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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2013년 윤홍식의 요한복음 강의 6강 - 너희는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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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또 들어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요. 12번째 8장 51절에서 59절 이야기인데 하나의 일화가 펼쳐집니다. 재밌어요. 보십시오. 12. 8:51~59. 51. “내가 그대들에게 진리를 말하노니, 나의 말을 따르는 자는. 말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 말이라는 거는 진리의 가르침 아닌가요? 성령이 하고 싶은 말을 예수님이 대신해 주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의 말 그럴 때는 진리라고 생각하세요. 성령의 가르침, 양심의 어떤 명령, 양심의 명령이라고 할 때 제일 이해가 쉬우시죠? 사랑하라 정의로워라 지혜로워라 겸손하라 이렇게 외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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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말을 양심의 말을 예수님이 대신한 거니까 지금 그 예수님의 말을 따른다는 거는 양심을 따른다는 거겠죠. 나의 말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양심을 따르시는 분은요 죽지 않을 겁니다. 성령은 영은 생명 자체거든요. 보세요. 이 혼이라는 건 에고의 세계에 생각 감정 오감은 무상하게 변하죠. 성령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이건 변하지 않아요. I AM 다음에 붙는 거는 변하죠. 나는 배고파. 나는 슬퍼. 계속 변하겠죠. 이 뒤에 붙는 것들이 생각 감정 오감입니다. 계속 붙어요. 그렇지만 나라는 건 안 변합니다. 생명 자체예요. 성령은 생명 자체입니다. 생명 자체에다가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사람은 죽질 않죠. 그런데 이 성령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매순간 죽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 하나가 지나가고 나면 내가 또 바뀝니다. 또 다른 나가, 또 다른 나가, 또 다른 나가 매순간 생사가 일어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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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선사(禪師)들이 생사를 초월해라 그러면 별거 있는 줄 아세요? 참나 찾으라는 얘기입니다. 생사가 없는 자리로 가라. 춥습니다. 추위가 없는 데로 가라. 춥다 덥다 다 이거는 우리 생각과 감정 오감 아닙니까. 넘어가라. 예수님이 선사들처럼 그 얘기를 엄청나게 하세요. 그것만 따로 모아놓은 복음이 도마복음이라는 게 있습니다. 학당에도 그 강의 일부가 있으니까 참고하시고요. 또 시중에도 책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저도 지금 제가 도마복음을 완강한 게 있기 때문에 DVD로 그것도 DVD로 보시기 힘든 분들을 위해서 녹취는 다 돼 있어요. 제가 시간만 조금 나면 정리해서 책으로도 내드릴 테니까. 예수님의 실질적인 심법들은 또 도마복음에 많이 나오는데 선사들의 가르침이랑 너무 똑같습니다. 너는 뭔데 이렇게 자신하냐? 저는 "선문답에서 배우는 선의 지혜"라는 책을 썼잖아요. 전문가예요. 그러니까 제 얘기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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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책 못 쓰신 분들은 제 얘기 따르세요. 나의 말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생사를 초월하는 생명의 자리를 알 것이다. 알고 살 것이다. 또 여기서 더 나가면 영생을 얻는 영적인 몸도 얻을 것이다. 영원한 샘솟는 신적인 에너지 그런 것도 얻을 것이다. 이런 것도 포함한 얘기겠죠. 52.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외쳤다.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당신의 말을 따르는 이들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소!” 이 말을 듣고 유대인이 외칩니다. 당신 마귀 들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어. 많이 들었다는 얘기죠. 마귀 들렸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내가 직접 보니 알겠어.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도 죽고 다 죽었는데 당신은 당신의 말을 따르는 이들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어. 근데 예언자들이 실제로 다 죽은 게 아닙니다. 엘리야 같은 예언자는요 산 채로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어요. 동양에서는 신선입니다. 우화등선했다는 케이스예요. 신라의 김각이라는 신선이요. 중국에 가가지고 중국 당나라 황제 앞에서 그대로 승천한 야사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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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장난 아닙니다. 그래서 이 엘리야라는 분이 그렇게 그대로 승천했어요. 그래서 이런 예언자들이 꼭 죽은 건 아니지만 이제 대다수의 예언자들은 분명히 죽었다. 그런 엘리야 같은 분은 사실은 영생을 얻으신 분이죠. 53.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위대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당신은 도대체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아브라함이나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느냐 이거죠. 54. 예수님께서 답하셨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그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를 영광되게 하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이시며, 그대들이 그대들의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성자와 성부는 엄연히 다르다.)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답합니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그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다. 보세요. 내 에고가 나 잘났다라고 말한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성령이 너 참 나의 올바른 자녀다”라고 말했을 때 의미가 있죠. 성령에서 그 말이 나올 때 의미가 있지 내가 그냥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즉 여러분 예수님도요 본인이 성자지만 에고만 딱 떼놓고는요 누구한테 이렇게 “내 에고는 남달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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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하신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인해 내 에고가 위대해지는 거지 에고 자체만으로는 예수님의 에고나 우리의 에고나 똑같이 차가운 쇠공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성령을 떼고 나면 예수님의 에고도 식을 겁니다. 그래서 무지와 아집과 욕망 속에 빠지실 겁니다. 이해되세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럴 리가 없어요. 왜? 늘 성령으로 타오르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까지 합니다. “나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식을 것이다. 가까이 와라.” 이 정도로 예수님은 타오르고 계셨어요. 늘 말 하나 동작 하나 뭐 하나 성령의 뜻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충만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거 보고 배워라. 내 모습을 보고 느껴라. 나로부터 멀어지면 성령으로부터 멀어진다.” 이해되시죠? 이런 일을 하실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얘기하신 거를요 과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정말 당당하시다고 생각하셔야 돼요. 성령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면 이런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령에 충만하셔서 사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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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노력하셨다는 걸 읽어내셔야 됩니다. 나는 내가 나 자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거 그거 중요한 거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 영광은 의미가 없다. 나를 영광되게 하시는 분. 즉 영광된다는 게 뭐냐면요 거룩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이요 성령으로 인해서 거룩해진다는 게 하느님이 여러분을 영광되게 하신 거예요. 이해되세요? 영광스럽다는 건요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가 신성해질 때 말하는 겁니다. 신성해지는 거. 예수님은 늘 신성한 존재로 지금 살고 계시는 거죠. 누구로요? 누구로 인해서? 성령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에고는 특별하지 않은데 이 성령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에고는 성스러워졌습니다. 이게 성자의 핵심이에요. 성부 성령과는 다른 성자는 인간적이에요. 그러면서 위대해요. 인간인데 에고를 갖고 있고 무지랑 아집이 있었을 텐데도 그걸 지혜와 사랑으로 극복하고 성령의 뜻을 펼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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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위대한 겁니다. 여러분도 똑같은 재료를 갖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하고 재료가 틀려.” 이렇게 얘기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걸 보여주려고 오신 거니까 예수님의 에고가 우리 에고랑 조금이라도 다르면 가짜죠. 사기 아닌가요? 그러면 예수님의 에고는 원래 뛰어놨는데 와가지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우리 에고가 철로 만들어졌다면 예수님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재질이 다른 에고를 가지고 오셔서 멋지게 보여주시고요 “나처럼 해봐” 그러면 사기죠. 예수님 찜찜하시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에요. 재료가 똑같다는 겁니다. “나도 너희들처럼 똑같이 욕망이 있고 똑같이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는 존재인데 나 성령 덕에 지혜와 사랑을 이렇게 구현한다.” 이게 성자의 메시지죠. 그래서 “내 에고 특별한 거 없다. 다만 나는 성령으로 인해서 영광스럽게 됐다” 이겁니다. 그래서 나를 영광되게 하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시며 그대들이 그대들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그분이다. 그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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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그 아버지가.