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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한 국제법 및 교회법적 접근
서정훈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강사(법학), 서울대교구 사제
Ⅰ. 서론
Ⅱ. 안중근에 대한 예비적 고찰 및 논점
1. 안중근의 삶
2. 안중근 논의의 쟁점
Ⅲ. 안중근의 재판에 대한 이해
1. 안중근 재판의 개요
2. 재판의 문제점
Ⅳ. 안중근에 대한 교회법적 접근
1. 안중근의 정체성
2. 이토 히로부미 저격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교회법적 근거
3. 이토 히로부미 저격 행위에 대한 교회법적 평가
Ⅴ. 결론
<국문초록>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국제적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이러한 평가는 각국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지만 각국의 평가를 넘어서 재조명을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안중근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이끈 독립투사이자 참된 군인정신을 실현한 군인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교육자였으며 시대를 앞서간 실천 신학자로 평가된다. 안중근은 지금까지 민족주의에 기초한 애국자라는 이미지가 강하여 가톨릭교회의 독실한 평신도였다는 사실이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도 애국심의 발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큰 대의적인 요소가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었다.
안중근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은 가톨릭교회에서 살인을 용인하는 정당방위로서의 행위라는 범주에 해당한다. 이 사건을 표면적으로 보면 개인과 개인 간의 살인행위로 보이지만 안중근은 자신이 군인 신분으로 한 행동이며 가톨릭 교회법의 준법정신에 입각한 행위였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재판 과정에서 이 사실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안중근 재판은 선행연구를 통해 국제 법적으로도 명백히 불법행위이자 무효임이 증명되었고 현재 국내 여러 단체와 법조인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재심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행위에 대한 평가는 국제법적인 정당성을 담보함과 동시에 가톨릭교회의 실정법인 교회법적인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 계속하여 안중근이 테러리스트이자 정당한 재판절차에 의하여 사형 판결을 받은 살인자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상황은 한·일간의 관계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역사에 대한 왜곡이자 사자(死者)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다.
일본 정부는 안중근의 재판과 판결에 문제가 없었으며 여전히 그가 테러리스트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 강변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될 예정인 안중근에 대한 명예훼손이 가속화될 경우 안중근이 희망했던 동양평화론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안중근의 저격 행위는 그의 주장대로 동양평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한국과 일본은 안중근 사건과 같은 역사적 쟁점으로 인한 갈등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 측이 강조하는 법적 쟁점부터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이다.
본고는 안중근의 저격행위가 국제법적으로나 교회법적으로나 합법적인 정당행위임을 밝히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안중근의 행위가 정당행위를 넘어 최상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며 극찬하고 있다. 국가 간 계속되는 감정적 대립은 그것이 불씨가 되어 평화공존에 금이 갈 수 있고 자칫 전쟁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안중근 사건을 법적으로 정리한다면 이를 통해 한국과 일본이 결정적 화해와 아름다운 미래를 열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분명히 추론할 수 있다.
안중근은 자신의 행위가 공동선을 목적으로 한 의거였음을 인지한 상태였고 저격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안중근에 대한 일본 정부와 친일파들의 명예훼손을 예방하고 한·일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국가 간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를 해야만 한다.
이 치유와 화해 작업은 통상적인 민족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법적으로 객관적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라야 가능하다. 안중근 사건에 대하여 한·일 양국이 정당한 법적 평가를 수용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화해와 발전적인 미래를 일궈갈수 있을 것이다.
Ⅰ. 서론
2015년은 해방 70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도‘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성대한 경축식을 치렀다. 또한 상하이와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재개관, 평화통일상 제정, 기록유산 공동전시나‘항일독립운동과 러시아’독립운동가 인명사전 편찬 등의 사업을, 국제교류, 통일, 학술, 문화예술 등 다양한 방면에서 기획 추진했다.1) 이러한 행사는 물론 최근 일본 정부의 움직임을 의식한 점이 없지 않으나 한편으로는 예전부터 지속되었던 일본 정부의 과거사 부정과 무관하지 않다.2)
2015년은 또한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いとう ひろぶみ, 伊藤博文, Ito Hirobumi)를 저격한 지 106주년이 되는 해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사건은 사건 직후부터 이에 대한 평가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민우일보>, <상해신보> 등을 통해서‘중국인들이 하지 못할 일을 한 쾌거’라고 평가하였고, 당대 중국의 지도자 손문(孫文), 원세개(袁世凱) 등도 시(詩)를 지어 크게 추모하였다.
한편 일본 측의 입장은 우리나 중국과는 크게 다르다. 일본의 지도자가 피살되었으므로 당연히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라고 할수있다. 문제는 그러한 인식이 시대를 넘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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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korea815.go.kr 광복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참조(검색일: 2015년 9월 27일)
2) 구체적으로 본고의 연구 대상인 안중근(安重根, 安應七, Thomas Jung geun AHN) 의사에 대한 평가도 한일 양국에서 정확하게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다.
3) 2014년 1월 20일 일본 정부의 대변인격인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すが よしひで, 菅義偉 , Suga Yoshihide)는 정례회견을 통해“우리는 안중근을 일본의 초대 총리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로 간주한다”라고 발언했다. 이러한 공식 입장 3주 후에 아베 신조(あべ しんぞう, 安倍晋三, Abe Shinzo)총리는“안중근은 내각총리대신과 한국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인물로 알고 있다”라고 발언했다.〈日관방장관“안중근은 테러리스트”…기념관 개관 항의(종합)〉,《연합뉴스》, 2014년 1월 20일,〈아베“안중근은 사형 판결 받은 인물”공식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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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안중근에 대한 대한민국과 일본의 평가가 크게 다른 사실은 그의 행위가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인가 아니면 시대적 흐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가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의 하얼빈 저격 사건은 우리 국민들에게‘의거’로 평가 받는다. 동양평화를 넘어 세계평화를 위한 정당행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살인을 하고도‘의거’로 평가받는 것은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정서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얼빈 사건을 의거로 평가하는 우리의 정서를 걷어내더라도 그의 행위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심층적인 접근이 요망된다.
본 논문의 의도는 여기서 확인된다. 즉 안중근의 하얼빈 사건에 대한 신학적, 국제법적인 접근을 통해 그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증명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안중근의 법률적 명예회복 및 앞으로도 예상되는 의거의 정당성에 대한 폄훼를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한다. 안중근은 현재 역사를 왜곡하는 국내 일부 친일파 세력4)과 국외 특히 일본 정부의 대표인사들 소위 정치인들에게 국제적으로 명예를 훼손당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연구를 통해 안중근이 대한민국만의 영웅이자 의사임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평화를 지향한 지도자적 인물이라는 것을 국제법 및 교회법적 시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현재까지 안중근에 대한 연구는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안중근 관련 저서는 총 100여 권이 넘고, 관련 학위 논문은 50여편, 학술지 논문은 340편이 넘는다.5) 안중근에 관한 수많은 연구 중에서 특히 재판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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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지만원. 김구는 빈라덴. 얻은게 뭐냐?〉《프레시안》, 2005년 3월 10일. http://news.naver.com/ 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17013(검색일: 2015 년 8월 4일)
5) http://www.riss.kr/index.do 한국학술정보원(KERIS)에서 제공하는‘학술연구정보서비스 (RISS) 참조 검색어:“안중근”(검색일: 2015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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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성에 관련된 선행연구는 법리적 측면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6) 이러한 연구들의 대체적 결론은 안중근에 대한 재판은 사법살인(司法殺人, Judicial murder)이며 법적으로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중근 재판의 부당성에 관련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그가 이해한 법과 양심에 관련된 연구 곧 그가 향유한 교회법리적 측면을 조명한 의거의 정당성에 관련된 연구는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국제법을 준수하면서 적군 포로와 민간인을 다뤘고 전쟁법규를 준수하면서 교전규칙을 따르며 전투에 임했다. 이는 그의 법인식이 한지역을 벗어나 보편적 세계관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인 것이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하얼빈 사건도 재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단서가 된다고도 하겠다. 이러한 점은 안중근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보완되어야 할 사항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중근은 세계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한 지도자였다. 그의 사상과 지향은 생전 살아온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당대를 살아간 지식인으로서 저술 목록에도 분명하게 제시된다. 사건 직후 그는 5개월여 수감되며 8일이라는 짧은 형식적 재판을 통해 사형을 당한다. 그는 수감기간 동안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저술하였고, 한편 재판과정에서의 그의 발언도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논의는 먼저 그의 삶을 조망해보고, 그에 대한 재판을 재검토함으로써 그의 행위 자체에 대해 국제법과 교회법적으로 고찰할것이다. 이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당시 재판의 문제점과 사법 살인이라 평가되는 불법적 판결의 부당성이 입증될 것이다. 이러한 입증으로써 그의 행위가 실제로는 합법적이며 적법한 행위였다는 사실이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연구는 신앙인이자 교육자이며 군인이었던 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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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안중근 재판의 부당성에 관련된 법리적 측면의 대표적인 선행연구물들은 다음과 같다. 명순구,《법의 눈으로 안중근 재판 다시 보기: 안중근 의사가 테러리스트가 아닌 이유》, 고려대학교 출판부,2010.; 명순구,〈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접점에 대한 법적 평가: 일본인이 안중근을 흉한으로 부르기 어려운 법리적 이유〉,《인권과 정의》, 제33호, 대한변호사협회, 2004.5.; 이장희,〈안중근 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외대논집》, 제33권제2호, 한국외대 법학연구소, 2009.5.; 한성민,〈일 본정부의 안중근 재판 개입과 그 불법성〉,《사학연구》제96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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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의 저격사건이 정당한 행위임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데 초점을 둘 것이며 이에 맞춰 최근 일본에서 제기되고 있는 안중근 의거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논증하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Ⅱ. 안중근에 대한 예비적 고찰 및 논점
1. 안중근의 삶7)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의 마을 광석동에서 안태훈과 조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해 사냥꾼을 따라 다니며 들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했다. 장성해서도 총을 메고 산에 가 새와 짐승을 사냥했는데 학문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후 1894년 16살 나이에 김아려와 혼인하여 첫째 딸 안현생과 장남 안분도 차남 안준생을 낳는다. 이 시기에 부친 안태훈과 함께 동학군들과 전투를 벌여 직접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도 하였다. 안중근은 세상의 불의를 경험하고 의기 넘치는 청년으로 성장한다. 그의 부친은 안중근 집안에서 가장 먼저 프랑스 선교사 빌렘(J. Wihelm, 한국명: 홍석구, 1860~1938)신부를 만나서 교리교육을 받고 1896년 10월에 세례성사를 받는다. 안중근도 부친의 뜻을 받들어 가족들과 교리교육을 이수 받아 1897년 1월에 스스로 택한‘토마스(Thomas)'8)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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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중근의 삶을 인식할 수 있는 1차 자료로 안중근이 감옥에서 쓴 자서전인〈안응칠 역사〉와 재판과정에서의 기록물(신문기록, 공판기록 등)을 기초로 한다. 이하의 서술은 필자가〈안응칠 역사〉 를 요약, 정리했으며 필자의 관점을 토대로 재서술 한 것임을 밝힌다.
