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113호 (2024년 1-2월) 화제작가 신간 특집 / 권경자 편

[조귀순]

권경자  d-kwon@hanmail.net

현)권경자 산부인과의원 원장

2006년 에세이스트 등단

(사)한국수필가협회 부산지회 부회장 역임

부산의사 문우회 회장 역임 역임

한국의사 수필가협회 회원

부산광역시 여자의사회 회장,

부산광역시의사회 부회장,

제3회 한국수필 부산문학상 우수상

현) 에세이스트작가회의 부산지회 회장

    나에게 문학이란

  난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책만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이였다.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가슴이 설레었다. 보물을 찾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맨 먼저 접했던 언어는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였다. 삼십 년 동안은 일본어의 세계에서 살아왔다. 분명 나는 한국 국적이어서 모국어는 한국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제일 부러웠던 건 그 집에 가서 같이 놀다가 헤어질 즈음  “이것 우리 아버지가 쓰셨던 시집 책이야” 하면서 공손히 책을 건네주는 친구였다. 뜻밖의 선물에 놀라기도 하고 고상한 그 집 분위기를 느끼니 내 마음은 착잡했다. 공부는 그 아이보다 내가 월등 잘 했지만 이국 땅에서 매일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노동으로 고달픈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시렸다. 선친은 살아 생전에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 빵을 해결하는 것조차도 너무나 힘이 들었다. 우리가 일본사람에게 당했던 것은 깨달음이 늦었기 때문이다. 앞선 깨달음을 얻으려면 기초부터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실력을 기를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난 어린 마음에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으로 떳떳이 인정받고 살려면 일본 애들보다 모든 면에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에게 답례품으로 이쁜 손수건을 줄 때 나도 언젠가는 내 혼이 담겨있는 책을 선물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졌다.

  학습 과목 중에서 제일 재미있고 성적이 좋았던 것은 국어였다. 어 느 나라 말이든 언어 자체가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읽고 듣고 말하고 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 담임인 여선생님이 점심시간에 갑자기 나를 방송실로 데려갔다. 마이크 앞에서 읽어보라고 원고를 주셨다. 학급 학생 모두와 극기 훈련으로 오 학년으로는 좀 어려운 산이었는데 학우와 선생님 도움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힘겹게 정상까지 오르게 되어 너무나 기뻤고 친구와 선생님께 고마움을 느꼈다는 글이다. 사전에 한마디 말씀도 없으셨고 연습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읽어보라 하셨다. 마이크를 통해 전교에 내 목소리가 울린다는 생각을 하니 좀 긴장이 되었다. ‘뭐, 내가 쓴 글인데 어려운 것 있나’ 싶어 배짱으로 일부로 꾀꼬리처럼 들리게 목소리도 이쁘게 만들고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감정 을 실어 읽었다. 그 사건이 문학에 눈뜨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내 생각이, 내 글이 많은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24살 나이에 유학생 남편과 결혼해 고된 수련 끝에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었다. 5년 뒤 부산으로 정착하였다. 서른네 살 때 개업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결혼, 출산, 육아, 시집살이, 병원경영, 8년 동안은 야간분만도 하며 의업에 올인한 상태였다. 난 성격이 워낙 쾌활하고 긍정적이지만 정신적, 육제적으로 정말 어려웠다. 피폐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떻게 그 일을 다 해낼 수가 있었을까, 내 스스로에 놀라며 자문해 본다. ‘문학의 힘’이 아닐까? 지치고 슬프고 억울하면 억울할수록 책을 가까이하고 문학이란 끈을 놓지 않았다. 분만 대기 중, 환자분이 혈액이나 소변을 채집하는 짧은 순간, 미용실과 지하철 어디에서든 틈만 나면 한 줄의 글이라도 읽었다.

  나에게 있어서 문학은 ‘은인’이다. 오로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문화, 언어, 습관이 다른 의식의 세계를 오가면서 마음의 질서와 균형을 잡아주고 현실에 좌절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밝은 마음으로 꿋꿋이 살아가게 해준 문학! 만족과 절제, 이해와 용서를 깨닫게 해준 문학! 남들과 어울리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에너지의 원천,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인가.

  한국에 나와 얼마 되지 않아 읽었던 신문 기사 내용이 모국어로 문필활동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나에게 대단한 긍지를 심어줬다. 언어 학적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말이 한글이라고 석학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모국어로 글을 쓴 작업이 고통에서 무한한 기쁨으로 변했다.