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말보다 아버지라는 말을 좋아하죠. 이거 이해하시죠? 아버지인 거예요. 여러분도 아버지라고 하세요. 여러분의 존재의 뿌리예요. 생각 감정 오감이 어디서 나옵니까? 뿌리 자리 어디가 뿌리입니까? I AM에서요. 나. 그래서 여러분이 “아버지” 하고 집중해야 될 때는 여러분의 존재감입니다. 존재 그 자체. 생각 감정 오감은 자녀예요. 나라는 존재의 자녀예요. 나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는 주어고 생각 감정 오감은 여기에 이제 술어로 붙는 것들이거든요. 어떤 술어가 붙느냐에 따라서 어떤 생각 어떤 감정 어떤 오감이 펼쳐지는데 이건 자녀고 이게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늘 아버지 하면 에고를 초월해서 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버지” 하시고 여러분도 여러분의 존재 자체에만 집중해 보세요. 이게 아버지께 바치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이게 아버지께 모든 걸 맡기는 행위고요. 그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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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54절 메시지에 중요한 게 있죠. 성자와 성부는 분명히 다르다는 얘기를 하십니다. 성자는 불완전한 에고까지 성령의 힘으로 다스린 사람을 우리가 성자라고 하는 거고 성부 성령은 완전함 그 자체, 영 자체를 말하거든요. 그래서 우리 성자는 에고까지 함께 우리가 말하고 있다는 걸 아셔야 되고요. 55. 그대들은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이런 얘기하시고 싶지 않으세요. 이렇게 이 정도 되셔야 됩니다. 공부를 하셔서 “나는 양심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내 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이런 말 하실 수 있어야 돼요. 이게 이제 부자유친입니다. 아버지랑 자녀 간에 이렇게 아주 친하고 소통이 돼 있어야 돼요. 진짜 아버지랑 이렇게 소통이 안 돼 계시면 여러분은요 양심이 뭘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사안 사안마다 어떨 때는 조금 아버지를 이해해서 올바른 행위를 하다가도 조금이라도 본인이 힘든 상황 직면하면 정신이 풀려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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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풀리고 멘붕이 와서 아버지랑 멀어져요. 늘 아버지랑 가깝게 지내면서 “아버지 안에 나 있다. 내 안에 아버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상태를 만드시려고 노력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대들은 그분을 모른다. 나는 안다. 만일 내가 그분을 모른다고 말하면 나도 그대들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나는 모른다는 말도 못한다는 겁니다. 이미 알기 때문에. 무섭죠? 이런 경지가 되셔야 돼요.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성자는 성부의 온전한 분신, 양심의 화신.) 보세요.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원하는 대로 산다 이겁니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신의 명령대로만 산다. 다이몬이 하지 말라는 건 안 한다.” 같은 얘기입니다. 56. 그대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볼 것이라며 즐거워했는데. 하느님한테 계시를 받고 내 후손 중에 위대한 성자가 나온다는 걸 알고 즐거워했는데 정말로 그는 이 날을 보고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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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메시아죠 예수님이 스스로 메시아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온 거를 그렇게 기뻐하셨다. 예전에 알고. 어떻게 알겠어요? 성령으로 아는 거죠. 계시 받아서 알고 좋아했다. 유대인들이 지금 빡 돌겠죠. 지금 자꾸 이런, 뭐 하나 이렇게 좀 유대인들도 어떻게 이해해 보려고 했는데 예수님이 자꾸 지금 이상한 얘기만 하는 겁니다. 57.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하길 “그대는 아직 50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유대인이 그대는 아직 50살도 되지 않았는데. 이 말도 묘하죠? 우리가 알기로는 예수님이 33세에 돌아가셨다 이렇게 아는데 이런 말 들은 거 보면 예수님이 나이가 더 되셨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아셔야 돼요. 아니면 노안(老顔)이셨든가. 그렇죠? 말이 이상하잖아요? 아니면 그 당시 말투들이 이랬든가. “50살도 안 된 놈이 뭐” 이런 게 상투적인 말이었던가.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죠. 그대는 아직 50살도 안 됐는데 아브라함을 봤다고.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내가 그대들에게 진리를 말하노니, 아브라함 이전에 나는 스스로 현존했다(I am)!”라고 하셨다. (시공을 초월한 내면의 성령은 바로 아버지의 영이다. 창세이전부터 우리의 신성은 현존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가 그대들에게 진리를 말하노니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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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나는 I AM. 이때도 그래요. 아브라함 이전에 나는 있다. 그러니까 제가 이제 좀 풀어봤습니다. 나는 스스로 현존했다. 시공을 초월한 나의 영은, 예수님의 영은 그때도 있었죠. 시간에 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도 하나의 선문답이에요. 선으로 치면 훌륭한 선문답입니다. 그렇죠. “아브라함 이전에 나는 있었다. 이 화두를 풀어봐라.” 푸실 수 있겠어요? 손뼉을 쫙 치고 막 이래야죠. “나도 있다” 하는 거 보여주셔야죠. 별거 아닙니다. 선문답은 이러고 노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사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세상이 생기기 전에 나는 성불했다.” 이런 이상한 얘기들을 할 때가 있어요. 이런 얘기들이 다 같은 맥락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라는 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벌써 시공에 매이죠. “세상을 초월했는데 내가 있다” 그러면 깜짝 놀래요. 세상의 감각으로, 분별심으로 볼 때는 “세상이 없는데 어떻게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함정이죠. 세상을 딱 놔버리시면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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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감정 오감을 탁 놔버리면 “음” 하고 긍정하시게 될 거예요. “시공이 없어도 난 있지.” 세상이 생겼네 안 생겼네 다 시공 안의 얘기죠. 시공을 넘어서도 우리는 있단 말이죠. 시공 안의 세계는 에고의 세계지 영의 세계는 시공에 걸리지 않거든요. 왜냐? I AM은 변화가 없는데요. 시간에 걸리지 않는데요. 여러분 나라는 존재감,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여러분 안에 신성이 있다는 게, 이거는 엄청난 발견인데 하루 종일 속 시끄럽고 바쁘게 움직이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순수한 존재로만 계셔보시면 몇 살인지도 알 수가 없어요. 여러분의 존재 자체는 시간성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몇 살인지 알 수 없다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이 10년 전의 나도 나라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요 존재가 이어지니까 그렇지, 생각이랑 다 바뀌었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하면요 좀 전의 나도 전생 같죠? 다른 면을 가지고 보면요 어제요 난 전생 같아요. 근데 왜 어제 나랑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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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존재감이, 늘 타오르고 있는 이 존재감이 똑같기 때문에 그래요. 생각은 바뀌었기 때문에 5분 전도 전생 같아요. “왜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해도 안 돼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전생에 나는 왜 그랬을까?” 이해되시죠? 이런 감각이 생기는 이유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 또 어땠을까요? 59.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돌을 집어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떠나 몸을 숨기셨다. 돌을 집어던지되. 이분들도 또 되게 성급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성전을 떠나 몸을 숨기셨다. 밉상이죠. 이런 당시 유대인들한테 아주 밉상 짓을 하고 다니셨다. 근데 사랑했었죠. 그렇죠. 사랑해서 어떻게든 얘기를 해보려고 하신 겁니다. 너무 차원대가 다르다 보니까 이게 좀 이렇게 접근이 잘 안 되신 것 같아요. 저쪽들이 이거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죠. 근데 이런 얘기만 하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비유도 들었고 얼마든지 쉽게 얘기하려고 노력하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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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도 있었어요. 가끔씩 이런 진지한 얘기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우리 내면의 성령이 바로 아버지의 영이고 창세 이전부터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우리의 신성은 현존했다. 이거는 진짜 화두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나는 있다”라고 말하실 수 있겠어요? 공겁(空劫) 이전에 세상이 나오기 전에 성불을 했다. 이게 선문답입니다. 뭐죠? 혹시 나눠드린 자료 중에 22페이지 있으세요? 종용록(從容錄)이라는 선문답은 3대 선어록입니다. 무문관(無門關) 벽암록(碧巖錄) 종용록 3대 선어록인데 22페이지에 뭐라고 했죠? * 종용록從容錄.공겁空劫 이전에 깨달아야 한다. 공겁 이전에 깨달아라. 황당하죠? 공겁은요 우주가 생기기 전의 시대를 시절을 말합니다.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깨달아라. 이게 선문답이에요. 화두예요. 예수님도 똑같은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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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이런 선문답을 던지면 “아 모르겠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돌을 집습니다. “죽을래.” 이렇게 된 거죠. 이해되시죠? 더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마태복음에 뭐라고 돼 있냐면요? * 마태복음(19:16~26).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 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아버지 하나님)뿐이시다. 그대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면, ‘계명들’(敬天愛人)을 지켜야 한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물었다. 