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와 고층 건물로 채워진 서울 도심 중앙에는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고즈넉한 마을이 있습니다. 바로 북촌 한옥마을입니다. 북촌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볼 수 있어 인기 있는 관광 명소가 될 수 있었어요. 수많은 한옥들은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서울을 대표하는 뚜렷한 느낌을 심어주고 있지요.
그러나 북촌의 깊은 맛은 드러난 겉모습과 몇 마디 말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개국 초부터 오랜 기간 조선을 이끌어온 양반 사대부들의 삶이, 삶의 방식이 여기저기 녹아 있고 그것들을 조금씩 이해하는 과정에서 더더욱 북촌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 살갑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모두에게 색다른 느낌을 주는 북촌한옥마을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약 100년 전 북촌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한바탕 땅 싸움이 벌어졌었다고 하지요. 조선인 부동산개발업자들이 가회동 일원에 조성한 개량 한옥이 최종 승자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그 한옥들을 우리는 지금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한옥에는 전통한옥과 도시한옥이 있습니다. 전통한옥이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의 집을 말한다면 도시한옥이란 일제강점기 일부 조선인 부동산개발업자들에 의해 조성된 개량 한옥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북촌에는 몇몇 한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것이 그 당시 조성된 도시한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중에서도 정세권은 남달랐습니다. 그는 1920년대 이후 몰락한 조선 농민들이 대거 서울로 몰려오는 시점에,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주택이 절대 부족함을 미리 인지하고, 북촌의 권문세도가의 집과 임야를 매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필지를 쪼개서, 작지만 쓸모 있는 개량 한옥을 대량 공급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수도, 전기가 들어오고, 환기, 일조권에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행랑방과 장독대, 창고 위치를 실용적으로 재배치하고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으로 된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였는데 이들을 도시한옥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도시한옥은 전통한옥과 비교했을 때 매우 작은 규모입니다. 20평 미만의 한옥도 있고 매입자들에게 주택금융을 제공하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북촌에 조성된 한옥집단지구에, 이전보다 더 많은 수의 조선인들을 거주할 수 있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일본인 거주 지역이 남촌을 넘어 북촌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정세권에게 도시한옥 집짓기는 단순한 집장사만이 아니었습니다. 집장사로 번 자금으로 물산장려운동에 나섰고 조선어학회 활동의 최대 후원자였기에 옥살이도 하였습니다. 일본인으로부터 북촌을 지켜내고 일본에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도모한 곳, 바로 북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