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다락방
두 사람이 골목을 나와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가 굴다리를 지나 왼편 골목으로 들어서자
채소전, 어물전, 싸전등이 즐비하게 늘어선 재래시장이 나타났다. 어물전을 지나자 맞은편
골목에 대폿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여기가 전농시장입니까?" "그래. 저기 포항 대포
집으로 가자." "단골입니까?" "단골이랄 것까지는 없고, 서울에 올라오면 이 집에 들르는 편
이지." 대포집으로 들어서자 조그만 홀에 테이블(함석으로 된 원탁 가운데 구멍이 있어서
연탄화덕이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3개가 있었고, 구석자리에 주방(조리대)이 있었다. 육십
대 중반의 노파가 아는 척하며 풍운류의 어깨를 툭 쳤다.
"어디 가서 죽었나 캤더만 살아 있었네." "어이구, 무슨 섭한 말씀을. 누님이 먼저 가셔야
지 제가 먼저 가면 예의가 아니지요." 풍운류와 그 노파는 이전부터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이 사람아 헛공부했구마는. 날 때야 차례가 있지마는 돌아갈 때야 순서가 따로 있나." "장
사는 잘 되십니까?" "내가 돈 벌라꼬 이 짓 하나. 사람 구경하는 재미로 하는 기재." "기왕
하시는 거 사람도 보고 돈도 벌고 하면 좋지요.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재미보고 쌍둥이 낳
고." "이 사람이 그새(그 사이, 그 동안) 인생공부는 안 하고 잡기만 늘었구마는." "우리 두
사람 묵을 방은 있지요." "우리집 다락은 나이롱양말 아이가. 열키(열명0도 자고 스무키도
자고." "몇 사람이나 묵어요?" "와(왜) 사람 많으모 딴 데 갈라꼬?"
"그게 아니라 너무 많으면 불편하잖습니까." "그 말이 그 말이지. 대여섯 명 될끼다. 어떤
때는 술 처먹고 달고 들어와서 한두 놈 늘 때도 있고." "알겠습니다. 우선 국밥이나 두 그릇
말아주세요." "알았다. 옆에 얼라(어린애)는 니 아들이가 콧대가 조르르한 기 귀동자로 생겼
구마." "편한대로 생각하십시오." "며칠이나 묵을 긴데?" "서너 달이나 대여섯 달이나 사정
봐가면서요." "그마이(그렇게) 오래 있을라꼬. 그라모 저쪽 골목 뒤에 골방 하나 있다. 거기
가서 독방 얻어라. 여기서 묵으면 세상 망나니들은 다 모이는데 부자간에 같이 묵을 방이
못 된다." "괜찮습니다. 이놈도 볼 거 못 볼 거 다 본 놈이라서 물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
니다." "와, 방세 모자라나. 내가 보태주꾸마."
"돈 있어요. 여기가 편해서 그러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못된 자슥들이 밤새드르(도록)
처묵꼬 싸우고 개지랄 허는데도 괘안겠나?" "누님, 장사 한두 번 합니까? 버릇이 돼서 시끄
러워야 잠이 오지 조용하면 오히려 잠이 안 와요." "그래, 니놈도 천상 양반은 못 되겠다."
"역마살이 끼어서 평생 떠돌아 다니는 놈이 양반이면 어떻고 상놈이면 무슨 상관입니까. 하
숙비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공술 푸는 것도 아닌데." "공짜 바라는 놈이 마빠구(이마)는 우
찌 안 까졌는고 몰라." "아무튼 누님은 다른 건 맘에 안 드는데, 욕설이 구수해서 찾게 된다
니까." "미친 놈,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거라. 음식맛이 니 주디(주둥아리)에 맞으니
까 찾아오는 기지 욕이 구수하다꼬?"