  재일교포 2,3세들은 국적만 한국이지 모국어를 모르는 애들이 태반이다. 슬픈 현실이다.

  선친은 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의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자녀 교육에 전력투구하셨다. 덕분에 나는 빵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글로 나의 존재가치를 표현할 수가 있게 되었다. 선친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기르고 어떤 인간이 되어주고 싶어 했는지 잘 안다. 나의 의학과 문학에 대한 열정은 아버지의 치열한 삶에서 온다.

  1988년도 아버님이 눈을 감으셨을 때 약속했다.

  “아버지,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이제 근심 걱정 다 놓으시고 편히 가십시오. 아버지가 못 해냈던 일을 제가 꼭 하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난 평생 의학과 문학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련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저녁 무렵 산책길에서 양팔을 교대로 오르내리는 기구로 신나게 몸을 풀고 있었다. 잠시 후 옆에 있는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라 양손을 동시에 놓아버렸다. 남편에게 가는 내 등 뒤에서 격노한 고함이 터졌다.

  “아주머니! 갑자기 손을 놓으면 어떡해요. 다칠 뻔했잖아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60대 중반의 여자였다. 나와 반대편에서 같은 운동을 하고 있던 분이다. 이 기구는 다른 곳의 같은 기구보다 앞 사람과의 거리가 짧고 줄도 가벼워 불안정했다. 탄력이 붙어 있던 줄이 그분 쪽으로 날아간 모양이다.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아차렸다.

  ”어머나, 미안합니다. 얼마나 놀라셨어요?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평소 조심성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정말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 인사를 했다. 고개를 올리니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가 커다랗게 커지고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였다.

  “아지매, 일본에서 오래 살다가 왔지요?”

  “아, 예.”

  “아지매, 한국에서 산 지 오래됐지요?”

  “아, 예.”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남편이 눈치를 채고 “이거는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양쪽 줄을 가운데에 모아 아랫부분을 묶어 주었다. 나는 우스웠다. 당연히 그리 하는 줄 알고 있고 항상 야무지게 했는데 남에게 손톱만큼도 피해주기 싫은 성격에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분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했다.

  “나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제가 잘못했는데 주의 부족이었어요.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에요 . 만일에 눈에 상처라도 입혔다면 큰일이잖아요. 앞으로 그 기구는 쓰지 않겠어요.”

  나는 걸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 아주머니는 어떻게 족집게처럼 맞추었을까?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아지매, 일본에서 왔지요?”란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던 사람은 없었다. 태어나서 30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고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일본교육을 받았으니 억양이나 작은 행동 모두가 남 다르게 보일 것이다. 나는 그저 몸에 배었고 습관대로 하고 있을 뿐인데 상대를 놀라게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내가 다르게 보이는 걸 인식한다.

  오래전에 만났던 일본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이분은 한국에 시집 와서 한국인 남편과 산다. 언젠가 초등학생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단다.

  “엄마, 엄마가 집에서 가르친대로 학교에서 하면 우주인이 되고 왕따 당하니까 학교에서는 엄마가 시킨 대로 안 해요.”

 나는 그애 말에 공감했다. 외모는 구분이 되지 않아도 행동 양식에는 많은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1980년대 대학교수인 남편과 제자와 함께 일본 우에노에 있는 한국식당에 갔을 때였다. 그 식당은 한국에서 일하러 온 아가씨 직원들이 많았다. 우리팀 담당 아가씨를 보고 한 남학생이 장난기 섞인 말투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분은 한국인일까요, 일본인일까요?”

  아가씨는 나를 한참 보다가 망설이면서 일본 사람이라고 답했다.

  “땡, 한국 사람입니다.”

  그녀는 놀란 눈을 하고 말했다.

 “이상하다, 이해가 안 가요. 이때까지 얼마나 일본 사람처럼 보이는 한국인도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일본인도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데.” 

  그 학생은 웃었다.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난감했다. 분명 한국 핏줄인데 내가 일부러 일본 사람을 닮고 싶은 것도 아니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숨긴 적도 없다. 나름 한국인이란 자부심도 애국심도 남다른 데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일본에서 살고 일본교육을 받았다고 일본 사람이 되지 않았다. 재일 교포 2,3세들이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는 사람이 많아진 지 오래되었다. 나는 조국에 와서 한국인으로 떳떳하게 살고 있으니 감사하다. 초등학교 입학하자 일본국기 ‘히노마루’를 그리게 했다. 그것을 아버지에게 보였더니 아버지 얼굴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던 것을 기억한다. 전혀 좋아하지 않고 잘 그렸다고 칭찬도 해주지 않고 약간 슬퍼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민단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아버지에게 보여드렸을 때는 환하게 웃으셨다. 아주 잘 그렸다고 칭찬해 주셨다.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이 좋았다. 하나 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4월 29일이었을 것이다. 천황의 생신이다. 그날은 국화 모양의 홍백 화과자를 전교생에게 주고 수업도 일찍 마치고 반은 공휴일이었다. 아버지에게 그 과자를 드렸다.

