내가 힘들어지면서 배구도 접고 노래로 재능기부를 하게된 것이 48때부터 인것같다 40살 부터 학부모가 됐는데 웃찾사봉사단에서 8년간 재능기부를 하기시작했다 2005ㅡ2012년까지 대한노인회정읍경로당들을 돌아다니면서 어르신들께 웃음과기쁨을 드렸다 전북광역대한노인회노래강사로 경로당돌아다니면서 독단적으로 노래교실을 해드렸다 대한노인회 노인대학노래강사와더불어 어느새 7년이란 흘렀다 전국노래자랑 정읍시편에 8년만에 참가했다 운이 좋았던지 예선통과본선진출 장려상을 탔다 그해 mbc단풍오감 시장가요제에서 대상까지 탔다 그해는 상복이 터졌는지 그 다음 해에 부산송도해수욕장을 가게 됐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 오라버니 덕분에 참여하고 돌아오는길에 운전하고 가시는가수님을 양아버지로 삼았다 그 양아버지덕분에 청주사시는 유영환작곡가님을 만나게 돼서 곡을 받기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갈때마다 한곡씩 받다보니6곡이나 받게됐다 곡 받고 준비중에 와글 와글 가요제나가서 대상도 받기도 했다 난 민요를 좋아하는데 민요가락이 없어서 산내면에 구절초테마공원이 있는데 9회때 까지 테마곡이 없어서 내가 만들어서 불러야 겠다 하고 아는 시인님께 부탁했다 바로 글이 안나왔다 만날때마다 재촉했다 6개월이 지난뒤 드디어 나왔다 구절초글이 작곡선생님께 보냈다 바로이틀뒤에 곡이 나온것이" 구절초사랑 "노래다 정읍에서도 녹차가 나오는데 정읍녹차를 타지역에서는 모른다 농촌도 도울겸 또다시부탁 "천년향기" 노래가 탄생됐다 시인이 쓴글과노래하고는 좀다르다 작곡하는사람 마음대로 바뀐다 천년향기는 나역시 몇소절을 바꿨다 청풍명월이 정읍사의망부석으로 사랑해요가 두번인것을 뒤소절은 그리워요로 바꾼것이다 정통적인 민요가 탄생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1년연습하고 녹음비가 없어서 계속 미뤘다 친정 엄마가 용돈 모아서 줘서 녹음을 했다 20년동안 대출받은것 이자만 갚기도 바빴다 시청에 근무했어도 봉급을 안줘서 동업으로 노래주섬을가서 장사만 해주었던것이다 노래를 좋아하다보니 주부가요열창무대 나가는것이 소원이라서 그쪽에 나갈려고 했던것이 지금까지 하게된 것이다 덕분에 노래연습도 하고 노래도 가르쳐주고 일과양득을 했다 학교다닐때는 어찌할수가 없었는데 직장근무하니 보증섰던것이 다시 봉급에 차감들어온다고 하니 힘들게 벌어서 아파트산것을 말도없이 남편이 팔았다 힘들어서 팔려고 하니 1년전에 팔았다나 아무말도 안 했다 그 아파트도 사연이 있다 남편친구분 어렵다고 돈을 차용해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놀음으로 탕진한 것이다 다른곳으로 가면서 인심쓴양줬는데 경매 나온 물건이었다 행여 조금이나마 받을수 있는 희망을 걸고 들어갔다 주민등록이전을 안해줘서 방치하던중 퇴거해서 바로 전입했는데 하루늦게 전입된 바람에 전혀 도움도 없이 경매에 입찰을 해야만 했다 아이들 차세대저축과 금을 팔아서 겨우 2천만원준비 해 놓고 받았다 이전할려고 가지고 있던돈도 위에 시누이가 한달만 쓰고 준다고 하면서 가져간돈 지금까지 20년이 지났건만 말도없다 그렇게 집도 없어졌다 얼마전 남편앞으로 된집도 또 팔았다 집살때마다 도움하나 안주더니만 자기명의로 된집은 다 없앤것이다 빚도 청산도 못하고 또 없어졌다 행여 어느정도 청산 될줄 알았는데 겨우 23백만원 청산 밖에 작년가을 추석때 아들이 