"아이구 냄새야, 점심은 뭘 드셨길래 이리 지독합니까." "아따 그놈 방구 뀌는데 입 대는
것 보니까 똥 싸놓으모 숟가락 가지고 달가(달겨)들 놈 아이가." "그 참 누님도. 젊은 사람
옆에 있는데 어린애 취급을 하면 어떡합니까. 내일모레 환갑인데. 그리고 방귀도 자리 피해
서 뀌셔야지 아무리 스스럼 없는 사이라도 에티켓이 있는 겁니다." "어따 등개(쌀겨) 후비
(훔쳐) 묵다가 목메키(목이 막혀) 뒤지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여기가 호떼루(호텔)가. 에시게
똔가 비세게똔가 찾게." "아이구 누님은 못 말리십니다." "못 말리모 삶아 묵지 별 걱정 다
하고 자빠졌네." "그만 합시다. 늘 당하면서도 이런다니까. 다락에 깨끗한 이불이나 한 채
올려주세요."
"이 인간이 대가리에 서리는 허옇게 맞아가지고 세상을 헛 산 게야. 이놈아, 합숙소에 와
가지고 깨끗한 이불 찾는 놈이 어딨노. 숯가마에 모시적삼 입고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지."
"알았습니다. 국밥이나 빨리 말아주소." "따로 국밥도 모르나. 손모가지 성한 놈이 니가 말
아 처묵으모 되지." "누님, 내가 없을 때 입이 심심해서 어떻게 지냈습니까?" "이 자슥아, 니
아이라도(네가 아니라도) 내 잔소리들을 놈 새비랬다(흔하다)." "알았으니까 아무렇게나 주
세요." "국그륵(그릇)에 구디기 집어넣어놔도 주는 대로 처묵을래?" "그럼 어떡하면 누님 마
음에 듭니까?" "문디자슥, 주디 다물고(입 다물고) 가마 있으모 내가 다 알아서 해줄 거 아
이가. 니놈이 알모 얼매나 안다꼬 늘기(늙은이) 앞에서 시부리샀노 말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까지는 없제. 철이 없어서 그런 긴데." "참, 누님도 빠르면 증손
도 볼 나인데 철이 없다니요." "이눔아, 하늘을 봐야 별을 따제. 상투도 안 튼 놈이 어디서
어른 행세 할려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놈(두룡) 소일거리 할 것 어디 하나 마련해 주
십시오. 돈 안 돼도 되니까 시간만 때우면 됩니다." "기왕지사 일을 벌렸시모 돈을 벌어야지
그기 무슨 소리고." "돈을 벌면 금상첨화지만 우선 아무거나 일거리만 있으면 됩니다." "그
라모 잠은 어느 놈이 재워주고 밥은 또 누가 먹여주노."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이
눔아, 이틀을 못 젼(견)디고 바람맨치로(처럼) 슬거미(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놈이 얼라(어린
애) 건사(거두다)는 우찌할라꼬." "이번에는 이 녀석이 여기 머물 때까지 같이 있을 겁니다."
"그라지 말고 니놈 관상 볼 때 옆에서 바람 잡으라카모 안 되나." "그럴 사정이 아니니까
부탁하는 거 아닙니까." "끔찍히 생각하는 거 보니까 보통 사이는 아이고, 참말로 니 아들이
가?" "글쎄, 편하실 대로 생각하시고 일자리나 알아보시라니까요." "그란데 저놈은 버버리
(벙어리)가? 아까부터 어째 말이 없노?" 지금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빙그레 웃기만 하
는 두룡을 보고 노파가 말을 걸었다. "두 분만 말씀하시고 저한테 말할 기회를 안 줬잖습니
까?" "주디(주둥이) 들썩거리는 거 보니까 버부리는 아니구마. 그라모 니 저자거리(시장거
리) 청소 해볼래. 채소전하고 어물에서 쓰레기가 마이 나오니까." "청소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노무 자슥아, 그걸 니가 왜 신경쓰노?" "아무거나 하겠습니다." "그라모 낼아
직(내일 아침)부터 해라." "알겠습니다."