어떤 청년 있죠? 부자 청년, 재산 다 바쳐라 해서 낙심하고 사라진 그 청년, 그래서 부자가 천국 가는 거는 낙타가. 요즘 이제 해보니까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다라는 이제 원문은 밧줄이다라고 그러지만 밧줄이건 낙타건 바늘귀 통과는 힘들죠. 부자는 천국 못 간다는 말을 예수님한테 하게 만들었던 그 청년입니다. 그 청년이 와서 물어봐요.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 해야 되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이다. 아버지밖에 없다. 예수님이 왜 그럴까요? 이때는 이 얘기를 하신 거예요. 나의 에고도 시공 안에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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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성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악의 유혹을 느끼고 있다. 불완전하죠. 현상계는 불안전해요. 절대계만 영원하죠. “절대계 자리, 아버지 자리만이 선하다. 나한테 선하다는 말을 하지 마라”라고 이렇게 엄격하게 구분하실 때는 확실히 구분하십니다. 그대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면 아버지 뜻대로 살면 되죠. 그러니까 계명들을 지키면 된다. 계명들은 뭡니까? 10계명인데 예수님이 10계명을 둘로 요약해주죠. 하나님을,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해라. 진심으로 사랑해라. 또 하나는 이웃들을 니 몸처럼 사랑해라. 그래서 제가 경천애인 이렇게 써놓은 겁니다. 저는 우리말로 하자. 우리 조상들이 늘 즐기시던 경천애인,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자. 예수님도 다른 가르침이 없어요. 그거 하면 되는데. 왜냐? 예수님 안에 있는 양심과 조선 선비들이 느꼈던 양심과 우리가 느끼는 양심이 다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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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분 안에서도 뭐라고 외치나요? 양심, 하나님이 양심입니다. 양심 위할 줄 알고 그 양심을 위한다면 필연적으로 뭘 하셔야 되나요? 이웃들한테 사랑을 베풀어야죠. 이웃들한테 해롭게 하면 안 되죠. 경천애인은 사실은 줄이면 하나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부분을 제대로 배웠죠.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냐면 모든 계명, 십계명은 하나로 요약된다. 그럼 경천 쪽일까요 애인 쪽일까요? 애인 쪽이에요. 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이거 하나면 충분하다. 이게 뭐냐 사도바울이 사랑이다. 사랑이 제일 귀하다. 끝내버립니다. 황금률이 제일 귀해요. 그러니까 근데 지금 많은 이 한국교회 분들 전 세계 교인들 중에 좀 잘못, 오해하신 분들은 뭘 지금 결론내신지 아세요? 십계명을 하나로 줄이며 경천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라. 11조를 바쳐라. 하나님께 모든 걸 바쳐라. 이웃이 없어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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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심각한 겁니다. 결론을 잘못 내리면 안 돼요. 진짜 부모님 마음을 안다면, 진짜 양심을 이해한다면 양심을 인간관계 속에서 구현할 줄 알아야 되는데 경천애인을 올바로 이해 못하면 양심을 위한다면서 양심을 하지 않는 이상한 형태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에 경천보다 애인 쪽에다 힘을 줍니다. 왜냐하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한테 사랑을 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이걸 이해하기 쉽게 비유 드리는 게 하나님은 부모님이고 사람은 내 형제들이죠.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 여러분 어떠시냐는 거죠? 아버지 뜻을, 진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형제한테 잘하지 않을까요? 형제한테 잘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이죠. 근데 아버지한테만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거 좀 이상하죠? 아버지한테만 잘해요. 형제들한텐 잘 안 해요. 아버지한테 가서 형제들 이간질하고 “저 형제 지옥가야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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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봤는데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아버지 딸랑입니다.” 하고 막 아버지한테만 공을 들인다. 이상한 놈이죠. 아버지가 제일 조심해야 될 놈입니다. 사이코패스. 다른 형제들 잡아먹을 놈이에요. 진짜 아버지 사랑하는 사람은요 아버지 마음을 아니까 자기한테 오는 선물도, 아버지가 주신 것도 형제들한테 돌리겠죠? 다른 형제들을 자기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이거 구분하셔야 돼요. 여러분이 가정에서 누가 효자인지도 구분 못하시니까 직장 가서 도대체 누가 사이코패스인지 누가 진짜 건실한 사람인지 못 알아보니까 지금 세상이 엉망인 겁니다. 다 직장생활 힘드시죠? 누구 때문에 힘든가요? 한 놈 있죠. 여러분 착취하고 있는 한 사람,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그 사람이 그 사이코패스죠. 그걸 또 그 사람을 지지해 주는 사람이 누구예요? 그 위의 사이코패스. 위에서 좋아해주지 않는데 힘을 쓸 수 있나요? 아버지가 정신을 잃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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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를 효자인 줄 착각하는 겁니다. 인간사회에서 이 황금률, 예수님이 말한 이 계명만 지켜지면요 인간사회에 평화가 오고 지상 천국이 펼쳐져요. 그때는 직장에 사회에 사이코패스들이 절대 위로 못 올라가는 세상이 올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아는 진짜 직장 동료들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위에 올라가겠죠. 진짜 아버지의 자녀가 리더가 되는 사회가 지상 천국이고 그래서 요한계시록 끝에 뭐라고 나오냐면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이 되면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들이 14만 4천 명이 새 예루살렘을 다스린다.” 이렇게 나옵니다. 지금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가겠다고 막 날이 선 분들이 많은데 그렇게 해서 못 들어갑니다. 양심을 지킬 때 이웃을 사랑할 때 거기 상징적인 숫자지만 12지파에 1만 2천 명씩 해서 14만 4천입니다. 지금 거기 들어가겠다는 종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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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둘이 아니에요. 14만 4천 명은 양심을 묵묵히 실천하시는 그분의 자리지 이렇게 자기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분들이 아니에요. 천국 가려는 자들은 천국을 못 갑니다. 바리새파들이 얼마나 천국 가고 싶어서 십계명을 열심히 지켰는데 예수님이 매정하게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했죠. 제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매정한 분이죠. 절 원망하시면 안 돼요. 이해되세요? 이런 게 진실이라는 거를 누군가는 얘기를 해줘야겠죠. 여러분이 묵묵히 실천하고 계세요. 하느님께 사랑을 바치고 이웃을 사랑해 보세요.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가 여러분을 다 내려다보고 있고 여러분이 양심을 따를 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겁니다. 이거를 자꾸 표 내려고 하는 것부터가 다 잘못됐어요. 막 14만 4천 명 모아서 시위하면 아버지가 “아이” 하고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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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 주실까요? 웃기지 않나요? 욕심이죠. “아버지 우리 구원해 주세요.” 고시 시험 보는데요 여러분 떨어진 사람들끼리 모여가지고요 떼를 지어서 하면, 숫자 모여서 수 싸움으로 “우리 합격시켜주세요” 하면 나라가 합격시켜주나요? 시험을 잘 봐야 합격을 하죠. 그렇죠. 필요한 과목 공부는 안 하고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떼를 이루어가지고 시위한다고 하늘이 들어주시는 존재가 아닙니다. 과목은 예수님이 분명히 정해줬죠. 경천애인 잘해라. 계명 지켜라. 영생한다. 그럼 그냥 지키세요. 그렇죠? 이웃을 사랑하고 늘 아버지께 맡기는 삶을 사세요. 양심적인 삶을. 그래서 이런 교회 이기주의, 우리 교회 아니면 또 안 돼요. 다른 교회 다니는 분들은 아마 쟤들은 좀 힘들지 않을까 이런 생각하시고 다니십니다. 제가 아는 분들이 보니까 그래요. 우리 교회가 천국에서도 제일 노른자 땅은 우리 거다라는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우리 교회 거다. 제일 천국에서도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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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패밀리는 우리 교회다. 예수님하고 제일 가까이에서 끈을 연결해서. 이 인간사의 그 부조리를 하늘까지 갖고 가겠다는 분들이에요. 천국 가서 또 천국 망쳐놓을 분들이에요. 잘 살고 있는 천국에 부조리와 뭔가 부패와. 그쵸, 라인 만들고 거기 가서. 그럴 분들이에요. 욕망을 천국에까지 투영하지 마세요. 그 인간적인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 욕심을 버린 사람들이 가는 세계예요. 참 이게 지랄 같죠? 욕심 부려서 가면 좋은데 현상계 일들은 욕심 부리면 되는데 이거는 욕심만 갖고는 안 돼요. 욕심을 잘 부려야 돼요. 어디다 부릴 건지? 양심, 10계명 잘 지키는데 욕심을 부려야 되고, 10계명도 그냥 형식적으로 지키면 바리새파가 되니까 아버지께 모든 걸 맡기면서 지켜야 돼요. 요 조건만 맞추시면요 여러분은 충실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렇게 또 얘기를 하고. 요즘 얘기하다 보면 자꾸 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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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의 힘을. 모르겠어요. 어쩌겠어요 뭐. 그렇죠? 이런 얘기 예수님도 자꾸 하시니까요 십자가도 당하시고 한 거죠. 이런 얘기를 계속 누가 하면 듣기 싫은 사람들이 있겠죠. 그런데 예수님도 그 얘기하러 오셨죠. 그러니까 안 할 수도 없어요. 성령이 하라고 하니까. 이런 얘기를 안 들으면 세상이 반성을 안 하니까 누군가는 해야 돼요. 그렇죠? 그럼 누가 해야겠어요? 성령이 얘기하란다는 게 잘 느껴지는 분이 해야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분은 이제 안 해도 되는데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이런 얘기하라고 나를 보낸 것 같다는 게 확실하면 해야죠. 그래서 저도 이런 얘기를 하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는 겁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10장 11절에서 21절은요 이게 대승 사상의 핵심을 얘기합니다. 대승불교 하는 분들 이 구절 꼭 읽으셔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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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이 있죠?