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6호
덕암서원 (德巖書院)
덕암서당
분 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서원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94.04.16
소 재 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유월3길 29-72 (유월리)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경산이씨덕암서당종중
· 상 세 문 의 : 경상북도 성주군 문화관광과 054-930-6792
경산 이씨인 이천배·이천봉·이주를 추모하기 위해 도내 유림에서 세운 건물이다.
이천배와 이천봉은 형제 사이로 함께 정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중 이천봉은 정묘호란 때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벼슬을 지냈다.
조선 현종 13년(1672)에 세운 이 서원은 처음에는 성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만 담당하는 덕암사로 세웠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되었다가, 고종 13년(1876) 덕암서당으로 고쳐 세우면서 교육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문 격인 건명문을 들어서면 남동향으로 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만들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지붕에서 느끼는 완만한 곡선이 돋보이는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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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제6권 / 문답(問答) / 이경발(李景發)과의 문답
〔문〕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선생의 위판(位版)의 길이와 너비를 평소 8현의 위판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답〕 두 선생의 위판은 향교 대성전(大成殿) 안에 종사하는 십철(十哲)의 방식을 따르고 김 선생(金先生 김굉필(金宏弼))의 위판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종사하는 분들의 방식을 따라야 하네. 그 이유는 두 선생이 만일 동무와 서무에 종사하는 분들의 방식을 따르게 되면 김 선생은 더 이상 어떻게 낮출 기준이 없으므로 형편상 그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네.
〔문〕 축식(祝式)은 마땅히 두 폭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방식을 ‘연월일 후학모 감소고우선사이천정선생 복이 …… 이한훤당김공배향 상향(年月日 後學某 敢昭告于先師伊川程先生 伏以 …… 以寒暄堂金公配享 尙饗)’이라 하고 운곡(雲谷 주희) 선생에게도 이와 같이 해야겠습니까?
〔답〕 만일 그 내용을 쓴다면 두 선생 앞에 다 마땅히 써야 할 것이네. 다만 ‘배(配)’ 자는 쓸 수가 없고 마땅히 ‘종사(從祀)’ 자를 써야 하네.
〔문〕 제품(祭品)은 주부(州府)의 큰 제사 때 8변(籩), 8두(豆)를 쓰고 있으니 지금의 경우에는 6변, 6두를 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두 선생의 제향은 향현(鄕賢)의 경우와는 다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답〕 두 선생은 4변, 4두를 쓰고 한훤 선생에게는 《오례의(五禮儀)》의 종사하는 법에 따라 좌우에 각 2변, 2두를 쓰도록 하게.
〔문〕 한훤당 앞에도 술을 한 잔만 올리고, 폐백을 올리거나 축문을 읽는 일은 없습니까? 의례적인 향사에는 이와 같은 의식이 없다 하더라도 위패를 봉안할 때는 다를 듯한데 어떻습니까?
〔답〕 두 선생 앞에는 삼헌(三獻)을 갖추며 축(祝)은 있고 폐백은 없으나, 김 선생 앞에는 술을 한 잔만 올리고 축은 없이 분헌관(分獻官)이 있네. 위패를 처음 봉안하는 제사에도 마찬가지이네. 그리고 처음 봉안하는 제사 때 두 선생 앞에 이미 한훤당을 받들어 붙인다는 뜻을 갖추어 고하였으니, 한훤당 앞에는 굳이 따로 고할 것이 없네.
〔문〕 서원 규약 중에 날마다 사당에 배알하는 등의 일을 전처럼 벽에 게시하고는 싶습니다만, 난리 이전부터 원생들이 줄곧 해이해져서 어떤 자는 매일 배알하는 것을 싫어하여 모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초하루와 보름에만 참배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한다면 너무 간소할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원생들이 해이해졌다고 해서 매일 사당에 배알하는 의식을 벽에 게시하는 문제를 미리 꺼릴 필요는 없네. 해이해진 자들이 꺼리고 오지 않는다 하여 당장 우리의 기존 규정을 고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초하루와 보름에만 참배하는 규정도 나름대로 무방할 것이네. 다만 만일 매일 배알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논한다면, 내가 그 규정을 정하는 데 관계하였으므로 나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니, 감히 새로운 주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다시 언급하기는 곤란하네.
