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림 비 치 §
ꁋ 제주도 4.3 항쟁 역사 기행지 … P.2
ꁋ 제주도 4.3 항쟁 일지 … P.11
1.
4.3의 도화선은 3․1절 발포
2.
4.3은 어떻게 전개됐나.
3.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4. 5.10선거 거부 투쟁
5.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6. 학살 -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
7. 하산민들
8. 지속되는 대학살과 항쟁의 종식
9.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
10. 잠들지 못하는 남도
11. 제주 4.3항쟁에 관한 이승만 독재정권과 미국정권의
얼굴!!
ꁋ 일정표 … P.18
자료글 1.
◈ 제주도 4.3항쟁 역사기행지
1. 관덕정
관덕정 광장은 제주도 역사의 앞마당이었다. 1448년 세워진 이래
제주 역사의 굴곡을 말없이 지켜보며 침묵으로 증언해 주는 곳이 관덕정이요, 이 광장이다.
1901년 신축년 항쟁이 일어났을 때 이 항쟁의 장두였던 이재수가 관덕정 광장에서 효수되었고,
1949년 6월에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효수된 시신이 전시되기도 했다.
해방이후
이 광장에서는 정치적인 집회가 많이 열렸다. 1947년 2월 10일에는 제주시내 중학생 수천 명이 여기에 모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양과자 먹지 말자"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3월 1일, 28주기 3.1 운동 기념식을 끝내고 해산하던 도민들을 향해 미군정이 총격을 가해 다수의 도민을 살상하는
3.1 발포 사건이 여기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그후 발포에 항의하는 전도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이에 대한 미군정의 계속적인 탄압으로 급기야 뒷
해의 4.3항쟁으로 이어지는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2. 정뜨르 비행장
<지금은 제주국제공항으로 변모한 정뜨르 비행장>
1940년초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정뜨르
비행장은 도두봉 가까이에 있는 활주로 부근에 자그마한 군용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시설이 전부였는데 1957년에 와서 활주로를 증설하여 민간항공기가
취항하기 시작하였고, 1982년에 대규모 확장공사로 국제공항으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현재 제주국제공항이 바로 4.3당시 최대의 학살터였다. 당시
미군정과 군경토벌대는 북제주군 관내 무수한 양민을 재판한다는 구실로 비행장으로 끌고와 학살한 후 바로 그 자리에 매장해버렸다.
3. 박성내
제주시
아라동 제주여고입구 동쪽에 있는 박성내에는 무자년 난리가 일어난 그해 겨울 12월 21일 (1948년 음력 11월
21일)에 1백여명 이상의 죄없는 도민들이 한스럽게 숨져간 곳이다. 연대가 교체되던 12월에 들어서면서 좋은 전과를 올리려는 욕심으로 무리한 토벌과
함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경우들이 빈번해졌다. 함덕, 북촌, 신촌 등지의 주민들이 토벌에 참여하면 자유로울 수 있다는말에 넘어가 박성내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4. 물장오리
4.3유격대 훈련장. 군경토벌대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는 이 오름 부근에 도당본부와 유격훈련
학교가 있었으며 1948년 6월 24일 임영관 경위를 포함한 28명의 경찰토벌대전원이 몰살당하는 4.3봉기 이후 유격대가 완전한 승리를 이룬 첫
전투로 기록된다.
5. 관음사
한라산 산록도로 변에 자리잡은 조계종 제주교구 본사인 관음사는 비구니 려관 스님에 의해 1908년 세워졌다. 제주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는 관음사는 한때 재산무방대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으며, 군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또한 관음사는 4.3항쟁의 말기 유격대(재산무장대)와 군 토벌대와의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격전지이기도 하다. 1949년 2월 중순경 관음사에서는 재산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 이후 관음사는 토벌대에 의해 깡그리 불에 타 1964년에 복원이 되었다.
6. 하가리 육시우영
외도지서
주둔 9연대 군인들이 원동지구 토벌작전으로 원동으로 올라가는 길에 길을 안내하던 빈모씨가 애월면 하가리주민들을 모함에
육시우영에 집합된 주민들 29명이 무차별 희생됨.
7. 원동마을
원동
마을은 애월읍 소길리 산 1364번지 일대에 속하며 제주시와 모슬포를 잇는 서부 산업 도로 중간에 위치해 있다.
과거 원동 마을은 제주목과 대정현을 걸어서 오가는 사람들이 가다가 쉬면서 술과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주막거리가 있던 곳으로 이러한 주막들을
중심으로 화전과 목축을 하면서 15가구에 60여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살던 마을이었다.
4.3 당시 군경 합동 토벌대는 사건이 장기화되자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설정하여 소개 - 방화 - 집단 학살로 이어지는 중산간 지역에 대한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원동
마을 역시 산간 마을이었기 때문에 예외는 아니었다. 1948년 11월 13일, 철모에 하얀 띠를 두른 제9연대 군인들이
이 마을을 포위하고 들어왔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이 공비 출몰 지역, 적성 지역에 살고 있다며, 마을 사람들을 주막거리로 모두 모아 놓고 집단적으로
학살해 버린다. 학살 현장에서 총에 맞았으나 살아난 장병기 할머니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 9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나타나서 사방으로 포위하고 주막 번데기로
사람들을 전부 집합시켜 놓은 거라. 그러다가 나중에 어디로 데려갈 듯 하더니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앉혀 놓고 총으로 와작착 와작착....