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즉 이 얘기는 뭐냐면요 중생이 아프면요 나도 아파야 당연하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요즘 힐링 힐링해가지고 안 아프려고 노력하시죠? 보살은 그게 아니에요. 안 아플 것도 공부를 제대로 하다 보면 아파져요. 명상하고 몰라 괜찮아 너무 즐거웠는데 양심 분석을 딱 해보시면요 아파져요. “지금 중생이 이렇게 힘든데.” 명상한 것 때문에 더 아파요. 명상을 해서 나를 자꾸 내려놨더니 중생의 마음이 진짜 내 마음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더 아픔이 옵니다. 이 양심을 이 세상에서 구현해야 된다는 그런 원이 세워지면서 동시에 힘들고, 양심을 몰라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 보면 아파요. 그러니까 제 말씀은 진짜 힐링은 양심의 힐링 아니고는 힐링 안 된다는 거예요. 아파할 때 아파하는 게 힐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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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아프셔야 돼요. 지금 안 아프시면 이상한 거예요. 마비된 거예요. 여러분이 양심이 살아나서 건강한 마음이 된다면 아프셔야 돼요. 여러분 손에다가, 손끝에다가 바늘로 찔렀어요. 안 아프면 이상한 거죠? 힐링이 되면 아파야 되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양심 힐링이라는 건 이런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비된 마음을 다 이렇게 건강하게 풀어주고 나니까 자비심이 샘솟고 지혜가 샘솟아서 “안녕하십니까?” 할 때 안녕 안 하다는 걸 알아야 되는 거예요. 손끝에 찔렀는데 이 손가락은 여러분 손가락 아니에요? 안 아파요. 이게 마비된 겁니다. 이렇게 마비시키는 힐링을 하시면 안 돼요. 이해되시죠? 이런 관점을 가지고 지금 요즘 이 시대를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자. 한번 보시죠. 13. 10:11~21.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가 진짜 목자야. 나머지 다 사이비야.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시는 겁니다. 진짜랑 사이비는 이렇게 달라. 보세요. 진짜 목자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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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가 양떼를 데리고 가다가 만약에 늑대떼가 쳐들어왔다 그러면요 나를 먹어라 하고, 차라리 날 먹어라 하고, 내 양들이 너무 나 같아서요. 양을 위해서 무조건 희생해야 되는 존재가 목자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 때문에 내가 양이라면 누군가 날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너무 알겠기에, 양들의 마음이 너무 느껴져서 내가 양들을 위해서 내가 더 더 성숙한 사람이니까 내가 나서야지 하고 나선 그분이 목자고, 책임감 있는 목자고, 진짜 목자고, 선한 목자죠. 선한 목자는요 양들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할 줄도 알아요. 양들이 너무 내 마음 같아서, 내가 당해서 내가 받고 싶은 거를 해주고 싶어서요. 내가 양들이라면 누가 날 도와주고 보호해줬으면 좋겠어서 내가 그 마음을 알아서 보호해 주는 겁니다. 이런 분이 보살이죠. 삯꾼은? 이게 가짜 목자예요. 돈 받고 하는 목자 즉 일당 받으려고 하는 목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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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떼가 오면 도망가죠. 일당 얼마나 받는다고 거기서 목숨을 걸어요? 그렇죠? 욕심이 딴 데 있는 거죠. 이런 욕심꾼이 이 지도자인 양 할 때는요 위기가 오면 도망가 버린다는 겁니다. 자기 하나 살 궁리하면서 사이비 교주들은요 조금만 위기가 오면 도망갑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시겠지만 사이비 교주는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 반대로 양을 던져주면서 버틸걸요. 양을 늑대한테 던져주면서 “이거 먹고 좀 가라.” 그러지 않을까요? 이렇게 보면 적나라하죠.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양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늑대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러면 늑대는 양을 물어가고 양떼는 흩어지게 된다. 목자도 아니다. 양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늑대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러면 늑대는 양을 물어가고 양떼는 흩어지게 된다. 여러분은 어떤 목자를 지금 어떤 리더를 지금 믿고 가시나요? 그러니까 이 사이비 교주라는 게 이 목자가 나를 도와줄 줄 알고 그렇게 감언이설에 속아서 여러분이 믿고 계신 겁니다. 위기의 순간에 그분은 여러분을 배신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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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잘 아시라는 겁니다. 13. 삯꾼은 고용된 사람이라 양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도망가 버릴 뿐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그분을 아는 것같이, 나는 내 양들을 알고 양들은 나를 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그분을 아는 것과 같이. 아버지도 나를 알고 양심, 양심이, 성령이 나를 알고 나도 성령을 알고, 양심을 알고 이런 사이처럼 나랑 아버지 사이처럼. 나도 내 양들을 알고 양들도 나를 안다. 지금 이 중간에 예수님이 존재하신 거죠. 성령과 성자 간의 이 돈독한 관계처럼 이 성자와 일반 중생, 일반적인 양떼들도 이런 관계가 돼야 된다. 그러니까 “내 안에 있는 성령을 봐서라도 나를 믿어라” 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에고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성령을 봐서 날 믿어라. 사실 위대하죠. 이 성령을 따르는 에고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해되시죠? 우리랑 다른 특별한 재료의 에고는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에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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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랑 똑같지는 않죠. 왜 다르게 됐을까요? 재료가 달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르기로 했기 때문에. 생각 감정 오감이라는 재료를 올바르게 썼기 때문에 달라진 거죠.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이 성자한테 우리가 접속을 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가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내 길로 알고 걷다 보면 나는 내 안에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게 돼서 아버지와 또 만나게 되죠.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만나게 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징검다리가 되겠다는 거죠. 그게 성자의 입장입니다. 보살들이 그래요. 아미타불도 위대한 보살들은 관세음보살도 다 이겁니다. “나를 통해서 너 안의 불성을 봐라.” 밖에 있는 아미타불의, 우리가 아미타불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결국 우리는 자성미타(自性彌陀)라고 하죠. 참나인 아미타불을 우리는 만나게 된다. 즉 이걸 그대로 기독교에 적용하면요. 우리가 우리 밖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성자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 보면 우리는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자성 예수죠. 참나 그 자체인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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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신성과 우리의 신성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는 우리의 신성을 만나게 된다. 성인들의 가르침은 다 똑같습니다. 15. 나는 양들을 위해서 내 목숨을 내놓는다. 나와 양들도 하나다. 자 이 얘기는 뭘까요? 이게 지금 이게 효자예요. 예수님이 효자잖아요. 아버지랑 나는 하나죠. 그 마음을 너무 알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일반 양들과의 관계가 또 부자 관계처럼 느껴진다는 거예요. 나의 자녀처럼 보인다. 이해되세요? 그래서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전수받은 맏이의 마음이 그러겠죠. 동생들이 자식 같고 나 같아서 사랑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님 대신에 사랑을 베푸는 그 존재가 성자잖아요. 성부 하나님은 안 보이시잖아요. 그럼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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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이해되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거예요. 인간의 모습을 한 하나님. 이해되시죠? 하나님의 온전한 분신이니까 우리한테는 그분이 하나님인 겁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 성령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예수님은 지금 그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내가 그대들한테 딱 아버지의 그 마음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아버지가 우리를 포기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대들을 포기하겠는가라는 겁니다. 나는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도 있는데 그 양들도 데려와야만 한다. 그러면 그 양들도 내 목소리를 듣는 한 무리가 될 것이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도 있다. 즉 이게 어떤 양들일까요? 지금 나를 따르는 제자들이 1차적이고 예수님도 가르세요. 우선순위를 가르세요. 내 말 들어주는 사람이 1순위입니다. 그다음 지금 내 말을 안 듣고 있지만, 보살은 안 듣고 있는 양, 즉 길 잃어버린 양도 결국 내 양 아닌가요? 구원은 해줘야 되죠. 그런데 지금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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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양도 있다. 우리 안에 있지 않은, 지금 내 우리 안에 안 들어온 양, 그 양도 결국은 구원해야죠. 그 양들도 데려와야만 한다. 이게 보살 사상입니다. 한 마리 양, 남은 한 마리 양까지 데려와야 된다. 왜 그럴까요? 인류가 한 명이라도, 아무리 탕자라도,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알죠? 아무리 방탕한 존재도 하나님이 볼 때는 아들 아니에요. 그러면 예수님 같은 성자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볼 때도 그 친구도 역시 똑같은 자녀예요. 구원해야 돼요. 하지만 우선순위가 틀려요. 내 말을 따르는 사람이 1순위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양이고. 그 양들은 산천을 헤매고 다니는 양들이에요. 데려오기는 해야 된다. 이게 불교에서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부처님이 모든 중생을 구원해준다”라고 얘기하시지만 그런데 유연중생과 무연중생이 있어요. 