"메칠(며칠) 해봐라. 다른 일거리 찾아보꾸마." "고맙습니다." "글타꼬(그렇다고) 공밥 주는
거 아이다." "염려 마십시오." "니는 신경쓸 거 없다. 니 애빈지 개빈지 이 얼빠진 놈이 밥
빌어먹이겠지." 옆에서 듣고 있던 풍운류가 볼멘 소리를 했다. "누님, 내가 벌어먹이는 거지
어째서 빌어먹는 겁니까? 말은 똑바로 합시다." "이눔아, 길거리에 자리 펴놓고 팔자, 사주,
오행 봐준다고 사기치고 쌈짓돈 뺏는 게 도둑질이지 뭐꼬. 도둑질하는 것도 직업이고 돈벌
이라 칼 수 있나?" "누님, 제가 하는 일이 어째서 도둑질입니까? 잘못된 팔자 고쳐주는 일
인데." "니놈이나 잘해라. 천날만날 떠돌아다니지 말고." "그거야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아닙
니까." "이눔아, 벼락박에(벽에) 똥 처발라도 지 대가리에 웬통 쳐바를 놈이 지 앞도 못 닦
으면서 남의 팔자를 고쳐준다꼬 시건방 떨지 말고 니나 잘해라."
"아이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애 보는 앞에서 이게 뭡니까?" "그라모 니 앞도 못 닦는 놈
이 존경받을라 캤드나." "그래도 체면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시끄럽다 그마. 니놈이 뭐라캐
도 이놈은 심지가 굳어서 중심 흔들릴 놈이 아니구마." "됐습니다. 우린 올라가 잘랍니다."
"이따가 여남시(열시) 되모 오만 잡놈이 다 올라올끼다. 누가 시비 걸더라도 싸우지 말고 대
가리 처박고 조용히 자그라." "알았습니다. 누님도 대충 치우고 일찍 주무십시오." "일을 걸
쳐놓고 우찌 자노. 걱정 말고 자그라. 구지게(구석에) 보모(보면) 어제 빨아놓은 거죽(모포)
있다. 그거 꺼내가지고 덮어라." "네, 편히 주무십시오."
두룡은 풍운류를 따라 수직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천장 사각뚜껑을 열고 다락으로 올라갔
다. 그랬더니 두평 남짓한 방이 나타났다. 하지만 천장이 낮아서 허리를 구부려야 했고, 가
운데에 30촉 백열등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여러 장 포개져 있는 모포를 백열등에 비추
자 몇 년은 묵었음직한 때가 닳아서 반짝반짝 광택이 났다. "어르신, 모포가 꼭 구두약 발라
서 불맥기 올려놓은 것 같습니다." "합숙소는 다 그래. 때가 모포 올 사이에 끼어서 바람 안
들어오고 보기보단 따뜻해. 처음엔 찜찜하지만 며칠 덮으면 괜찮아질 거야." "괜찮습니다.
저도 갈매기(생선 좀도둑)생활할 때는 판장(부두)에서 생선 비린내로 찌든 그물을 덮고 지
냈는데요."
"그래. 고린내가 비린내보단 낫지. 파도 철썩거리는 판장에서 찬바람 솔솔 들어오는 그물
덮고 자는 것보단 훨씬 따뜻하고." "네, 여기도 감지덕지지요." "그런데 인간은 청개구리를
닮아서 지난 어려움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거든. 살다보면 쉽게 풀릴 때도 있고, 잘
안 풀릴 때도 있는 건데, 어려울 때는 이보다 더 어려웠을 때를 생각하며 참고 인내할 줄
모르고 끝장이 난 것처럼 오두방정을 떨거든." 포항 대포집 다락방에서는 밤이 되자 자연스
레 술판이 벌어졌다. 다들 거친 바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인생들이라 눈빛만 봐도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사내들의 술자리였으므로 화제는 더욱
장황했다.