8) 안중근이 가톨릭교회의 시민권자로서의 세례명으로 사도 토마스(Thomas)를 선택한 이유는 토마스가 아시아까지 진출한 선교사이기에 그 세례명을 사용한 것이라 진술하였다. 이 진술의 근거 는 사도 토마스가 인도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순교하였다고 단언한《토마스 행전》에서 파생된 전승에 따른 것이고 그가 수혜받은 가톨릭교회의 교리교육을 통한 영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중근평화연구원,《안중근 신문기록-안중근 제3회 신문기록(피고인 제3회 신문조서)》, 채륜, 2014, 50쪽.;“토마스”,《한국가톨릭대사전》, 11권, 8674~86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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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라는 자서전을 살펴보면 그는‘정의에 입각한 실천적 행동가’라는 사실을 알수있다. 물론 그의 삶에 대한 조망은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될 수 있지만 그는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삶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방법론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9)
가톨릭 신앙을 수용한 이래 그의 삶은 크게 변화하였다. 구체적으로 당시에는 드물게 외국인 선교사와 접촉함으로써 가톨릭의 보편적 정의는 물론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의 폭이 크게 확대되었다고 할수있다. 그가 신앙인의 권리와 의무를 인지한 상태에서 신자로서의 책무를 적극적으로 구현한 행위가바로 이토의 저격사건으로 볼수있다. 이렇듯 그가 추구한 신앙인 이후의 삶은 신앙인 이전의 삶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양태를 드러낸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인의 책무는 교회법의 준수였다. 곧, 그의 의거는 교회가 제시한 법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한 정당행위이다. 이 사실을 간과한다면 안중근의 저격행위는 객관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가톨릭 신앙 수용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으나10) 본고에서는 그의 삶 전체에서 보이는 모습을 신앙인, 교육자, 군인으로 분류하겠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삶
가톨릭교회의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신자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발생함을 의미한다. 안중근은 세례성사를 받음과 동시에 전혀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고 살아가는 소명을 받았으며 가톨릭 교회법을 준수해야 할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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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금까지 그의 삶에 대한 인식은 조국애만 강조되고 신앙이 바탕이 된 삶이라는 측면은 소홀히 간과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는 하얼빈 사건 직후 가톨릭교회가 그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의거 당시 교회 책임자들은 당황했고, 그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언론사에 찾아가 항의까지하였다.안중근,《안응칠 역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 19∼31쪽.
10) 안중근,《안응칠 역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 1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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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족은 빌렘 신부에게 약 1년간의 교리교육을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 신앙인이 되는 과정은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사회적 정의감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는 전통적 학문에 프랑스어 등 서양언어를 공부하면서 삶 전반에 걸쳐 역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모습을 교리 기간 동안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외국인 선교 사제와 신앙에 대하여 직접 토론하고 신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가톨릭교회에 입교하여 탁월한 평신도 선교사의 모습을 보인다. 빌렘 신부와 함께 선교에 힘을 쓴 그는 가톨릭교회의 번영이 그가 추구한 삶의 가장 큰 핵심 사업이 되었다. 그가 실천한 교리교사(敎理敎師, Catechista)12)로서의 역할은 오늘날 예비신자입교의 방법론으로 크게 본받을 만하다 하겠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드러낸 영혼구원(靈魂救援, Animarum salus)13)에 대한 열정은 오로지 하느님께 순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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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의 의무와 권리(TITULUS I DE OMNIUM CHRISTIFIDELIUMOBLIG- ATIONIBUS ET IURIBUS), 교회법 제208조~제223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반포,《교회법전》, 주교회의 교회법 위원회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3.
12) 교회의 선교 활동(TITULUS II DE ACTIONE ECCLESIAE MISSIONALI), 교회법 제785조 제1항“교리교사들 즉 합당하게 교육받고 그리스도교인 생활에 뛰어난 평신도들이 선교 사업 수행에 채용되어, 선교사의 지휘 아래 복음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전례 거행과 애덕 사업을 편성하는데헌신하게 하여야 한다.”
13) 가톨릭교회는 세례성사(洗禮聖事, Sacramentum Baptismatis)를 입문성사(入門聖事, 세례 견진 · 성체) 중 최초로 받는 성사라고 일컫는다. 이 세례성사를 받아야만 비로소 교회의 기타 성사들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성사이다.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며 성체성사(聖體聖事, Sacramentum Eucharistiae)에 참여하여 영성체(領聖體, Communio, Holy Communion)가 허락된다. 가톨릭교리는 성체(聖體, Eucharistia)를 먹는 자는‘불사불멸(不死不滅, Immortalitas)’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안중근이 사형직전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세례성사를 받으라고 일본인 미즈노 변호사를 권면하고 설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생명의 빵: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 51~54.;“불사불멸의 약인 생명의 빵”,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가톨릭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제2837항,“세례(DE BAPTISMO)”, 교회법 제849조“성사들의 문이고 구원을 위하여 실제로나 적어도 원의로 받는 것이 필요한 세례는 합당한 말의 형식과 함께 물로 씻음으로써만 유효하게 수여된다. 세례로 사람들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태어나며 불멸의 인호로써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교회에 합체된다.”,“세례성사”,《한국가톨릭대 사전》, 7권, 4902~4910쪽.; 황종렬,《안중근 토마스의 하느님-세계-인간이해》, 두물머리미디어, 2010,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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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신앙이었고 가톨릭교회를 널리 알리는 선교였기에 초대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이상이 그대로 조선 땅에서 드러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교육자로서의 삶14)
안중근은 빌렘 신부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점차로 교육의 중대성을 인지하였다. 그가 추구하고자 한 교육은 신앙교육이 핵심이었으며 교리를 전하는 교육을 위해 대학(大學, Universitas) 설립을 빌렘 신부와 의논한다. 한국에 문맹자가 많기에 교육을 통한 선교에 걸림돌이 있으므로 서양의 박학한 수사(修士, Monachus, Frater)들을 초대해 대학을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빌렘 신부와 협의해 당시 조선교구장인 뮈텔(G. Mutel, 한국명: 민덕효, 1854~1933) 주교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와 면담한 뮈텔 주교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대학설립의 뜻을 수용하지 않는다.15) 안중근은 배우던 프랑스어 학습도 그만두고 가톨릭의 진리는 믿으나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여 크게 좌절한다. 그는 교회의 교도권과 교리는 존중하고 순명하지만, 하느님의 뜻과 배치되는 듯한 성직자의 잘못된 판단은 믿을것이 못 된다는 혜안16)을 드러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이 신앙인으로 거듭난 삶의 핵심 조력자는 가톨릭 사제(司祭, Sacerdos)17)였다. 특히 그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한 빌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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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안중근,《안응칠 역사》, 41~71쪽.
15) 뮈텔 주교가 왜 안중근과 빌렘 신부의 대학설립에 대한 의중을 반대하는지는 미상이다. 아마도 성속이원론적 입장에 서있던 뮈텔로서는 안중근이‘세속’의 일에 치우치고 있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렇게 대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조광의 의견이 있다. 조광,〈안중근을 어떻게 볼 것인가〉,《제10회 가톨릭포럼 안중근과 동양평화사상》, 천주교 서울대교구 매스컴 위원회, 2010, 32 쪽.
16) 안중근은 가톨릭교회라는 '종교'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로 일하는 '종교인' 즉 '사람'과 '직책'을 분명히 구분하는 지혜롭고 성숙한 신앙인의 처신을 이 부분에서 엿볼 수 있다. 최석우,〈안중근의 신앙과 애국심〉《안중근(도마) 의사 추모자료집 -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 천주교정의구 현전국사제단, 1990, 135쪽.
17) 신품성사(神品聖事, Sacramentum Ordinis)와 주교로부터의 파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리자 로서 미사성제(Missa聖祭)를 봉헌하며 복음전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교회법상 한 국어로 특별히 주교(主敎, Episcopus)와 신부(神父, Pater)를 구분하는 경우에 신부라는 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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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통해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의논했으며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식별했다. 이후 그는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통해 한국이 위태로워질것을 예언한 빌렘 신부의 판단을 듣고 해외 이주계획을 세운다.
안중근은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사제와 의논을 하는 사람이었다. 해외에 나가 조국의 억울한 사정을 설명하고자 하는 거사를 계획하는 기도를 성당에서 바친 후 르각(Le gac, 1876~1914) 신부와의 만남을 통해 행동의 방향성을 권고 받는다. 르각 신부는 그의 의중에 공감하지만 결정은 본인 뜻대로 하도록 조언한다. 르각 신부의 권고사항은 총네가지였다. 첫째는 교육의 발달, 둘째는 사회의 확장, 셋째는 민심의 단합이요,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다.
이네가지를 성취하면 어떠한 외세의 공격이 있더라도 민족정신의 힘은 깨
뜨릴 수가 없다는 지론이었다.
르각 신부의 의견을 수용해 그의 조언을 따르기로 다짐하며 즐기던 술을 대한 독립의 날까지 끊기로 맹세한다. 이후 1906년 3월에 가족을 이끌고 청계동에서 진남포로 이사해 살면서 전 재산을 처분하여 학교를 설립한다. 그학교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인데 이 학교에서 르각 신부의 권고안을 수용하고 실현하여 청년들을 교육하는 교육자로 활동한다.
3) 군인으로서의 삶18)
1907년 정미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로 정미 7조약을 맺고 황제를 폐위시키고 군대까지 해산시킴을 목도하고 안중근은 의병에 투신한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늙은 도둑’이라 칭하며 그의 폭거로 인해 한국이 위태로운 상황에 있다고 호소하며 국내외 각 지방을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김두성 장군19)과 이범윤 장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자신은 참모중장으로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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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탁덕(鐸德)이라는 말을 사용하나 일반적으로 사제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신부를 가리킨다. 어원적으로 사제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 즉 성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사제”, 《한국가톨릭대사전》, 6권, 4001~4003쪽.
18) 안중근,《안응칠 역사》, 7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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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20)되어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군과 여러 전투를 경험하면서 곧 죽음의 위협 속에서 그는 철저한 신앙에 기초해 천명(天命)의식으로 살아간다. 생사의 문제는 하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지론이다.
전쟁에 임하며 이 전쟁이 의로운 전쟁이라는 의전(義戰)이론을 인식한 상태에서 전투부대원들의 입교(入敎)를 권면하며 대세(代洗, Baptismus privatus)를 베푸는 자세21)는 신앙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결과였다. 그의 삶은 단순한 군인의무 수행이 아니라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애국의식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전쟁의 형식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결합된 것이다.