〔문〕 홀기(笏記)에 희생(犧牲)을 살펴보는 의식이 없습니다. 성균관에는 초헌관이 희생을 살펴보되 축(祝)이 희생이 살졌다고 고하고, 주현(州縣)에는 종헌관이 희생을 살펴보되 살졌다고 고하지는 않습니다. 서원의 향사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옛 의식에는 초헌관 이하가 희생을 매어놓은 곳에 나아가 줄지어 서 있고 축이 희생이 살졌다고 고하였네.
이상은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위판을 봉안할 때의 의식에 관한 것이다.
[주-D001] 이경발(李景發)과의 문답 : 경발은 이천배(李天培)의 자이다. 호는 삼익재(三益齋), 본관은 경산(京山)이다. 작자보다 15년 연하이며 작자의 문인이다. 본 문답은 작자 60세 때인 1602년(선조35)에 이루어진 것이다. 성주(星州) 사류들이 임진왜란으로 다년간 향사가 중단되었던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수리하고 과거처럼 다시 정이(程頤)와 주희(朱熹)를 주벽으로 하고 한훤당(韓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종사(從祀)하기 위해 그 위패를 처음 봉안할 당시에 이천배가 사류의 대표로서 그에 따른 제반 문제를 작자에게 물어온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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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제12권 / 제문(祭文) / 이경발(李景發) 천배(天培) 에 대한 제문 갑진년(1604)
아, 애통하여라. 우리 경발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온화하고 순박한 모습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고 진실하고 신중한 말소리를 더 이상 들어볼 수 없단 말인가.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행실이 세상에 드러나니 화목하고 도타운 정을 가슴에 지녔으며, 큰 뜻을 세우고 옛 성현을 사모하여 세상과의 교제를 끊고 홀로 글을 배웠으니, 이는 다 지금 세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네. 그런데 뜻밖에 병이 들어 뜻을 품은 채 지하에 묻힘으로써 마침내 온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한 고을의 어진 선비가 죽었다고 한탄과 한숨을 자아내게 하고, 친지와 벗들이 눈물을 흘리고 목이 메어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다고 말하게 한단 말인가. 이는 진정 경발의 심지와 행실이 남들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네. 자신의 포부와 재주를 발휘하지 못한 안타까움이나 죽은 뒤에 후사를 맡길 만한 자손이 없는 슬픔 따위는 경발 자신에게 그다지 큰 유감이 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네.
내가 그대의 가문과 서로 관계를 맺은 것은 여러 대이네. 그대의 부친과는 일찍이 같은 문하생에 같은 뜻을 지니고 같은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한 정분이 있었는데, 나를 버리고 먼저 세상을 떠나 나로 하여금 항상 지기지우를 잃은 한탄을 품고 살도록 하였네. 그러나 다행히 그대 형제가 있어서 내 만년의 교분을 맺어 지난날 이루지 못한 우정을 다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또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나의 서글픈 심정을 어찌 또 차마 형언할 수 있겠는가. 옛일을 추억하고 지금 상황을 생각하니 내 가슴이 무너질 듯하네. 한잔 술로 깊은 정을 부치니 넋이 행여 지각이 있다면 이내 심정 알 것이네.
[주-D001] 이경발(李景發) : 이천배(李天培)는, 호는 삼익재(三益齋),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그의 아우 이천봉(李天封)과 함께 작자의 문인으로 작자보다 15년 연하인데, 46세로 1604년(선조37)에 죽었다. 이때 작자는 62세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1
한강집 속집 제8권 / 서(書) / 答李君顯 彦英
한강집 속집 제8권 / 서(書) / 答李君顯 彦英
謹奉辱書。就審酷暑。侍奉雅履佳福。感慰無量。慈闈證候。尙未快安。恒深仰慮。浴椒太早。僕亦非不知之。而苦於濕痺。不免爲觸冒庚炎計耳。初欲由旱路。而昨得郭稚靜書。遂欲紆就木道耳。適左右許與同行。深爲幸甚。而一行行色之煩。曾致多口之外滋。今亦有朋友間簡密之規。故雖子弟朋友之親切者。皆一切揮斥之。如有不得已相從者。則約與聚會於泉上。此亦出於不得已者。而氣像如何耶。
叔發亦不許同之。其必別作一行。想彼知君有行。必與同之矣。
한강집 속집 제8권 / 서(書) / 이군현(李君顯) 언영(彦英) 에게 답함
삼가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요즈음 무더위에 시하(侍下)에 있는 그대의 근황이 평안함을 알고 나니, 고맙고 위안되는 마음 한량이 없네. 하지만 자당(慈堂)의 병세가 아직 쾌유되지 않았다 하니 매우 염려되네.
