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A 원나라 元朝 1271년-1368 몽골 징기스칸
출처:바이두백과 소스:이페어케이
원나라 (1271년-1368년[1]), 중국 역사상 처음몽골민족이 세운 대일통왕조는 통치자가 몽골 보르테를 위해 근씨만을 거느렸다.고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정하고 5세 십일제(十一帝)를 전하며 1206년 칭기즈칸(成吉思 年)이 몽골정권을 수립한 지 162년, 홀필열정국호원( 忽必烈定國號元)으로부터 98년이 흘렀다. [2]원나라가 중원을 탈당한 뒤 북한원정권은 1402년까지 계속되었다.
1206년 칭기즈칸은 몽골 각부를 통일하여 대몽골국을 세웠다.전후로 서쪽 요·서쪽을 공략하다.하, 화라자모, 금조 등의 정권.몽고칸이 세상을 떠난 뒤 아리아불형과 홀비열의 땀자랑으로 몽골은 분열했다.1260년 홀필열이 즉위하여 황제로 칭하고, 건원은 중통(中統)으로 칭해졌다.1271년 홀필열은 역경(易經)의 '대야건원(大野建元)'의 뜻을 따 '대원(大元)'으로 국호를 바꾸었고, 이듬해에는 대도를 정하였다.1279년 남송 망명정권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당말 이래 오랜 혼란을 종식시켰다. 이후 지속적으로 [2], 원나라의 일본 공격 확장, 대외·베트남·미얀마 등의 반응을 보였으나 실패해 자바에 실패했다.원나라 중기의 황위 계승은 문란하고 쿠데타가 빈번했으며, 정치는 늘 제 궤도에 오르지 못했고, 한화는 지체되어 발전이 없었다.후반기에는 정치가 부패하고 권신이 정치에 간섭하였으며, 민족 갈등과 계급 갈등이 심화되어 원나라 말기에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3】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하자 북벌은 원정을 몰아내고 대도를 공략했다.이후 원정은 사막에서 물러나 사칭 북원으로 불렸다.1402년 원신 귀리적이 정권을 찬탈하여 타타르를 세우자, 북원은 멸망하였다.
원나라 시기에 통일된 다민족 국가는 더욱 공고히 하여 강역이 역대를 초월하였다.원나라 폐지상서성화문하성은 중서성과 추밀원, 어사대가 정·군·감찰의 3권을 유지하고, 지방은 행성제도를 시행하여 중국행성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원나라 상품경제와 해외무역은 비교적 번영했다.원나라 때 각국과 외교 왕래가 빈번하여, 각지마다파견 사절·선교사·상여 등이 줄을 이었다.문화적 측면에서는 그동안 원곡 같은 문화형식이 생겨나 세속화에 가깝다. [4]
중국어명 원나라 외국어명 Yuan dynasty 별명 대원대몽골국, 대나라 1271년 12월 18일부터 1368년 9월 14일까지 도 성대도(현 베이징) 제 왕홀필열, 철무이, 해산 등 언어의 몽골어 (팔사바),
카테고리
1 국호
2 역사
▪ 몽골 통일
▪ 확장 분열
▪ 대원수립
▪ 천하를 통일하다
▪ 4방향 원정
▪ 제통전계
▪ 한화운동
▪ 내란이 빈번하다
▪ 봉기 풍운
▪ 북원 흥망
3강역
▪ 영토 범위
▪ 행정 구역
▪ 번속국
4 정치
▪ 행정기구
▪ 감사기구
▪ 지방제도
▪ 법제도
▪ 등급제도
5 군사
▪ 군사기관
▪ 군종설치
▪ 방위시스템
▪ 주요 전쟁
6 경제
▪ 농업
▪ 비즈니스
▪ 화폐
▪ 인구
▪ 과세
7 문화
▪ 사상
▪ 문학
▪ 희곡
▪ 종교
▪ 사학
▪ 언어
▪ 예술
8 테크놀로지
▪ 천문역법
▪ 지리
▪ 농학
▪ 수학
▪ 수리
▪ 건축
▪ 기계
▪ 의학
9 민족
▪ 한족
▪ 색목인
▪ 서남제족
▪ 토번
10 사회
▪ 제사
▪ 결혼
▪ 장례
11. 외교
12 제왕 가계
국호
원나라의 전신은 칭기즈칸이 세운 대몽골국이다. 【5】남송 이심전 《건염 이래 여야잡기》 을집 권 19년 : "몽골은 금나라를 침략하였는데, 이는 스스로 큰 몽골이라 불렀다.원초 한문사과에는 '대조몽골국' '몽골대조국(또는 '대조국') 등의 명칭이 있는데, 같은 국호의 다른 한역이다. [6]