인연이 있는 중생과 인연 없는 중생이 있기 때문에 1차적으로는 인연 있는 중생부터 구제합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우선순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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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구원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보세요. 인연 있는 중생을 구원하고 나면은 14만 4천 명이든 몇 명이든 간에 동지가 늘죠. 그러면 예수님의 나머지 어린 양들도 구원받기가 점점 쉬워지는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한 명 두 명 구원하다 보면은 이제 같이 도와줄 멘토들이 늘어서 구석구석 찾아가게 돼요. 그래서 같이 양을 찾아다니니까 어디 구석진 데 숨어있는 양까지 다 찾아서 나중에 구원해 줄 수가 있죠. 재미있죠. 이런 발상이십니다. 불교도 기독교도 똑같아요. 그리고 언젠가 그 양들도 내 목소리를 듣는 한 무리가 될 것이다. 언젠가 구원받을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기꺼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생명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아버지 뜻대로라면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내놓는 목숨은 일시적인 거고 나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게 예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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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서 오는 자신감입니다. 나랑 아버지는 둘이 아니고,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아버지의 뜻이 뭡니까? 경천애인,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나는 내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다. 18. 누구도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 단지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려놓을 뿐이다. 내게는 목숨을 버리거나 다시 찾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내리신 것이다.” 이해되시죠? 영생의 권한이 나한테 있다. 아버지의 분신이라서 가능한 겁니다. 결국 아버지한테 그 능력이 있는 거고 나는 아버지의 그 능력을 온전히 구현했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의 그 능력이 지상에 펼쳐지는 걸 도울 책임이 있다. 관리할 책임이 있다. 아시겠죠?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다”라고 말할 수 있고요. 내가 한 대로만 걷고 내가 말하는 걸 이해해라. 이게 내가 성령과 함께 지내면서 알아낸 성령의 비밀이다 하고 얘기해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성령과 함께 사는 사람이 영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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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생명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생명을 맡았다 이런 얘기까지 하시는 겁니다. 내가 얘기한 대로만 하면 하나님의 뜻 내가 전하는 대로만 따르면 당신들도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그게 내가 권한을 갖고 있다 이런 얘기입니다. 19. 이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의 의견이 다시 갈라졌다. 그래도 이때는 갈라졌네요. 그렇죠? 다 같이 돌을 드는 게 아니고. 20. 많은 이들이 “그는 마귀에 들려 미쳤소. 왜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많은 이들이. 다수는 “마귀에 들려 미쳤소. 왜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오”라고 선동을 할 때, 21.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것은 마귀 들린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오. 어찌 마귀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또 일부는 “마귀 들린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오. 어찌 마귀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소?” 이분도 약간 포인트를 잃고 계시는데요. 걱정되네요. 그렇죠. 이분도 이제 뭔가 믿음은 좋은데 장님 눈뜬 거 가지고 지금 예수님을 이해하시면 예수님 답답하시겠죠. “지금 내가 얘기한 거 제대로 못 알아들었구나” 하는. 이해되시죠? 현장을 이렇게 우리가 지금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14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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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22절부터 39절입니다. 22. 그 후 예루살렘에 성전봉헌축제가 열렸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柱廊)을 걷고 계셨다. 솔로몬 왕을 기념한 주랑이었겠죠? 24.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어 “언제까지 우리 애를 태우시렵니까? 선생님께서 메시아시면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답답하겠죠. “아. 돌겠네.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어디까지 지금 얘기를 하라는 걸까요? 왜 이렇게 안 믿는 걸까요? 메시아면요 좀 메시아답게 로마군도 쫓아내고 이런 걸 보여줘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떤 메시아의 증표들을 지금 못 보여주고 계신 거예요. 자꾸 말로만 지금 때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병 좀 고쳐주고 저거는 아닌데. 메시아는요 예언자이자 제사장이자 왕인 존재여야 돼요. 그러니까 로마군을 몰아내는 사람이 메시아인 거예요. 이스라엘이 기다릴 때. 그래서 예수님을 지금도 메시아라고 안 보는 이유가 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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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으로부터 구원을 못 시켜줬지 않냐 이거예요. 오셔가지고 나의 왕국은 지상에 있지 않다는 둥 막 이렇게 말을 자꾸 돌리셨잖아요. 그러니까 “영적으로는 왕이다”라고 지금 신약도 결론 내리고 말지 지금 실질적인 구원은 못 했잖아요. 그러니까 언젠가 한 번 더 와서 하셔야겠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성경에 맨 끝에 붙는 겁니다. “와서 지상의 천국을 열어주실 거다”라는 얘기까지 해야 메시아라는 게 온전해지거든요. 지금 이때는 여의치 않아서 지상에서 이 예루살렘을 못 만드셨어요. 새 하늘 새 땅을 못 여셨다고요.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볼 때 좀 의심스러운 겁니다. “당신 맞냐고?” 자꾸. 그런데 예수님은 답답한 게 메시아가 꼭 왕이 되고 꼭 로마를 물리쳐야가 아니라 이 땅에 양심적으로 사는 모습만 보여주면 사실은 메시아거든요. 근데 이 당시 백성들이 그걸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양심을 보여줘도 양심을 알아들을 눈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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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예수님대로 계속 이 땅에서 이렇게 하면 지상 천국이 온다는 핵심 법문을 해주고 계신데 계속 “당장에 왜 로마군 안 몰아내요?” 이런 식의 지금 의문을 갖고 있는 겁니다. “물위를 걸을 수 있다면 신통 좀 부려서 로마군 좀 몰아내주지.” 지금 자꾸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당시에 메시아 후보들이 많았어요. 예수님보다 더 메시아로 인정받은 사람도 있어요. 누구냐면요 그 로마군하고 맞서 싸웠던 그런 저항군들이요. 그 장군들. 이런 사람들이 메시아로 더 인정받고 했었어요. 예수님이 한 건 잘 이해를 못한 거죠. 실제로 로마랑 싸운 사람이 메시아로 보였습니다. 그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이제 그런 분들이 도인은 아니거든요. 불의를 못 참고 움직이신 분은 맞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진짜 지상에서 천국 만드는 비방을 보여주셨는데 이건 잘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답답하니까 또 이제 얘기는 하셔야죠. 25.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했으나 믿지 않는구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행하는 일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했는데 안 믿는구나. 나 계속 메시아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메시아는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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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부음을 받은 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러면 이게 왕이거든요. 사실은 그러면 영적인 군주가 꼭 지상에서 꼭 이 왕국까지 열어서 보여주면 제일 좋겠지만 꼭 그럴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때가 그럴 때는요 뭘 보여주냐면 예수님은 왕처럼 사는 모습을 보여주신 거거든요. 영적인 군주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이렇게 황금률을 적용한다. 이게 리더다라는 걸 보여주셨는데 이걸 못 알아들은 겁니다. 이해되세요? 진짜 리더십을 보여주신 겁니다. 왕이 결국 보여줘야 할 건 뭔가요? 리더십이에요. 그 어떤 왕국을 못 열더라도 리더십을 보여준 겁니다. 이렇게 살아라. 제자들을 이렇게 가르치고 사람들한테 이렇게 얘기하고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 인생을 살아가라 하는 걸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내가 지금 자꾸 얘기했는데 못 알아듣는구나. 그다음 뭐 있죠? 아버지 이름으로 내가 행하는 일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내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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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메시아라면 자기 생각, 자기 감정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고 마음 안의 중심 자리에 영을 세워두고 영의 뜻대로 살아가는 모습 영의 뜻대로 하는 리더십, 영적인 리더십이고 양심적인 리더십이죠. 이걸 보여주는 사람이 메시아다. 성령대로 주인공이 돼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메시아다. 즉 진짜 메시아는 누굽니까? 이런 인간사 속에 살면서 선악을 온전히 가르고 선은 하고 악은 안 하는 사람이 그냥 메시아예요. 이분은요 충분히 나라를 다스릴 수 있죠. 그렇죠. 상황에 따라 다스릴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겠지만 이분은 왕 노릇할 수 있는 분이잖아요. 왕의 자질을, 자격을 갖고 있잖아요. 이걸 사람들은 못 알아봐요. 권력이 없으니까 못 알아봐요. 이 차이입니다. 저는 이것 때문에 당시는 못 알아보셨다고 봐요. 그래서 그 제자인 유다까지 배신하잖아요. 그 배신하게 된 이유가, 유다 있죠? 유다, 유다는 젤롯당(Zealot黨)이었거든요. 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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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뭐냐면은 저항군입니다. 우리로 치면 독립군이에요. 