   “이걸 학교에서 받았어요.”

   그때 아버지의 흥분에 가까운 상기된 얼굴, 이제와서는 당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고도 남는다.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으로 살아냈던 비애, 억울함, 수모 등등 가슴 속 깊이 쌓인 복잡한 감정이 노출되는 것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교포1세 어르신들은 2세에게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잊지 말고 살아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일본학교에 입학시키고 일장기를 그리고 천황을 찬양하기 위한 화과자를 받아오니 아버지로서는 고뇌를 많이 하셨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의식적으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절 아버지는 교포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주 나를 데리고 갔다. 특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행사는 매년 거행한 8.15기념식이다. 버스를 대절하여 도쿄 시부야 공회당에 전국에서 집합한다. 대형 스크린에 한국 군대의 당당한 모습이 보여지던 때의 함성, 기립 박수, 눈물범벅, 그 웅장한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민단 단장으로 활약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자세가 나의 정체성 확립에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어르신들은 낮에는 고된 육체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밤에는 2세들 미래 교육을 위해 많이 애쓰셨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고마운 마음이 절실해진다. 초등 3~4 학년쯤 전교 조례식 때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제창하는데 나는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여자 담임이 내 옆에 왔다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나가 다른 선생님들이 서 있는 앞자리로 갔다. 옆에 있던 남자 체육 선생님에게 내 얘기를 귓속말로 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어떤 날은 히노마루 국기를 손에 들고 큰 도로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봤다. 한 친구가 나한테 국기를 주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국기를 흔들지 않고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갔다.

  그 당시 미치코왕비(황태자 부인)가 친정인 지바켄에 왔다가 도쿄 황거로 가는 길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 근처 도로를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려 했던 것이다. 모두 국기를 흔들고 환영했지만 나는 조용히 보기만 했다. 그때 차 안에서 하얀 모자를 쓴 왕비가 창문을 조금 열고 고개를 15도 정도 숙이고 손을 흔들던 모습을 봤다. 나는 손에 들 었던 일장기를 아까 줬던 친구에게 던지다시피 주고는 먼저 집으로 왔다. 그때 이 사람들이 우리 민족에 큰 고통을 주고 피해를 입혔던 것과 관련성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여태껏 마음속 에서 일장기와 천황 기미가요를 의식적으로 기피하고 살아왔다.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세계는 변한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언젠가는 위화감 없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흔들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꼭 올 것이라고 믿으며 산다. 

               1엔 그리고 1원

  일본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동전 1엔(円)의 중요성이다. 편의점에서 일회용 카메라를 샀다. 가격표를 보니 1029엔, 그러니 지 폐지갑에서 1000엔, 잔돈지갑에서 29엔이 나와야 한다. 1엔 한 개가 모자란다. 어쩔 수 없이 30엔을 낸다. 1엔이 있었더라면 거스름돈을 받을 필요가 없어서 직원이 편했을 텐데. 지갑 속을 뒤지면서 마음과 머리와 손이 바빠진다. 그런 나를 보고 직원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기다려주었다. 나도 서두르지 않았다. 가볍게 미소를 던지며 양해를구했다.

  “1엔이 모자라서 아쉽네요. 30엔을 드려야겠어요.”

  그는 고개 숙여 대단히 감사하다고 인사하였다. 일본인 치고는  건장한 체구에 얼굴 크기에 비해 작은 안경을 쓰고 앞머리가 벗겨진 중년 아저씨였다. 그 몸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화려한 체크무늬 앞치마를 입고 생글생글 웃는 유머러스한 모습에 나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주인인지 직원인지 모르겠다. 1엔을 나에게 건네줄 때는 돈을 받을 때보다 한층 더 밝은 표정이었다. 왼손 손바닥으로 받쳐가며 오른손 엄지와 인지로 귀한 물건을 증정하듯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다.

  “예, 여기 1엔이 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는 지나치다 싶은 공손한 태도에 웃음이 나왔지만, 마음속으로  감동을 받았다. 1엔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1엔을 준비하는 마음. 1엔 을 정확하게 주고받는 마음. 1엔을 고맙게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름다웠다. 마음에 쏙 들었다.

