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소의 아르테미스 神殿(多産의 女 神)을 헐어 성 소피아성당. 성 요한 성당 建築材로로 使用하였다고 합니다.
東方敎會의 本山이었던 성 소피아聖堂은 現在의 內部는 비잔틴시대의 樣式과 이슬람모스크 樣式이 混合되어 歷史의 소용돌이 속에 健在한 聖堂 建物自體 만으로도 博物館 役割을 充分히 하고 있었다.
다음 大砲의 門이란 뜻의 술탄의 거쳐 톱카프 宮殿을 見學 現存하는 오스만 帝國의 巨大한 宮殿으로 15-19세기 말까지 帝國의 皇帝들이 살았던 곳이다
現在는 博物館으로 使用하고 있었으며 보스포루스 海峽에 位置하고 있었다.
순례의 강행과 시차 관계로 피로가 겹쳐 몹시 지쳤다
巡禮 後 호텔에 投宿했으나 또 쏘주피티로 나를 혹사 시켰다
O 9월10일 (금) 이스탄불 空港으로 出發 카이세리로 向 했다
카이세리 空港에서 버스로 카파도키아로(親切하고 사랑스러운 땅 이란 뜻) 移動
카파도키아의 그리스도교 役事는 1~13世紀까지 繼續되었다
로마 迫害와 7세기 아랍의 侵入, 8세기 前後 동로마 內部 葛藤으로 聖畵의 支持者들이 偶像 崇拜 者로 몰려 迫害를 받자 이곳으로 逃避해 地下
洞窟敎會를 만들고 聖畵를 그렸다
처음 그려진 聖畵 (1~2세기)는 거의 다 毁損되고 現在 남아있는 것은 7~9세기 以後의 것들이다
카파도키아 地域은 使徒行傳 2,9절: 1베드로 1,1절 新約에 두 번 나온다.
AD30년 5월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使徒가 有名한 오순절 說敎를 한곳이다
온 天地가 검은 灰色 빛 巖石바위로 稀貴한 形態의 模樣을 하고 있었으며 그 바위에 洞窟을 뚫어 聖堂을 짓고 修道生活을 하였다고 했다.
카파도키아에서 같은 時期에 3명의 敎父가 彗星처럼 誕生하였다
카이세리 바실리우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 니싸의 그레고리우스 이다
괴뢰메 溪谷은 天然의 自然 彫刻品으로 幻想的 이었다
바위 동굴 속에 프레스코와 聖畵들이 敎會마다 裝飾되어있다
어두운 敎會 천정과 벽에는 예수그리스도의 誕生, 公生活과 奇蹟들, 最後의 晩餐, 유다의 背叛, 十字架의 죽음과 復活 等이 그려져 있다
代表的인 동굴 聖堂은 바실리아 聖堂 (작은 聖堂) 엘말러킬리세 (사과 성당),
크즐라르 마나스트러(修道院)엘 나자르 聖堂이 있다
괴뢰메는 그리스 中部의 修道院 集成 村 메테오라, 아토스와 더불어 가장 인상 깊은 修道院이며 1923년 터키와 그리스가 맺은 條約에 따라 正敎會 修道者들은 모두 그리스로 移住했다
카파도키아에서 테린쿠유로 가는 도중 성모마리아 洞窟 敎會에서 미사 드린 후 긴 다리를 건너 유명하다는 동굴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다음은 데린쿠유 (Derinkuyu) 로 移動,地下 都市를 巡禮하였다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으로 世界 文化 遺産이다
海拔 1300m 의 高原地帶로서 약 3000만 년 전 火山爆發로 鎔巖이 굳어져 생긴 곳에 굴을 파서 지하도시를 만들었다
깊이는 120m 지하 8층 規模로 巨大한 都市를 이루었다
避難民이 늘어날수록 더 큰 空間이 必要한 만큼 옆으로 또는 地下로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形成하게 되었다
땅속 깊이 우물을 파서 地下水를 食水로 使用하고 그 通路는 空氣淨化 機能의 役割을 했다고 한다.
收用 規模는 正確하지 않으나 약 2-3만 명이었으며 카파도키아의 다른 都市들과 마찬가지로 農事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地下都市에는 敎會 學校 食堂 寢室 부엌 倉庫 와인 食用油 저장고 等 共同體 生活에 不便함 없이 多樣한 施設을 갖춘 都市를 形成하고 있었다.
각층은 獨立的으로 區別되며 터널을 通해 다른 地下都市 들과 連結되어 있었으며 外部人 侵入을 막는 役割도 했다
테린큐유를 巡禮한 후 콘야 로 移動 호텔에 投宿했다
O 9월11일 (토)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파묵 칼레. 리오디게이아 巡禮
콘야 聖 바오로 聖堂에서 아침 미사 後 페르게에서 險峻한 안티타우루스 山脈을 넘어 인구 2만5천의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遺蹟이있는 곳으로 移動했다
시리아 셀레우코스 王祖를 創始한 셀레우코스 이름을 따서 안티오키아로 命名했다고 한다.