독립군의 어떤 중심에 있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이유는 예수님이 독립을 시켜줄까 봐였어요. 따라봤는데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해요. 예수님 생애에서, 이게 공생애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내 왕국은 지상에 있지 않다.” 이런 얘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유다가 지금 뭔가 좀 생각하는 게 다르다라는 걸 알게 된 겁니다. 나는 지상의 왕국을 원했는데, 메시아라면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내가 말하는 이게 메시아로서의 모습이다”라고 자꾸 얘기를 하니까 지금 유다가 아마 마음이 식었겠죠? 그래서 배신하지 않았나 이렇게 추측되고 있습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추측합니다. 저도 이제 그렇게 보여요. 배신을 했다면. 그런데 그런 부분도 있어요. 유다가 30전 받고 배신하고 이런 게 구약에 나오는 그런 옛날 얘기들 중에도 있거든요. 그 당시 옛날 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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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팔려간 얘기, 뭐 이런 얘기들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그런 너무 또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후세의 어떤 좀 첨삭일 수도 있어요. 유다가 얼마 받고 팔았다는 거. 아무튼 유다라는 제자가 좀 실망했을 부분은 이해가 돼요. 이해되시죠? 지금 성경이 역사 그대로는 아니니까. 아무튼 역사적으로 우리가 추측해 볼 때 제자 중에 한 명이 크게 낙망한 제자가 나올 법하죠? 지상에서 한 자리 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대통령 되면 나는 최소한 총리라든가 수석, 이런 걸 생각했는데 “내 왕국은 지상에 있지 않다. 왕국은 이미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막 이래버리면 낙망이 되게 컸겠죠? 이런 게, 이런 설명이 나오는 이유도 당시 그런 독립군, 그러니까 실질적인 메시아를 찾았던 마음과 예수님한테 기대했던 이 마음이 뭔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이 메시아의 모습과 달랐다는 거죠. 너무 감각이 서로 달랐다는 거. 그런 것도 보여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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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또 양 얘기가 나오죠. 26. 그렇지만 그대들은 나의 양이 아니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대들은 나의 양이 아니니까 믿지 않는 것 같다. 무연중생이다. 나랑 너희들 인연이 없는 것 같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말을 왜 이렇게 못 알아듣느냐? 내 양들은 내 목소리 듣는다. 니들이 내 양이었다면 내 얘기 알아들었을 텐데 하는 거죠.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그들이라면, 나는 그들을 이미 알고 있고 그들도 내 진짜 내 제자들은 나를 따른다. 뭐 보고 따르느냐? 양심 보고요. 성령 보고 따른다. 내가 임의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라 아버지대로 산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럼 그 양들도요 이미 알죠. 아버지를 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해되세요? 예수님도 그들을 알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아는 거예요. 양들이라면 예수님이 아버지 뜻대로 산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예수님도 그 양들이 아버지를 안다는, 나를 통해 아버지를 만났다는 걸 알아요. 이렇게 서로 통하는 사이가 양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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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예수님의 자녀가 돼요. 엄밀히 말하면 이제 형제간인데 맏이를 따르는 동생 같은 존재들이 되는 거죠. 근데 또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보니까 자녀 같은 존재가 되는 거죠. 이래서 이제 이런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또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원인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 제일 닮은 자녀를 우리가 보면, 이제 그분을 보면 아버지를 보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또 부르게 되는 그런 부분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이해하시면 기독교를 정말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나로부터 빼앗지 못한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권한까지 다 갖고 있거든요. 실질적인 아버지, 뭐죠? 장남이 아버지 역할을 하는 지금 그런 게 우리 인간 세계인 거예요. 왜냐? 실제 아버지 성부 성령은요 인격이 아니다 보니까 보이질 않거든요. 그런데 인간 중에 그럼 제일 어른은 누구냐? 그러면 지금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화엄경 같은 거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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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이나 이런 뭐죠? 화엄경에서 말하는 위대한 10지 보살들이죠. 지금 그런 존재에 해당되는 겁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나를 진짜 따르는 제자들한테는. 예수님이 마음대로, 보세요, 예수님 인격이 마음대로 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성령이, 성령이 하는 작용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결국은 성령을 만났기 때문에 그 능력을 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중간 다리가 돼서 아버지랑 제자들 간의 관계를 연결을 시켜준 거예요. 그래서 그 제자들도 영생을 얻게 돼요. 그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나로부터 빼앗지 못한다. 그런 깨달은 제자들, 성령을 아는 제자들은 아무도 나로부터 빼앗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내게 주신 아버지께서는 어느 누구보다 위대하시다. 아버지야말로 위대하신 존재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을 아버지 품에서 빼앗아 갈 수가 없다. 성령 깨달은 사람한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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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시 성령을 뺏어갈 겁니까? 그분한테 성령 깨달은 제자들한테 그렇죠? 그런데 얘기가 점점 어렵게 돼가고 있다는 거 아시겠죠? “메시아인지 아닌지 좀 얘기해 달라고요”라는 그런 제자가 분명히 누가 있지 않았을까요? 아 이 양반 자꾸 얘기를 어렵게 하시네. 그러니까 메시아냐고요 아니냐고요? 로마 언제 물리치실 거예요? 지금 이거예요. 로마 언제 물리치실 건데요? 왜 자꾸 저한테 이런 얘기만 하십니까? 그 당시에 이제 사람들은 이런 마음일 수 있죠?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의 온전한 분신인 성자이다. 아들이 아니고는 아버지를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제 여기까지 선언하셨습니다.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서 예수님께 던지려 하자. 그러니까 다시 또 조용히 돌을 드네요. 그렇죠? 그러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었다. 참 일 어렵게 하시네 이거죠. 이 사람들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좀 어떻게 얘기 좀 해주지. 그러니까 지금 얘기 다 하신 거죠. 이 말은 뭡니까? 메시아라는 걸 입증할 때 예수님이 어떤 방식을 쓰셨나요? “당신 메시아예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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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버지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너희들을 구원하러 온 사람이다. 그리고 너희들도 나로 인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게 지금 메시아의 역할이에요. 메시아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구세주거든요. 근데 지금 이 말을 듣고도 “아, 이!” 하고 돌을 든다는 겁니다. 원하는 답이 아니었죠.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자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그대들에게 많은 선한 일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 어떤 일로 그대는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라고 하셨다. 난 아버지, 성령을 통해서, 양심을 통해서 많은 양심적인 일을 나는 했다. 왜 나한테 돌을 던지는가?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뭐라고 했냐면 33. 유대인들이 대답하길 “우리는 그들 중의 어떤 것 때문에 돌을 던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니, 그대가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칭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들 중에 어떤 것, 당신이 선한 일 한 거 그것 때문에 돌 던지는 게 아니고 신성을 모독했다. 아까 돌 던지기 직전에 뭐라고 했나요? 직전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여기서 못 견딘 거죠. 신성 모독이다. 그대가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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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는 당신은 그냥 사이비 교주 같다 이거죠. 유대인이 볼 때는. 메시아냐고 물었는데 로마 어떻게 할지는 얘기도 안 하고 자꾸 “아버지랑 나는 하나다” 이런 얘기만 자꾸 하니까 이제 유대인들이 삐진 거죠. 지 자랑만 자꾸 하고 있고 더구나 이제 아버지까지 모독하면서 지금 메시아로서 책무는 안 하고 있는 이 상황, 못 견딘 겁니다. 근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이 훌륭한 메시아로서의 선언이라는 걸 못 알아들었죠. 당시 영성이 이랬던 거예요. 못 알아듣는. 그럼 당시 영성이 그랬구나 하고 비웃을 일이 아닌 게 지금도 못 알아들을 걸요? 지금 예수님이 이 얘기할 때 여러분이 돌은 안 들더라도 “아 여기 빨리 벗어나야겠다.”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이 사람하고 대화 더 못하겠다.”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이런 그래서 지금 영성이요 절대 진보하지 않습니다. 물질문명이 진보한다고 안주하시면 안 돼요. 그거는 그게 영성이 진보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요. 예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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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이 2천 년 전에 나왔던 말인데 2천 년 전 인류가 했던 말인데 여러분 못 알아들으시잖아요. 영성이 퇴보했죠. 전반적인 어떤 문명의 수준은 올라갔지만 영성 하나만 갖고 놓고 보면 공자님이 얘기했던 거 지금 못 알아들어요. 