"맞습니다. 쥐뿔도 없던 것들이 갑자기 공돈이 생겨서 졸부가 되면 지난날 어려웠던 시절
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안하무인이 되지요. 그런 사람 여럿 봤어요. 먹거리가 없어서 쩔쩔매
는 이웃들이 보는 앞에서 버젓이 보신유람을 다니고 계집질하고 권력에 빌붙어서 사리사욕
이나 채우려 하고 나라가 어려워지면 그걸 이용해서 돈이나 긁어모을려고 눈깔이 시뻘개서
설치고..." "그래. 산다는 게 별 것 아닌데, 내가 한발 양보하고, 나보다 어려운 곳 돌아보고,
따뜻하게 감싸주면 자신도 보람있는 인생이 되고, 세상도 살맛나는 건데... 사람들이 도대체
그 간단한 이치를 모른단 말이야." "누가 아니랍니까. 법 지키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바보
되고 도태되는 사회구조가 문제지요."
"그런 갈등까지도 초월해야 편하게 사는 건데..." "그런 현실을 뻔히 보면서 초월한다는
게 어디 가능합니까?" "불가능한 건 아니지. 다만 어려울 뿐이지." "바꿀 수도 없는 구조를
안달해 본들 뭣하겠습니까.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허허, 그런 일은 누가 알아준다
고 하는 게 아닐세. 확고한 신념이 문제지. 안중근 선생이 누가 알아주길 바래서 이또오 히
로부미를 쐈겠나. 자신도 죽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야..." "마찬가질세. 일제시대나 지
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말일세.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없는 현실이라면 식민
지나 다를 게 뭐 있나. 국민에게 주권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안 그래?" "그게 다 욕심 때
문이지요. 차라리 솔직하게 죽을 때까지 해먹을 테니까 딴소리 말라고 하는 게 낫잖아요."
"두고 보게. 어차피 죽을 때까지 할 테니." "그럼 이 나라꼴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빨리
죽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옛말에 죽으라고 기원하는 놈은 더 오래 산다지 않
습니까?" "걱정 말게. 권력의 속성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거니까. 머지 않아 내분이 일
어날 걸세. 절대 권력자가 물러날 때를 놓치면 측근에게 죽게 되어 있어." 그때 아래층이 왁
자지껄하면서 삐꺽거리며 계단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두더쥐가 기어나오
듯이 머리들이 하나둘 뚜껑을 열고 올라왔다. 모두 거나하게 취해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됫
병짜리 소주가 들려 있었다.
무리 중에 구렛나루와 얼굴에 대각선 칼자국이 길게 나 있는 사람이 빈병을 창틀에 내려
쳤다. 그와 동시에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튕기며 병 아랫부분이 날카롭게 톱니처럼 떨어져
나갔다. 칼자국은 풍운류와 두룡을 의식한 듯 깨진 병 밑바닥을 움켜잡고 고함을 질렀다.
"인마, 술 따라!"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이가 똘마니처럼 넙죽 잔을 따랐다. "예, 형님."
"이런 잔에 주둥아리 피칠해가며 마셔야 술맛 나는 법이지. 안 그래?" "맞습니다. 형님." 칼
자국은 날카롭게 깨어진 병 밑바닥에 소주를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전혀 망설이지
않고 들이키는 것으로 봐서 이런 식으로 자주 마시는 모양이었다. 그는 콧수염을 쓱 문지르
고 나서 풍운류를 돌아봤다.
"이봐, 노털 한잔 해!" 숫제 반말 지껄이였다. "허허, 마셨으면 좋겠는데 저는 술을 못해
요." 풍운류가 그답지 않게 한발 뒤로 물러섰다. "이것 봐라. 노털이라고 신고도 생략했더니
남수(주먹세계에서 사용하는 은어)까고 자빠졌어." 그때 보다 못한 두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나며 놈에게 다가가려 하자 풍운류가 눈치를 채고는 잽싸게 다리를 붙잡았다. "이 새끼."
"그만둬. 술 마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칼자국도 마주 일어서며 한쪽 손에
깨진 병을 움켜쥐고는 싸울 듯한 자세를 취했다. "어쭈, 겁도 없이 엉기겠다 이거지. 너 이
새끼, 내가 누군지 알아?" "이 자식아 알콜중독에 빠진 양아치 새끼지 네가 별거야?"
두룡이 발칵 되받아쳤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풍운류가 다시 두룡의 팔을 잡았다.