요컨대 그 당시의 전쟁법규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안중근은 일본의 불법적 전쟁방식에 대하여 복수로 응징하지 않았다. 그가 만국공법(萬國公法)22)이라는 전쟁법규를 준수하여 포로를 우대한 사건은 큰 의미를 지닌다.23) 즉, 의병에게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함부로 살인할 수 없다는 법이다. 적병이 아무리 의병을 사로잡아 무참히 죽일지라도 그들과 같이 포로를 대하지 말고 전쟁법규에 의거해 적병을 처우해야 한다는 지론은 그의 탁월한 법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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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두성 장군의 실존설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학계의 연구가 있다. 안중근은 최재형 부대의 우영장(右營將)이라는 계급으로 전투에 참가했기에 김두성이 최재형의 가명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운용,〈한국의 안중근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둘) -안중근장군설·김두성실존설·고종배후설을 중심으로-〉,《남북문화예술연구》, 통권 제11호, 2012, 339~385쪽을 참고할 수 있다.
20) 이 부분의 사실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안중근은 자서전뿐 아니라 신문기록과 공판기록에도 확인 할수있듯이 본인의 군인 계급을‘참모중장(參謀中將)’이라고 밝혔다. 그가 자신을 가리킨 군사계급인‘의병 참모중장’과‘의병 사령관’이라는 표현이 오늘날‘장군(將軍, General)’개념의 지위와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의병의 인원 약 50인에서 100인 이하의 우두머리인‘우영장(右營將)’이었다는 학계의 증언이 있다. 또한, 현재까지 조사된 사료에 의하면 1910년 이전의 의병관련 자료에서 의병계급 중에‘참모중장’이라는 직책이 있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신운용, 위의 논문, 354~355쪽.
21) 그는 의병전쟁을 천명(天命)으로 여겼으며 일본군에 쫓기며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로 삶의 의지 마저 잃어가는 동료들에게“천주님을 믿어 영생(永生)하는 구원을 받는 것이 어떻소?”라며 사대교리(四大敎理)를 가르치고 대세(代洗)를 주며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다. 안중근,《안응칠 역사》, 137쪽.; 최석우,〈안중근의 신앙과 애국심〉,《안중근(도마) 의사 추모자료집 -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990, 134쪽.
22) 안중근이 표현한‘만국공법’은 오늘날의 국제법(國際法, International Law), 국제인도법(國際人道法,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이라는 규범의 범위라 할수있다.
23)“현재의 만국공법에 따르면 사로잡힌 적병일지라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법은 없소.…”안중근, 《안응칠 역사》,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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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법의 존엄성 및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려는 탁견임을 엿볼 수 있는 사례 이다.24)
그러므로 안중근은 군인의 본분을 지키면서 의병 안에서의 선교에 투신하였다고 평가된다.25) 구체적으로 그의 법사상은 동양의 유교정신과 가톨릭의 만남이 가능한 영역인 하늘을 공경하라는 경천26)사상이었다. 안중근은 적군과의 전투에서 전장의 죽음을 목격하고 육체적인 생명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험을 수시로 대면한다. 이에 따른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자연적으로 종교적 인간관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전쟁터(참호 안)에무신론자는 없다’(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27)라는 격언처럼 그는 인간본성에 대한 성찰과 탐색으로 철저한 종교인이 되었다. 그의 종교철학의 기저가 된 이러한 인식은 그의 정체성 확립은 물론 의거에 논리적이며 신앙 적인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2. 안중근 논의의 쟁점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의거 직후부터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평가는 국제적으로 한국, 일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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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안중근은 의병전쟁의 목적과 대상을 분명히 하였다. … 전쟁의 대상이 일본의 일반 국민이 아니라, 일본인들을 위험에 빠뜨린 이토와 같은 침략세력임을 분명히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의병전쟁을 통하여 이토가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공동의 적이라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안중근,《안응칠 역사》, 137쪽.
25) 그가 행한 교리교육의 중심주제는 가톨릭교회 구원관의 핵심인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불사불멸(不死不滅, Immortalitas)사상이었다. 가톨릭 신앙을 통해 구원을 얻으라는 그의 열정적 선교사의 모습은 교회의 규칙을 지키면서 대세를 행하는 것곧적극적 신앙행위로 드러난다. 그는 인간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신조인‘기쁜소식(福音, Evangelium)’을 보는 이들마다 선포한다. 이 행위들은 안중근이 일찍이 배운 한학과 동양철학을 기본으로 하여 교리교육을 하는 토착화(土着化, Inculturation) 신학이론의 탁월함을 보여준 것이다.
26) 경천(敬天)은 하늘을 공경하라는 의미이며 원래 단군의 건국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에서 영향을 받은 단어로 추정된다. 안중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양사상과 가톨릭 교리의 합일 즉 토착화 신학이론의 정수를 드러낸다. 하느님이 준수하라고 한첫번째 법인 십계명의 제1계명인‘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의 동양적 표현이 바로 경천이라 해석할 수 있다.([가장 큰 계명]마르코 12, 28~34, 마태오 22,34~40, 루카 10,25~28 참조)
27) https://en.wikipedia.org/wiki/There_are_no_atheists_in_foxholes(검색일: 2015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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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은 물론, 국내적으로도 당대를 살아가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여기에서는 평가의 원인이 되는 하얼빈 사건과 이를 중심으로 하는 안중근 논의의 쟁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하얼빈 사건의 개요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당시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 Leased Territory)였던 하얼빈 역 정거장에서 한국침략의 핵심 당사자이자 세계평화의 저해자인 추밀원(枢密院) 원장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28)했다. 이토는 안중근이 쏜세발의 총탄을 맞고 약 20여분만에 사망했으며 안중근은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어 검찰 수사를 받다가 별다른 절차 없이 일제에 넘겨져 일본 총영사관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은 후 감방에 구금되었다. 일제에 의한 약 5개월에 걸친 심문과 중국 뤼순의 일본 법원에서 8일 동안의 형식적 재판 후 1910년 2월 14일 일본형법 제199조(살인죄)를 적용하여 사형이 선고되었다.
안중근은 상소를 포기하고 제1심 판결이 확정되었으며, 판결 한달후3월 26일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2) 선행 연구를 통해서 본 논의의 쟁점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안중근에 대한 연구는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축적되었다. 이에 대해 국제법 및 교회법적인 측면에서 고찰하면 크게 그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와 재판의 진행과정에 대한 연구로 대별할 수 있다. 특히 재판의 부당성에 관련된 선행연구는 법리적 측면으로 사법살인이며 법적으로 하자가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안중근이 이해한 법과 양심에 관련된 연구 곧 그가 향유한 교회법리적 측면을 조명한 의거의 정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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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안중근의 의거에 관하여 사살(射殺), 포살(砲殺), 주살(誅殺), 암살(暗殺) 등의 용어가 쓰이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저격(狙擊)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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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련된 연구는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국제법을 인지하고 있었다. 국제법에 따라 적군 포로와 민간인을 다뤘고 전쟁법규를 준수하면서 교전규칙을 따르며 전투에 임했다. 또한 신앙인으로서 동료 의병들에게 세례성사에 관련된 교회법을 이행하는 등 그의 법적 행동은 가톨릭교회가 추구하는 평화주의적 법사상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추구한 법은 공동선(共同善, Bonum commune, Common Good)을 위한 법이며 인류애를 위한 법이고 이러한 법 인식은 총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법곧가톨릭교회의 법치주의 실현으로 이해되며 평가 될 수 있다.
이른바 그의 법 인식은 가톨릭교회의 규정에 근거한 교회법 정신이라 할수 있다. 그가 추구한 인간존엄성에 근거한 법사상적 측면은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교회법사상이 아닌 다른 이론으로는 해석할 길이 모호해진다. 이토 히로부미의 인간 존엄성까지 염두에 둔 그의 법정 진술과 언변29)은 오늘날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조인과 학자들을 포함한 법 울타리 안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0여년전그당시에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낸 선구자적 인류애는‘서로 사랑하라’(요한 13, 34)는 그리스도의 법 사상의 발로였다. 필자는 이러한 측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안중근은 신앙인이 된 이후에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영문 인장30)을의 거하는 그 날까지 소지하였으며 가톨릭교회 입문자에게만 부여되는 세례명을 자신의 성과 이름 앞에 항상 먼저 드러내었다. 그가 무장투쟁을 한 의병전쟁 중에 매일 아침기도31)를 드리는 등 기도생활에 충실했으며 전투수행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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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안중근평화연구원,《안중근·우덕순·조도선·유동하 공판기록-안중근사건 공판속기록》, 신운용 편역, 채륜, 2014, 220~221쪽.
30) 영문 인장명:“Corean Thomas”, 그는‘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토마스’로 대변되는 가톨릭 신앙의 정체성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였다. 군인신분으로 가톨릭 신앙인의 표양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할수있겠다. 황종렬,《안중근토마스》, 대구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3, 11, 196쪽.; 안중근평화연구원,《안중근 신문기록》, 채륜, 2014, 50쪽.
31) 안중근이 바치는‘아침기도’란 전 세계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공통으로 바치는‘신자 공동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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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봇짐에는 교리서와 교회서적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전투에서 일본 군인과 상인들을 체포하는 전과도 올렸지만 무장이 해제된 포로를 즉결처분하는 일은 살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그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인도주의와 국제법에 따라 이들을 석방해 주었다. 전쟁법규에서 군인으로서 행하는 합법적‘살해’와 민간인과 포로를 대할 때 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불법적‘살인’을 명확히 구분한 그의 통찰력은 가톨릭교회의 10대 규정인 십계명의 제5계명‘사람을 죽이지 마라’를 전장에서 실천한 것이라 평가 할수있다.32)
이렇듯 신앙인이 된 이후의 안중근의 삶에 무게를 두고 그의 정체성과 의 거의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은 과거 삶의 습성을 과감히 청산하고 하느님이 제시한 법대로 살기를 결심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즉 그리스도의 법치에 순응하여 살겠다는 다짐이다. 안중근이 새롭게 세상을 인식하고 새로운 법을 인지하게 된 변화된 삶, 죽음을 이겨내는 새로운 삶으로의 전향과 방향성이 본고가 의거의 올바른 해석에 초점을 둔 이유이기도 하다. 세례성사 이후 교회가 가르치는 법을 따르는 그의 행동은 오늘날 전세계 13억여 명의 로마 가톨릭교회 평신도들의 교회법 준법정신의 이상이자 모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안중근의 법의 정신과 이상이 의식에서뿐 아니라 행동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하얼빈 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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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이며, 일정한 형식의 활자로 정해져 있는 성문의 기도문을 가리킨다.〈아침기도, 저녁기도〉,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전례위원회(편),《가톨릭 기도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출판사, 1997, 20~24쪽.