난 그때 총부리가 겨드랑이로 들어가 젖가슴으로 나왔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애기 안은 채 죽은 사람들 사이에 누워져 있습디다. 죽은 사람들 위로
기름을 부어 불이 막 타고 있었어. 난 겨우 기어서...."이날 집단 학살로 27명의 주민의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늙은이들과 부모를 잃은 10살 미만의 어린이들은 하귀, 고내, 곽지 등지로 혹은 고아원에
수용되어 뿔뿔이 흩어져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이로 인해 원동 마을은 폐허가 되어 버렸고, 원동 마을 주민들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아픔과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고 말았다. 또한 원동 마을 주민들의 땅은 임자 없는 땅으로 버려졌다가 외지인이 이전돼 버리거나, 헐값에 팔려 나가 버렸다.
지금
마을 터는 짙푸른 대나무 숲과 하늘을 가릴 정도의 빽빽이 자란 삼나무로 뒤덮여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8. 발이오름 (바리메, 鉢山)
북제주군
애월읍 어름2리에 있는 이 오름에서 지난 1994년 3월 제주 4.3연구소와 46주기 공준위팀이 4.3당시의 것으로
확인되는 유골1구와 유물들을 일제때 파놓은 인공굴에서 공동발굴하였다. 1948년 11월께 군경토벌대를 피해 이 굴로 들어오게 되어 생을 마감한
유골의 주인공은 조천출신 정태옥(당시 30)씨다.
< 발이오름 분화구
>
9. 한수기곶
한경면
저지리에서 남동쪽 5Km 위치한 한수기 곶은 4.3초기 한림, 대정의 유격대가 은거했던 곳이다. 한수기 오름 서쪽에
위치해 있는 한수기굴은 한림면 유격대(저지리 명의동 청년)들이 은거했던 곳이다. 이 굴 속에는 철창과 죽창의 제조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칸을
나누기 위해 돌을 쌓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유격대의 은거 생활을 짐작케 해준다. 한편 한수기 오름 서쪽에 널려 있는 유격대 아지트의 흔적들은
대정면 유격대가 은거 했던 곳이다. 4.3항쟁 발발 직후 지서를 습격했던 대정면 청년들이 피신하면서부터 이곳은 대정면 유격대의 아지트가 되었다.
10. 백조일손지묘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어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사람들 중 1백 32명을 학살 후 몇 년이 지난 후에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해다가 공동으로 안장해 놓은 집단 묘역이다.
너나없이
누구의 시신인지도 구분할 수 없어서, 넓은 묘역에 6*22 줄씩 해서 애기무덤만한 조그만 봉분 1백 32개를 쌓고
시신을 모셔놓았는데, 4.3항쟁을 전후한 시기의 희생자를 이처럼 대단위로 묘역을 조성해서 안장시킨 곳으로는 유일한 곳이다.
11. 섯알오름
일제가
탄약고로 썼던 섯알오름은 6.25 후 예비검속된 한림, 대정 지역의 2백여 명의 인원을 대정읍의 곡마 창고에서 이송시켜서는
무차별 학살한 통한의 학살지이다. 정부는 6.25가 발생하자 무고한 양민들과 보도연맹원, 4촵3항쟁 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사람등 다수를 '예비검속'이란
명분으로 검거해서 대량 학살을 한다.
당시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을 보면, 군경은 검속자들을 배에 싣고 한 바다에 나가서 돌덩이를 매달고 수장시켜버리기도 하고,
집단 총살을 하기도 하였다.
12. 무등이왓
'무등이왓'이라 불리웠던 동광리는 안덕면 서북쪽 해발 300미터에 위치한 산간마을로
20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해방은 공출없는 세상'이라고 믿었던 무등이왓 사람들은 1946년 미군정의 공물수집 정책에 마을
주민 모두가 항의하여 보리공출 반대운동을 벌인 적도 있었다. 이후로 군경의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하여 마을 청장년 대부분은 산으로 피신하기 시작한다.
무장대의
근거지에 가까웠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무장대의 왕래가 빈번한 이 마을에 1948년 11월 14일 마을유지 9명이
학살된 것을 비롯하여 11월 21일 소개시 무차별 학살과 방화로 주민 상당수가 죽고 마을도 잿더미로 변한다.
13. 큰넓궤
큰넓궤에는 굴은 동광리에서 서북쪽으로 2.5키로 정도에 위치한 천연동굴이다.
이궤에는 4.3 당시 토별을 피해 동광리사람 120여명이 50~60일 동안 숨어 살았던 곳이다. 지금도 당시에 사용했던 생활용기가 굴 곳곳에 널려있다.
나중에 이 곳이 토벌대에 발견되었으나 근처 도을악에서 보초를 서던 무장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대부분이 15Km 떨어진 한라산 영실 근처
볼래 오름까지 피신하였으나 대부분 잡히고 만다.