천장이 낮아서 둘다 허리를 구부린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그만 두라니까.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이것 봐요, 그쪽도 그만 하시오. 싸워봤자 다치기만 하지 득될 것 하나
도 없잖소." 풍운류는 이번에는 칼자국을 쳐다보며 훈계를 했다. "어쭈 이것들이 번갈아가며
얼리고 있네. 이것들이 왕년에 영등포를 주름잡던 쌍칼을 몰라보는 모양인데, 오늘 한번 죽
어봐라." 이젠 상황이 한쪽이 참는다고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시작된 싸움이
니까 리더인 털보를 빨리 제압하는 것이 질서를 잡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 자식아,
그럼 영등포에서 놀지 뭐하러 여기까지 왔냐."
두룡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비스듬히 날려 뒷꿈치로 상대의 관자놀이를 찍어버렸
다. 칼자국은 그 한방에 눈을 까뒤집고 나가떨어져 부들부들 떨었다. "야 인마, 옆에 있는
놈." 두룡이 그의 바로 옆에 있던 양아치를 불렀다. "네, 저 말입니까?" "그래. 여기 술 한잔
따라. 그리고 넌 지금 내려가서 비계 한 덩어리 썰어서 올라와. 안주가 있어야지." "네, 형
님." "이 새끼야, 함부로 형님이라고 부르지마." 양아치는 이미 두룡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
에 넋이 빼앗긴 상태였다. "네, 알겠습니다."
"올라오면서 술잔 깨끗한 거 하나 가지고 오고. 술을 왜 지저분하게 처먹고 지랄이야."
"저어... 털보 형님... 그, 그냥 놔둬도 되겠...습니까?" "새끼, 더듬긴. 그냥 놔둬. 조금 있으면
일어날 거다." "네." "어르신 한잔 올릴까요?" 두룡이 풍운류에게 잔을 권했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생각없네." "나머지는 네놈들끼리 나눠 마시고 조용히 자도록 해. 떠드는 놈은
그 자리에서 멱을 따줄 테니까." "아...알겠습니다. 안 마시면 안 됩니까?" "이 새끼야, 처먹
을려고 사온 술인데 왜 안 마셔. 안주까지 갖다주니까." "아닙니다... 마...마시겠...습니다."
"마시고 나서 저 윗목에 유리조각 전부 치우고 청소 깨끗이 하고 자도록 해. 이게 어디 사
람 자는 방이냐, 돼지 우리지." "염려 마십시오." "빨리 마시고 불 끄도록 해." 그때 칼자국
이 낑낑거리며 일어났다. 두룡이 그런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봐, 영등포 쌍칼, 정식으로 한판 해볼까?" "아, 아닙니다. 모,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용
서하십시오. 형님." "나이 많은 조카는 있어도 나이 어린 형님은 없잖아." "죄...죄송합니다."
"나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소. 밑바닥 생활하는 사람끼리 서로 돕지는 못할망정 싸
워서야 되겠소."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왕년에 영등포에서 얼마나 잘 나갔는
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을 인정해야지. 그리고 세상 갈 데까지 다 가버린 골방 구석에서 깡다
구나 주먹을 들먹이는 건 치사한 짓 아니오." "그, 그렇습니다. 앞으론 절대 이런 일이 없도
록 하겠습니다."
"나두 굳이 나이든 사람에게 손대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주먹이고 깡다
구고 떠나서 나이순으로 서열을 정하겠소. 불만 있습니까?" "없습니다. 처분대로 따르겠습니
다." "좋습니다. 옆에 계시는 어르신이 제일 연장자인 것 같으니까 방장입니다." "그럼 여기
가 학교(교도소)란 말입니까?" 여기의 양아치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골방에 대장이 방장이
지, 그럼 골장이라고 불러야 되겠소?" "아닙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털보, 당신은
규율부장을 맡으시오." "제가요?: 그럼 형님은?" "이것 보세요. 나이순으로 계급을 정한다고
얘기했는데 자꾸 그러실 겁니까?" "그래도..."