  일본 사람들의 동전 지갑 속을 들여다보면 1, 5, 10, 50, 100, 500엔 짜리 동전들이 사이좋게 오순도순 앉아 있는 모습이 정겹다. 일본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잔돈을 정확하게 준비하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이다. 선생님께선 재료값 1015엔을 받는 사람이 편하게 거스름돈이 필요 없도록 가져 오라고 하셨다. 그 다음날 한 명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1015엔을 봉투에 넣어 가져왔다. 오래 한국에서 살다가 일본에 가 보니 내 눈에는 <중학생 머리컷 2,525엔>이란 전광판이 별나 보였다. 우리 같으면 2500엔이거나 아예 2600엔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익을 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끝 단위 잔돈까지 소중히 여기는 건 서로를 생각 하고 공정해지려는 그들의 상도덕을 보는 것 같아 부러웠다.

  나의 진료실 책상 서랍 안에 있는 동전 지갑엔 1원, 5원이 아예 없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한국에서 살기 시작한 80년도 초에는 분명히 1원, 5원짜리 동전이 있었다. 돼지 저금통에 내 손으로 넣었는데, 그때 국민 한 사람당 빚이 60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500만 원이 넘는다. 나라살림이 걱정스럽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결과는 아닐까? 지난달 전기요금 청구서에 원단위 절사 -8이라고 적혀 있다. 가슴이 뜨끔했다. 이때 까지 무심코 넘겨버리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1원 8개가 서운하지 않을까?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인정받고 싶지 않을까. 해낼 능력이 있는데 기회를 주지 않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작고 보잘 것 없다고 무시해 버리는 일에 마음이 쓰인다.

 지하철 1구간 요금이 900원이니 1원짜리로 900개다. 와~ 어마어마 해. ‘티끌모아 태산’이란 속담이 실감난다.

 현재 일본 황후는 평민 출신이다. 그 집을 드나드는 상인들의 입에서 나온 소문에 의하면 그 가문의 절약 정신이 유별나다. ‘아깝다. 아깝다’란 단어가 입에 붙어 있다고 한다. 노랗게 바랜 과일, 감자와 당근 껍질까지도 버리지 않고 망자루에 모아서 통풍이 잘 되는 서늘한 곳에 걸어 놓는다.

   ‘스프를 만들 때 <다시>로 씁시다’라고 가족 구성원들에게 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철두철미한 절약의 생활철학이 몸에 배었다. 한 일본 여성이 한국의 종합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야기다. 작은 목소리로 아프니까 와달라고 수십 번을 애원해도 아무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자, 그녀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소리소리 지르고 베개를 벽에 던지고 난리를 쳤단다. 그제야 그 부서에 있는 의사, 간호사들이 총동원되어 그녀 병실에 모였다는 웃지 못할 일화이다.

  가끔 우리 사회가 작은 것에 대해 너무 무심한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잔돈을 무시하고 작은 소리를 무시하고, 그러다 작은 생명도 무시할까봐 걱정된다. 그녀는 “겉으로는 조용해 보여도 속으로는 다 생각이 있는데, 작은 목소리에 제발 귀 기울여 주세요” 하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한 방울의 물과 쌀알 한 톨도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존중하는 마음, 만물 만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아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함께 살아가는 길이다. 서로가 소중히 여기면 꿈과 희망을 얻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1원을 외롭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일본에서 1엔 덕으로 컸고, 지금은 한국에서 1원 덕분에 꿈과 희망을 붙들고 살아간다.

    권경자 론 

                        디아스포라-탈중심적 소수 문학

                                                                                                                       김종완

  1951년 ‘지바켄 후나바시’ 시에서 재일교포 2세의 장녀로 태어난 작가 권경자는 여느 교포들과 달리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아버지는 일찍 성공하여 교포와 일본 사회 양쪽에서 인정받고 있었 기에

                       나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유년 시절이 순탄하였다.             