14. 녹하지 주둔소
서부산업도로쪽에서 1100도로를 연결하는 제2산록도로를 따라 중문동
천서마을을 지나면 북쪽에 잘 깍아놓은 듯한 피라미드 모양의 녹하지오름이 보인다. 이 오름 바로 앞 동산이 녹하지 주둔소 터다. 공동목장으로 가는
시멘트길을 따라 10여분 남짓 걸으면 50여년이 세월을 견딘 녹하지 주둔소가 서쪽부분을 밭담용 등으로 쓰기 위해 가져다 버려 거의 없어진 것을
제외하면 형체를 뚜렷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다.
성
전체의 둘레가 120m 안팎의 사각형 모양이다. 주둔소 성벽의 높이는 약 3m이고, 성밑바닥의 너비는 1.5m 정도
겹담으로 단단하게 쌓여져 있다. 또 주변으로는 다른 주둔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호가 주둔소와 7~12m정도 거리를 두고 주둔소를 돌아가며 너비
2~3m, 깊이 1m 가량의 크기로 파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주둔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호가 주둔소와 7~12정도 거리를 두고 주둔소를 돌아가며
너비 2~3m, 깊이 1m 가량의 크기로 파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주둔소에 올라 남쪽을 내려다보면 산방산에서 서귀포 섶섬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한라산쪽도 보여 감시하기에는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 오름 옆의 계곡 주변에는 무장대의 아지트였던 것으로 보이는 사각형과
원형 모양의 트들이 남아있다.
한라산
무장대가 거의 소멸되는 54년째까지 존속돼 모진 역사를 지켜본 주둔소는 이제 개발의 바람에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다.
녹하지 주둔소는 골프장이 들어설 지역이어서 곧 헐릴 운명이다.
15. 영남동
한라산
중턱(약 해발 500m)에 위치한 이 마을은 한때 50여호 이상이 거주했던 규모있는 마을이었으나, 1948년
4.3당시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폐촌이 되어버렸다.
16. 시오름 주둔소
제2산록도로와 1100도로가 만나는 교차로에서 동쪽으로 5km정도 가다 다섯 번째 다리 바로 옆에서 틀어 남쪽으로 300m 남짓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면 해발 420m에 위치한 시오름 주둔소가 나타난다. 4.3당시 쌓은 주둔소 가운데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풀로
우거져 자유롭게 걸어다니기에 불편하지만 당시에는 사방을 감시할 수 있을 정도로 트여있었다. 제2산록도로의 개설로
지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당시는 서귀포시 서호동 중산간 마을을 통해서 2시간 가까이 걸어야 접근이 가능했다. 49년 초 계곡을 끼고 만들어진
삼각형 모양의 시오름주둔소는 한면의 길이가 40여m 정도로 전체 둘레는 120m 정도이다. 성담의 높이는 약 3m, 성 너비는 1m 정도로 단단하게
쌓아져 있다. 촘촘히 쌓여진 주둔소 성벽은 이끼와 나무덩굴로 얽어져 50여년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성벽에는 군데군데 총구를 들이댈 수 있는
구명이 뚫려있고, 주둔소 안에는 당시 토벌대와 민간인 협조원들이 잠을 잤던 숙소터도 꽤 큰 규모로 남아있다.
17. 수악교 주둔소
제주 4.3항쟁 대 토벌기 이후 한라산 잔여 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해 한라산 중턱에 토벌대 주둔소를 설치하였다. 수악교 주둔소는
수악교에서 계곡을 따라 700미터 쯤 올라가면 수악계곡을 끼고 둘레 약 300미터 정도의 돌성으로 쌓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18. 정방폭포
정방폭포는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영주 12경으로 꼽고 있는 이 폭포 역시 4.3당시 남제주군에서는 가장 큰 학살터였다.
토벌대는
기암절벽의 폭포수와 부근 절벽 소남머리에서 '살인훈련'이라는 명목하에 전주와 수목에 손발이 묶인 양민들을 상대로
사격연습을 하거나 장검 돌격 연습을 행하였다고 한다.
죽창과
총에 난자당한 피살자의 시신에서 떨어지는 살점, 부서진 뼈마디는 바로 비폭 물줄기와 함께 폭포속에 감돌면서 바다로
떨어졌다. 그곳은 낭만도, 아름다움도 없는 살벌한 처형장일 뿐이었다. 동광리 사람들도 1948년 12월 24일 정방폭포 근처에서 모조리 총살되었다.
19. 의귀리 현의합장묘
의귀리는 1948년 음력 10월에 소개작전으로 마을이 온통 불에 타버리자 갈 곳 없는 주민들이 이리저리 쫓기다 토벌대에 잡혀 의귀리
국민학교 옆밭에서 음력 12월 12일과 14일 양일에 걸쳐 집단학살되 시신 50여구가 묻혀 있는 곳이다.
20. 표선 백사장
당시
표선초등학교에 수용되었던 중산간부락(가시리 등)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곳.
당시 17세 이상 40세 이상까지 전원집합하리는 군경의용대의 지시로 향사에 집합하였던 바 표선리까지 가서 진상을 조사한다고 하여
전원 연행하고 하등의 심문도 없이 총살하였음. 제2연대 소속 군인들에 의해 표선백사장에서 토산리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되었다고도 함.