BC25년 아우구스투스 皇帝는 이곳에 로마군을 駐屯시키고 로마인 居住地로 삼았다 地形이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나 地震으로 廢墟가 되어 흩어진 돌무덤과 雜草들만 茂盛했다
사도바오로는 1차 傳導旅行 때(45-49년경) 페르게에서 險峻한 안티타우루스 山脈을 넘어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이코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에서 傳導 했다 (사도 13,13-52)
都心에는 비잔틴 時代에 세워진 바오로 大聖堂의 礎石이 남아있었다
큰 聖堂을 짓기 전에 작은 聖堂이 있었는데 그 작은 聖堂 바닥에서 이곳 주교 옵티모스 (Optimos 357-384년경 재직) 의 이름을 새긴 모자이크 두 개가 發見되었다
그래서 이 작은 聖堂은 본디 유다교 會堂이었던 곳으로 推定되는 곳이다.
터키에서 유다교 會堂터에 聖堂을 세운 事例는 여기뿐이라고 한다.
사도 바오로가 傳導旅行을 다니면서 거쳐 가신 重要한 자리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라오디게이아로 移動했다
1) 라오디케이아 Laodikeia (현재 이름 Laodikeia 7대 교회중 하나)(묵시3,14-22“너는 미지근하여 덥지도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이곳 敎友들은 物質的으로는 豊饒로웠으나 靈的으로는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라오디케이아는 나지막한 언덕위에 이었는데 섭씨 50도에 가까운 더위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히에라폴리스의 뜨거운 溫泉물이 9Km 떨어진 라오디케이아 까지 흘러오면서 물이 식어 미지근하게 되었다
시리아의 안티오크스 2세(BC 261-252년 재위)가 이 地域의 戰略的 要所 때문에 都市를 創建하고 왕비의 이름을 따 라오디케이아 라고 命名했다
사도 바오로가 3차 傳導旅行 中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케이아 敎會도 세운 것으로 推定된다.
1710년과 1899년 두 번에 걸친 대 地震으로 破壞된 都市遺蹟 끝 부분에 7대敎會 中 하나인 라오디케이아 敎會터에 아직도 그 당시 돌에 새겨진
十字架가 남아 있었다.
아직 遺蹟 大部分이 땅속에 묻혀 있는 것으로 推定한다.
바로 건너편에 하얗게 보이는 목화의성 파묵칼레로 移動
파묵칼레 (목화의 성 이란 뜻이다)
히에라폴리스 遺蹟地를 지나 아름다운 파묵칼레 溫泉에 들어섰다
多量의 탄산칼슘을 含有한 溫泉水가 만들어내는 神秘롭고 아름다운 목화의 성 이었다
우리는 모두 따뜻하게 흐르는 溫泉水에 발을 담그고 참새처럼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며 즐거워했다
天然으로 이루어진 하얀 石灰巖은 마치 氷河의 언덕처럼 보였다
多樣하게 形成된 큰 웅덩이마다 가득 채워진 새파란 溫泉水를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면서 한 폭의 그림처럼 그 神秘에찬 아름다움에 歎聲에 歎聲을 거듭했다
하느님의 傑作品 파묵칼레(목화 성)는 世界文化 遺産으로 登載되어 있다.
溫泉水에 疲勞를 씻어내고 벌판에 세워진 호텔로 移動하였다
단잠으로 또 다른 새 날의 아침을 기대하면서~~~
O 9월12일 (일) 에페소로 移動
2) 피라델피아 Philadelphia (현재이름 Alasehir 7대 교회 중 하나 )사도요한 교회 (묵시3,7-13“너는 힘이 약한데도 내말을 굳게 지켜내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요한 黙示錄 일곱 敎會 가운데서 오직 스미르나교회와 더불어 필라델피아 敎會만은 나무라지 않았다
필라델피아는 BC 159-138년 페르가몬 임금 아탈로스 2세인 필라델피아누스에 의해 都市가 세워졌기에 필라델피아누스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사르디스, 베르가모, 라오디케이아, 히에라폴리스, 사이에 있어 交通의 要衝地로 農業과 가죽製品, 織造 業이 主要 産業이다.
사도요한 敎會는 600년에 세워졌으나 大地震으로 무너져 現在는 세 개의 기둥만 남았다
3) 사르디스 Sardis (현재이름 사르트 Sart 7대 교회 중 하나)
(묵시3,1-6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사르디스는 BC 600-546년 까지 Lydia 王國의 首都였다
城邑은 해발 45m 트몰루스 산의 돌출부 고지위와 고지아래 계곡 두 곳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6세기에 아주 富强한 都市였고 難攻不落의 都市였다
放心에 虛를찔려 BC 546년 페르시아 고레스 왕과 218년 안티오크스 3세의 侵略을 받고 陷落됐다
古代 리디아의 首都로서 巨大한 아르테미스 神殿이 있었다.