32)〈십계명〉,《가톨릭 기도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출판사, 1997, 12쪽.; 조광,〈안중근을 어떻게 볼 것인가〉,《제10회 가톨릭포럼 안중근과 동양평화사상》, 천주 교 서울대교구 매스컴 위원회, 2010,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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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안중근의 재판에 대한 이해
본 장에서의 논의는 안중근 재판과정에서의 법적 쟁점에 대하여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하고자 한다.33) 이와 함께 공정한 법적 시야에서 이 재판의 부당성에 대해 분석하는 것에 논증의 방향성을 둔다. 굳이 논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죄악으로 취급된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주는 것이 모두 죄악으로 단죄될수는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예방주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나 그로 인해서 더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안중근에 대한 이해는 한일 양국이 크게 다르다.34) 전후 맥락(脈絡)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것은 살인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시야를 넓혀 국제법적으로 본다면 안중근의 저격사건은 분명 다른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본장에서는 선행 연구를 중심으로 안중근 재판이 갖는 법리의 모순점, 곧 재판의 부당성을 국제법적 시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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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앞에서 논의의 쟁점이 되는 것이 그의 정체성과 재판의 정당성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의 정당성에 대해 논의를 한정한 것은 재판이 그의 정체성을 전제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중근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문제는 본고의 주요 쟁점이므로 뒤에 서술하기로 한다. 안중근 재판의 부당성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지금까지 총 6편의 연구물이 있다. 대표적인 연구물로는 명순구,《법의 눈으로 안중근 재판 다시 보기: 안중근 의사가 테러리스트가 아닌 이유》, 고려대학교 출판부, 2010.; 명순구,〈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접점에 대한 법적평가: 일본 인이 안중근을 흉한으로 부르기 어려운 법리적 이유〉,《인권과 정의》, 제33호, 대한변호사협회, 2004.5.; 이장희,〈안중근 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외대논집》, 제33권제2호, 한국외대 법학연구소, 2009.5.
34) 소위 안중근 재판에 대하여 한국의 일반적 인식은‘총체적인 불법적 정치재판’이며‘사법살인’ 이자‘무효’라는 입장인 반면 일본정부 측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 재판이 공정하며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한 사람을 살인한 안중근이 법의 잣대로 사형판결 받은 것만은 합법적 법집행이며 역사적 사실이라는 입장인 것이다. 한성민,〈일본정부의 안중근 재판 개입과그불법성〉,《사학연구》제96호, 2009, 225쪽.; 조용주 변호사,《SBS 그것이 알고 싶다: 조슈번의 후예들 -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 2014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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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간 이유부터 검토해야 한다. 이토를 저격할 그 당시의 시대상황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하려는 시기의 막바지 단계였다. 1909년 일제는 완전한 식민지화를 한해앞둔해에 이토가 마치 개인자격으로 하얼빈을 방문한 것처럼 선전을 하며 연막을 쳤지만, 사실은 만주 문제와 한일합방 문제를 두고 러시아 측과 비밀리에 흥정하려는 계획 하의 방문이었다.36)
이 강제 합병의 핵심 당사자이자 책임자였던 이토를 제거하는 행위는 안중근의 법정 진술대로 동양평화 곧 세계평화를 위한 방어전쟁 행위였다. 합법적 방어행위는 국제법이라는 전쟁법규로 보장이 되었으며 국권을 침탈하는 불법행위에 대항하는 행위는 마땅히 실천해야 할 피침탈자의 정당한 방어의 책무이기도 하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은 개인과 개인 간의 살인사건이 아니라 국제법상 전쟁 행위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견지한 상태로 안중근 재판에 접근해야 한다.
1. 안중근 재판의 개요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저격 사건 직후 하얼빈 역 구내 러시아 헌병 분소에서 러시아 국경지방재판소 검사 콘스탄틴 콘스탄치노비치 밀레르 (КонстантинКонстантин́ овичМиллер, Konstantin Konstantinovich Miller)에게 신문을 받는다. 그는 이토가 조선통감이었을 때그무리에 의해 일본 군대와 순사들에게 동포들이 고초를 겪었음을 밝혔다. 이날 저녁 오후 10시 10분경러시아 측은 일제의 요청에 따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 그의 신병을 인도하였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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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안중근의 저격 사건 이후 일본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하였고, 그를 살인자로 규정 하였으나 이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한일 간의 감정을 앞세운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문제가 적지 않은 안중근 재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으로 대두된다. 한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나 모두 합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법적 인식태도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 무엇이불합리한 재판이었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36) 문규현,《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교회 창설부터 1945년까지-》, 빛두레, 1994, 12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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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일본 영사관 지하 감옥에 구금되는데 10월 30일에 관동도독부의 검사 미노부치에게 제1회 신문을 받기 시작하여 11월 26일까지 총 7회 신문이 진행되었다. 첫 번째 신문에서 이토를 저격한 이유에 대하여 총 15가지38)를 제시한다. 이후 안중근 등 피고인들(우덕순·조도선·유동하등)은 11월 3일 뤼순(旅順)39)에 위치한 감옥으로 옮겨져서 수감된다.40)
1910년 2월 7일부터 12일까지 총 6차례 공판은 진행되었고 판결은 14일에 났다. 안중근 재판과 사형집행은 이렇듯 총 8일간의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경뤼순에 위치한 일본법원 관동도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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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당시 러시아는 일본과 범죄인 인도협정이 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의 관할에 있던 이 사건을 일본 총영사관으로 보내버린다. 안중근 사건에 대한 처리의 시작부터 불법성이 개입된 점을 인지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가 관례적으로 일본에 한국인에 관한 재판관할권과 신병인도를 넘겼다는 주장이 있다. 안중근 사건 이전에 김재동·서재근의 일본인 피살 사건(1907년 3월)을 계기로 일본법과 국제법을 어기면서 자의적으로 한국인의 사법권을 약탈한 선례를 적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신운용,〈일제의 국외 한인에 대한 사법권침탈과 안중근 재판〉,《한국사연구》, Vol. 146, 2009, 213~219쪽.
38) 안중근평화연구원,《안중근 신문기록》, 채륜, 2014, 5~6쪽. 15가지 죄목: 1. 이토의 지휘로 한국 왕비 살해 2. 5년전이토의 병력으로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모두 한국에 매우 불리한 조항 3. 3년전이토가 체결한 12개조의 조약은 한국에 군사상 대단히 불리한 사건 4. 이토는 한국 황제의 폐위를 도모 5.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킴 6. 조약체결로 한국민이 분노하여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때문에 이토는 한국의 양민을 다수 살해 7. 한국의 정치 기타의 권리를 약탈 8. 한국의 학교에서 사용한 좋은 교과서를 이토의 지휘 아래 소각 9. 한국 인민의 신문 구독을 금지10. 전혀 충당할 만한 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질이 좋지 못한 한국 관리에게 돈을 주어 한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드디어 제일은행권을 발행함. 11. 한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국채 2,300만원을 모집하여 이를 한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그 돈을 관리들 사이에서 마음대로 분배했다고도하고 또는 토지를 약탈하기 위해 사용했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한국에 대단히 불리한 사건이 됨.12. 이토는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였다. 그 까닭은 즉 러일전쟁 당시부터 동양평화 유지라고 하면서 한국 황제를 폐위하고 당초의 선언과는 모조리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13. 한국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한국보호라는 명분으로 한국 정부의 일부 인사와 의사를 통하여 한국에불리한 시정을 펴고 있다. 14. 지금으로부터 42년전현일본 황제의 부친을 이토가 없앤 사실15. 이토는 한국민이 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제나 기타 세계 각국에 한국은 무사하 다고 속이고 있다., 안중근이 이토를 포살할 수밖에 없었던 15가지 죄목을 적시한 행위는 일제의본격적인 제국주의적 한반도 침탈 이전에 이미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다고 볼수있다. 특히,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취했던 여러 정책들을 볼때 이토의 죄에 대한 위와 같은 논리적 진술은 안중근의 시국 인식에 대한 선각자적인 탁월한 판단력이라 할수있다. 변기찬,〈안중근의 신앙과 현양에 대한 비교사적 검토〉,《2000년 대희년· 안중근 의거 91주년 기념 심포지엄: 2000년 대희년과 안중근 토마스》,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년 11월 4일, 58쪽.
39) 이 재판의 관할은 일제의 관할지인 그 당시 식민지 뤼순(旅順)이고 안중근은 여기로 송치되었다.
40) 황종렬,《안중근토마스》, 대구가톨릭대학교 출판부, 86~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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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법원은 일본형법을 적용해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안중근은 상소를 포기함으로써 제1심 판결이 확정되고 판결일자를 기준으로 약한달후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경에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41)
이 재판은 시작부터 국제법 및 통상적인 법적 절차가 무시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일제가 안중근에 대하여 사형판결을 예단하고 진행한 형식적 재판의 수순이며 절차였음을 다음의 논의에서 밝힐 것이다. 어떠한 측면에서 안중근의 재판절차가 공정성을 무시한 채 위법성 및 불법성을 드러내고 있는지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재판의 문제점
일본의 입장에서는 안중근을 무조건 사형시켜야만 하는 다급한 이유가 있었다. 그를 단순 암살범이자 자객 즉 테러범인 흉한(兇漢)이며 흉도(兇徒)이자 사이비 정치범으로 몰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안중근 의거의 정당성이 법적으로 확보되었을 때 국제적 여론에 의해 자칫 을사늑약에 의한 한반도 병합의 부당성까지 드러나게 될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한 반도 점령을 기초로 한 식민지 계획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일본정부의 정치 역학적 판단이 개입되었다. 또한 일제의 불법적인 대한제국 침략에 대한 지배야욕을 폭로하는 안중근의 입을 봉쇄해야 하는 다급함이 신문과정과 재판에서 여실히 드러났기에 일본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를 사형시켜야할 필요성이 시급했다.42) 그러므로 급하게 진행된 재판은 재판관할권, 법적용, 당시 상황에 대한 인식, 안중근의 정체성, 공정성 등 많은 모순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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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안중근평화연구원,《안중근·우덕순·조도선·유동하 공판기록 - 안중근사건 공판속기록》, 채륜, 2014, 222~232쪽.; 신성국,《신성국 신부의 의사 안중근(도마)》, 지평, 1999, 199~216쪽.
42)‘일본 정부로부터 안중근 재판에 대하여 일제의 형법을 적용하라고 지시받은 구라치의 증언’, 동경 도립 중앙도서관 소장 극비(極秘)문서에서 참조.《SBS 그것이 알고 싶다: 조슈번의 후예들 -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 2014년 3월 15일. 당시 일본의 형법에는 해외에서 일본인을 살해한 외국인을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 1910년에는 러시아 조차지에서 이토를 살해한 안중근에게 적용할 일본의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판결 또한 내릴 수 없었다는 논지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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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순서대로 고찰하기로 한다.
1) 재판관할권
안중근 사건43)의 재판에서 검찰은 그의 저격행위를 단순한 형사범으로 취급하려는 논리로 일관한다. 일제는 재판관할권이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있음을 주장하였고 법원은 검찰측 주장을 가감없이 그대로 인용하여 판시한다.
그렇지만 일본이 주장하는 관할권한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첫째 안중근의 국적은 대한제국이라는 점, 두 번째 저격행위의 장소는 청국의 영토로 러시아의 조차지였다는 점, 세 번째 이 사건의 저격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 한국과 일본 내지 한국과 청국 사이에 재판관할권에 관한 특별한 조약이 존재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제의 관할권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 드러난다.44)
일본에 재판관할권이 있다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인 재판부는 재판관할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판시하는데 이러한 논거는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45) 할 수 있다.
1. 1899년 대한제국과 청국 사이에 체결된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 제5관의 규정에 따라 한국에 있는 청국인과 청국에 있는 한국인은 서로 치외법권을 가진다.