사고가 나서 할머니차가 폐차됐다 차가 없으면 안돼기에 집 판돈으로 차를 사줬다 내것 하나 한것도 없이 없어지니 마음이 그렇다 30년을 가정과자식과남편을 위해 희생했는데 남은것이라고 빚밖에는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곡을 받았기에 머리가 트인것이다 이제 나머지 30년은 나를 위해서 살아볼꺼라고 녹음하고 난뒤 바로 음반낼 여력도 또 없었다 1년이 지났을까 답답했는지 엄 마가 또 용돈 모으신걸 주셨다 교통사고나서 치료비나온것과 엄마가 준 돈으로 음반을 냈다 작곡선생님 용돈도 못드리고 대신 주위 가수들을 소개시켜주었다 그렇게 엉겹결에 가수의길에 들어서게 됐다 1년여 지났을까나 어느 날 갑자기 차가 이상해졌다 시끄러운 소리와함께 솟튼터널을 지나기전이라서 지나서 잠시 세워 점검했다 여자들이 겨우 할수있는것은 바퀴점검뿐인데 하던중 아뿔사 운전대를 돌아 조수석으로 갔는데 휠만 남기고 타이어는 나를 버리고 바람나서 나가버린상태 "바람난 타이어" 첫 번째 글 제목이다 보험회사 연락후 기다리다 쓰게된 글이다 이때부터 글을 쓰기시작했다 2016ㆍ4ㆍ4ㆍ부터 쓴글이 그해에 400편을 썼다 1년안에 천편을 쓴다고 했는데 게으름 피우니라고 아직도 천편을 못채웠다 3년안에는 천편의시를써서 시집을 내야 할텐데 그해 부산청옥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2017ㆍ1ㆍ월에는 오은문학 수필상을 탔다 엉겹결에 시인과수필가로 된 것이다 답답할때 글을 쓰고 시를 쓰니 시간 가는줄을 몰랐다 경기가 갈수록 침체됐다 작년에는 너무 힘들어서 떡공장을 취직해서 다녔다 백수처럼 지내다가 일을 했더니 너무 힘들었는지 대상포진까지 생겼다 덕분에 살이 빠져서 기뻤다 스트레스를 연속적으로 받다보니 그랬나보다 참 이상한것이 나갈돈이 적어지면 돈들어오는것이 적어진다 설령여유가 생기다보면 또 나갈일이 생긴다 남편때문에 그러더니만 또 자식들에게 나간다 막내아들이 카드를 써서 떡공장다닌것 집세와 카드메꾸니 없어진것이다 떡공장도 일이 없다고 12월부터는 자동으로 쉬었다 나이가 들어 잘린것이다 요즘 다들 젊은사람들을 선호하기에 양심껏 최선을 다해서 해줘도 역시 내마음하고는 다르다 12월에는 메주공장에 한달간 일당재로 다녔다 지금은 나이 많다고 갈곳도 없으니 참 한심할뿐이다 매주 첫째주 둘째주 목요일일은 실버요양병원노래교실 매주첫째주월요일은 좋은사람들 어르신유지원 노래교실을 해드린다 미래의 나의자화상들 아니련가 벌써 58살 한갑이 코앞에 있다 매니저없이 혼자 교통비와동영상비 생기면 찍었던 유튜브가 백여개가 넘는다 연습생으로써 발전된 것을 보는것이다 남들이 뭐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최선을다해서 세상을 살고 있기에 보람이고 나 한테는 재산인것이다 주위사람들이 그래도 응원을 해주니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살련지 모른다 고창문화원 노래사랑실버악단팀 정읍문화원 실버악단팀ㆍ 정읍문화원 메아리 연극단원 구름꽃예술단 으로 활동중이다 새해에는 정읍신문이 주관하는 파랑새 산악회 회원으로 들어가있다 대한민국 차마고도와자연보호회원으로도 정읍녹차를 세계화로 하기위해 부지런히 홍보를 하고 있다 인천월미도 알콩달콩예술단 총무를 맡아서 일도 봐주고 있다 한달에 한번씩 바람도 쐴겸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