공자님 같은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이 안 나온다고요. 지금 철학과에, 우리나라 전국의 철학과가 지금 해방 후에 지금 철학과를 열어서 어마어마하게 공부하고 있죠. 그럼 그 철학자 중에 공자님이나 예수님 말을 이렇게 자기의 철학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냐는 거죠? 이게 영성이 퇴보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분들 말씀 해석하는데 지금 우리가 시간을 다 쓰고 있지, 그나마 해석도 잘 안 되고 있다는 거. 이게 영성의 차이예요. 즉 뭐랑 똑같냐면요 이런 영적인 제품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성경이 2천 년 전에 나온 아이패드라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그 아이패드 재현을 못하고 있다니까요. 분해만 해보고 지금 뭐 어떻게 이걸 만들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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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는 어디서 가져와서 했는지? 뭔 기술이 쓰였는지? 설명서도 없고 자꾸 설명만 해요. 내가 볼 때는 이 아이패드라는 거는 뭐죠?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부터 지금 연구하고 있는 거죠. 아이패드라는 건 내가 볼 때는 이렇게 요리할 때 쓰는 물건인 것 같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렇죠. 지금 그 격이에요. 예수님 말씀을 놓고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뭔 말씀인 것 같아 막 이렇게 억측을 하면서 지금 보내고 있는 딱 그 수준이에요. 물질문명으로 대입해보면요 문명의 격차가 확 납니다. 고대 문명을 지금 못 따라가고 있는 거. 이해되시죠? 전반적인 문명이 그랬다는 게 아니고요. 당시 사람들이 다 이런 얘기했던 게 아니잖아요. 단 일부지만 일부가 이루었던 영적인, 정신적인, 철학적인 성취를 지금 우리는 다수가 더 현명한 것 같지만 못 이루고 있다. 이건 이제 받아들이셔야죠. 우리 수준이 그래요. 하지만 학당과 함께하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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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나갑니다. 함께하신다면 해볼 만하죠. 할 수 있습니다. 더 잘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이 좋은 시대에, 제가 늘 얘기하지만 예수님이 지금 사셨다면 스마트폰 아마 몇 대를 돌리셨을지도 몰라요. 로마한테는 막 뭐라고 이스라엘인들한테는 전 세계인들한테는 또 알맞은 설법을 막 해가시면서 전 세계 사람들이 아버지를 알고 깨어나게 도와주려고 하시지 않았을까요? 이런 좋은 시대예요. 그래서 우리는 흉내라도 내자는 겁니다. 자 예수님 말씀 먼저 이해를 하고 흉내를 내야겠죠. “신성 모독했다. 그대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했지 않냐.” 핑계 잡을 게 이거밖에 없었겠죠. 예수님 말은 못 듣겠고. 뭐 하나도 해주는 거 없으면서 자기가 하느님이랑 하나님 이런 말 하니까 솔직히 못 듣겠다. 당신 말 신성모독이다라고 걸려고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했죠?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그대들의 율법에 기록되기를 ‘나(하나님)는 그대들이 하나님들이라고 말하였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대들의 율법에 기록되기를, 구약입니다. 구약 시편에 뭐라고 나오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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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들이 하나님들이다라고 말하였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보십시오. 시편에 뭐라고 돼 있는지 보세요. * 시편(82:6). 82장 6절입니다. 하나님이 얘기하시는 거예요. 내가 말하길 “너희들은 ‘하나님들’이며, 지극히 존귀한 분의 아들들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다라고 얘기한 겁니다. 놀라운 얘기죠. 지금 구약 신약 공부하는 분들요 다 다시 머리 청소하고 다시 들으세요. 하나님이 뭐라고 했냐면 “그대들은 신성한 내 자녀다”라고 얘기한 겁니다. “하나님들이다”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이걸 알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마인드에는 뭐가 있었겠어요? 자기만 성자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에요. 그대들도 성자들인데 지금 못 알아듣고 있다. 아버지를 모르고 있다. 난 아버지를 안다. 내 얘기 듣고 같이 아버지를 알면 그대도 성자다. 그럼 우리 다 같이 천국 갈 수 있다. 예수님이 이 얘기를 지금 하시는 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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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라면 이 얘기를 지금 세상을 돌면서 하셔야 돼요. 전도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시겠죠? 성령대로 살아가시면서 여러분이 “그대는 자녀다. 그대는 하나님들이다.” 조금도 예수님과 차이를 두시면 안 돼요. 예수님은 이 에고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를 아주 잘하신 분이고 우리는 이제 걸음마 떼고 하는 거지만 자격은 동등하다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우리도 그럼 결국 뭡니까? 예수님처럼 해야 된다는 거죠. 이렇게 나가야지 “예수님이나 하는 거야”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당연히 우리 현재로서는 격차가 크지만 예수님처럼 해야 돼요. 예수님도 그걸 바라세요. 나처럼 하라고.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대들 율법에 뭐라고 돼 있냐? 내가 말했다. “그대들은 하나님들이다”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35.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들’이라고 하였으니, 성경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태초 이전부터 현존했던 하나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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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 말이 뭔 말입니까? 성경의 말은 진리고 영원히 우주가 망해도 안 사라질 거니까 그 말은 영원히 진리다 이겁니다. 우린, 우리 모두는 영원히 하나님들이다. 단호하게 얘기하신 겁니다. 이 말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태초 이래 우리 모두는, 보세요. 태초 이래 우리 모두는 I AM, 우리 모두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다. 에고가 그거를 못 지금 감내(堪耐)하고 있을 뿐이다는 거죠. 나처럼 하자. 이게 지금 보살이고요. 이런 위대한 보살이 어디 있습니까? 불교 공부하신 분들은요 성경을 열심히 읽으셔야 돼요. 위대한 보살이 다녀가셨는데요 종교가 다르다고 지금 안 믿고 계시면요 안 돼요. 보살이 어떤 모습 보이실 줄 알고요? 관세음보살의 33 응신(應身) 중에 별의별 모습으로 옵니다. 대통령으로도 오고 거지로도 오고 보살로도 오고 부처로도 오고 보살은 마음대로 와요. 10지 보살은요, 우주의 궁극의 보살은 마음대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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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한테 도움되면요 그 모습으로 와버려요. 이게 대승 사상인데 대승 사상을 아시는 분이라면 위대한 부처님이 예수님으로 오셨을 수 있다는 걸 그냥 이해하셔야 되는데요. 그렇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들이다.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낸 자는 어떻겠는가? 어찌하여 그대들은 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고 해서, 내가 신성을 모독했다고 하는가?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시게 하시어. 자 누굴까요? 예수님 자랑에 들어갑니다. 하물며 맏이는 어떨까? 이거죠. 다 아들들인데 하물며 하느님이 거룩하게 하신. 그러니까 결국 뭡니까? 사실은 에고가 노력해서 하느님을 닮은 거지만 하느님이 그렇게 해 주셨다는 거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자녀. 뭘까요? 제일 맏이, 아버지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신 그 자녀는 오죽할까? 내가 그런 말 하면 죄가 되겠냐? 이거죠.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그 자녀인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해서 세상에 보낸, “야, 다른 애들 좀 가르쳐라” 하고, “다른 형제들 성적이 말이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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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좀 가르쳐라” 하고 보낸 그 자녀는 오죽하냐 이거죠. 오죽 하느님이겠냐 이거죠. 오죽 하나님이겠냐. 어찌하여 그대들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나를 신성 모독했다고 하는가? 이거 점점 돌을, 더 큰 돌을 잡을 것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37. 만약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않거든, 나를 믿지 말라! 내가 양심대로 안 하거든, 아버지 뜻을 어기거든 믿지 마라. 38. 그러나 만약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거든, 나를 믿지는 않더라도, 그 선한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그대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 내면의 현존하는 성령-I Am-을 믿어라. 양심적인 일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 일을 행하거든 날 믿어라. 나를 믿지는 않더라도 그 선한 일은 믿어라. 아버지가 하신 일이니까 그건 믿어라. 나를 안 믿어도 좋은데 아버지는 믿어라 이겁니다. 그러면 그대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자 보세요. 나는 안 믿더라도 내가 한 일이 양심적이라는 것만이라도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 이겁니다. 그러면 그걸 알아보는 사람 안에서는 양심이 싹트겠죠? 그럼 결국은 뭐냐면은 그대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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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는, 나를 안 믿어도 당장에 좋으니까 내가 하는 게 양심에 맞다는 거라도 믿어라. 그러면 그대들도 양심을 이해하게 되다 보면 결국에는 “아 저 양반이 양심대로 살았구나. 아버지가 안에 있고 또 저 사람 안에 아버지가 늘 있었구나” 하는 거를 알게 될 거 아니냐.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대들 내면에 현존하는 성령을 믿어라. 양심적인 일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이거를 알아라 이거죠. 39. 또다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로부