2. 이에 따라 한국국적의 안중근은 청국에는 재판권이 없고 한국이 영사재판권을 향유한다.
3.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은 한국의 외교권한이 일본에게 있다고 규정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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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 사건의 법적 쟁점을 객관적 견지에서 살펴보기 위해‘의거’라는 표현대신‘사건’으로 표현함 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명순구의 견해를 따르기로 한다. 명순구,《법의 눈으로 안중근 재판 다시 보기》, 47쪽.
44) 명순구, 위의 논문, 221~222쪽.
45) 명순구, 위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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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따라서 안중근 사건에 대한 영사재판권은 일본에 있다.
이러한 법원의 논리전개는 오류가 있다. 일제는 안중근은 한국 국적이 아닌 일본 국적으로 단정하여 재판 관할권이 일본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발생 당시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1조
와 2조를 근거자료로 들어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고 한국의 보호국인 일본이 외교권을 갖는다고 해석했으며 또한 이 해석을 벗어나 한국의 사법권까지 일본이 갖는 것으로 확대해석 하였다.46)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재판을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관할한다는 결정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관할하도록 해버린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47) 이 사건에 대하여 한국 국적의 안중근을 일본 국적으로 단정해 버리고 단순 형사사건으로 치부한다면 법리적 문제는 크게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 사건을 살인사건으로만 단정해버리면 재판권이 일본에 있다는 주장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원칙적 재판관할권 보유국인 러시아가 스스로 재판권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다.48) 일제가 애초부터 재판관할권을 주장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권한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무리가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49)
그러나 이 사건은 재판부가 을사늑약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해석하여 일본 형법을 적용해 형사사건으로 치부할 사안이 아니다. 민족해방전쟁의 지도자였던 의병 신분의 군대지휘관 안중근이 일제식민지 침략에 맞서 적장인 이토를 사살 후 포로로 나포된 사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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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한일보호조약은) 외교상의 권리문제에 대해 규정한 것으로 사법권에 대해 규정한 조약은 아니 다. 이 조약을 근거(당시 검사의 주장)로 재판권이 일본에 있다고 확대 해석을 한건문제가 있다
- 우츠노미야 겐지(宇都宮弁) 변호사(전 일본 변호사협회 회장)”《SBS 그것이 알고 싶다: 조슈번의 후예들 -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 2014년 3월 15일.
47) 이장희, 위의 논문, 316쪽.
48) 안중근재판 관할권을 일제에 귀속시킨 것은 국제법을 무시한 러일 간의‘야합’에 따른 결과라고 밖에 볼수없다는 신운용의 논문〈일제의 국외한인에 대한 사법권침탈과 안중근 재판〉,
489~491쪽을 참고할 수 있다.
49) 명순구, 위의 책, 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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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일제의 형법을 적용할게 아니라 국제법을 적용해 포로에 걸맞도록 인도적 처우를 하고, 본인이 원하는 국가로 송환함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50)
2) 법 적용(일본법)
안중근에게 적용되어야 할 법이 일본법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한국법이어야 하는가? 일제는 당연히 일본제국 형법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재판했다. 검찰 측은 1905년 을사조약을 근거로 이 사건에 적용할 법규는 일본 형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변호인 측은“일한보호협약 1조에 의해 한국 신민을 보호하는 것은 한국 정부의 위임을 받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권은 일본 영사관에 있지만 적용 법규는 한국이 제정한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법원은“일한보호협약 제1조의 취지는, 일본 정부는 그 신민에 대해 갖고 있는 공권력 사용에 있어서 균등하게 한국 신민도 보호해야 한다는 해석에 의해 공권력 사용의 일부에 속하는 형사법을 적용하는 것”이라하여 한국 형법 적용을 배제한다.51)
을사조약이 여러 문제가 많아 무효가능성이 큰 늑약(勒約)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이 유효라고 하는 가정에서 보더라도 재판부의 안중근 사건에 대한 일본법 적용은 무리가 큰 주장이다.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 것뿐이지 주권까지 위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이 그 당시 조약으로 위임한 것은 사법권의 일부에 속하는 영사 재판권뿐이다. 을사조약을 통해서 한국이 일본에게 형벌법규의 제정까지 위임했다면 검찰과 법원의 입장이 타당할 것이지만 을사조약의 어느 항목에서도그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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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장희, 위의 논문, 316~317쪽.
51) 명순구, 위의 책, 57~60쪽.
52) 명순구, 위의 책, 60쪽. 최근 안중근 재판에 관련된 극비(極秘)문서가 SBS를 통해 공개되었다.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인 구라치 데츠키치(倉知鐵吉, Kurachi Tetsukichi)가 외무성 시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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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쟁에 대한 인식 상태 : 의병전쟁
저격을 당한 자와 저격을 한 자의 법적 지위에 따라 사망이라는 현실에 대한 법적 평가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이른바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사실이 전쟁 중 교전행위 중에 일어난 사안으로 본다면 일본인이나 그 어떤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를 테러리스트라 호칭할 수 없을 것이다.53) 그렇다면 안중근의 저격 당시의 신분이 민간인이었는지 군인이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야만 하겠다.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반복하여 거듭 자신이 의병이며 군인의 직무를 수행한 것임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저격행위가 스스로 의병단체에 소속된 의병 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사살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 주장은 안중근의 법적 지위가 군인이고, 그의 행위 자체가 교전 중에 일어난 것이라는 명확한 인식을 기초로 한 것이다.54) 즉 그의 의거는 합법적인 교전행위55)라는 국제법적 인식을 전제한 상태에서 수행된 전투수행 중의 임무였다는 사실이다.
4) 교전자격자의 지위: 군인
교전자격(交戰資格, facultas bellandi)이라 함은 무력충돌 시에 적을 공격할 수도 있고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자격을 일컫는데, 이 교전자격을 갖춘자를‘교전자격자(belligerents)’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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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고록(외무성 외교 사료관에 있던 자료를 모아 발간한 것)에 의하면 재판부 단독 판단으로 일본형법을 적용해 안중근을 사형판결한 것이 아니라, 일제 본국에서 전보를 보내 일본 제국형법을 적용할 것을 구라치를 통해 법원에 명령한 것이다. 구라치는 수시로 본국과 전보를 주고 받으면서 본국의 명령대로 법원에 지시를 하였다. 그는 일본 형법 적용에 대한 건과 안중근을 사형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까지 정부의 뜻과 의지대로 법원에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역할을 하였다. 법원은 구라치의 강한 압력에 굴복하여 정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일본법을 적용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먼저 정해놓고 재판을 진행시킨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문서 공개로 안중근에 대한 당시 재판은 불법이며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입증가능하게 된 새로운 길이열렸다고 할수있다.《SBS 그것이 알고 싶다: 조슈번의 후예들 -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 2014 년 3월 15일.; 한성민,《일본정부의 안중근 재판 개입과 그 불법성》, 257~258쪽.
53) 명순구, 위의 책, 63쪽.
54) 박정원,《안중근 재판의 문제점과 부당성에 대한 법적 고찰》, 124쪽.
55) 합법적 교전행위에 대한 논거는 이장희, 위의 논문, 311~313쪽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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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교전자격이 없는 민간인은 적을 공격할 수도 없거니와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곧 민간인의 신분에 있는 자가 적을 공격하다가 체포되면 포로의 처우를 받지 못하고 형사제재의 대상 이 되며, 민간인을 공격하다가 체포된 사람은 비록 그 공격자가 교전자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포로의 대우를 받지 못하며 형사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 다만, 교전자격자들 사이에서의 공격은 정당행위(正當行爲)로서 법률상 처벌의 대상이 아니고 나포나 체포되었을 시에는 포로의 처우를 받게 된다.56)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할 당시에 교전 상태였으며 이들 두 사람 모두 교전 자격자였기 때문에 안중근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안중근은 수차례 자신이 민간인 신분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의병중장57)이라 주장하고 있다. 즉 군인의 지위를 인정하고 포로로 대우하고 국제법을 준수하여 재판하라는 의견이다. 일제는 이 주장을 무시해 버렸지만, 실체적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 그 당시 안중근과 이토의 신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교전자격자의 신분에 있는가? 안중근은 의병58)이라는 군인이었고 교전자격자59)였다.
이토는 조선의 초대 통감이었고 사건 당시에 추밀원 의장이라는 신분에 따라 그 또한 교전자격자60)였음은 명백하다. 이렇게 안중근이라는 저격자와 이토라는 피저격자 두명모두 교전자격 자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안중근의 저격행위는 정당행위로 평가되 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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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명순구, 위의 책 63~64쪽.
57) 안중근평화연구원,《안중근·우덕순·조도선·유동하 공판기록 - 공판 시말서》, 채륜, 2014, 220쪽. 안중근이 의병인 군인신분인 것은 확실하나 계급이 의병중장이라는 장군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가 표현한 중장(中將)의 계급은 아마도 50인 이하의 우영장이라는 계급을 지칭한 것이라 추정된다. 이에 대한 논의는 신운용,〈한국의 안중근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둘) -안중근장군설·김두성실존설·고종배후설을 중심으로-〉《남북문화예술연구》통권 제11호, 339~385쪽 참조할 수 있다.
58) 국제법(헤이그 육전 조약 Hague Regulation land warfare, 陸戰條約 1907년)상 육전의 법및 관습에 관한 규칙(Regulations respecting the Law and Customs of War on Land)에 의하면 제1장 교전자의 자격에 전쟁법 및 전쟁의 권리와 의무는 군대에 적용될 뿐 아니라 민병 및 의용병단에도 적용됨을 명시하고 있다. https://www.icrc.org/ihl/INTRO/195(검색일: 2015년 8월 15 일)
59) 안중근이 교전자격자의 신분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명순구, 위의 책, 74~80쪽.; 이장희, 위의 논문, 313쪽을 참고할 수 있다.
60) 이토가 교전자격자의 신분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명순구, 위의 책, 69~74쪽을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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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재판의 불공정성
안중근 재판에 대하여 일본법을 적용하고 국제법에 의거한 교전자격자의 지위를 배제한 것은 일제가 의도한 것이다. 이 사건을 일본 국내적 차원의 단순 형사사건으로 처리해야 일제의 식민지배의 정당성이 공고히 되고 국제법 위반이라는 불법재판의 책임이 회피될 수 있었을 것이다.61) 이미 사형판결을 정해놓고 총체적 불법재판을 진행한 법원이 행한 태도와 입장의 배후에는 일본정부의 몫이 지대하다. 공판과정과 판결까지 재판의 중요 결정사항 등은 일본 정부의 조정에 의한 것이며 지시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인지한 상태에 서이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62)
일제는 안중근 재판을 한국침탈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는 기회로 이용하려 했기에 이 재판은 시작부터 불공정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63) 이와 함께 안중근은 최후 진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 재판의 편파성을 지적하였다. 첫째, 재판관을 비롯하여 통역 변호사까지 모두 일본인으로만 조직한 것, 둘째, 한국인 변호사 선임을 거부당한 것, 셋째,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에서도 통역을 분명하게 하지 않은 점이다.64)
이렇듯 일본 정부의 모의와 감독에 따라 진행된 재판 구성원은 안중근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또한 러시아도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해 안중근의 신병을 국제법을 무시한 상태로 일본에 넘겼다. 안중근은 이러한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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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박정원,〈안중근 재판의 문제점과 부당성에 대한 법적 고찰〉,《법학논총》Vol. 25, 2012, 128쪽.
