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초 예닐곱 살 때의 일로 기억된다. 밤에 잠잘 때마다 나는 허공에 붕 떠서
날아다니는 꿈을 곧잘 꿨다. 멀리 보이는 금성산(전남 나주시 외곽)이나 30리 밖
칡산 정상에서 날아와 집 앞에 사뿐히 내려앉고,
어떤 때는 지붕에서 날아 내리는 꿈이다.
갑자기 꿍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처럼 잠자리처럼 가볍게 날아 내려앉는 것이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송정리 벌판에서는 매일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 송정리
주변 드넓은 평야에는 일본군이 중국과 만주로 가는 전투기 중간 기착지로 활용하고
또 출격하기 위해 닦아 놓은 비행장이 있었다.
인근 마을 청년들과 광주·나주 송정리
학생들이 활주로를 닦는 강제 노역에 동원돼
조성한 비행장인데 그곳에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뜨고 내리는 비행기(전투기)를 보고
나도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키웠던 것 같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서 보듯
자라나는 어린이는 역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자란다. 공동묘지 주변에 살면 온종일 상여놀이를 하게 되고, 장사꾼이 사는 거리에서는 물건을
사고 파는 놀이를 즐기게 된다. 나는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광경을 보면서 한없이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을 키웠던 것 같다.
이 꿈이
평생 나에게 하늘에 등불을 켜고 사는 삶을 주었다. 그것은 고향이 나에게 베푼 선물이며 한 인간으로서,
사나이로서 사는 가치를 부여해 준 동력이 됐다.
초등학교 2~3학년 때의 일이다. 고향인
영산강 상류쪽 나주군 산포면은 학교가 없어 6km 정도 떨어진
남평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린 나이에 6km 정도 떨어진 학교는 상당히 멀고 힘든 통학거리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서당에 보내다가 적령기보다 두 살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나는 통학길이 언제나 즐겁고 신명났다. 가슴을 달아오르게 하는 얘기를 무궁무진하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바로 2년 위인 강제원과 4년 선배인 강계원 형제는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얘깃거리들을 날라 와
통학길에 실타래처럼
풀어 놓았다. 그들의 삼촌이 영어·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서 외국 신문과 잡지를 보고 얘기해 준 것을
나에게 공급하고 함께
꿈에 부풀었던 것이다.
“만주에서는 김일성 장군이 일본놈들을 한 번에 대여섯 놈을
조자버리는디 그 힘이 장사라고 하더랑개.
포수보다 총도 더 잘 쏘고.”
“김일성 장군이 누구여?”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신출귀몰하는 홍길동 같은 사람이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장군인디 말을 잘 타는 기병이랴. 우리나라를 찾기 위해 만주로 탈출해서
독립군을 길러 일본군을 보는 족족 한 방으로 보내버린댜.”
“그 장군이 말을 잘 탄다고? 얼마나 잘 타는디?”
“기병
출신잉개 허벌나게 잘 타지. 백두산에서 아침 먹고 말을 달리면 지리산 무등산에 와서 점심을 먹는다는겨.
한나절밖에 안 걸린당개.”
금방 본 것처럼 말해 주는 데는 나도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 따르면 김일성 장군은 그대로 신화이자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제원이 성(형), 나도 일본 육사 가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니가 육사 간다고. 키가 작은디 될 것인가 몰라.”
강제원이 말하자 그의 형 강계원이 나섰다.
“인제
2학년인디. 어른되면 클 것잉개 갈 수 있을 것이여. 그리고 너는 영리헝개 가고도 남을 것이여.”
나주는 일찍이 반일(反日)과
배일(排日)의 중심 고을이었다.
1929년 광주 학생 사건의 중심 인물들이 광주로 기차 통학하던 나주 출신 서중학생들이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 후유증을 앓으면서 고향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같이 키우고 있었다.
나주는 기름진 평야가 질펀하게 뻗어 있어 풍요롭고 유림 등
학자와 의병이 많이 배출돼 자존심 강한 고을이었다.
왜놈 꼴 보기 싫다고 철로도 내주지 않아 철도도
나주 시내를 관통하지 못하고 멀리 돌아서 났을 정도였다.
▲장지량 장군은
한국 공군 창설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장지량(張志良·81·사진) 장군은 공군 역사의 산증인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49년
공군본부 초대 작전국장으로 재직 후 68년 전역하기까지
19여년간을 강직한 자세로 공군 발전에 기여해 왔다.
6·25전쟁 발발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직접 안내하기도 했으며 평양의 미림 기지를 점령하고
지리산 공비 토벌(사천 기지)과 공군 단독 출격 작전(강릉 기지)을 지휘하는 등 전쟁간 혁혁한 공을
세웠다.
