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없는 石像
조흥제
은평구로 이사 와서 ‘밥 할머니’ 이야기를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밥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던 차에 교회 선교회 모임에서 그 할머니의 발자취를 답사한다고 하여 동행하였다.
교회 앞에서 15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젊은 여성의 안내로 중형버스에 올랐다. 그녀는 은평문화관광해설사회 회원이라고 하면서 북한산 자락으로 안내했다. 맑은 가을 하늘에 북한산 능선이 선명하게 보이자 젊었을 때 많이 다녔던 코스여서 불현듯 가고 싶었다. 한적한 길 가에서 내리니 중년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은평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신원영)이라고 소개했다.
좌측에 우뚝 솟은 북한산 정상이 보였다(본 이름은 삼각산). 그 봉우리가 백운대(836m)이고 그 옆에 만경대, 우측으로 조금 밑에 둥근 석봉이 노적봉이다. 그 봉우리를 노적봉이라고 한 것은 밥 할머니 때문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까지 진군했다가 명군(明軍)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여 고양군 벽제관에 진을 쳤다. 명군은 승리에 취하여 방심하고 오다 벽제관에서 왜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조명(朝明) 연합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밥 할머니가 기지(機智)로써 구해 주었다. 밥 할머니는 당시 49세로(그때 49세면 할머니라고 불렀던가 보다) 주민들을 동원하여 큰 바위 봉우리를 하루 저녁에 짚으로 두르고 그 밑으로 흐르는 계곡에 횟가루를 뿌려 회색물이 흐르게 했다. 왜군이 빨래하던 밥 할머니에게 왜 개울물이 회색이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짚에 싸인 노적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 위에 쌓아 놓은 볏가리가 군량미’라고 하면서 ‘군사들이 아침을 하느라 쌀을 씻는 물’이라고 했다. 왜군은 그 말에 겁을 먹고 철수했다. 해설사가 그러한 설명을 끝내고 밥 할머니가 횟가루를 뿌린 계곡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계곡 가로 길게 다리가 놓여졌다. 지금은 주택가지만 예전에는 깊은 산중이었을 것 같다. 차를 타고 고양군으로 가다 내린 곳에 머리 없는 석상이 있다. 밥 할머니의 석상인데 일본치하에 있을 때 일본인들이 머리를 잘라서 몸만 남았다고 한다.
인근에 있는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행주산성과 밥 할머니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여기로 데려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행주산성은 서울 쪽에서 보면 조그맣고(128m), 한강 건너에서 보면 깎아지른 절벽이지만 뒤쪽에서 보니 경사가 완만하고 경내가 넓었다. 가운데 능선이 있고 천여 평이 넘을 평지가 양쪽에 있으며 그 가를 능선으로 둘러 싸 흡사 묏산(山)자를 뒤집어 놓은 산세다. 여기가 1593년 3월14일(양력) 아침부터 저녁까지 12시간 동안 조선군 4,000명(승병을 포함하여)과 왜군 3만 명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 때 쌓은 토성(土城)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방어벽이 됐지만 앞이 훤히 트여 문제였다. 그래서 나무로 방어책(防禦柵)을 만들었다. 왜군은 양쪽 가에 능선이 있어 한꺼번에 들어오지 못하고 가운데로 4000명 씩 여덟 차례에 걸쳐 공격해 왔다. 조선군은 30여 대의 화차(火車)에다 신기전(화약을 매달은 화살)을 장착하고 한꺼번에 쏴서 떨어지는 곳에서 터지게 했다. 거기에 철편(鐵片)을 넣었으니 요즘말로 하면 폭탄이 터져 파편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길이가 짧은 화살을 큰 통에 넣고 쏘아 떨어지는 곳에서 터져 사방으로 날라 가게 하여 왜군의 피해가 컸다. 왜군이 목책에 불을 질러 태우려 하자 물을 뿌려서 껐다. 거기서 백병전이 벌어졌는데 승병(僧兵)들이 앞장섰다. 승병은 가족이 없으니 결사대와 같았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싸운 계층은 지배 계급인 양반이 아니라 승병과 노비(奴婢)들이었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때 조선군 진영에는 군사들 뿐 아니라 다수의 부녀자도 있었다. 그녀들이 군인들에게 밥도 해 주고, 우물에서 물을 날라다 주어 불을 끄게 했다. 화살이 떨어지자 돌을 앞치마에 싸서 군사들에게 갖다 주어 그 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 한강을 통하여 배가 들어 왔다. 강화군수가 화살과 군량미를 보낸 조운선(漕運船)이었다. 그러자 왜군은 조선군 원군이 오는 줄 알고 황급히 철군하였다.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에서 전문가의 해설을 들으니 눈으로 안내문을 읽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행주산성은 당시 이름이 덕양산이었다. 그 고장의 이름을 ‘고양’이라고 지은 것은 관내에 있는 고봉산(193 ․ 심학산)과 덕양산, 두 산의 산명에서 따 왔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중요한 인물은 권율(權慄 ․ 1537~1599)장군과 밥 할머니였다. 권율은 무신(武臣)이 아니라 문신(文臣)이었다. 젊었을 때 아버지가 영의정 직에 있어서 의식(衣食) 걱정이 없어서였던지 한량들과 어울려 놀러만 다녔다. 권율의 사위가 꾀쟁이 이항복(李恒福)이었다. 장인이 발을 안 씻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버선 벗기기 게임을 하였다. 장인이 버선을 안 벗으려 하자 사위가 달려들어 벗기니 까마귀 같이 새까매서 망신을 주었다. 그렇게 게으른 아들에게 아버지는 보다 못해 “네가 공부를 안 하면 부자(父子)의 인연을 끊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권율은 41세에 두문불출하고 공부에 전념하여 5년 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전라도 광주 목사로 부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은 군사와 의병을 이끌고 한양을 지키러 오다 오산 근방에서 왜군과 한 차례 싸우고 덕양산으로 와서 진을 쳤다. 그 때 권율장군을 도와 준 사람이 밥 할머니였다. 근방에 있던 많은 부녀자를 행주산성으로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이 따랐을까?
밥 할머니는 지금의 은평구에 살던 오(吳)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집은 땅이 많은 부자였다. 밥 할머니는 처녀 때부터 손이 커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해서 공짜로 주었다. 결혼도 부자 집인 문(文)씨 네 총각과 하였다. 결혼하고도 새색시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밥을 해 주어 인심을 얻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밥 할머니가 노적봉 큰 봉우리에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짚을 두른 것은 평소에 인심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행주대첩 후 조정에서는 권율장군을 도원수(都元帥)에 임명하고, 밥 할머니에게는 정경부인 작위를 내렸다. 그뿐 아니라 노적봉이 잘 보이는 곳에 밥할머니의 석상을 세웠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은 밥할머니가 밉다고 석상의 머리 부분을 잘라 몸뚱이만 남았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참으로 소중한 나라다. 유사 이래 외국의 침입을 900번 이상 받고서도 꿋꿋하게 지켜 왔으니 조상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제 우리 세대는 직장 일선에서 물러나서 할 일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 이 나라를 지켜 주시고 후손들이 잘 살게 해 주십사 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