"뭐가 그래도입니까. 나이가 많으면 형이고 적으면 동생인 것이 세상 이친데. 열살 이상
연상이면 아저씨고 스무 살 이상이면 아버지와 동격이니까 어르신이고 그런 거지." "알겠습
니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그냥 넘어가고 내일부턴 말 낮춰도 좋습니다. 그 대신 제가 정한
룰은 지켜야 합니다." "...?" "첫째 밖에서야 뭘하든 상관 않겠습니다. 단 골방에서는 금줍니
다." "예외도 없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생일이라든지 제사를 모시는 때는 예외로 하겠습
니다." "생일축하야 하겠지만 제사까지야..." "가족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냉수 한
사발을 놓더라도 기일은 잊지 말고 기려야지. 그게 사람 도리 아니겠소." "이거 젊은 사람
앞에서 염치가 없구만."
"생일날 술 허용한다고 생일도 아닌데 생일이라고 우기는 양심불량자가 없기 바랍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내에서 모야(담배)는 저녁 10시까지만 허용합니다. 모두
잠들어 있는데 이부자리 속에서 피다가 잘못하면 모두 통구이 되는 수가 있으니까." "그런
그래요. 작년에 뻔질이라고 골초가 하나 있었는데, 이 친구는 잠잘 때 빼고는 항상 담배를
물고 있었어요. 글쎄 얼마나 피워대는지 한 가치를 필터까지 다 꼬실리고 다시 담배를 꺼내
서 불을 옮겨 붙일 정도니까 말 다 한거죠. 하루는 이 친구가 술이 얼큰히 취해가지고 담배
를 손에 든 채고 이불 속에 누워 있다가 그래도 잠이 든 거 있죠?" "그래서?"
"마침 털보형이 홀에서 술을 마시다가 올라와보니 방안이 연기로 가득차서 앞이 안 보이
더라는 겁니다. 형님이 본 대로 얘기하슈." "전등을 켜놨으니까 알아차렸지. 안 그랬으면..."
"어떻게 되었어요." "아, 전등불빛이 꼭 반딧불 같더라니까. 그래서 큰일났다 싶어 모포를
보니까 뻔질이가 덮고 있는 모포 반쯤이 불꽃도 없이 빨갛게 타들어가는 거야. 조금 더 놔
뒀으면 영락없는 바비큐가 될 뻔했지." "그 정도 타들어갔으면 뜨거웠을 텐데." "술이 취해
서 정신이 없었겠지. 재빨리 모포를 걷어서 창문 밖으로 던지고 보니 깔고 있는 요에도 불
이 옮겨 붙어 있는 거야. 후다닥 뛰어내려와서 홀에서 술 마시던 놈들과 함께 바께스고 바
가지고 할 것 없이 물을 떠다 부었지. 그때서야 부시시 일어나면서 오히려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는 투야."
"그 친구 완전히 곰이었군요." "나중에 보니까 왼쪽 팔하고 허벅지에 2도 화상을 입었더
라구." "그 친구 지금은 어디 있어요." "죽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이삼일 지나서였지 아
마." "자살했어요?" "병신 뒤질려면 돈 많은 자가용차에나 뛰어들 일이지." "그럼?" "춘천
못 가서 남춘천역 들어가기 전에 퇴계동인가... 거기서 열차에 뛰어들었지." "박살났겠군요."
"차라리 부딪쳤으면 튕겨나오기라도 해서 시체나 온전하지. 한쪽 철로에 걸쳐서 넘어지는
바라에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두동강이 났는데 징그러워서 못 보겠더라구."
"연고자는 없었습니까?"
"고아출신인데 연고자가 있을 턱이 있나. 주소가 여기로 되어 있으니까 사고난 지 5일인
가 1주일인가 뒤에 벌금통지서가 날아왔더라구." "벌금은 냈습니까?" "5천 원 날아왔는데 누
가 낼 사람 있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괜히 벌금 내고 나면 시체 인수해 가라 어쩌라 보통
귀찮은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실내에서는 담배 피면 안 되겠죠?" "하긴 조심해야지." "그
리고 제가 털보형을 규율부장 시킨 이유는 술담배를 제일 많이 할 것 같아서 솔선수범하시
라고 시킨 거니까 그리 알고 잘하세요." "이거 너무한데... 감투 하나 주는 척하면서 족쇄를
채우는구만." "아무리 막 사는 인생들이지만 이곳도 엄연히 단체생활입니다. 자유도 좋지만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니까." "그건 그래요."