53년 10전투비행단장, 54년 주미 대사관 무관과 한·미 군사 회담 공군 대표, 56년 공군본부 작전국장,
58년 11전투비행단장, 62년 공군참모차장, 64년 공사 교장, 66년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전역 후 에티오피아·필리핀·덴마크 대사, 제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97년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회장을 거쳐 현재 한국군사학회 회장으로 있다.
빨간 마후라-2-“나도 장군처럼 큰 인물 될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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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3일. 광주~나주 통학기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광주 동중학생)들이 한국
여학생(전남욱· 전남여고)을 희롱한 것이 도화선이 돼 일어난 광주 학생 사건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1919년 3·1운동 후 10년 만에 다시
조선 독립운동으로 퍼져 나갔다.
이를 제압하느라 일제는 나주 지역의 많은 학생과 유지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여 나주 사람들은
일제에 대한 공포심보다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보수적이기는 하나 기품 있는 양반의 고을이자 자부심의 고을로 통하는 나주
사람들은 볼품없는 일본 사람들에게 조선 민족이 당한다는 것이 자존심상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저항의식은 타 지역 주민보다 훨씬
강했다.
우리 어린이들도 그 영향을 받아 등·하교길에는 늘 이런 이야기들이 주요 화제가 됐으며 만주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김좌진·김일성 장군 이야기만 나오면 어린 소년의 가슴은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우리 집안의 내력으로 보아도 일제에 대한 저항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의 조부 형제는 구한말(1888년) 똑같이 무과에 급제했고 그중 둘째 조부는 수군만호(水軍萬戶)로 복무하다 동학군에 가담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장군이었다.
고종 사촌 형(고모의 아들) 나재기(羅在基)는 나주 궁삼면의 왕실 토지를 일제의 동양척식회사가
강압적으로 매수해 농민들에게 비싼 소작료를 물리는 등 수탈이 극심해지자 면 대표로 나서 싸우다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과 가혹한 고문을 당해 끝내
불구가 됐다(나주 궁삼면 항일운동 사건).
언론인이자 청년 운동가인 외삼촌 최종섭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요인(이시영·김창숙)에게
독립 자금을 모아 송금하는 비밀 결사 지도자였다.
나라를 잃은 뒤 탄식처럼 읊조리던 아버지의 넋두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왕실 조정이 무능하니 나라를 빼앗기고, 또 허약한 문(文)에만 기대니 쓸모없는 형식 논리에만 빠지고, 무인을 등한시하니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힘조차 없구나.”
말하자면 실질과 군대 양성이 나라를 세우는 기초인데 이것 모두를 잃거나 방치하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탄식이었다.
나주 지역은 양반의식이 강해 우리 집 가풍도 그런 일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두 분 조부
형제의 경력에서 보듯 다분히 현실 중심의 무과(武科)적 기질을 가졌던 것 같다. 이런 가풍 속에서 자란 나는 윗학년 강제원의 이야기를 듣고 일본
육사를 꿈꾸게 됐다. 무엇보다 김일성 장군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 가는 길에 강제원에게 물었다.
“성, 김일성
장군 이야기 더 해 줘.”
“김일성 장군은 독립군 대장이랑개. 축지법을 쓰는 사람이여. 백두산·금강산·지리산을 폴짝폴짝 뛰어
댕기면서 일본 놈들을 조자부러.”
자꾸 듣지만 언제 들어도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존재가 현실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영웅담은
과장됐는지 모르지만 말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그런 인물이 있다는 것이 부푼 꿈과 기개를 안겨 주기에 족했다. 우리의 기대치가 컸던 만큼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당장의 현실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제원도 김일성 장군에 대한 지식이 그 정도 수준에
머물렀다. 똑같은 말이 되풀이될 뿐 진전이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일성 장군은 본명이 김광서로 일본 육사23기 출신이며 나이는
50대였다. 8·15 광복과 더불어 북한을 지배한 김일성(본명 김성주)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나의 중학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큰형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 아버지와 큰형은 나에게 일반 중학교보다 한 달 먼저 시험을 치르는 광주사범학교에 테스트 삼아 응시토록 했는데
나는 거뜬히 합격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왕 합격했으니 관비 혜택과 직업 보장을 들어 사범학교에 입학하기를 주장했고 큰형은 나의
장래성을 기대하고 광주서중을 권했다. 공업학교를 나와 군청 직원으로 나가고 있는 열 살 터울의 큰형은 이상주의자였으며 나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아버지, 동채(나의 아명)는 학교에서 언제나 수석입니다. 저렇게 머리 좋은 아이를 농촌에서 교사로 썩히기에는 재능이 아깝습니다.
크게 써먹어야지요.”
결국 큰형의 이상론이 아버지의 현실론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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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지량 초대 공군참모총장님 안부가 아쉽습니다.
다음 글을 기다리며... 감사드립니다.
옛날 신문에 여기까지 연재되고 아직 찾지 못했었었읍니다.
선배님 흥미있게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찾은 다음 다시 연재물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