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門江
토문강은
백두산 정계비에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의 물줄기를 따라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으로 한다고 정계비에 새겨져 있다.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가 합의 하여 세우고 지금까지 논란이 일어나는것은
19세기말 조선과 청나라가 토문강을 양국이 서로 다르게 주장 하면서 문제의 소지가 발생 되었다.
조선은 토문강이 북간도를 가로 지러는 송화강의 상류다는 주장과 청나라는 두만강이다는 주장이
서로 엇갈리면서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져 온것이다.
조선의 주장대로 토문강이 송화강의 줄기라면 북간도는 우리땅이지만 청나라의 주장이 맞다면 지금 한반도의
국경 두만강으로 고착 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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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들을 검색하다 서울대학교 역사학자 송기호 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을 접하게 된다..
"송교수는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1885년 조선과 청의 국경 정계비에 양국 국경으로 표기된 토문강이 송화강이라고 주장했지만 조사 책임자였던
이중하가 토문강이 두만강임을 말해주는 흔적을 발견해 고종에게 보고서를 보냈고, 최근 조선족 학자의
조사에서도 이런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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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가 우리땅이라는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면
중국땅이다는 근거라도 같이 내나야 될거 아닌가.
자국의 국경과 권리등을 3국이 강제로 대신 체결한 조약은 일본이 청나라와 체결한 조선의 국경조약
간도협약이 세계서 유일하다.
간도 협약 전문이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다.
① 조·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圖們江:토문강)으로서 경계를 이루되, 일본 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조선인의 잡거(雜居)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조선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나라 백성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나라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길림[吉林]·장춘[長春] 철도를 연길[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조선의 회령(會寧) 까지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한국 최고의 지성이다는 서울대 역사학 교수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송기호가 언급한
이중하는 누구인가
1885년(고종 22년) 감계담판과 1887년(고종 24년) 감계담판을 통해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협상을 벌였다.
당시 청나라는 1882년 임오군란을 기회로 자신들의 군대를 한양 도성에 주둔시키면서 강압적으로 두만강은
토문강이다.억지를 부리면서 국경을 확정 지으려 했다.
고종의 명을 받은 이중하는 조선의 감계사로 나갔다.
이중하는 청나라 감계사를 만나 이들과 백두산 정계비를 중심으로 측량과 물줄기를 따라 한달여 조사를 마치나,
백두산 정계비 인근에는 압록강과 토문강 지류의 물줄기가 위치해 있었고 정계비와 토문강 지류 사이에는 문헌에
나타난대로 나무, 돌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이 답사로 청나라 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청나라 감계사들은 이중하를 위협 하면서 또다시 두만강이 토문강이다.
자신들이 의도하는 국경선을 강요했다.
이때 이중하는 청나라 대표들에게 ‘내 목을 자를지언정 국경은 줄일수 없다"는 명언을 남기고
송화강은 토문강의 물줄기가 맞다며 끝까지 주장 하면서 결국 두번의 협상은 결렬되고 간도협약 전까지
조선은 여전히 간도의 영유권을 유지 할수가 있었다.당시 이중하는 협상 내용을 상세하게 일기로 남겼고 지금도 간도
영유권 문제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고 그일기는 지금 이중하의 감계전말.감계 일기로.규장각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이중하 [李重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 역사는 송기호가 의인일까?
이중하가 다시 의인일까?
조선은 당시 열강들의 먹이감으로 쟁탈전이 전개되자 이중하는 한치의 땅도 이들에게 넘길수 없었고.
또 북간도 지역 조선 백성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해 이중하는 목을 걸었다.
이중하가 죽고 그를 기리는 송덕비만 현재까지 남북에 13개나 발견 되었다.
대하소설 토지 작가 박경리는 일간신문 칼럼에서 '이미 조선의 지배권 밖으로 떠난 선구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하여
목을 내걸고 항쟁한' 이중하를 조선의 마지막 신하로서 '의인'이라 평했다.
백두산 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은 정계비의 문헌대로 장군봉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4km 내린 마천령 산줄기
능선에서 물은 동서로 나뉘어진다.토문강은 정계비에 새긴 글대로 여기서 발원이 되지만 하나의 물줄기가 두개강의
발원지는 될수가 없다.두만강의 발원지는 아니다는것이다.
동쪽 산허리 아래쪽 물줄기는 무산이나 회령 더멀리 흘러서 두만강과 합류 할수는 있지만 발원지는 아니다.
현지를 충분히 답사 하지 않고 추정만 하기에는 백두산을 이해 하기에는 너무 큰산이다.
분명한것은 정계비 서쪽 물줄기는 압록강을 만들었고 동쪽의 물줄기는 토문강을 만들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중요시 해야 한다..
최근 조선족 학자의 조사에서도 토문강은 두만강이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 됐다는 언급에도 한마디 보탠다..
학자는 연구를 통해 자신의 논문으로 답을 내나야지 조선족이 누구냐 1992년 한중 수교가 열리면서 우리는 반세기가
지나 이들을 만났으나 조선의 선구자 1세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난뒤였고 남은 2~3세 이들은 어느새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 있었고 이들의 정신 세계는 지금도 중국이다는 펙트다.
지금도 한,중 축구 경기가 열리면 조선족 동포들은 중국을 응원 한다는 사실 기억 해야 한다.
이들의 끊질긴 왜곡부분은 또 어떻게 설명을 하나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숙종 38)당시 청나라 왕실의 청사고(淸史稿)등에서 토문강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1880년경 함경도 백성들의 월강 사건등 국경논쟁이 다시 잃어날 무렵 청나라 지리지등에서
土門江이 도문강으로 바꿔져 등장하기 시작 한다.
이 같은 지명 조작은 청나라가 망하고 모택동 공산당 혼란기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만주사변 당시 이들은
백두산 정계비를 철거한뒤 두만강이 중국이 말하는 도문강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1933년 연길현 산하의 두만강
강변촌 후이무둥 일개 강촌 마을을 도문으로 마을 명칭을 고친데 이어 다음해 도문현으로 승격시켰다.
이때부터 중국의 모든 지도에는 도문이 등장하고 두만강은 도문강으로 바꿔진다.
이글을 써면서 도문의 현지 지인에게 전화를 건다.
현지인도 60년대 소학교때부터 도문강으로 교과서에서 배웠다고 한다.그러나 조선족 사회서는
현재 도문강으로 부르는사람은 없다며 한족 역시 두만강으로 부른다고 한다,
두만강 주변 인구 비율이 조선족 사회가 우위를 차지 하고 또 우리한국 여행객들의 보탬도 있었을것이다면서
밀려오는 한족들과 갈수록 감소하는 조선족 사회가 앞으로 걱정이라고 한다.
소리없이 밀려 오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이들의 이주 정책과 만만디가 무섭다는 애기다.
송기호 교수가 국정 교과서 집필자는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곳은 도문시에 두만강 하류를따라 60km 내려온 나진 선봉이나 아오지 탄광을 가는 두만강 권하교 다리 좌측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2012년까지만도 없었다. 2015년 8월에 갔을때 표지석이 보인다.
백두산 정계비에 기록된 土門江과 도문강은 한자어 자체가 다르다.
이들은 동북공정의 완성편을 그리고 싶었지만 스스로가 모순을 저지러면서 다급 하다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급하면 체하는법이다.
중국은 5.000년내내 분열의 역사를 갖고 있다.
역사는 준비된자를 기다리고 있다
사대주의에 절은 학자들을 정리 하지 않고는 다음 세대도 늘 반도에만 머문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5E5143559495A510)
팔공산 자락에서
2016. 7월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