"그리고 방청소는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합니다." "그냥 놔두면 할마시가 알아서 해주는
데..." "할머니도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장사하시는데 청소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알았습니다." "볼멘 소리 하지 마시고 제가 처음 말씀드린 대로 술, 담배, 청소, 이 세가지
만 지키면 됩니다. 처음엔 귀찮겠지만 며칠 지나면 적응이 될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
만 남이 시키기 전에 자율적으로 하는 게 기분도 좋고 편한 겁니다. 제가 이 문제 때문에
같은 얘기를 반복하지 않도록 신경써 주십시오." "알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방 서열은 나이순입니다. 만약 나이를 무시하고 맞먹거
나 대드는 사람이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용서 안 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두들
편하게 지내자고 하는 얘기니까 꼭 명심들 하세요." "기념으로 술이나 한잔 더 합시다." "좋
아요. 오늘은 이왕 가지고 온 술이니까 마시고 내일부턴 절대 안 됩니다." "이중에 내일 생
일 든 사람 없어?" 그 와중에서도 칼자국은 술 먹을 핑계를 찾고 있었다. "농담 그만하시고
빨리 술 마시고 자도록 합시다. 시간도 늦었는데."
두룡은 다음날 새벽부터 시장 청소를 했다. 3시 반에 일어나 해장국을 한 그릇 먹고 나면
4시 통금해제가 되었다. 그때부터 전날 쌓아놓은 쓰레기를 리어카에 싣고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변 고물상 옆에 있는 쓰레기 하치장에 부려놓는 일이었다. 그러면 시청 청소차가 와서
치우는 작업이었다. 채소전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가장 많은데 무조건 리어카에 싣는 게 아
니라 우거지 국거리로 쓸 배추시래기와 무청 등을 골라 따로 보관해 놓으면 해장국 집에서
가져 가고 담배를 한갑씩 사주었다. 쓰레기량도 줄이고 부수입도 생기는 일석이조였다. 그렇
게 두어 시간쯤 치우고 나면 어느새 장사꾼들이 자리를 잡고 아침 찬거리를 사러 나온 아줌
마들과 흥정을 하느라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6시쯤 청소를 마치고 합숙소로 돌아오면 1층 홀은 한바탕 북새통을 치른다. 합숙하는 사
람들의 직업도 다양해서 두룡이처럼 청소부에서부터 역전 지게꾼, 엿장수, 야바위꾼, 솜사탕
장수, 노름꾼, 양아치, 앵벌이 등 눈살 찌푸리는 직업은 모두 망라하고 있었다. 두룡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일나갈 준비를 하기 때문에 좁은 홀에 모두 내려와
세숫대야, 바가지, 양동이 할 것 없이 그릇은 모두 하나씩 차지해서 세수를 하느라 홀바닥은
비눗물이 흥건히 고이고 발들여 놓을 틈이 없었다. 그런데 욕 잘하는 주인 아주머니도 그
시간만큼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오냐, 욕봤다." 만난 지 하룻밤이 겨우 지났는데도 주인 아주머
니는 두룡이를 믿음직스러워 했다. "여기 먹음직한 배추시래기 가지고 왔습니다. 싱싱한 게
좋아요." "그래, 오늘은 고등어 였코(넣고) 찌제(찌개) 주까." "그럴 줄 알았으면 들어올 때
고등어 한 손 사오는 건데..." "이노무 자슥, 니가 돈이 어딨다꼬... 어제 찌지고 낭가(남겨)
놓은 거 있다." "할머니, 이 사람들 차례차례 내려와서 세수하라 그러세요. 온통 난리구만
요." "모르는 소리마라. 새벽부터 남정네가 일 나가는데 여자들이 방정시럽그로 주디 나불거
리모 재수 옴붙는기라." "할머니도 참."
