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죄와 구원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_N. T. 라이트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중세, 특히 발달된 연옥 교리가 15세기 유럽 교회에 드리운 깊은 그림자 안에 놓여 있다. 오랫동안 서구의 교회는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이 나뉘어 있어도, 완전하고 가장 거룩하게 된 “성인들”(saints)만 죽은 후에 곧바로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인들을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최종적으로 천국행이 확정되었다 하더라도 처벌받고 정화되는 고통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고안해 냈고, 이어서 단테가 생생한 운문을 통해 묘사했다. 다가올 천국을 고대하면 연옥의 고통은 참을 만하다고 신학자들이 아무리 설명한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들, 연옥의 시간은 여전히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연옥을 피하는, 또는 연옥에 머무르는 시간을 줄이는 전략을 구상하고 만들어 내는 산업(이 표현은 지나치지 않다)이 등장했다. 살아생전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 사람들에게 걸맞은 사후 세상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기도를 하는 공동체가 세워지고 예배당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을 잘 돌아가게 하는 다른 방법들도 있었다. 연옥에서 받을 고문과 죄에 대한 처벌을 완전히 면제해 준다며 교황이 “면죄부”를 내놓았다. 16세기 초까지 어떤 사람들은 면죄부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번 돈이 교회의 주요 사업을 돕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바로 그때, 학식과 신실함을 겸비한 독일 북동부의 한 젊은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사는 더 이상 이 사태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교회가 개혁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여 면죄부 장사를 비판하는 내용을 포함한 95개조 “논제”(theses)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못으로 박아 두었다. 그는 진지한 토론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의 여파는 신학교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 버렸다.
.
마르틴 루터는 탄탄한 성경적 근거를 바탕으로 인간 사후에 일어날 일에 관한 교회의 모든 공식적 가르침을 반박했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바울의 신학을 근거로 삼았다. 바울의 칼을 재빠르게 두 번 휘두르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다. 죽을 운명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하지만 죽음 자체가 죄를 종결시켰다(롬 6:7) 그렇다. 죄는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 처벌을 짊어지셨다(갈 3:13, 고후 5:21). 그러니 연옥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곧장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
교회가 받아들인 전통을 반대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랐다. 천사 박사(Angelic Doctor)보다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아가 비대해진 세속적 교황제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가운데 새롭게 발명된 인쇄기가 교황을 반대하는 논고와 일상어로 번역된 성경을 찍어낼 수 있게 되자 루터의 메시지는 흡인력을 얻었다.
.
그런데 연옥이 배제되어 “천국 혹은 지옥”이라는 단 두 개의 선택지만 남는다면, 어떻게 인간은 자신 앞에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길거리에서 얼어 죽느니 차라리 감옥에서 하루를 보내려는 잡범과 같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가혹한 상황보다는 차라리 연옥에서 “징역살이”를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연옥을 부인하는 것이 느닷없이 (구원에 대한) 확신(assurance)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사람은 자신이 곧장 천국에 갈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최소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 이후로(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다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의로움”이 필요하다고 가르쳐 왔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어떻게 ‘유스티티아’(iustitia, 의로움)를 얻을 수 있는지에 관한 다양한 이론이 발전했다. 의로움은 주입되는가, 전가되는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디카이오쉬네’(dikaiosynē)를 말한다. 루터는 바로 하나님의 ‘디카이오쉬네’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디카이오쉬네’, 곧 자신의 ‘유스티티아’를 죄인인 인간들에게 수여하실(credit) 수 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도덕 규율을 지키려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복음을 믿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확신은 따라온다. 연옥을 부정함으로 사후 세계에 대한 불안이 가중된 듯했으나, 이로써 이제 미래의 최종 운명에 대해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
이러한 내력으로 (다시 말하면, 이 주제는 굉장히 복잡하지만 이 정도 간략하게 말해도 여기에선 충분할 것이다), 그 유명한 개신교의 (바울적이라고 여겨진) “이신칭의” 교리가 탄생했다. 이 교리는 필자 자신을 포함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이 교리는 무가치한 통회자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를 말한다.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또한 죄 용서를 받았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말한다. 죄 용서는 현재 주어진 것이며, 신자가 죽고 난 직후에 맞이할 미래에 대한 보장이다. 면죄부는 “헌금함에 동전이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는 약속 아래 팔려 나갔다. 이에 대해 개신교도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최악의 죄인이라도 진실로 믿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 예수로부터 용서를 받는다.” 만약 선택지가 이 두 가지만 있다면(사실 16세기 초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단 하나의 진짜 답이 있을 것이다. 바울이 분명히 인정할 만한 단 하나의 답.
.
이 답의 가장 큰 장점은 중세에 제기된 질문에 성경적 답을 준다는 것이다. 반면, 가장 큰 약점은 “중세에 제기된 질문“에 성경적 답을 준다는 것이다. 그 질문은 중세 시대에 너무나 중요해진 나머지 이내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으로 간주되었다. 내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지옥과 연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삶은 종종 짧고 험하니 질문은 절박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박한 질문으로 보인다. “천국 가기”가 궁극의 목표인 세상에서는 심지어 장수하며 편안한 삶을 산 사람들에게도 절박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고전적으로 개신교도들이 제시한 답변 몇 가지가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
하지만 신약성경이 말하듯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통치(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가 이미 땅 위에서 시작되었다면 이 모든 질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궁극적 미래에 관한 신약성경의 비전이 “천국에 가기”와 “지복직관”(beatific vision, 천상에서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을 천국에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이라면?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공동체와 교회, 그리고 정치적 도전에 관한 질문들이 갑자기 날카롭게 다시 부상한다. 갈라디아서가 이러한 지점에서 우리를 이미 앞서간 문서라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