(1948년 11월 17일, 18일, 19일, 22일, 27일(음(,49.1(음))
21. 수산복구비
성산읍
수산2리 마을 입구에는 높이가 1m도 채 안되는 이 비석은 4촵3당시 소개작전으로 인해 마을의 완전히 초토화되었다가,
평온을 되찾자 수산2리 주민들이 마을을 다시 재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22. 성산 터진목, 수마포 굴
성산은
숲이 무성하고 울창하여 원래 청산(淸山)이었다고도 하며, 바닷가에 봉우리가
우뚝하게 자리잡고 그 위는 오목하게 파여 마치 城과 같다 하여 城山이라고 하였다 한다.
성산
일출봉은 바다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굳어진 후 융기된 것이다. 성산봉을 떠받치는 높이 180여 m의 깎아지른 절벽은
대나무를 쪼개 놓은 듯 치솟아 올라 흙 한줌 없다. 험준한 암벽의 정상은 거대한 접시 모양의 분화구가 펼쳐져 있다. 또 둘레에는 99개의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삥둘러 있어 마치 성곽 같다. 성산 일출봉의 장관은 해돋이로 '성산 일출'이라 하여 예로부터 영주십경 중 제일로 쳐 왔다.
일출봉 바로 밑에는 24개의 인공굴이 있는데 이를 수마포(水馬浦) 땅굴이라 한다. 성산 지역에 주둔한 중대 병력 규모의 일본군 부대는 일출봉을 요새화하고 수마포
해안가에 24개의 굴을 팠던 것이다. 이 굴을 다 파기까지는 2년 여가 걸렸고, 노동력은 주로 전라도 등지에서 징용으로 차출되어 온 인원으로 충당됐다.
굴의 크기는 폭탄과 어뢰를 감추어 놓기에 적당하도록 높이 3~5m, 너비 3m, 길이 10~50m가 되며, 굴 안쪽에서는 서너 개의 굴이 서로
통하도록 파 놓아 유사시에 언제라도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성산지역에는
중대병력 규모의 일본군 村上부대가 주둔하여 일출봉을 요새화하고 수마포 해안가에 24개의 굴이
있으며, 4.3당시 동부지역의 학살터로 토벌대들에 의해 고성리 청년고들과 오조리 부락민 100여 명이 학살되기도 한 터진목과 일출봉 북쪽 낭떠러지
암벽을 낀 해안가로 모양이 움푹하게 들어간 모양이라고 하여 우뭇개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도 4.3당시 많은 주민들이 학살되어 마치 '멸치 널어지듯'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23. 다랑쉬 오름, 마을터, 굴
다랑쉬(月朗) 마을은 구좌읍 세화리에서 남서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해발 1백 70 미터의 중산간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이다. 다랑쉬 마을은
4 3 당시 토벌대에 의해 소각되어 지금은 폐촌이 되어 버렸다.
소개되기
전 이 마을은 목축과 농사를 짓는 주민들 약 20여 호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군경 토벌대에 의해 48년 겨울 어느
날 마을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이
마을 뒤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다랑쉬 오름은 구좌읍의 상징이다. 구좌읍 주민들의 억센 기상은 이 오름에서 나온다고
한다. 4 3 당시 이 오름은 유격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오름에 올라서면 구좌읍이 한 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4 3 당시에는 오름 위에서
군경 토벌대가 올라오는 것을 감시하기도 했으며, 봉화를 올리기도 했다.
1992년 4월 1일, 폐촌된 다랑쉬 마을에서 약 300m 정도 떨어진 들판의 조그만 굴에서 4
3희생자 유골 11구가 발굴되었다. 이 굴의 입구는 직경이 60~70Cm로 좁고 낮아 한 사람이 엎드려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발굴 당시 이
굴 속에는 11구의 시신 외에도 주변 여기저기에 질그릇, 놋그릇, 놋수저, 무쇠솥, 항아리 등 온갖 생활 용품이 그대로 있었다. 이들 희생자들은
9세의 어린이로부터 51세의 아주머니를 포함한 민간인들이었는데, 이들은 1948년 음력 11월 18일, 초토화 작전 시기에 토벌대에 의해 굴 속에
갇힌 채 연기에 집단 질식사한 것이다.
굴
속에 갇혀 있던 11구의 시신은 봄볕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기도 전에 당국에 의해 성급히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고,
굴 입구는 콘크리트로 폐쇄되었다.
이
굴은 지난 1992년 4월 1일 4촵3희생자 유골 11구가 발굴되어 충격을 던져주었다.
24. 큰곶검흘굴
4.3직후부터 덕천리는 일종의 해방구로서 구좌면 면당본부가 꽤 오랫동안 위치해 있었다. 이 면당본부가
있던 곳이 바로 큰곳 검흘굴이다. 이 굴은 입구가 304미터 절벽아래 위치해 있어 절벽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25. 북촌옴팡밭
조천면
북촌리는 해안마을 위치해 있으면서도 많은 피해를 받았던 마을이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되는
1948년 1월 17일, 18일(음력 12월 19, 20일) 발생한 '북촌사건' (아이고사건)은 주민들을 국민학교에 집결시킨 후 차례대로 옆 밭으로
끌고가 총살한 사건이다. 이틀새 북촌 주민 320여명 가량이 억울하게 죽었다. 이러한 집단학살로 북촌은 한때 무남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26. 함덕 해수욕장
함덕해수욕장은
대대분부가 주둔하였던 곳으로 1948년 10월부터 총살이 집행되었던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대대본부의 위치는 지금
함덕해수욕장 주차장 맞은 편이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총살되는 대로 모래사장 구덩이에 쳐박혀졌다. 주로 1948년 가을에서 겨울까지 총살이 집행되었는데
죽은 시체는 모래사장에 대강 매장되었다.
