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청355-1.hwp
1장
(1) 원문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묘.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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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 길. 도리. 이치. 근원. 가다. 행하다. 이행하다. 통하다. 다니다. 말하다. 도.
가(可) : 옳다. 가히. 가능하다. 허락하다. 할 수 있다.
상(常) : 떳떳하다. 영원하다. 항상. 늘. 불변. 일정하다. 변함없이 행하다.
명(名) : 이름. 이름 부르다. 불리다. 지칭하다. 이름나다. 훌륭하다.
시(始) : 처음. 시작. 비롯하다. 시작하다. 근본. 근원.
묘(妙) : 묘하다. 젊다. 오묘하다. 미묘하다. 불분명하다. 흐릿하다.
요(徼) : 돌다. 순찰하다. 구하다. 훔치다. 변방. 변방의 경계. 분명함. 분명하다.
위(謂) : 이르다. 일컫다. 일컬음. 알리다. 까닭. 이유. 일러.
현(玄) : 검다. 검붉다. 깊다. 멀다. 아득하다. 가물거리다. 모호함. 모호하다.
우(又) : 또. 다시. 용서하다. 오른손. 오른쪽.
중(衆) : 무리. 여럿. 많은 사람. 많은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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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
이행할 수 있는 도는 항상의 도가 아니다. 불릴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없어야 (그 대상의) 오묘함(實在, reality)을 보고,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있어야 (그 대상의) 분명함(現象, appearance)을 본다. 이 양자(오묘함과 분명함)는 같은 곳에서 나와 이름이 다를 뿐이다.(하나는 실재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현상이다.) 이 양자의 (차이 방향으로 나아가면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같음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 경계는) 모호하다. 모호하고 더욱 모호한 곳으로 나아가면 여러 오묘한(실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3) 해설
노자의 도(道)는 궁극적 실재(窮極的 實在, Ultimate reality)로서 무엇이라고 정의(定義, definition)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정의하는 순간 한정(限定, define)되어서 한정되지 않는 영역과 대비되면서 궁극적 실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정된 영역과 한정되지 않는 영역이 대비된다는 것은 한정된 영역보다 외연(外延, extension)이 더 큰 영역이 존재해야만 가능한데, 외연이 더 큰 영역이 존재하면 궁극적 실재는 아니다. 그리고 만약에 궁극적 실재보다 외연이 더 큰 것이 있다면 더 큰 그것이 궁극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노자도 25장에서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냥 도(道)라고 부르겠다. 억지로 이름하여(그 이유를 설명하면) 그것은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노자는 “크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逝)이라 할 수 있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은 멀리 근원(根源)에 이르는(源) 것이라 할 수 있고, 근원에 이른다는 것은 다시 되돌아가는(反)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노자의 도는 항상 동일한 상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결국 25장에서 우리는 도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도가 크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가 부동(不動)이 아니고 유동(流動)이라는 것이다.
도는 유동(流動)하기 때문에 이행(移行)할 수 있는 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이행할 수 있는 도는 당연히 항상 동일한 상태로 있는 항상(恒常)의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항상의 도는 유동하는 실재의 도가 아니며, 현상으로 우리들의 감각기관에 포착된 인상(印象)이며 포착된 이후에는 머릿속에서 기억되고 재생되는 관념(관념, idea)으로서의 도이다. 이러한 도는 화이트헤드의 영원한 대상(永遠對象, eternal object)이다. 화이트헤드의 영원한 대상은 한정형식(限定形式, forms of definiteness)으로 한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 짓는 데 사용되어 사물의 차이를 드러내는 기능이 있다.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대상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 예를 들어 집에서 양과 염소를 함께 기른다고 할 때, 양을 양이라 하고 염소를 염소라고 이름 붙여야 두 동물의 차이를 드러내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숫자가 많지 않을 때는 양과 염소들 안에서도 차이를 드러내 구별하기 위해서 또 다른 이름(순둥이, 시샘이 등)을 붙여 부른다. 숫자가 많을 경우에는 양1, 양2, 양3, 염소1, 염소2, 염소3 등으로 이름을 붙여나가면서 목에 명찰을 달아서라도 우리들은 구별하려고 한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우리들 앞에 놓인 수많은 대상들에게 이렇게 이름을 붙여 불러야 혼돈을 피할 수 있으며, 서로 무엇을 지적하는지 알 수 있어서 상호소통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름 붙일 대상이 생멸과 이행을 하기 때문에 그 대상에 붙인 이름도 항상의 이름이 될 수 없다. 또한 이름의 의미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고 다르기 때문에 항상의 이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불릴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름도 생멸을 겪고 다른 것으로 그 의미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일생은 짧지만 이름은 오래 간다’는 의미가 전제(前提, premise)되어 있다. 그런데 노자는 이름도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보다는 대개 오래가지만 영원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노자는 1장에서 왜 이 말을 하는가? 사람들의 사고가 이름에 매여 있어 오류에 빠지기 쉬운 점을 지적하고, 이 오류에서 벗어나야 자신이 말하는 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치는 대상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대상만이 지니는 고유한 한정특성(限定特性)을 드러내어 그 대상과 다른 대상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그 대상과 다른 대상을 구별할 수 있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 대상들 간의 차이를 더 많이 드러내어 구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만물(萬物)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분석적(分析的) 방법으로 노자가 경계(警戒)하는 것이며 지식이 많아지는 방향이다. 