62) 한성민,〈일본정부의 안중근 재판 개입과 그 불법성〉, 257~258쪽.
63) 신운용,《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일제의 국외한인에 대한 사법권침탈과 안중근재판-》,채륜, 2009, 464쪽.
64) 안중근평화연구원,《안중근·우덕순·조도선·유동하 공판기록 - 안중근사건 공판속기록》,채륜,2014,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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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부당성을 인식한 상태로 자신을 일본법이 아닌 만국공법으로 판결하라 고 거듭 요구했지만 법원은 묵살했다.
이와 같이 재판 과정 내내 그를 단순 민간인 자격의 자객인‘사이비 정치범’이자 테러리스트로 확정하고 진행된 재판의 모순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때, 일본정부와 재판부의 치밀한 공작에 의해 전개된 안중근의 재판은 명백히 부당하며 불법이자 무효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65)
Ⅳ. 안중근에 대한 교회법적 접근
안중근의 저격행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평가는 이미 신앙과 관련된 영 성과 윤리적 측면을 기초로 한 신학적 접근이 활발하게 연구되어 왔다. 반면 안중근의 법에 대한 인식과 이 사건에 대한 교회법적 측면의 연구는 이렇다할 연구 성과를 찾아보기 어렵다. 본장에서는 안중근 사건이 지닌 교회법적 성격과 안중근이 지향하는 법 인식에 대한 측면을 부각시킬 것이다. 안중근의 저격행위가 가톨릭교회에서 금지한 살인인지, 아니면 그 금지된 살인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정당한 살해66)의 범위인지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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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일본 류코쿠(龍谷)대 법학과 교수 도츠카 에츠로(戶塚悅朗, Totsuka Etsuro)는“일본이 만든 재판소는 불법재판소, 불법재판소가 내린 판결은 불법판결이고 그렇게 되면 그 불법판결에 의거 하여 사형에 처했다는 것은 살인을 한 것”이라며 안중근 재판에 대한 총체적인 불법행위를 논리적으로 진단하였다.《SBS 그것이 알고 싶다: 조슈번의 후예들 - 왜 안중근을 죽이는가》, 2014 년 3월 15일.
66) 안중근의 저격행위가 살인행위인지, 살해행위인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김춘호,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의 사회적 차원: 현대적‘살인’(환경 피해)과 현대적‘살해’(안중근 의거)〉,《가톨릭 신학과 사상》제35호, 2001년 3월, 72~93쪽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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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중근의 정체성
1장에서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안중근은 가톨릭교회의 신앙인이자 교육자였으며 군인이었다. 안중근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시기는 신앙인이 되기 전과 신앙인으로 거듭난 이후이다. 하얼빈 사건을 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건 시점이 바로 가톨릭교회 시민권을 취득한 세례성사를 받은 직후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자유의지에 따라 교회의 법을 준수하겠다는 장엄한 선서와 다짐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교회의 법을 분명하게 인식했으며 그 법을 법치주의의 원칙에 따라 준수할 것이라 증언자들이 보고 듣는 성당에서 선언을하고 세례성사67)를 받았다.
신앙인이 된 이후의 그의 삶은 독실한 신자로서의 교회법적 권리와 의무를 이행한 삶이었다. 그는 교회가 장려하고 권고하는 평신도가 해야 할 기도생활에 충실했으며 선교사명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책무임을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삶은 가톨릭교회의 창립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명령한 법규를 따르는 삶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 인간들에게 명령한 법이 바로 가톨릭교회의 법이다. 가톨릭교회의 번영을 위한 그의 노력은 그의 선교연설68)과 세례성사의 권면 및 군인으로서 전투수행 중에 행한 대세(代洗) 등으로 나타난다.
그는 신앙인이 된 이후 그리스도의 교육철학을 구현하는 교육자69)로 거듭나고 토착화 신학이론을 실천70)하는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의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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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안중근은 토마스(Thomas)라는 세례명으로 전혀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세례성사(洗禮聖事, Baptismus)를 받으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감을 공적으로 드러낸다. 예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 신앙을 청합니다. + 신 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새 이름(세례명)을줌+이제부터 그대를 (아무)라고 부를 것입니다. ◎ 아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개정하여 교황 바오로 6세의 권위로 공포한 로마 예식서: 어른 입교 예식(시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
68) 안중근,《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증언하는 신앙인이 되다: 안응칠 역사》, 32~40쪽 참조.
69)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의 의무와 권리(TITULUS I DE OMNIUM CHRISTIFIDELIUMOBLIG- ATIONIBUS ET IURIBUS), 교회법 제217조“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례로써 복음적 가르침에 맞는 삶을 살도록 소명되느니 만큼 인격의 성숙을 추구하고 또한 구원의 신비를 깨닫고 살도록 올바로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70)“민족들의 문화 안에 복음을 토착화”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가톨릭교회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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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군인생활에 투신하다가 하얼빈 의거라는 사건을 정점으로 가톨릭 신앙의 핵심가치를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신앙인 그 자체로 살인한 행위는 세속적으로 보나 교회적으로 보나 중죄이자 대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분이 군인이라면 이 사건을 보는 시야는 전혀 달라진다.
가톨릭교회는 군 인생활을 국가 공동선과 평화 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라 찬양71)하고 있다.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해 작은 악을 실천하는 행위72)로서의 정당성은 가톨릭교회 역사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예가 무수하다. 곧 공동선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질서를 보호하고 증진하는 참된 길이라 할수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단순히 그 행위자체만을 판단 하여 유무죄를 기계적으로 대입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안중근 사건을 접근했을 때 안중근은 교회법의 수호자이자 신자로서의 의무를 적극적이고 혁신적으로 구현한 참된 신앙인이라 평가된다.
2. 이토 히로부미 저격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교회법적인 근거
저격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 당국자들은 안중근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부끄러운 역사73)의한장면이다. 당시 교회 당국자의 판단력으로 안중근의 행동을 상식과 신앙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고 이해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특수성과 미숙성에서 기인한것74)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 시민권자인 안중근 토마스의 저격행위를 교회법에서 어떻게 해석·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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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제854항.
71)“군인 생활로 조국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한 역군이다. 이 임무를 올바로 수행한다면, 그들은 참으로 국가의 공동선과 평화 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10항.
72) 박승찬,〈도대체 뽑을 사람도 없는데?:‘어떠한 경우에도 선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장작은 악을 선택하라!’(〈신학대전〉Ⅲ,68,11 참조)〉,《평화신문》, 2014년 7월 20일.
73) 당시의 한국 가톨릭교회 당국은 안중근의 이토 저격행위를“살인죄”를 범한 죄인으로 취급하여 그가 가톨릭신앙인이라는 사실마저 부인하려고 하였다.〈자료집을 발간하며〉,《안중근(도마) 의사 추모자료집 -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990, 3쪽.
74)“뮈텔”,《한국가톨릭대사전》, 5권, 2891~2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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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안중근 사건이 발생할 시기에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 사제들에 의한 안중근 사건의 해석은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 당국자의 시야로 보았을 때에는 당혹스러움과 유감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물론 안중근 사건 발생 이후 교회의 직권자(職權者, Ordinary)는 그를 신자로서 파문한 바도 없고 단죄한 바도 없었다. 교회는 이 사건을 신앙적으로 교회법적으로 그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침묵만을 유지했다. 단지 교회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안중근이 가톨릭신자가 아니라는 거짓증언을 언론에 유포한 교구장 뮈텔 주교의 부적절한 행동75)이 전해질 따름이다.
안중근은 사형판결이 확정된 후 자신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한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청원했다. 빌렘 신부는 그를 위하여 교회법상 사제의 직무를 이행하려고 교구장에게 관할권 이외의 지역에서의 성사거행을 청했으나 거절당한다.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가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 교회의 법 규정을 무시하는 월권행위라고 판단하여 항명한다. 이러한 태도에 뮈텔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교구장 직권으로 미사의 주재를 정지하는 징계처분76)을 내리지만 빌렘 신부는 자신의 행동이 문제가 없음을 교황청 법원(敎皇廳 法院, Apostolici Tribunalia, Apostolic Tribunal)에 제소를 통해 입증하였다.
그 당시에 안중근의 저격행위에 대한 공식적 교회 입장은 발표되지 않았다. 교구장 주교의 직권적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빌렘 신부에 대한 정직처분과이징벌적 처분이 위법하다 하여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한 빌렘 신부의 사목적 환경만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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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뮈텔 주교 일기》1909년 10월 26~29일. 이 행동을 호교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교리에 는 명백히 어긋난 행동이었기에 교구 직권자로서의 올바른 처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76) 뮈텔 주교 일기(Journal de Mgr. Mutel: 민(뮈텔) 주교의 일기 가운데에서 안중근과 관계된 부분만 발췌 수록 158~165쪽), 1910년 3월 15일 일기,《안중근(도마) 의사 추모자료집 -서거80주년을 맞이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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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도 안중근은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저격행위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명령한 사랑의 실천 행위였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외형적으로 버린 한국가톨릭교회의 당국자들을 용서하고 끌어안는다.77) 사랑과 용서의 실천, 바로 이것은 안중근이 평생의 모토로 정한 정의와 사랑의 법인식이다.
법은 살아 있기에 계속 움직인다. 과거의 규정과 현재의 규정 그리고 미래의 규정은 계속 변화한다. 따라서 이 사건이 있을 당시의 교회법 규정의 잣대로 안중근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가톨릭교회의 규정이 최초로 성문화하여 법전의 형식으로 출판된 것이 1917년이다.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가톨릭교회의 창설 이래‘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78)로서 입법 활동을 해온 교황들의 법령집과 공의회의 결정문들을 총정리하여 종합 편찬한 법전이 1917년에 반포되었다.
이른바《1917년 법전》(Codex Iuris Canonici 1917)은 교회 역사상 최초의 현대적이며 체계적인 교회법전이다.79) 안중근 사건 당시의 규정은 그당시의 명시적인 법 조항이 존재하지 않은 시기이므로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법전의 법조문을 유추 해석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안중근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 가장 가까운 시기인 1917년의 교회법전을 기준으로 저격행위의 정당성을 살펴보아야 하고 이 법전에 명기된 정당한 행위로서의 방어행위를 기초로 이 사건을 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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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빌렘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1910년 경술 2월 15일”,“뮈텔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 1910년경술 2월 15일”, 안중근,《동양평화론(외)》, 범우사, 2010, 72~74쪽.