27. 낙선동 성터
알선흘이라 불리기도하는 낙선동에는 높이 2.5m~3m 둘레500m
정도의 석성이 남아 있다. 이 돌성은 4.3당시 토벌대에 의해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다. 전략촌 건설을 위한 축성 작전은 도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루어 졌다. 낙선동 전략촌은 1948년 12월 20일 선흘리 소개작전으로
마을이 불태워지고 주민들이 함덕 중학교에 감금 되었다가 1948년 초에 건설 된 것이다. 소개 및 전략촌 건설 이후 주민들은 일종의 수용소 였던
석성안에서 생활 했으며, 산사람에 동조세력 또는 도피자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남자들이 학살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전략촌 석성의 보초는
16세 이상의 여자들이 서기도 했다.
28. 선흘곶
선흘곶(동백나무 숲이 있는 곳)에는 굴이 있다. "모시물"굴과 그 서쪽에 "반못"이라는 작은
굴이 있는데 25일에는 반못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희생되고 그 다음날에는 모시물굴을 군경토벌대가 포위하여 굴속에서 생활하던 선흘주민 94명정도가
집단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때 굴에서 빠져나온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죽은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여 나무로 명패를 만들어 시신곁에 놔뒀으므로 유족들이
찾는데 쉬웠다고 한다.
29. 밴뱅디 굴
48년 10월 소개령이 내려지고 마을이 방화되어 선흘2리(선인동)주민 50여명이 피신해 있었는데
48년 10월 27일(음) 토벌대가 선흘리 반못굴에서 주민들을 총살하고 난 후 주민에게 밴뱅디굴을 가르치라고 하여 굴 속에 피신중인 선인동, 와산,
와흘 등지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일부는 함덕리 평사동 모래밭(함덕해수욕장)에서 총살되기도 하였다.
30. 이덕구 산전
제주시
터미널에서 제1횡단도로로 20여분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수장교'를 지나게 된다. 여기서 조금 더 가 내리면 동쪽으로
숲길이 보이는데 이 길을 따라 1시간 정도 걸어가면 Y자형의 '안새왓 내'와 '밧새왓 내'가 합수되는 상류의 밋밋한 분지가 나온다. 바로 이 곳이
이덕구가 이끄는 유격대가 최후에 주둔했던 곳이라 하여 '이덕구산전'이라 부른다. 산중에 있는 대단위의 분지에다 주변에 물이 좋고 뒷편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어 조천의 중산간 부락을 관망할 수 있다.
31. 이호 해수욕장
1948년 10월 10일(음)1948년 10월 5일(음)용담동에서 살았는데 이호로 연행되어 희생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노형동 월산부락에서 이호동으로 소개 내려간 사람들이 모래동산소나무밭에서 생되었던 사례도 있다.
32. 천제연 폭포
서귀포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중문관광단지 동쪽에 위치한 3단 폭포이며,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갈 수 있다.
절해의 관광지인 이곳이 4.3당시에는 학살 장소로 쓰기도 했다. 선임교 동쪽 소나무 밭이 그 학살터 였다.
33. 우도
1947년 3.1발포사건이 일어나자 우도주민 천여명은 3.1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지서 파견소 간판을 떼어내고 순경사택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거리상의 문제로 10여 일이 지나서야 경찰 본서에서
알게 되었다는 기사가 나와 있다. (47년 4얼 2일 제주신보) 일제하 항일운동이 활발했던 반면에 8.15전후, 4.3과정에서 이 지역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영향을 입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조사된 기록이 거의 없다.
자료글
2
◈ 제주 4.3 항쟁 일지
1. 4.3의 도화선은 3․1절 발포
4.3의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내에서 3․1절 시위 군중에게 경찰이 무차별
발포, 14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비롯되었다. 3월 1일 제주에선 3. 1절 1주기 기념대회를 가지며 ‘3. 1혁명정신으로 한국의 통일독립을 쟁취하자’,
‘미국은 남한에서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 집회를 가졌다. 이에 대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대답은 경찰 기마대의 무차별 발포 였다. 결국 6명의 사망자를 만들어 냈다. 국민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50대 농부 등 대부분 관람 군중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주도민들을
격분시켰다.
당시의
제주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군정당국즉 이승만 독재정권과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던 분위기였다. 6만 명에 이르는 귀환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300여 명의 희생, 대 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악재가 겹쳤다. 특히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관리들의 모리행위(47년 2월 이 문제로 감찰청장이 해임된 사건도
있었음)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터진ꡐ3․1절 발포사건ꡑ은 제주도민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군정당국은 이 경솔한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 민심 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열흘 뒤인 3월 10일부터 제주에서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민관(民官)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됐다. 이 파업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했다. 파업에는
도청을 비롯한 도내 165개 관공서 국영기업 단체들이 참여했다. 도내 전체 초․중등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도 이에 동참해 문을 닫았다.
경찰 자료에 의하더라도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 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주 출신 경찰관 66명이 파업에 동참했다가
파면당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본토에서
경찰 400여 명과 서북청년단원들이 대거 들여왔다.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망국 단독 선거 절대반대!!”