"그라고 기집이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 가는 거 아이고, 마수거리(첫거래)하는 거 아인기
라. 부시게(부엌아궁이) 불땔 때 비짜리(비) 깔고 앉는 거 아이고." "그런데 부엌에 빗자루
아니면 깔고 앉을 만한 게 없잖아요." "그라이(그러니까) 궁디(엉덩이)를 따아(땅에) 대모 안
되는 거지." "왜요?" "비짜리 깔고 앉으모 밤에 허제비(허깨비:도깨비) 나오는 기라." "왜 허
깨비가 나오는데요?" "그건 나도 모르지. 예전부터 어른들이 하지 마라 캤으니 그란 줄 아
는 기지." 그건 아마도 월경이 흘러서 빗자루에 묻으면 혈액 속에는 인성분이 있기 때문에
밤에 빛이 나므로 허깨비로 오인했을 성싶다.
모두들 부산하게 설치면서 아침식사를 끝내고 일터로 나가자 조금 조용해졌다. 출출하던
두룡이 시래기 찌개를 숟가락으로 뜨고 있는데, 마침 풍운류가 다락 사다리를 밟고 삐걱거
리며 내려왔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똥강아지 같은 놈들이 새벽부터 어떻게 떠들어대는지
잠을 설쳤어." 그러자 주방에서 육수를 우려내던 할머니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문디자슥,
일찍 일라는(일어나는) 새가 벌거지(벌레) 한 마리 더 잡아묵는다카는 이바구도 못 들었나."
"누님, 어느 미친 년놈들이 새벽부터 관상보러 나온답니까." "이눔아, 누가 새벽부터 자리
피고 질바닥에 나앉으라카도나. 채소전에 나가서 시래기라도 좌(줏어) 오모 담배 값이라도
벌제."
"이거야 원, 내 돈 주고 밥 사먹으면서 된 시집살이 하는구만." "이눔아, 남 같으모 지 밥
묵고 할 일 없다꼬 잔소리하겄나. 그래도 내 겉이 잔소리 해주는 사람이라도 있으이 니놈은
행복한 기다." "맞습니다. 무슨 불행 무슨 서러움치고 소외되고 잊혀지는 것만 하겠습니까."
"알긴 아는구먼." "해장국이나 한 그릇 말아주소. 슬슬 나가 볼랍니다." "괜히 엉뚱한 사람들
한테 사기치지 말고." "참 니노(너는) 이름이 뭐라캤노?" 주인 아주머니가 두룡에게 말했다.
"두룡입니다. 김두룡." "짐두료이..., 이름이 좋기는 한데 너무 시다(세다). 고생 좀 하겠구마
는." "젊어 고생이야 일부러 사서 하는 것 아닙니까?"
"고생이야 지나고 나면 약이 되는 기지만 조심해라. 죽을 고비 몇 번 넘기겠다." "벌써 몇
번 넘긴 걸요." "방심하지 마라. 몇 번 더 남았다." "네." "아 참, 니 소개사당(솜사탕) 장사
해 볼래. 저쪽 보관소에 자장구(자전거) 보름 전에 매끼(맡겨)놓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이 없단다. 보관비만 해도 자장구 값 될끼다." "나중에 주인 나타나면 어떡합니까?" "어떡하
긴, 주면 되지. 나타나지도 않을 끼다. 보관비 줄 거 가지고 새 자장구 살낀데." "얼마나 주
면 됩니까?" "돈 줄 꺼 있나. 갱비(경비)한테 담배 서너 갑 사주면 될끼다." "그럼 할머니가
얘기 좀 해주세요." "그래. 아직(아침) 묵고 퍼뜩 가보자. 그 새 딴놈이 끄직고(끌고) 가뿌모
(가버리면) 도로아미타불 아이가." "알겠습니다."
첫댓글 잼납니다 욕쟁이 할무이~
감사
재미 있는 글 !
인생 공부 할수 있는 글 잘 읽고 ~~~~
감사 감사
감사요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즐감...!
감사
감사합니다 ..
즐독 ㄳ
ㄳ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