                                                                                                           ―「고약스런 말의 속사정」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 빵 을 해결하는 것조차도 너무나 힘이 들었다. 우리가 일본사람에게 당했던 것은 깨달음이 늦었기 때문이다. 앞선 깨달음을 얻으려면 기초 부터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실력을 기를 수밖에 없다(「나에게 문학이 란」).” 작가는 그런 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했다. 아버지는 문패에 ‘ 竹山’라는 일본 성씨를 병기했다. 자연히 딸도 유치원 때부터 일본 성 씨를 따라 타케야마 케이꼬(竹山慶子)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權慶子(일본식 발음Gon keiko)라고 한국 성씨를 복원시켰다. 사람들로부터 “권 선생은 유쾌하고 밝아요, 고민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아요”라는 소리를 종종 들 을 정도로 건강하고 쾌활했지만, 그녀에게도 상처는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주산학원에 다녔다. 쌀가게 2층 다다미방, 우리는 긴 책상 앞에 앉아 얌전하게

       바른 자세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학생 둘과 남학생 다섯, 아무도 떠들지 않았다. 그때 건너편의

       한 애가 심심했던지 100엔짜리 동전을 굴렸고 또르르 구르던 동전은 내 앞에서 멈추었다. 바로 주워서

      “여기 있어” 하고 그 애한테 주려는 순간, 오른쪽에서 초등학생치고는 아주 묵직하고 낮은 악의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얏빠리 죠센진와 치가우(역시 조선인은 다르네)!” 또 박또박 내뱉는 그 말투에 놀라 획 돌아봤다.

                                                                                                          ―「고약스런 말의 속사정」

  순간 어린 소녀는 “얼어붙었다”. 후덕하신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소녀는 워낙 명민했으므로 그때까지 누구에게서도 그런 폄하 발언을 들어볼 일이 없었다. 일본인 친구들과 서로 집을 오가며 각별하게 지내면서도 그들과 좀 다를 뿐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이 사건은 소녀의 정체성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등줄기엔 식은땀이 흐르고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화끈거렸다.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지만

              빨개진 얼굴이  창피했다. 아이들은 침묵했다.

                                                                                                          ―「고약스런 말의 속사정」

   ‘아이들의 침묵’에 방점을 찍자면, 왜 아이들은 침묵했나를 물어야 한다. 그 침묵은 뭘까. 암묵적 묵인? 집단적 소외의 기미? 그녀는 문 제의 발언보다도 다른 급우들의 침묵에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잊지 않았다. 자신이 조선사람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뇌리에 깊이 새겨넣 게 된 중요한 지점이다. 그러나 위축되지 않았다. 외려 더 완강한 자존심을 내장시켰다. 의과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성씨를 고쳐 쓴 것도, 바로 저 상처로부터 수혈받은 당돌한 용기다. 당당한 자존심과 굳은 의지의 소유자가 된 그녀는 의과대학 졸업과 동시에 한국인 유학생과 결혼하면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편과 인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문학 덕분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둘은 언어학습 능력이 탁월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본 학생인 작가는 한국어를 잘했고 한국 학생인 남편은 일본어를 잘했다. 소통은 원활했고 즐거웠다. 그녀는 초등학교 오학년 때 이미 글짓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전교생이 듣는 학교 방송으로 자신의 글을 낭독한 적이 있었는데 훗날 초등학교 선생님은 그녀가 국문과(일본어학)에 진학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할 정도였다.

                         나에게 있어서 문학은 ‘은인’이다. 오로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문화, 언어, 습관이 다른 의식의

                        세계를 오가면서 마음의 질서와 균형 을 잡아주고 현실에 좌절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밝은 마음으로

                        꿋꿋이 살아가게 해준 문학! 만족과 절제, 이해와 용서를 깨닫게 해준 문학! 남들과 어울리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에너지의 원천,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인가.

                                                                                                                                              ―「나에게 문학이란」  

  그녀에게 문학은 이렇듯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하지만 결혼은 태어나고 자란 일본의 사회와 문화로부터 결별인 동시에 한국 사회라는 생소한 세계로의 모험이었다. 물론 일본에 살았어도 한국인 부모님 슬하에서 모국어나 모국의 풍속을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결혼제도는 한 나라안에서 살았다해도 낯선 집안으로 들어가 시어른을 모시며 새 식구로 자리매김하기까진 꽤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외국에서 온 며느리 야 오죽했겠나. 더구나 당시는 다문화 가정이 확산되기 이전이었다.

                          1980년 8월에 조국 땅을 밟고 시어른이 계신 대연동의 주택에서 신 혼살림을 시작했다.

                       한 달 남짓 지나 추석을 맞았다. 일본에서는 추석 을 명절로 쇠지 않는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풍속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추석과 보름달에 유별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무척이나 생소하였다.           