“이승만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 통일 만세!!”
“투옥중인애국인사 석방하라!!”
도지사가 외지 사람으로 교체됐고. 제주 출신 경찰관들이 뒷전으로 밀렸다. 본토에서 파견된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조금이라도
불평하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 고문했다. 심지어 억지로 죄인을 만들어 금품을 갈취하는 등 백색테러가
잇따랐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이런 긴장 상황은 계속되었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간 2500여 명이 구금되었다. 특히 1948년 3월에 들어서면서 조천․모슬포 지서 등지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 사회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때마침 “5․10 단선”결정으로 전국의
정치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다. 좌파 조직만이 아니라 김구, 김규식 등 일부 우파와 중도파에서도 5․10 단선 반대 대열에 나섰다.
제주도 민중 역시 5․10 단선 반대투쟁에 점화, 1948년 4월 3일 경찰관서를 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2. 4.3은 어떻게 전개됐나.
1948년 4월 3일 자정, 마침내 무장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봉우리마다 단독선거 반대의 봉화가 타오르는 가운데 한발의 총성과 함께 제주 민중의 무력 항쟁이 시작되었다.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망국 단독 선거 절대 반대’ ‘투옥중인 애국지사 즉시 석방’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즉각 철수’ ‘이승만 매국도당 타도하자’ ‘한국 통일 독립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유격대 무력 항쟁을 시작한 것이다.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여 명과 그 동조자 1천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하였다.
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단 행하여 각 면에서 투철한 사상성 및 전투 경험을 소유한 자를 30명씩 선발하여 연대와 소대로 구 분 편성된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유격대의
기습 공격에 놀란 미군정은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 부를 설치한 후 통행 증제를 실시하고,
4월 10일에는 부산 주둔의 국방경비대 5연대 2대대를 9연대에 배속하여 경비대의 병력을 증강시켰으며, 또한 유격대와의 연고가 짙어서 진압작전을
효율적으로 치르기에 부적당한 제주 출신의 경찰 대신 타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국방 경비대가 폭동 발생의
초기부터 도민의 불만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추진하지 않는 것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는 한편, 9연대장 김익렬에게 사람을 보내
'초토화작전' 을 계속 요구하였다.
우리는
억압과 억눌림 속에서
자유와 해방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목숨을 내걸고
투쟁 할 것입니다.
3.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미국은
김익렬의 거부로 초토화 작전이 시행의 불가능해지자,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이리 하여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그 다음날 미 군정장관 딘(W. Dean)의 내도 후에 즉각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딘은 평화협상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5월 I일 오전 12시경 제주읍 외곽 오라리가 서북청년단 및 대동청년단 소속 청년 30여 명에 의해
기습되어 12채의 민가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마을에서 1.5km가량 떨어진 민오름 주변에 있던 유격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 청년들을 추적하자, 이 청년들의 보고를 받은 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유격대가 이미 사라진 마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진입하였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유격대와 경찰에 의해 경찰관 가족 I인과 마을 주민 1인이 각각 희생되었고, 경찰은 오후 4시 30분까지 마을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심문하다가
김익렬 등의 국방경비대가 출현하자 황급히 마을에서 철수하였다.
이후의
사건 진상규명 과정에서 미군정과 경찰은 오라리방화사건이 우익청년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국방경비대의 진상보고를 묵살하고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몰아
붙이는 조작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을 통하여 조작된 보도를 하도록 하는 한편, 사건 당시 오라리
상공을 정찰하면서 찍은 필름을 편집하여 제주도의 5월 1일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유격대의 만행을
증언하는 홍보물로 이용했다.
5월 3일에는 미 고문관 드루스 대위의 지휘하에 귀순자를 호송해 오던 제9연대 7명과 미군 사병
2명에게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여 귀순자 중 일부가 죽고 나머지는 다시 산으로 도망하는 사건 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처음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발뺌하였지만, 미군에 의해 체포된 괴한 중 1인이 제주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다시 이것을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을 위해서 경찰과 미군정,
그리고 경비대와의 이간을 시킬 목적으로 자행된 유격대의 경찰 가장기습사건이라 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이에 4.28평화협상과 이후 조작된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뒤집어씌웠다. 미군정은 김익렬을 용공으로 몰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하여 대규모 초토화 작전을 준비해 나갔다.
4. 5.10선거 거부 투쟁
이에
대응하여 '인민유격대'는 5.10선거가 다가오자 그것을 파탄시키기 위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 공세로 관련인사와
경찰, 우익청년단체 관련 인사들이 살해되었고 각종 시설이 습격당하여 파괴되었다.
이와
함께 도민들도 5. 10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선거 관련 공무원들이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선거 사무를 보지 않았다. 도민들은 경찰 및 극우청년단체의 회유 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향보단에 가입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선거날이
되자 더욱 강화 된 협박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입산해 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선거 거부를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화되고 남제주군 선거구만의 선거가 간신히 치러졌다. 도민들은 그들의 항쟁목표의 하나로서 5.10단선을
완벽하게 파탄시킨 것이다.
5.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이에
미국은 즉각 제주도의 해안선을 봉쇄하고 박진경(김익렬 후임)에게 초토화작전을 명령한다. 초토화작전을 명령받은 박진경은
5월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2개 마을에서 218명의 도민들을 체포한데 이어 5월중에만 무려 3,126명의 '포로'를 붙잡는 전과를 올린다.