2세기 로마의 안토니우스 皇帝 때 完工, 巨大한 規模와 이들의 裝飾, 雄壯하고 華麗한 藝術 作品으로 有名하다
이오니아식 기둥머리는 現存하는 裝飾技法 中 가장 아름답다
이곳은 금이 많이 生産되어 最初로 金花가 만들어 졌다
가장 큰 두 개의 돌기둥 뒤쪽으로 아치형 窓門이 있는 작은 敎會가 있다
異端의 妨害도 없었고 迫害도 誹謗도 받지 않았으며 豊饒로운 物質文化에 빠져 信仰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 라는 責望을 받은 敎會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깨어있어라 悔改하라고 叱責했다
4) 티아티라 Thyatira (현재 이름 아카사르 (Akhisar) 7대 교회중 하나)
묵시2,18-29 “거짓 예언자 이자 벨을 따르지 미라”
BC 3世紀경 알렉산더의 將軍인 셀레우코스(Seleukos)가 이곳을 占領하고 이곳에서 出生한 自身의 딸 이름을 따서 티아티라 (티아의 동네) 라고 부르게 되었다
리디아 王國 때부터 페르가몬, 비잔틴, 사르디스, 스미르나의 교차지이며 商業都市로서 당시 紫色 옷감 貿易 中心 地 役割을 하였다
예로부터 꼭두서니 뿌리에서 抽出한 물감으로 만든 高價의 비단과 紫色옷감 生産地로 有名했던 곳이다
사도바오로가 2차 傳導旅行 中 마케도니아의 필립피(Philippi) 外郭에서 만난 옷감장수 리디아도 이곳 出身의 商人이었다. (사도16,11-15)
사도바오로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入敎시킨 리디아가 이곳 出身이고 옛 祖上의 王國 이름을 가진 女人이었다는 事實이다
또한 物慾 때문에 傳敎한다는 誤解를 받지 않으려고 敎友들로부터 物質的 도움을 拒否했던 바오로 一行이 리디아 집에 머물렀다는 事實이다
廢墟가 된 옛 敎會터의 痕迹을 돌아보는 중 땅에 기어 다니는 거북이를 잡아들고 신기하게 여겼다
그리고 431년 6월22일 에페소 公議 會가 이 敎會에서 열렸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론 시간에 박 준양 敎授님의 講義를 듣던 곳이 바로 여기라니 그 感悔가 새로워졌다
성모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 θεοτόκοϛ(떼오토코스)稱號를 附與하는 問題를 놓고 네스토리우스는 反對하고 치릴로는 積極的으로 主張했다
안티오키아 學派의 影響을 받은 콘스탄티노플 主敎 네스토리우스는 位格 的 一致를 拒否하는 Χριστοτόκοϛ (그리스도토코스)ㅡ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主張하는 반면 알렉산드리아의 主敎 치릴로는 位格 的 一致 πρόσωπον(프로소폰)을 主張하며 神聖과 人性을 불붙은 石炭에比喩, 불과 석탄이 오직 하나를 이루어 分離할 수 없다는 θεοτόκοϛ(떼오토코스)ㅡ하느님의 어머니를 主張하며 激烈한 論爭으로 불붙었다
콘스탄티노플부근 修道院長이며 네스토리우스 主義에 反對者인 에우티케스가 人性이 마치 바다로 떨어지는 하나의 꿀방울이 그 안에 녹아버리듯 位格 的 一致를 主張하는 치릴로를 擁護하고 나섰다
에페소 公議 會의 結果는 θεοτόκοϛㅡ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稱號가 받아드려짐으로써 確定되었다
이 結果로 치릴로는 알렉산드리아 故鄕으로 돌아가 錦衣還鄕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상부 이집트로 追放당해 그곳에서 451년에 生을 磨勘한다.
巡禮 後 점심때가 되어 골목을 두 바퀴 돌며 헤매다가 食堂을 찾았다.
점심 食團도 별로였는데 食堂 周邊을 徘徊하며 큰 소리로 電話하는 터키 男子의 音聲 때문에 더욱 밥맛을 잃었다
安養 다니엘 兄弟님은 食堂 商街에서 45 유로에 산 빨간 가방이 旅行途中 속을 썩여 後聞에 의하면 집에 到着하자마자 死刑에 處했다한다.
점심 食事를 하고 다음 行先地인 성모마리아집을 向하였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리스도인에 대한 迫害가 심해지자 사도 요한은 성모님을 모시고 에페소로 避身하여 앞산 南西쪽 능선아래 집을 지어 성모님을 모셨다고 한다.
성모님 집 뜰에서 野外 미사를 드리는 雰圍氣는 特別한 親近 感을 느꼈다
이슬람 巡禮 客들도 그들 나름대로 聖母님을 尊敬하기 때문에 여기를 찾는 다 했으며 그래서인지 미사 드리는 모습을 유심히 보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 성모마라아의 집이 發見된 경위는 독일 태생 카타리나 修女가 全身 痲痺로 12년 동안 寢臺에 누워있으면서 자주 예수님과 聖母님 發現을 보곤 하였다 했습니다.
첫댓글 아름다운 순례를 하고 오셨네요 여행일지 감사하고요 뵙기를 사모 합니다
성지순례여행기 잘읽었습니다. 해박한 지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부족하지만 칭찬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