                                                                                                                ―「보름달」                              

   “태어나서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29년을 일본에서 살았”고 또 그 세월 이상을 한국에서 살았다. 한국에서 살아온 그 긴 시간은 “일본식이 아닌 한국식 되기”의 수련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단지 낯섦을 낯익음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다. 어거지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은 감각적 감수성의 저하일 수도 있다고 현대 심리학자들은 주장한다. 부조리와 불합리를 자주 경험할수록 저항보다 순응의 빈도가 높아지는 것, 이것이 사회적 동물이며 적응의 존재인 인간 의 원초적 비극일 수 있다.

  허나 작가 권경자는 순응형이 아니라 탐구형이다. 아직도 무수한 질문을 쏟아낸다. 그는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묻고 또 묻는 천진한 아이 같다. 그래서 희망의 작가다.

                       비록 한국말을 쓰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외국에서 태어나서

                   외국에서 한 세대의 세월만큼 교육을 받고 자랐다면 사실 나의 사고와 문화는 어쩔 수 없이

                   이국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가족이 있어 이곳에서 살았지만, 적응

                   과정이 결코 수월하진 않았다. 배짱과 노력으로 버티었다고 할까?  아니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적응했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내 생각이나 행동이 주위 사람과 다르면 바로 수정하였다.

                   철저히 한국식이 되고자 했으니 나의 사고방식은 이제 순한국식이 되었다고 자부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인공위성이라고?」

  배짱과 노력으로 버텼고 눈치보며 조심스레 적응했다는 그의 진술은, 또 “내 생각이나 행동이 주위 사람과 다르면 바로 수정”했다는 고백은 그녀의 현재 의식을 투영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세상은 낯설다. 삶의 모든 순간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로의 한 걸음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고 낯선 게 당연하다. 익숙하지 못하 고 생소한 게 부끄러움일 수 없다. 그것은 예민한 감수성의 소산이며 작가로서는 가장 훌륭한 자산이다. 모두가 안다고 입을 모을 때 모른다고 외치는 그가 진짜다.

  권경자의 수필은 그 낯섦의 세계를 향한 질문이며 치열한 탐색이다. 태어나고 교육받은 나라와 학습의 결과를 실천해야 하는 나라가 달랐다는 것, 디아스포라의 문학은 주류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탈중심적이며 소수의 경험이므로 공감층도 넓게 열려 있지 않다. 그럼에도 권경자는 지치지 않고 글을 쓴다. 세련되게 명문을 쏟아내는 것은 아니다. 일본식의 습속이나 가치관이 드러난 문장은 상당히 이 질적이다. 예를 들면, 한국으로 온 지 4개월 되었을 때 김장철을 맞았는데 거리에 김장시장이 열린 것을 보고 버리는 줄 알고 집에서 기르는 카나리아에게 주려고 배추잎을 뜯다가 주인에게 무안을 당하는 장면은 이질적인 것을 넘어서 코믹하다. 또 “남편을 모신다”든가  “말씀을 올린다”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고, 공손한 태도나 상냥한 말 투와 친절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중시하는 견해가 수필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점도 이질감을 불러온다. 그러나 진실되고 호소력이 있 으며 탐구적이다.

  우리는 그의 수필을 통해 다름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여 시댁에서 첫 추석을 맞은 그녀는 처음으로 송편을 빚어 보았으며 차례를 올렸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그녀에겐 이러한 풍습이 생소할 건 당연했다. 추석을 지낸 그 밤 연탄재를 치우려고 문밖에 나갔다가 둥실 떠 있는 보름달을 보고 그녀는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자 갑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고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내가 선택한 길인데 울어야 할 까 닭이 무엇인가.” 맞다. 굳세어라, 금순아!

               그 첫 번째 추석이 낯섦의 시작과도 같았다. 한국의 예절은 일본의 예 절과 달랐고 한국의 전통은 일본의

               전통과 상반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 었다. 귀국하고 처음 몇 해는 혹독한 시련의 적응기였다. 나는 시댁 식구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고 말도 서툴고 풍습에도 서툴렀다. 게다가 결혼 한 지 4년이 지나도록 임신이 되지 않았다.

               아기라도 빨리 생겼더라면 덜 외로웠을 것이다. 황야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성공하고

               싶었고 고국에서 당당하게 뿌리내리고 싶었다.                                                 ―「보름달」

  “황야에 홀로 선” 그 고독과 “살아남아 성공하고 싶었고 고국에서 당당하게 뿌리내리”고 싶었던 처절한 외로움의 시간이 그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견인했다. 