6월 중순이 되면 '포로' 의 숫자는 6천 명으로 불어난다. 한라산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소하는 박진경의 강력한 투망식․토끼몰이식 공격은 도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광폭함은 국방경비대에 대한 이전의 도민의 호의적인 반응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국방경비대는 " ,,,,미군 철모에 미군복, 미군화에 미군 총, 비가 오면 그 위에 미군 우장을 쓴다.
멀리서 보면 키가 작은 미군부대가 전진하고 있는" 모습으로 "동족의 섬멸에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박진경과
국방경비대의 이와 같은 강력한 토벌에 대응하여 유격대는 5월말 그 편제를 '인민해방 군'으로 바꾸었고, 도민들 또한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국방경비대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탐지,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6월 18일 토벌 방식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등이 박진경을 살해하자, 미군정은 최경록을 그 후임
에 임명하여 박진경 암살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한편, 도민들에 대한 수색작업을 계속하였다. 이 어 7월 15일에는 송요찬을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약 한달 동안 새로이 부대정 비를 하게 한 다음 유격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등 의 정치일정 등으로 인하여 유격대는 장기항전 준비에 돌입함으로써,
경비대의 대 유격대 진압작 전 또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허공
중에 흩어진 넋이여,
살은 썩고 녹아 흙이
되고,
뼈로 남은 혼백이여,
구름길 바람길에 떠도는
넋이여,
갈기갈기 찢겨진 까마귀
밥도 되지 못한 원혼이여,
오늘의 4.3 넋이여........
6. 학살 -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
부대를
정비한 송요찬이 9월초부터 유격대 진압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송요찬과 그의 뒤를 이은 김상겸에 의해 강력한 토끼몰이 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이라는 전율할 대량학살작전이
전개되면서 유격대는 축소되어 갔고, 유격대 세력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의 '폭도사살' 전과가 기록되어 갔다.
특히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국군 14연대의 여․순 봉기를 진압한 10월 하순 이후에는 유격대와의 연결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작전과 소개민 심사, 이를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이 연일 이어졌다.
1949년이 되자 정부와 미국의 주한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함병선의 제2연대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대토벌을 더욱 강화하였다. 해군에서는 18척의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선을 완전 봉쇄하고 37밀리 포로 함포사격을 가하였고, 공군에서는 L-4, L-5형 연락기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폭탄 투하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동시에 육군은 대전차포, 박격포, 0.5인치 기관총, 로케트포, M1 소총 등의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여 집단 학살과 무차별 방화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의 결과로 해안에서 4km 이상 떨어진 한라산에 오르는 부락은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학살을 피한 도민들은 삶을 찾아 다시
산으로, 해안의 안전지대로 도피해야 하는 운명에 직면하게 되었다.
7. 하산민들
그러나
이들의 삶 또한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입산한 도민들은 여전히 토벌대의 추적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다시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라는 새로운 적과 직면하였던 것이다. 해안부락의 안전지대로 피신한 도민들 또한 형편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산 사람과 협력한 마을 사람'으로, 또는 '공산당 물이 들었다'고 많은 의심과 감시의 눈초리를 겪어 야 했으며, 끝내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소개된 마을 을 유격대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대대적인 축성 작업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민보단원이
되어 이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의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8. 지속되는 대학살과 항쟁의 종식
제2연대의 육․해․공군 연합작전에도 불구하고 유격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정부 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한다.
토벌대는
한편으로 3월 25일 기한의 사면계획을 발표하는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무장진압의 2단계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 결과 사면기간 동안 강경한 토벌작전에 대한 공포와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죽음 같은 삶을 벗어나려는 하산민의 두려움과
의구심 에 찬 투항이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회유, 고문, 협박 등을 통하여 유격대의 규모와 주둔 위치, 무장력 등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여전히 강경한 무장진압을 전개하던 유재흥 부대는 사면기간이 끝나자 즉각 대대적인 최후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 동안 유재흥 부대는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였으며, 동시에 3,600여 명의 유격대 동조자를 생포하였다. 이러한 전과는 당시 미군 비밀 문서가 과장 집계 한 무장유격대의 숫자가
250여 명, 그리고 그 동조자의 숫자가 1,000~1,500명에 불과하였다는 것 에 비추어 볼 때, 유격대 색출을 빙자하여 도민에게 가해진 철저한
대토벌, 대학살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즉 유재흥 부대는 '선무'라는 탈의 뒷면에 도민 대학살이라는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유격대 세력은 거의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폭동이 종식되었음을 대내
외에 과시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대부분의
군경이 17일, 18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항쟁과 그것에 따른 피의 보복, 대살륙이 일단락 되었다.
그날은
어둠 속에 죽창이 일어서고 우리는 비명에 쓰러졌다.
바다야!
형무소 울타리보다 높은
원한진 바다야
우리는 이 섬을 지키다
보리밭 한 모퉁이에
아프게 아프게 쓰러졌습니다
9.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
그러나
학살은 이에 멈춘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도내 도처에서 소위 '전향자' 에 대한 대 검거 및
처형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경찰은 대정, 한경, 한림, 애월, 안덕, 중문, 서귀 등지에서 이전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양민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목 하에 소집하여 모슬포 송악산 부근 섯알오름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탄약고로 끌고 간 다음, 이들을 학살했다. 사망자 192명, 도민들은 뒷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를 조성하여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고 있다.