여기에 비해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이름이 줄고 줄어서 천지(天地)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 이것은 종합적(綜合的) 방법으로 노자가 선호하는 것이며 지식이 줄어들면서 도에 가까워지는 방향이다. 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면 하늘과 땅(天地)까지도 있음(有)이라는 공통점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천지의 공통점을 있음(有)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면 그 있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없음(無)이라는 이름이 전제된다. 종합하는 방향으로 더 나아가서 있음과 없음의 공통점을 드러내는 이름은 무엇인가? 이것을 노자는 도(道)라고 일단 이름을 붙여 놓지만, 도(道)라고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道)라고 한정해서 이름 붙이면 도(道)와 비도(非道)로 이분(二分)되어 ‘있는 것이다(是)’와 ‘있는 것이 아니다(非)’의 공통점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이름을 붙여 가면 천지에서 시작해서 만물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름 붙이기 전인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붙이는 일에서 만물이 탄생되니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이름을 붙여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주어진 대상들의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것은 그 대상들의 현상에 불과하다. 반대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주어진 대상들의 차이점은 흐릿해지지만 공통점이 통찰되면서 유기적이고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이 통찰로 말미암아 오묘한 실재의 세계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없어야 (그 대상의) 오묘함(實在, reality)을 보고,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있어야 (그 대상의) 분명함(現象, appearance)을 본다.(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고 노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노자는 “이 양자(오묘함과 분명함)는 같은 곳에서 나와 이름이 다를 뿐이다.(此兩者同出而異名)”고 말한다. 양자의 공통점을 통찰은 하지만 이름을 붙이지 않은 오묘함과 양자의 차이점을 드러내 이름을 붙인 분명함이나 그 근원은 같다. 왜냐하면 하나는 실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실재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우리의 감각기관에 포착되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기관에 포착되는 것은 현상이다. 현상은 감각기관에 포착되기 때문에 분명하지만 실재는 공통점에 대한 통찰이라서 차이점이 드러나지 않아 그 경계가 흐릿하고 불분명하다. 칸트는 이것을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ing in Itself)라고 하면서 인간 경험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자는 모호함(玄)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같음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 경계는) 모호하다. 모호하고 더욱 모호한 곳으로 나아가면 여러 오묘한(실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대상을 분석해서 차이점을 선명히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현상의 세계만 밝혀질 뿐 실재의 세계와 멀어진다. 실재 중에서도 궁극적 실재를 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도를 알고자 한다면 위와 반대방향인 모호함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대상들에 이름을 붙여서 지식을 늘려 가면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지식을 늘려 가면 재산, 지위, 권력, 명예 등을 늘릴 수 있고 남들과 비교하여 우위를 차지해서 남보다 잘 사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노자는 그러한 사고의 방향이 인생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으며, 장자는 인생을 재미없게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지식, 재산, 지위, 권력, 명예 등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모두 사람으로서 동일하다고 보는 사고 방향을 갖게 되면 인생에 여유가 생기게 되고 즐겁게 살 수 있다. 작은 키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키 큰 사람 앞에서 위축되거나 부러워하기 쉽다. 그리고 대머리인 사람이 머리카락이 풍부한 사람 앞에서 위와 같은 생각을 하기 쉽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신경이 예민하다고 한다. 이럴 때는 신경이 예민한 것보다 무딘 것이 좋다.
신경이 아주 날카로워져 그것으로 일상생활이 힘들 때 신경안정제의 힘을 빌려 신경을 무디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시적이다. 몸이 지니고 있는 자연치유력을 증가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고의 틀을 바꾸는 것이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또한 사고의 틀을 바꾸는 것은 병을 치료하는데 머물지 않고 인생을 어둡고 힘들게 하는 부분을 걷어내고 밝고 즐겁게 하도록 우리들을 이끈다. 작은 키의 사람이 키의 크고 작음의 차이점에 주목해서 그것을 분명히 의식하는 사고가 작은 사고이며, 키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공통점에 주목해서 동일하게 인간이라는 통찰적 사고가 큰 사고임을 자각한다면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머리도 마찬가지이다. 노자는 차이점에 주목하는 사고의 방향을 바꾸어 공통점에 대한 통찰을 지속적으로 키워 가야만 자신이 말하는 도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도덕경 1장에서 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방향대로 간다면 개인적으로는 만족한 인생이, 사회적으로는 평화가 정착될 것이다.
(4) 문제제기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지식을 늘려가기 위함인데, 노자가 말하는 방식대로 하면 학교는 없어져야 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동일한 인간이니 부자가 되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노자의 생각인가?
2. 도를 알기 위해 사고가 모호한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하는데, 그러면 더욱 모르게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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