              기다리던 아기가 태어나고 산후 4개월 만에 부산대학병원 산부인 과 교실에 들어갔다

            다행히 일본에서  수련했던 기간을 인정받고 바 로 4년 차로 편입했다. 이렇게 하여 조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보름달」

  이후 종합병원에서 봉직하다가 나와서 개원한 지 37년 차다. 40대 부터 글쓰기를 시작했고 테니스, 헬스, 마라톤, 배드민턴 등체력 단련을 겸한 동호회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완벽한 착지! 성공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는 늘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즐거움을 열거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즐거움」이란 수필은 권경자라는 캐릭터가 가장 잘 드러난 글이다. 그녀는 워낙 검소하며 알뜰하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사람을 좋아한다. 혼자 자가용을 이용하기보다 버스나 택시를 타고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을 더 즐긴다. 그는 정보 폭주 사회가 타자를 소거하고 자기애에 빠져 지내는 현대의 주체들과 상반된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자가용과 스마트폰에 의해 현대의 주체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격리한다. 그들은 스스로 몸의 일을 포기하고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어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기쁨은 정신의 일이고 행복은 몸의 일이다”라고 말했다. 성과 사회에서 몸을 통한 오감으로 세계와 만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모두가 의자에 앉아 던져진 정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의사 권경자는 몸으로 세상을 만난다. 쉼없이 몸을 움직여 세계와 직접 대면하고자 치열하다.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몸으로 살기” 그것일 것이다. 그녀는 우리 사회의 자랑스러운 시민이다. 어떻게 그는 이토록 건강하게 성숙될 수 있었나? 그녀의 건강한 사회생활을 위해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은 아마도 시어머니일 듯싶다.

                 ① 시어머님은 철없는 며느리를 누구보다 아끼고 이해해주셨다. 일본에서 자라 한국 풍습에는

                서툰 나를 잘 보살펴  주셨고 마땅찮은 부 분도 있었을 것인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과 다른 여자의 삶을 격려해 주셨다.

                  ⓶ 어머니는 내 마음이 어지러울 때 정리해주는 해결사이기도 하셨 다. 살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상황에 부딪쳤을 때, “어머님, 오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조용히 말씀을 올리면,

                끝까지 들어주고 눈을 지그시 감으셨다.

                “네 말 맞다. 네가 옳다. 그놈 틀렸다.”                                     

                                                                                                                 ―「꽃상여」

  시어머니는 “열아홉 처녀로 전처소생이 일곱이나 되는 사대부집 홀아비에게로 시집” 와서 당신 슬하에 사남매를 더 두었는데 서른넷에 남편을 여의고 말았다. 결국 홀로 십일 남매를 키우고 출가시켰 다. 인내심이 대단한데다 천성적으로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다.

                대지주인 남편을 모셨기에 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사셨던 어머님은 소작농들이 찾아오면

              집에서 굶는 자녀들에게 주라며 곧잘 밥을 넉넉히 담아주시곤 했었다. 은혜를 잊지 못한

              소작농이며 머슴들의 자제들이 일본에 많이 살았는데 우리 결혼 소식을 듣고는 당시 귀했던

              세탁기며 텔레비전 같은 선물들을 많이 보내왔다. (…) 6·25 때 지주의 가족들임에도 시댁이

              마을 공산당원들에게 당하지 않은 것도 그 덕택이었다.                         

                                                                                                                             ―「꽃상여」

    시어머니는 96세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 대학교수인 아들은 출장을 가고 며느리인 작가가 임종을 지켰   다.

                어머님은 30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시고는 말없이 눈을 감으셨다

             우리는 눈빛으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 눈빛은 ‘이제 나는 너희 시아버지 곁으로

             가니 나머지는 너에게 부탁한다. 넌 똑똑하니까 잘 해낼 게야’라고 하셨고, 나는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머님께 배웠던 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편히 가세요’ 화답했다.                                           