10. 잠들지 못하는 남도
4.3은 결코 몇 글자로 채워진 역사책의 한 페이지로 남겨질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몇 년간의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만 끝난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혹은 형이, 혹은 삼촌이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토벌대의
총에 사살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붉은 것”으로 낙인 찍혀 연좌제의 사슬에 매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4.3은 제주도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을 파괴하는 등 막대한 정신적 피해를 가져온
것이다.
4.3으로 빚어진 유족들의 정신적 후유증은 상상을 뛰어 넘어선다. 대부분의 체험자들은 피해의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4.3을 생각하는 것조차 꺼려한다. 그들은 아직도 “말 없는 다수”일 뿐이다. 이들의 상처는 정작 정신과 육체의 속으로만 곪아가고 있다.
4.3의 진행과정이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듯이 4.3 진상 규명의 역사 또한 한국 현대사의
빛과 어둠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외신은 “4.3에 대한 재평가는 중앙의 민주화 수준에 비례하는 문제”라고 송곳을 찌르듯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는 4.3의 논의가 철저히 금기시 되어 왔다. 이른바 문민정부라고
자처하던 김영삼 정부도 변죽만 울리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다면ꡐ국민의 정부ꡑ라는 김대중 정부는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4.3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4.3 특별법 제정과 정부보존문서 공개도
공약 사항의 하나다. 결국 공약의 실천 여부는 새 정부의 민주화 수준에 달렸다. 또한 한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모순들의 충돌의 공간이었던 제주도
4.3 항쟁에 대한 역사적 진실규명과 피해보상, 명예회복등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11. 제주 4.3항쟁에 관한 이승만 독재정권과 미국정권의 얼굴!!
“제주도 놈들은 모조리 죽이시오.” (이승만)
“정부를 수립하는 사이 대구 폭동과 여순 반란사건등 공산당의 파괴활동을
몇번 경험했지만, 제주도의 폭동과 같은 대규모의 반민족 행위는 일찍이 없었다.
나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역적 도배를 절멸하라고 군경 수뇌에 지시하고 있다.
폭동의 진압은 시간 문제이다.....” (이승만)
“ 대한민국을 위해 제주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버려라.” (조병욱)
“ 제주도의 40만 도민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에는 아무렇지도 않다.”
(신성모)
“1948년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
(제주지역 미군 총사령관 브라운 대령)
“가능한한 빨리, 깨끗이 해치우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주한미군 사고단장 로버츠)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9연대장 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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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늘 이 한반도에
다시 오지 마십시요
주님 당신은
절대 오셔선 안됩니다.
이곳은
아직도 공의와 정의를
이야기해선 안되는 땅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머리에
분단의 철책선을
그들은 주님의 손과 발에 총검을,그들은 주님의
옆구리에
미사일을 쏠 것입니다.
주님 절대로! 절대로!
이 땅에 오셔선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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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정 표
|
16일(일) |
17일(월) |
18일(화)) |
19일(수) |
20일(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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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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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요!! 아침먹고 해남관광을… |
일어나요!! |
일어나요!! |
일어나요!! 밥먹고 짐정리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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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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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답사 ! *큰 넓궤 |
한라산 등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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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대흥사 등등 해남볼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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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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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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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도착!! 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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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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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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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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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먹고.. 주먹밥^^ |
2차 답사! *낙선동 *반못굴 *검흘굴 *아끈다람쉬오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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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보며 밥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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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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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답사 *백조일손지묘 *대정지역 (삼의사비, 민족해방기념비 추사적거지) *원동 *항몽유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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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로 출발!! |
광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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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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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여기저기 둘러보고 배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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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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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점심먹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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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참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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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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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답사! *다랑쉬마을 *다랑쉬 굴 *함덕해수욕장 *북촌초등학교 *애기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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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멀미나는 사람 약먹고.. 잘사람 자고… 신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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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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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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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제주도로 일단은 해남으로 가자!! 남도땅 열심히 보면서.. 시간나면 월출산도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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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시 |
저녁먹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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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 |
귤따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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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 |
숙소로 이동 짐정리 |
저녁먹고…. |
집으로!! 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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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바다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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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시 |
저녁먹고.. |
함께드리는 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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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시 |
제주시내관광… 자유시간. |
4.3항쟁 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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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호스텔 짐풀고 |
무명천할머니 비디오 상영 및 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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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시 |
뒤풀이겸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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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항쟁 사전공부 잠자리로 |
레드헌트 상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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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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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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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인터체인지로 나온다. 북항까지 가지 말기 바란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서 해남이나 대불공단 또는 목포공항으로
이정표를 잡고 온다. 대불공단에 가까이 오면 해남 이정표가 나오며 이때부터는 해남의 이정표를 따라 온다. 쭉 뻗은 금호방조제 중간부터 해남군에
들어서게 된다. 방조제가 끝나는 첫번째 삼거리에서 조심하자. 왼쪽으로 산이, 직진하면 진도가 나온다. 해남으로 오려면 좌회전하여 산이쪽으로 온다.
직진하여 진도쪽으로 가면 한참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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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