78) 교회법 제 331 조“주께로부터 사도들 중 첫째인 베드로에게 독특하게 수여되고 그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될 임무가 영속되는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이세상 보편 교회의 목자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임무에 의하여 교회에서 최고의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직권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 제18항.“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온 교회의 볼수있는 으뜸인 베드로의 후계자와 더불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는,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에 관한 교리를 모든 사람앞에 천명하고 선언하기로 결정한다.”
79) 이 법전의 편찬은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작되어 교황 베네딕토 15세때 완성되었기에《비오- 베네딕토 법전》이라고도 불린다. 교황 비오 10세는 1904년 3월 19일 자의 교서 Ardum Sane Munus를 통해 법전 편찬의 결정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안중근 사건이 발생한 1909년 10월 26일그당시의 교회의 법규정을 상세히 살펴볼 수 없다는 한계를 밝히는 바이다. 추후에 보다 심도 있는 교회법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이경상,《가톨릭 교회법 입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0,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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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안중근 사건을 교회법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먼저 살펴볼 문제가 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교회법적으로 정당한 행위로 인정받을 수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살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예외의 경우는 전쟁 중에 적을 사살하는 경우와 정당방위 정도를 들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선결조건이나 정당방위가 성립할 수 있는 요건도 있어 무조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전쟁의 선결조건과 정당방위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들
전쟁을 피함80)
2309 무력을 통한 정당방위에 대한 엄격한 조건들을 엄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이는 중대한 결정이므로 무력을 쓰는 정당방위는 도덕적 정당성의 엄중한 조건들을 따라야 한다. 이 결정은 아래 조건들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
- 공격자가 국가나 국제 공동체에 가한 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해야 한다.
- 이를 제지할 다른 모든 방법들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효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 성공의 조건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 제거되어야 할 악보다 더큰악과 폐해가 무력 사용으로 초래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서 현대 무기의 파괴력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이 조건들이 이른바‘정당한 전쟁’에 대한 교리에서 열거되는 전통적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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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09항, 가톨릭 교회법의 법원(法源)이 되는 교리서(敎理書, Catechis-
mus), 성경(聖經, Biblia Sacra), 성전(聖傳, Traditio), 교황들의 가르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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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가톨릭교회의 교리서는‘정당한 전쟁’의 근거를 전통적으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81)에서 찾고 있다. 정당한 전쟁은 가톨릭교회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데 구약에서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군인과 전쟁을 단죄하지 않았으며 가톨릭교회의 설립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군 복무를 반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군인 생활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였다(마태오 8, 5~13 참조).82)
예수 그리스도 또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어떠한 인간적 폭력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자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도 폭력의 거부를 명령하였다. 이렇듯 비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전쟁보다는 비폭력에 의한 평화83)를 강조한 부분도 있지만, 불의한 군인과 예수에게 폭력을 행사한 그 군인에게그폭력 행위와 처벌의 정당성을 되물었다(요한 18, 22 참조). 이렇게 예수는 부당한 혐의를 피하고 부당한 대우에 항거하는 정의심을 드러냈다.84)
가톨릭교회는 2000년 역사 이래로 항시 정당한 전쟁 이론을 견지해 왔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달성하고 공동선을 위해서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전쟁행위는 자연스럽게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또한 신학적으로, 법적으로도 하자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최후의 방어수단으로서의 제한적 전쟁을 인정하지만 현대에 와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상황이 거의 희박해지므로 일반적인 전쟁 상황인 불의한 전쟁에 대한 명백한 거부와 비폭력을 수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85)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제한적으로 교회의 전통적인 정당한 전쟁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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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vol. XXXV.,Ⅱ-Ⅱ,q.40,aa.1-4, Newyork, McGaw Hill, 1972.
82) K. H. 페쉬케,《그리스도교 윤리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의한 가톨릭 윤리신학 제3권사회윤리》, 유봉준 옮김, 분도출판사, 1992, 83쪽.
83) 김정우,〈가톨릭교회의 전쟁에 대한 이해〉,《사목》제277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10~11쪽.
84) K. H. 페쉬케,《그리스도교 윤리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의한 가톨릭 윤리신학 제2권대신및대인 윤리》, 김창훈 옮김, 분도출판사, 1992, 365쪽.
85)〈기독교·개신교 구분해 써야-서정훈(가톨릭대 인문학부)〉,《한국일보》, 2003년 4월 1일. 불의한 전쟁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교황청과 교황은 전쟁반대를 계속 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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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언표하였다.“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충분한 힘과 권한을 가진 국제적 권력이 없는 동안에는, 모든 평화적 타협 방법을 시도해본연후라면 각 정부와 정당 방위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사목헌장, 79항) 이러한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쟁은 그 자체가 악이고 피해야 하지만 최후의 수단으로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함을 교회는 천명하고 있다.
이후에도 교황청 문헌‘자유의 자각(Libertatis Conscientia, 1986년)’을 통해“개인의 기본권과 공동선을 심대하게 손상시키는 명백하고도 장기화된 폭정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무력투쟁”을 용인하고 있다.86) 이러한 정당한 절차에 따른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오래된 전통을 기저로 하여 합법적으로 그 행위가 교회 내에서 인정되어 왔다.
한편 현행 교회법에서는 두개조(제1323항과 제1324항)의 법조문에서 불의한 공격에 대항한 정당방위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법의 법조문은 1917년 교회법전의 제2205조의 법조문이 보충되고 개정된 것이다. 안중근 사건이 발생한 당시의 가장 가까운 시기의 법전인 1917년 교회법전에서는 정당방위가 가능한 정당한 행위의 요건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제 2205 조제4항 부정한 침해죄에 대하여 상당한 정도의 정당한 방위가 있었을 때는 범죄는 완전히 제거된다. 그 정도를 넘었을 때는 도발의 경우와 같이 단지 귀책성을 경감한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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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자유의 자각(Libertatis Conscientia, 1986. 3. 22):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교황청 신앙교리성 훈령〉, 강대인 옮김,《교회와 사회: 사회교리에 관한 교회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제79항.
87) Can. 2205 - §4. Causa legitimae tutelae contra iniustum aggressorem si debitum servetur
moderamen, delictum omnino aufert; secus imputabilitatem tantummodo minuit, sicut etiam causa provocationis. Benedicti PP XV,《Codex Iuris Canonici :Pii X Pontificis Maximi iussu digestus /auctoritate promulgatus Benedicti Papae XV ;praefatione Petri Gasparri》, TYPIS POLYGLOTTIS VATICANIS, MDCCCCXLVⅢ, p. 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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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법조문이 66년 만에 개정되었다. 적법한 정당방위의 범위를 세분화하여 조금 더 분명하게 명시한 형태의 현행 교회법전에서는‘정당방위’의 합법성에 관련된 표현이 총두개의 조문으로 나누어 언급되어 있다. 제1323조는 정당방위의 조건을 충족했을 때는 어떠한 형벌도 받지 아니한다고 적시했으며 제1324조는 정당방위의 조건인 합당한 절도(節度)를 준수하지 못하였을 때는 형벌이 완화되거나 참회 고행이 적용된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이렇게 나눠서 언급한 이유는 불의한 공격자에 저항하는 행위가 정당 방위의 조건에 일치하는가의 여부 곧 합치하는가 불합치하는가라는 차이만 있기 때문이다.
1917년 교회법전의 정당방위와 1983년 교회법전은‘정당한 방위’라는 법언이 사회적 측면에서 피침해자의 개인적 방위를 넘어서 평화적인 질서유지곧법질서 확립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법조문이 제시한 방향은 안중근의 지향인 동양평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의거라는 측면의 법 해석이 추정가능한 근거가 된다. 교회법은 정당방위가 합법이며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한 실천덕목임에는 분명하나 그 범위를 넘는 과잉방위에 대해서는 죄가 면제 혹은 감경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 1323 조 법률이나 명령을 위반하였을 때 아무런 형벌도 받지 아니하는 자는 다음과 같다.
5. 자신이나 제3자에 대한 불의한 공격자에 대항하여 합당한 절도를 지키면서 정당 방위로 행동한 자.
제 1324 조①범죄가 실행된 경우에 위반자가 형벌이 면제되지는 아니하나, 법률이나 명령으로 정하여진 형벌이 완화되거나 그 대신에 참회 고행이 적용되어야 하는 자는 다음과 같다.
6. 자신이나 제3자에 대한 불의한 공격자에 대항하여 정당 방위로 행동하였으나 합당한 절도를 지키지 아니한 자.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반포한 교회법전(敎會法典, Codex Juris Canonici, Code of Canon Law)에서의 정당방위의 개념은 정의로운 전쟁론을 뒷받침하는 법 규정이다. 그는 정당방위에 대하여‘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1995년)’이라는 회칙을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간 해석을 하고 있다.“정당방위는 타인들의 생명, 가정과 국가의 공동선을 책임진 사람들에게는 권리 일뿐아니라 막중한 의무이다.
불행하게도 침해자가 해를 끼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때로는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최종적인 결과는 그 일을 발생시킨 침해자에게 그 원인이 있다.”88)라고 하며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성 토마스 견해 및 윤리신학자 알퐁소 주교의견해를 인용하면서 정의로운 방어행위의 정당성을 선포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때가톨릭교회는 평화를 추구하며 어떠한 폭력과 살인행위도 용납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다만 특수한 상황 하에서 일정한 조건을 담보한 상태에서 모든 이의 공동선 증진을 위해 인간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방어수단으로서 정당방위를 정당한 행위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곧 특별한 상황에서 저항할 조건들이 합법적으로 충족된 상태에서만 정당방
위로서의 정의로운 전쟁을 허가하고 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3. 이토 히로부미 저격 행위에 대한 교회법적 평가
안중근은 가톨릭교회의 정의로운 전쟁 교리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토를 살해한 것은 합법적 정당행위로 이해했으며 가톨릭교회의 법 규정 또한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재판을 받는 신문과정에서 늘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냈다.‘토마스(Thomas)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항상 ‘토마스는 나의 본명(本名)이다’라 답하며, 토마스를 동양에까지 선교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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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1995. 3. 2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1995., 제55항,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I-II, q. 64, a. 7; 성 알폰소 마리아 데리 구오리, Theologia Moralis, 1, III, tr. 4, c. 1, dub. 3 참조.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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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서양의 유명한 사람이라 설명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은 토마스 성인의 선교 사도직의 이행임을 분명히 하였다.89)
① 미조부치 타카오 검찰관: 이토 공을 죽인 것은 정당행위로 생각하는가.
안중근: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하였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② 미조부치 타카오 검찰관: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죄악일 것인데.
안중근: 그렇다.
③ 미조부치 타카오 검찰관: 그대는 그렇다면 인도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것이겠지.
안중근: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럴 만한 자리에 있는 자 외에는할수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 성서에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
④ 미조부치 타카오 검찰관: 그대가 믿는 홍 신부(洪 神父, 빌렘 신부를 말함) 가 이번 흉행을 듣고 자기가 세례를 준자중에서 이러한 자가 나온 것은 유감이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그대는 자기의 행위를 인도와 교지(敎旨)에 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피고인은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90)
이 신문 기록은 본 논의에 있어서 핵심적인 답을 제시하는 자료이다. 위의 검찰관 신문내용을 다시 풀어 해석하자면 첫 번째 신문의 질문은“너는 국제법적으로, 일본 형법으로 이토를 죽인 것이 정당행위로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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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안중근평화연구원,《안중근 신문기록-제3회 신문기록》, 채륜, 2014, 50쪽.; 최석우,〈안중근의 신앙과 애국심〉,《안중근(도마) 의사 추모자료집 -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990, 134쪽.