                                                                                                                ―「꽃상여」   

    23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고부의 이별은 이렇듯 고요했다. 그녀가 첫 아이를 출산하고 넉 달 뒤에 대학에 편입하여 의사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시어머니의 적극적 응원과 지지에 힘입었음에 틀림없다. 그녀 삶의 한 축이 무너졌다. 그러나 그는 눈물 속에 빠져 있지 않고 시어머니의 일대기를 돌아보며 추모한다. 기억이 부활이다. 시어머니의 삶에 대하여 쓰고 또 늘 기억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이어짐이 곧 시어머니의 부활인 것이다. 심지어 김포공항에 전시된 꽃가마를 볼 때마다 탑돌이하듯 가마 주변을 돌고서야 탑승구로 향하는 습관이 생길 정도라니 참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 아닌가. 역시 사랑은 동사다.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일본에서 사업가로 탄탄히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유학생 남편을 만나 고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매우 서운해 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의 태도는 “분위기와 대사는 영화배우 처럼 멋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저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가거라, 조국인데”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엿공장으로 시작했 다. 삼십 대 중반의 신격호가 그 아버지의 공장에서 엿을 사다가 과 자와 껌의 원자재로 사용하여 (「나의 삼일절」) 롯데재벌가의 발판이 된 것으로 보면 그 엿이 얼마나 명품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이후 프레스공장을 거쳐 펄프회사를 오랫동안 경영하신 성공한 사업가였는 데, 1988년에 올림픽 개막을 한 달 앞두고 돌아가셨다(「아버지」). 작가가 개원한 지 2년 4개월 즈음이었다.

                  울음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놓고 겉으로는 웃으면서 환자분을 맞이 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안 그래요, 아버지? 올림픽 기간 중 당신이 이 세상 아닌 저 먼

            세상에 계신다는 공허감, 상실감에 흠뻑 젖어 있었어요. 지금까지 개·폐회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못 보았습니다.                       

                                                                                                                 ―「아버지」

  권경자의 특징은 슬픔을 당한 즉시 표출하지 않고 천천히 오래 머문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던가에 초점을 맞춘 「아버지」라는 작품은 무려 72매나 된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조망하면서 작가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완강하게 드러낸 이 작품은 자칫 지루하고 딱딱할 수 있는데 아버지라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타자를 선택해 서간문 형식으로 씀으로써 호소력을 지닌다. 그녀는 외모가 아버지를 닮았고 정신도 아버지를 닮으려 노력한다. 어릴 적 아버지는 딸을 손수 씻겨주었다.

                      아버지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당신이 발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부지런 히 가지런히 씻어줄 때마다  

                 저는 너무 간지러워서 비틀거리면서 ‘흐흐흐 흣’ 웃었지요. 그때 아버지의 손놀림과 감촉이

                 지금도 몸에 배어 있어요.             

                                                                                             ―「아버지」

     그 절대적 사랑의 체험이 권경자 인생에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그녀는 낯선 세계와의 부딪침에 두려움이 없다. 진료실에서 만난 환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거기서 또 의미를 생성해 내며 또 삶의 자세를 다듬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개인보다 사회나 단체를 우선시한다. 재일거류민단 단장을 오래 하신 아버지의 영향력일 것이다.

                 아버지! 저는 단결(團結)이란 단어보다 화합(和合)이란 단어를 좋아해요. 단결이란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기편이 옳지 않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속해있는 집단의 이익 때문에 무리하게

               결속해야 될 것 같은 부자유스러움을 느끼는데, 화합은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 오해하고 있는 사람,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까지도 함께 포용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애쓰고, 상 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같이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아름다 움이 있잖아요.

               화합보다 더 좋은 낱말이 있어요. 그것은 융합(融合)이에요.아버지가 살아오셨던 생활철학은 정직과

               화합, 융합 그 자체였어요. 저는 거기에 예절과 질서를 보태고 싶어요. 

                                                                                                                                  ―「아버지」

   정직, 화합, 융합, 예절, 질서, 친절, 공손, 이런 단어들이 권경자의 수필에는 자주 출현한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다. 타자를 잃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이미 오염될 대로 오염된 개념들이 권경자의 수필에선 순진하리만치 진지하게 다뤄진다. 촌스러운가. 아니다. 진실하다. 토속어나 화려한 수사가 글맛을 살릴지 몰라도 그렇게 아름다운 문장은 외국어 번역 때 엄청난 난관에 봉착한다. 권경자의 멋부림 없는 문장들은 짧고 정확하여 AI에게 번역시키면 오류도 없을 것 같다 . 무미하고 담담한 권경자의 글들은 조금은 이질적이지만 낯설기 보다 어떤 그리움마저 불러온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잃은 줄도 모르고 폐기한 개념들을 권경자는 글 속에 보물처럼 묻어놓았다. 이는 그의 삶의 궤적이 특별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즉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한국에 와서 살게 된 디아스포라적 삶을 살아야 했던 그가 낯선 세계에 성급하게 순응했다면 이런 수필집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낯선 것을 정직하게 표출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연 권경자의 수필은 탈중심의 소수 문학으로 의미가 크다.

            kjw2605@hanmail.net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