초정(椒井)에 목욕하는 일은 그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풍습(風濕)으로 저리는 통증이 고통스러워 어쩔 수 없이 무더위를 무릅쓰고 떠날 계획을 한 것이네. 처음에는 육로로 갈 생각이었으나 어제 곽치정(郭稚靜 곽근(郭赾))의 편지를 받고 물길로 돌아서 가려고 하네. 마침 그대가 나와 동행해 주겠다고 하니 매우 다행스럽네. 하지만 일행이 많은 것은 일찍이 외부인들의 비난을 초래한 적이 많았고, 지금 또 여러 벗들로부터 단출하게 다녀오도록 하라는 경계가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 집 자제나 친근한 벗이라 하더라도 모두 일절 물리쳤다네. 하지만 만일 부득이 따라오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온천 근처에서 함께 모이자고 약속할 생각이네. 이 또한 부득이한 방침인데 그대의 느낌은 어떤가? 숙발(叔發 이천봉(李天封))도 동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필시 따로 일행을 만들 것으로 보이네. 숙발이 그대도 간다는 사실을 알면 반드시 함께 가려고 할 것이네.
[주-D001] 이군현(李君顯) : 군현은 이언영(李彥英)의 자이다. 호는 완석정(浣石亭)이고,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작자의 문인이며 작자보다 25년 연하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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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속집 제8권 / 서(書) / 이숙발(李叔發) 천봉(天封) 에게 답함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한 나의 심정이야 말을 하잘것이 뭐가 있겠는가. 편지를 받고서 서원으로 들어간 그대의 근황이 평안함을 알고 나니, 매우 위안이 되었네. 나는 겨우 노쇠한 몸을 부지하고 있는 처지로 나날이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낀다네.
과거 시험 날짜를 뒤로 미루었다는 소식이 아직 없는 데다가 또 한식(寒食)을 만났으므로 나 역시 재계할 인원이 혹시 다 모이지 못할까 매우 염려스럽네. 서원의 단청을 이미 오래전에 마쳤는데도 위판(位版)을 봉안하는 일이 아직 지연되고 있으니, 매우 미안한 일이네. 그러나 상황이 어쩔 수 없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대를 만일 원장(院長) 직에서 교체하게 된다면 그 두 사람은 물론 후임으로 앉힐 만하네.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대를 교체한다는 말을 어찌 내 입으로 꺼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내가 그런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과연 따라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외진 시골 마을에 자취를 숨기고서 세속과 서로 관계를 갖지 않으려고 하네. 서원에 관련된 일 등이 비록 사문(斯文)의 성쇠에 관한 일이기는 해도 내가 마땅히 간여해서는 안 되고 서원에서도 나에게 질문을 해오지 않아야만, 비로소 내가 오늘날 취해야 할 처신과 남들이 나에 대해 취해야 할 처사에 부합될 것이네. 이 늙은이의 소견이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그러나 그대가 지금 맡은 원장 직만은 교체하는 것이 옳지 않네. 반드시 위판을 옮겨 봉안하고 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단장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중에 천천히 논의하여야 할 것이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D001] 이숙발(李叔發) : 숙발은 이천봉(李天封)의 자이다. 호는 백천(白川)이고, 본관은 경산(京山)이다. 이천배(李天培)의 아우로, 형과 함께 작자의 문인이며 작자보다 24년 연하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3
答李叔發 天封
積阻此懷不足言。獲書。知君入院佳勝。甚慰甚慰。僕僅扶衰悴。日覺憒憒耳。科期退音尙未至。又値禁烟之節。僕亦深慮齋員之或未齊會耳。丹艧已畢之久。而奉安尙稽。殊甚未安矣。然事勢有不得已。則亦且奈何。君若可遞。兩君固可代矣。無緣而遞君。僕豈能發此口乎。况僕有言。而謂人能聽從乎。僕自以爲屛跡窮閻。與世俗不相關涉。如書院等事。雖信爲斯文所係。而僕固不當預。院亦不相問。方愜於僕之今日自處與人之處我也。老物此見。於君意如何。然君今日
院長。則不當遞也。須待移妥及東西齋裝畢後徐議之可也。如何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