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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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로
구약성경
신약성경
역사적 예수(歷史的 - , 독일어: Jesus von Nazaret, 영어: historical Jesus)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나사렛의 예수에 관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상은 계몽된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예수상을 찾자"고 하여 신앙과 분리되어 예수에 관한 역사비평 방법(critical historical methods)을 사용한 연구 주제이다.
초기 기독교의 예수 이미지
예수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배경예수의 관점문화 속 예수
역사적 예수 논구 운동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박사 학위 논문인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독일어: Von Reimarus zu Wrede: eine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 영어: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From Reimarus to Wrede: a History of Life-of-Jesus Research)가 있으며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근대 서구 신학계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던 17-18세기 유럽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역사비평주의 영향으로 등장하였다. '교리적 그리스도'가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등 신조 또는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으로 해석한 기독교 교리적 그리스도라면, '역사적 예수'는 역사 속에서 살았던 인물로서 예수의 삶을 주목하여 바라본 예수를 말한다. 다시 말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역사적 인물로 실재했던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히려고 시도하는 연구다. 이러한 재구성은 그의 생애에 관한 1차 사료인 복음서 본문에 대한 성서 비평적 분석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가 살았던 당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연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 식민지였던 갈릴리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고장에서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유대인으로 제2성전 시대 후기 유대교에 메시아적이고 묵시적인 기대가 있던 시기에 살았다. 예수는 세례 요한이 처형 당한 이후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자 자율적인 윤리 교사"로 보일 수 있는 행동으로 2-3년간 활동하였다. 예수는 놀랍고 독창적인 비유를 말했고, 그 가운데 많은 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는 환전상과 제물로 쓰일 비둘기 등의 동물과 판매상을 쫓아내는 '성전정화 사건'을 일으켰다. 이때는 유월절로 예루살렘에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갈등이 고조된 시기였다. 성전 경비병이 그를 체포했고, 재판에 회부된 이후 헤롯 왕 등이 로마 총독인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넘겨 십자가형에 처했다. 예수가 시작한 운동은 처형되어 죽은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동생 야고보와 사도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 운동은 랍비 유대교에서 분리해 초기 기독교로 발전하였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문화적 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1세기 팔레스타인의 문화는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인 유대교(Judaism)와 외래문화인 헬레니즘(Hellenism)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서 헬레니즘이란 그리스 문화가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띠기 시작한 새로운 형태로서, 그 시기에 동부 지중해 세계의 판도를 바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의 정복 전쟁으로 정복하고 인도로 향하는 길을 연, 그의 원정의 뒤를 따라서 헬레니즘 문화가 생겨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장군들이 정치적 암투를 벌이면서 제국은 분할되었지만, 헬레니즘 문화는 지중해 동부 세계에서 7세기 아랍 제국의 정복이 있기까지 지배적인 문화로 남아 있었다.
예수가 살던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는 개인주의는 매우 낯선 사고방식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족이나 가문 같은 친족 집단끼리 서로 연결되어 사는 공동체적 전통을 존중하는 세계관 속에서 공동체적 문화와 유대교 전통을 존중하는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개인의 사적 이익보다는 가문의 명예를 더 중요시했고, 유대교적 가치가 경제적인 가치보다 중요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법은 소위 모세 율법 또는 모세 5경이라고 불리는 율법(Torah)과 종교적 관습법이 유대인의 규범이었다.
또한 그들의 우주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천상이 세 가지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 |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 ” |
|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2코린) 12,1~2 , 공동번역 |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이 죽은 뒤 168년부터 167년 사이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다인을 헬라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강제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을 폈다. 음식법과 안식일 준수, 성전에서 하느님에게 올리는 제사 같은 유다교의 특성을 외국의 왕인 에피파네스가 제거하려 하였다.
“ | (안티오제국이 분할되면서, 팔레스타인번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반유대주의 정책을 성직자 지역은 이집트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에 걸쳐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외국의 왕들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는 적어도 종교의 자유는 허락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쿠스 에피파네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 ” |
| — 마카베오기 상권 1,44~50 , 공동번역 |
이러한 종교 탄압에 대하여 유대 민중은 안티오쿠스에게 저항했고 짧은 기간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자치 정부인 하스몬 왕조(Hasmonean Kingdom)는 헬라적 왕조의 모습을 닮아갔고, 그것은 종교적 자유를 향한 유대인의 근본적인 기대와 어긋났다. 결국 불안정한 정치 상황은 기원전 1세기 중엽 유다가 로마의 침략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