터 벗어나셨다. 그러니까 또다시 유대인들이 붙잡으려 했다. “이번엔 죽이자.” 뭐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죠. 도저히 안 되겠다. 그래서 붙잡으려 했지만 이렇게 잘 안 잡히시죠. 그들로부터 벗어나셨다. 이러고 이제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제 하나만 더 하고 끝낼게요. 15절까지 15번째 것까지 하죠. 짧으니까요. 어떠세요? 이거 현장에서 생중계하듯이 이렇게 들어보시니까 맛이 다르죠. 유명한 구절입니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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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최대한 그 당시 현장의 분위기에 있었던 사람인 양 한번 해봤는데요. 잘 전달이 됐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도 그냥 제 양심대로 한 거지 뭐 알겠어요? 그래서 제 양심에 이렇게 얘기해야 좀 흡족하다 하는 방향으로 그냥 얘기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저도 더 고상하게 얘기하면 아버지 뜻대로 말한 것뿐이죠. 그렇죠. 이렇게 자꾸 고상하게 한번 놀아보세요. 그러면 인류 문화가 수준이 높아집니다. 내 양심이 아버지라는 걸 알면요 “양심대로 했어”라는 걸 다르게 생각하면 “아버지 뜻대로 난 했어.” 그럼 예수님을 이해하게 돼요. 불자가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고 또 크리스천이 불자를 이해하게 돼요. 같은 거거든요. 보살은요 불성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에요. 대승열반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 I AM 그랬죠. 대승열반경에 “나 아(我)” 그럽니다. “아(我)는 여래장이다”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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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我)가 불성이고 여래장이다. 똑같아요.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죠? “나라는 것은 불성이고 여래장이다.” 이게 대승 사상의 핵심입니다. 근데 지금 내가 있니 없니 싸우시는 분들은요 참 안타깝습니다. 당시 돌 집어든 사람들이랑 큰 차이가 없어요. 이해되시죠? 못 알아듣긴 똑같아요. 나 그때 돌 안 들었는데. 못 알아듣기는 다 똑같아요. 알아들어야 끝나는 거지 못 알아듣고 뭔 소리인지 하고 계신 그런 분들이 지금 모여서 참나니 무아니 지금 다 지금 삼천포입니다. 다. 다 삼천포로 빠진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지금 알고 써야지 지금 그거 있니 없니 따질 때가 아니라고요. 지금 여러분이 뭐가 있어서 말하고 듣고 행동하는데요? 나요. 내가 하나님이에요. 나라는 게 있어서 말하고 듣고 행동하는데 내가 있니 없니 싸우고 계시면 그 정신없는 사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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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머리로 생각하시니까 답이 안 보일 거예요. 좀 내려놓고 맡기세요. 좀 나라는 자리에다 맡겨보세요. 그리고 얘기를 한번 해보세요. 어떻더라 하는, 내가 나로만 존재해 보니까, 우주에 나로만 존재해 봤더니 나도 남도 없는 나, 어떻더라. 뭔가 말이 나올 겁니다. 체험이 나오고 뭔가 다른 생각이 나와요. 그게 그 아버지 뜻을 따르는 삶이 이제 펼쳐져요. 이 중심이 없는 삶은요 뿌리가 없기 때문에, 뿌리에서 잘려나간 그 가지 얘기 예수님이 하시죠. 그거랑 똑같아서 뿌리에서 잘려나가면요 뿌리에서 나오는 영양분을 못 받죠. 말라 죽습니다. 아버지한테 뿌리를 안 박은 에고는요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오감에 치여 가지고 말라 죽어요. 예수님처럼 영에다가 뿌리를 박아버린 사람은 뿌리가 튼튼하니까 무럭무럭 자랍니다. 영감이 샘솟고 지혜가 샘솟고 자비가 샘솟아요. 용기가 샘솟고. 이런 삶을 사세요. 이런 분이 아니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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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개척하지 못해요. 절대로 개척하지 못합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요 늘 잘해보려다가 더 망치고 더 망치고 해가지고 늘 망가졌는데 우리는 다르게 살까요? 왜 우리만 다를까요? 과거 만 년간 인류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 왔는데. 변수를 하나 주셔야 돼요. 뿌리에다가, 영에다가, 성령에다가 중심을 두고 살아가시는 삶이 펼쳐질 때 새 하늘 새 땅이 열립니다. 이전에 없던 게 열려요.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하셨던 얘기를 지금 다시 우리가 들어야 되는 이유가 우리한테 절실한 문제예요. 지금 힘드니까. 15절까지만 하고 끝낼게요. 15번째 12절입니다. 15. 12:44~46. 12장 44절-46절.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 믿는 거 아니다. 난 조금도 아상(我相)이 없다 이겁니다. 나 잘났다는 마음 없다. 예수님은요 나 잘났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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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소리치신 거예요. 내가 길이요 진리라고. 나 잘났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이 그 말을 하면 가짜가 됩니다. 성부보다 성령보다 자기를 더 앞세우면 끝나요. 이해되시나요?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거다. 나는 그분의 뜻대로 행동한 것밖에 없으니까요.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래서 나를 믿는 이라면 누구나 어둠에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양심의 실현으로 영생을 얻게 함.) 나는 빛으로써 이 세상에 왔다. 나는 내 안에 있는 빛을 투명하게. 빛의 근원은 광원은 영(靈)이죠. 빛의 광원을, 빛에서 나오는 빛을 투명하게 나는 내 무지와 아집이 있는 만큼 그 빛을 가리겠죠. 근데 나는 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나는 그 빛을 가리지 않는다. 즉 내 에고가, 내 기질이, 내 성격이, 내 꼬라지가 절대 성령에서 나오는 그 빛과 그 명령과 지혜와 사랑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확신이에요. 나는 나 좋자고 성령을 어기지 않는다. 이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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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 전체가 나의 말과 행동 나의 모든 모습이 빛이 되는 거예요. 나는 양심 그대로만 사니까. 나 좋자고 양심 어기질 않으니까 내 행위 전체가, 내 존재 전체가 빛이 되는 거죠.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그래서 나를 믿는 이라면 누구나 어둠에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보고 듣고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내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라면 어둠에서 나오게 된다. 왜냐? 나의 빛이 이제 그쪽까지 비치게 되니까. 이해되시죠? 양심이 뭔지를 구현해 주지 않고 보여주지 않으면서 양심 얘기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죠. 양심적으로 살면서 양심 얘기를 할 때 양심은 여러분을 구원할 수 있는 빛이 됩니다. 여러분도 살아있는 양심을 보시게 되면 같이 따르게 돼 있고, 호응하게 돼 있고, 여러분 안에 있는 양심이 터져 나오게 돼 있어요. 이해하시죠? 그래서 여러분 안에도 다 지금요 엄청난 타오르는, 빛나는 성령이 있어요. 이게 감춰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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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군가가 환히 타오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여러분도 그 빛이 좋아서 모이시다 보면, 그 빛과 함께 있다 보면 빛이 좋아서 에고가 빛을 따르게 되겠죠. 그러면요 여러분 안에 있는 그 불씨를 찾게 되고 터져 나오게 돼요. 여러분 안에서도 한 명 한 명 또 터지고 또 터지고 하면 그 주변을 또 비추고 또 비춰서 결국은 지구 전체를 비추겠죠. 이게 영적인 혁명 론입니다. 양심 혁명은요 이렇게 일어나요. 지구는 이걸 해야 돼요. 지금 다른 혁명 말고 양심 혁명을 해서 이런 예전에 타오르는 빛을 보여줬던 성현들의 그 삶을 우리가 배워서 지금 이 순간 나도 똑같이 발전소가 되고 등대가 돼서요 주위를 비춰주세요. 그래서 같이 비추다 보면요 이거 모르는 거라고 봐요. 특히 한국인들은 한 번 불붙기 시작하면요 남들이 하는 건 다 해야 되기 때문에 아마 또 미친 듯이, 열광하듯이 경쟁적으로 보살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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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되자 하는 운동이 경쟁적으로 일어날 겁니다. 지금 여건은 너무 안 좋아요. 이런 강의 제가 해봤자 이런 강의 오늘 카페에 올라가면요, 이렇게 “개독은 가라” 이런 거밖에 안 달려요. “개독 꺼져라.” 지금 황금률을 너무 어겨놓으니까 개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됐지 않습니까? 개독이요 개독. 기독이라고 안 부르고. 기독은 그리스도의 우리말이죠. 한문이죠. 기독(基督). 기독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독, 그리스도가요 지금 개독이 됐다는 건요 누구 잘못인가요? 제자들. 남 욕하지 마시고 이웃 사랑 안 한 제자들 잘못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잘했으면 개독이라는 말이 왜 나옵니까? 여러분이요 예수님이 시킨 대로 이웃을 사랑해서, 내 몸처럼 사랑해서 이웃이 괴롭다면 같이 괴로워해 주고 이웃이 기쁘면 같이 기뻐해 주셨다면 왜 그런 말이 나올까요? 말도 안 되죠. 그래서 그런 말부터 사라지게 하시는 게 저는 진짜 제자 된 도리지 나 천국 간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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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거만한 표정 지으시면요 이 개독이라는 말은, 아까 그 돌 집었던 사람들이요 그 마음이 돼가지고 돌 찾게 됩니다. “아, 도저히 못 듣겠다.” 예수님을 빙자해서 자기 욕망을 얘기하니까 못 듣겠는 거죠. 예수님한테 돌을 던졌던 사람들은 욕심으로 던졌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개독 이런 말을 듣게 황금률을 어기는 행동을 해서 이렇게 맞는 돌은요 그건 정의의 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원망도 못 해요. 그렇죠? 그런 말이 안 나오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개독이라고 하는 사람들 다 내가 때려잡아야겠다.”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진짜 온전히 알리고 싶다면 빨리 황금률을 더 실천하셔서 이웃 사랑을 보여주세요. 그래서 개독이라는 말을 하기 민망하게 만드세요. “아 진짜 예수님 제자가 아니고는 못할 짓을 하고 계시다. 저건 성령이 아니고 못 하는 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라고 생각이 되면요 말 함부로 하겠습니까? 이런 게 진짜 전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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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님한테 가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그런 신앙 말고요. 본인이 스님이라면 그런 말 듣고 싶으시겠어요? 왜 그런 기본적인 황금률을 어기면서 자기가 진짜 그 제자라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성경을 혹시 안 보신 건 아닌지 의문이 가네요.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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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2013년 윤홍식의 요한복음 강의 6강 - 너희는 하나님이다.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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