90) 안중근평화연구원,《안중근 신문기록-제10회 신문기록》, 채륜, 2014, 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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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묻는 것이다. 안중근은 저격을 준비하고 행위한 시초부터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한다. 본고 3장에서 국제법적 정당성을 이미 논의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안중근의 답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검찰관은“너는 가톨릭신자이므로 네가 소속되어 있는 가톨릭교회에서는 제5계명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것을 어긴 죄악이 있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순순히 동의하며“그렇다”고 답을 한다.
교리적으로 외적으로만 보면 사람을 죽인 행위이기 때문에 죄가 맞다는 말이겠다.
우리가 주목할 질문과 답변은 세 번째 검찰의 질문“인도에 반하는 행위를한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한 안중근의 답변이다.“가톨릭교회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더큰악(이토히로부미)을 제거하기 위한 작은 악(저격행위)를 실천한 것91)이므로 이것은 교회법적으로도 처벌되지 않고 죄악이라 평가받지 않는다”라는 말로 해석할수 있다.
검찰관의 재차 신문은 집요하다. 피고인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피고인이 소속된 가톨릭교회 당국자 빌렘 신부조차도 피고인의 생각을 부정하고 있지 않느냐고 추궁한다. 이러한 추궁에 안중근은 침묵을 유지하는 묵비권을 행사한다. 신문을 통해 검찰관은 교구장인 뮈텔 주교와 빌렘 신부의 판단을 기초로 안중근이 주장하고 있는 정당행위론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빌렘 신부는 정당한 전쟁 교리에 대하여 이미 깊이 숙고하였고 또한 교리로 인식한 상태에서 안중근의 저격행위가 검찰관의 표현처럼 오해에서 비롯된 사적 보복이었다고 판단92)하였다. 그 당시의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 교리와 교회법의 해석의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시대를 고민하는 안목의 차이라 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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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박승찬, 위의 기사,《평화신문》, 2014년 7월 20일.
92)“나는 구체적으로 합법적 공적 처형, 정의로운 전쟁, 긴급한 정당방위를 꼽았습니다. 나는 이에 덧붙여서 어떤 애국심도, 어떤 공적 필요성도 사적인 살인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빌렘 신부님의 안중근의사 옥중 방문기: 1912년 3월 19일 프랑스 교우들에게 보낸 감사편지〉, 정양모 신부 역, 2쪽. 빌렘 신부가 이러한 판단을 내린 것은‘친일본주의자’였기 때문이라는 학계의 보고가 있다. 안중근이‘이토를 오해해서 살인했다’라는 일본 법원의 계속된 겁박을 빌렘 신부조차 교회법을 기초로 한 정당방위라 판단하지 않고 정당행위와는 상관이 없는 십계명을 어긴 대죄인이자 세속법적으로 단순 형사범 정도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은 빌렘 신부가 친 일본 성향에서 나온 식민지패러다임에 갇혀 있었기 때문으로 이에서 비롯된 판단력의 한계를 드러낸 결과였다는 황종렬의 의견이 있다.《서울대교구 시복시성 자료집: 안중근의 시복시성 가능한가: 안중근 토마스의 생애에 대한 재인식-의병기와 수인기의 목적을 중심으로》, 서울대교구 시복시성 준비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311~312쪽. 빌렘 신부의 친일성향의 여러증거에 대하여 더 자세한 내용은 황종렬,《안중근토마스》, 대구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3, 129 쪽 이하를참고할수 있다.
93)《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개정판>(라틴어 대역):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제14항,“애국심으로 또 국민 의무의 충실한 이행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진정한 공동선을 증진하여야 할 책무를 자각하여, 국가 권력이 올바로 행사되고 법률이 도덕률과 공동선에 부응하도록 그 의견을 관철시켜야 한다.”
94) 안중근,《안중근 자서전: 옥중서신 민 주교 전 상서, 홍 신부 전 상서》, 범우사, 2004, 169~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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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 신부는 안중근 사건을 이른바‘돌출행동’으로 밖에는 해석 하지 못하였음에 대하여 안중근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빌렘 신부에 대한 원망을 드러내지 않았다. 신문조서에서도 드러나듯 안중근은 빌렘 신부와 교회 당국자들에 대한 개인적 평가는 모두 묵비로 대신했다.
안중근의 저격행위와 법정에서 사제들을 보호하려는 묵비의 처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미리 앞당겨서 살았던 곧 시대를 앞서간 평신도 사도직의 정수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93)된다. 자신의 저격행위가 일제를 향한 정당행위로 방어해 주고 보호하는 입장에서 증언을 하지 않은 사제들의 모습까지 사랑하고 존경하며 기꺼이 용서하는 안중근의 모습94)은 오늘날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Ⅴ. 결론
안중근에 대한 인식은 오랜 기간 애국자로서 기억된 반면,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었다. 1979년‘안중근 탄생 100주년 기념식’과‘안중근 추모 미사’가 처음으로 거행됨으로써 신앙인 안중근이 주목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추모 미사는 계속 이어졌다. 1990년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안중근 의사 추모 자료집》을 간행하면서 학문적으로 신앙인 안중근을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어‘전쟁 중의 전투행위’,‘정당방위’에 해당하면 교리적으로 살인을 인정한다는 점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렇게 신앙인 안중근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일어나면서 안중근의 저격행위가 신학적으로, 교회법적으로도 정당했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되며, 그 결과 안중근은 오늘날에 있어서 신앙과 조국애를 조화롭게 연결시킨 모범적 신앙 인상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95)
따라서 이러한 배경 하에서 안중근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평가받아야만 한다. 그의 삶은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기 이전과 이후의 삶으로 구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삶으로 거듭난 세례 받은 이후의 삶은 가톨릭 평신도로서의 이상을 구현한 삶이었다. 그는 신앙인이자 교육자이면서 종국에는 군인으로서 삶을 마감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으로 인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방위로서의 정당행위로 인식되는 반면, 일본 측에서는 자객이자 테러범 정도로 취급해 버렸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현재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져 왔다.
안중근의 저격행위에 대한 입장정리가 아직까지 요원하여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서로 감정다툼과 역사왜곡이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정부차원에서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급선무로 해결 되어야 할 사안은 한일 양측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설득이 가능한 법률적 입장정리일 것이다. 현재 일본정부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재판이었기에 안중근을 단순 형사범이자 테러리스트로 단정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입장에 한국정부는 망언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앞으로의 한일관계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 예상된다.
안중근 사건을 재조명해보면 신병인도와 신문 그리고 공판을 포함한 재판전과정이 위법하고 불법이었다. 일제의 지시에 의해서 법원이 조종을 당하면서 사형판결을 미리 설정한 다음에 진행된 불법재판이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조차지에서 정치적 판단으로 관할권을 포기하여 일본에 넘긴 재판 관할권의 문제, 한국법이 아닌 일본법으로만 적용한 부당한 법적용의 문제, 전쟁상태를 인정하지 않은 점, 비정규 게릴라전의 한 형태로서의 저격행위를 인정하지 않은 문제, 안중근은 의병 지휘관이었기에 군인신분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문제 등이 노출됐다. 또한 재판 진행 과정에서 포로 신분을 규정하는 국제법으로 재판하라는 안중근의 거듭된 주장을 무시하는 등 불공정 피고인 처우 문제 등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중근의 저격행위는 개인적 차원의 사적 보복이 아니었다. 교회법적으로 그의 행위는 정당방위로서의 정당행위에 해당한다. 애국주의와 신앙이 결합된 토착화 평신도 사도직을 적극적으로 구현한 의인이기에 교회입장에서는 최상의 찬사96)를 보내고 있다. 그 당시에 교회당국자들로부터 오해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가톨릭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선교사 사제들의 판단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은 깊은 반성을 전제하며 사죄97)를했다. 안중근을 평가한 당시 교회의 사제들에게는 그 당시에 그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일제식민지 하의 입장을 십분 고려하여 호교론적 입장의 충정이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안중근의 저격행위가 목적하는 바는 대한제국의 독립이라는 소극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를 대한민국만을 사랑한 좁은 의미의 애국주의자로 평가절하해서도 안 되겠다. 그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동양평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민족 간의 단합과 일치를 도모한, 시대를 앞서간 평신도 신학자라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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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안중근”,《한국가톨릭대사전》, 8권, 5826~5829쪽.
96)《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개정판>(라틴어 대역): 사목헌장》,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제79항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부족이나 종족이나 소수 민족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저행위들을 숙고하여야 하며, 이는 잔혹한 범죄로 강력히 규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범죄를 명령하는 자들에게 공공연히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사람들의 정신은 최상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
97) 김수환,《김수환 추기경 말씀집: 안중근 추모 미사 애국 애족의 길[추모미사, 안중근 의사, 1993. 8. 21]》,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 1993, 243~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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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할 수 있다. 만민평등이라는 가톨릭 신앙관을 조선에 뿌리내리게 한 선각자임이 그의 저술에서 장엄하게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 구현을 기초로 세속의 법치주의를 넘어 하느님의 법즉사랑과 용서의 법이 구현될 수있 도록 대안을 냈던 대 사상가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 일본은 안중근을 평가절하하고 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 이른바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죄(대한민국 형법 제308조) 이다. 이것을 일본 정부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일본 측이 그토록 원하는 원칙과 법치대로 하면 된다. 즉, 감정대응을 자제하고 법적 문제 차원으로 접근하여 안중근의 명예훼손을 방지하고 예방해야만 한다. 국제법적 차원에서 안중근의 재판은 부당했으며 불법이자 위법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논거를 기초로 철저한 증거자료와 소명자료를 준비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준비를 해야만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교회법적인 차원에서 정당한 전쟁 교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안중근의 교회법적 준법정신의 실현까지 포함하여 향후 가톨릭교회의 시복시성(諡聖諡福, beatification and canonization) 의 자료로서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져야 함을 제안하는 바이다.
안중근은 사랑과 평화의 방해물을 제거한 참된 의인이었다. 그의 저격행 위는 공동선을 목적으로 실행한 의거임을 직시해야만 한다. 안중근 토마스라는 평신도 신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더 나아가 이론에만 머물지 않은 실천신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그의 사상이 더욱 깊이 연구되어야만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를 귀감으로 삼아 역사 왜곡과 망언으로 대변되는 일본 정부 측의 발언에 대해 합법적 정당성을 기초로 한 명예훼손 방지를 위한 재심을 철저히 준비해야 하겠다. 이러한 준비절차가 충실해진 상태에서 안중근의 숭고한 명예는 드높여지고 회복되며 보호될 것이라 전망한다.
투고일 : 2015. 9.30
심사일 : 2015.10.21
게재확정일 : 201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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