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에게 불투명할 때에만 당신은 "진정으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의 내면의 주체적인 경험의 철저한 상호주체성이라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그리운 옛 주제를 재건해야만 할 듯하다...좀비 가설을 기각하게 만드는 것은 만약 다른 모든 사람들이 좀비라면( 더욱 정확하게; 내가 그들을 좀비로 인식한다면) 나는 나 자신도 현상적 의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존재로 지각할 수 없다. 시차적 관점 359
대상a가 제가 시종일관(- φ)이라는 알고리즘으로 표기해온 욕망의 중추적 결여를 상징화 하면서 가장 완벽하게 자취를 감춰버리는
시각의 장속으로 뛰어들며 벌였던 이 무모한 도박을 오늘도 계속해야 겠습니다.
칠판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몇 가지 지표가 될 만한 사항을 적어두었습니다. " 가시적인 것의 장에서 대상a는 응시이다" 이에 이어 중괄호 속에 다음과 같이 적었지요.
"자연속에서= (- φ)로서"
실제로 우리는 자연에서부터 이미 응시로 하여금 그것이 인간의 상징적 관계속에서 맡을 수 있는 기능에 적합한 것으로 만드는 무언가를 포착해 낼 수 있습니다,
그 아래에 저는 지난 시간에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두 개의 삼각형 도식을 그려보았습니다. 첫번째는 기하광학적 장에서 우리의 자리에 표상의 주체를 위치시키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 자신을 그림으로 만드는 것 입니다, 그에 따라 오른쪽 직선 위에 첫번째 삼각형의 꼭지점인 기하학적 주체의 조망점이 위치 합니다. 그런데 내가 응시되고 있는 그림이 되는 곳 또한 바로 그 오른쪽 선 위 입니다, 이때의 응시는 두번째 삼각형의 꼭지점에 기입됩니다. 여기서 이 두 삼각형은 실제로는 시관적 영역의 작용 속에 있으므로 서로 겹쳐지게 됩니다. 그림1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4903A5CCCF6EB1E)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저는 시관적 장에서는 응시가 바깥에 있으며 나는 응시 된다는 것을, 즉 나는 그림이 된다는 것을 강조해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시적인 장속에 주체가 자리 잡을 때 가장 내밀한 수준에서 작용하는 기능입니다. 이러한 장에서 나를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바깥에 있는 응시 입니다. 응시를 통해 나는 빛 속으로 들어가며, 응시로부터 빛의 효과를 입게 됩니다. 그리하여 응시는 빛을 구현하는 도구가 되며, 그 도구를 통해 나는'사진-찍히게(빛에-의해-그려지게) 됩니다.
여기서 관건은 표상에 대한 철학적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관점에서라면 표상 앞에서 결국 나는 그것에 대해 휜히 알고 있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고, 나 자신이 표상은 단지 표상 일 뿐이며 그 너머에는 사물, 사물 자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의식적 존재임을 확신하게 될 겁니다. 예컨대 현상 이면에는 본체가 있다는 것 인데요, 당연히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 일텐데, 왜냐하면 칸트가 주장하듯 나의 선험적 범주들이 자기 뜻대로만 작동하면서 사물을 그 범주들에 맞게 받아들이도록 저를 강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테니 궁극적으로는 잘된 일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사물의 균형은 표면과 그 너머의 것 사이의 변증법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자연상태에서부터 존재의 균열, 이분화, 분열을 초래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존재는 결국 그러한 분열에 적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궁극적으로 의태라는 큰 제목 아래 다양하게 변주되는 일련의 현상들을 통해 관찰될 수 있습니다.
첫댓글 형욱 학생이 저번에 올린 "부재하는 편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없네요. 우리가 예전에 시차적 관점을 읽다가 이해가 잘되지 않았거나 또는 비판할 거리가 뭔지 다음번 읽기 참조로 "부재하는 편지"에 대한 자료를 학생에게 부탁했지요. 그래서 자료실에 잘 올려놓은 것을 새로 볼려니 없네요. 그 때 아쉬운 점은 학생이 올려놓은 자료에 대해서 그 다음번 모임에서 아무도 그 자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네요.
지젝이 너저분하게 너무 많은 예를 들어서 설파하는? 이야기는 서론에 나오는 지젝의 논지의 중언부언 같은 기분이 들구요. 중언부언하는 말에도 뼈가 있다면 그리고 핵심개념에 대한 중심잡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매번 우왕좌왕거리다가 비판의 대상으로만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지젝의 말놈음에 노리개가 되는 것 아닌지하는 생각도 하게 되면서 이럴 바에는 라캉 세미나 읽는 것이 더욱 일관되고 밀도있는 일이라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일단 3장 마지막까지는 함께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가정의 날 연휴에 자연의 기운 제대로 만끽하시고 더욱더 건강하세요..
언제나 열공 하시는 노선생님도 연휴 잘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