원세조(元世祖)는 홀필렬(忽必烈)이 '여도( 。圖)는 넓고, 유고( 。古)에는 없다'는 본조(本朝)의 뜻에 따라 한당(漢唐)처럼 처음 일어난 곳이나 시봉지(時封之)의 고을 이름으로도 크게 내세울 수 없어 1271년 '건국호조(建國號)'를 선포하고 '역경(易經)'의 '대야건원(大哉元)'의 뜻을 따서 '대원(大元)'을 국호(國號)'로 삼았다. [2] 원나라가 공식 편찬한 《경세대전》은 "원야자, 대야.그것을 이루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지원(之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크다"고 했다. [7]
원나라 창건 이후 한문문서에서는 몽골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으나 폐지되지는 않았으며, 몽문서에서도 이 호를 사용하였는데, 통상 한명 국호와 함께 로마자를 Dai'on yeke Monghol ulus(대원대몽골국), 또는 Dai'on Kemeku Yeke Megong으로 표기하였다. 【8】 원정은 1368년 사막에서 물러나면서 원정의 잔여세력을 북원으로 불렀다. [2]
역사
몽골 통일
몽골인의 직계 조상은 선비 거란인과 같은 어족에 속하는 실위 각 부족이다.수·당 때 그들은 거란의 북쪽, 타타르의 서쪽, 돌궐의 동쪽(조아강의 북쪽, 동기연강, 서지의 후룬베이)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였다.돌궐의 지배를 받아 돌궐 사람들은 흔히 타타르라고 부른다.당나라의 정조는 왕년에 돌궐의 기세가 쇠퇴하자, 후실 위인들은 당[9]에 굴복하였다.돌궐 후 회골 정권 붕괴에 이어 실위타담 사람들이 대거 사막 남북으로 진입했다.
원태조 징기스칸
약 9~11세기, 그 중 하나인 몽고우실웨가 망건강 하류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와 사이타마강, 크루런강, 토라강 등 3강의 상원 일대에 이르러 니루온몽골, 화디아레근몽골, 두 갈래로 나뉘어 합목흑몽고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크고 작은 씨족, 부족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합목 흑몽골 외에도 몽고지에서는 멸구걸, 타타르, 극렬, 내만, 사이타마 등이 활동하였다.이 모든 씨족 부족들은 앞뒤로 요와 김의 통치를 받았다[5].
몽골 부족의 경제 발전은 매우 불균형으로 12세기에 이르러 대부분 수렵 유목에 종사하고 소수 부족만이 농업을 경영하였다.그러나 이때 중원과의 무역을 통해 철기를 대량으로 얻어내 생산을 촉진하고 계급의 분화를 더욱 뚜렷하게 했다.더 많은 부를 빼앗기 위해 각 부족의 노예주들은 서로 전쟁을 벌인다. [10]
몽골 고원 지역의 많은 몽골 부족들은 원래 금나라의 신하들이다.금이 쇠락하면서 몽골 부족도 커지기 시작했고 김 정권의 통치에서 벗어나고 있다.김태화 4년(1204년) 몽골 제부의 수장인 철목진은 전쟁으로 몽골 고원의 몽골 부족들을 통일했다.김태화 6년(1206년)에 철목진은 각 부족에 의해 칭기즈칸으로 추대되어, 무북·몽골제국 수립과 함께 대몽골국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정권을 수립하였다.이로써 몽골 초원은 장기 혼전을 마감했다[5]. [11]
확장 분열
주조: 발도서정, 욱렬대서정, 몽금전쟁, 낚시성 전투
대몽골국가가 성립된 후, 끊임없이 대외 전쟁을 일으켜 그 영역을 확장하다.1218년 몽골은 서요를 멸망시켰다.1219년 칭기즈칸은 서쪽에서 중앙아시아의 꽃라즈모형을 정벌하였고, [12] 동유럽의 볼가강 유역까지 진격하여 1225년에 동쪽으로 돌아왔다.1227년 멸서하 칭기즈칸도 서하 원정에서 사망했다. 【13】 칭기즈칸이 세상을 떠난 후, 셋째 아들 둥지인 광대가 즉위하였다.1234년 몽골 연합 남송은 금을 완전히 소멸시켰다.1241년 서정의 몽골군이 동유럽 오지에 바짝 다가서기도 했다.1246년 항복토번.1253년, 홀필열은 서남쪽으로 원정하여 대리를 멸망시켰다.
합천낚시성터
합천낚시성터
몽골군의 대외전쟁은 반란을 감행한 지역이 성을 무너뜨린 뒤 인구가 대량 학살되고 노예화된다.수많은 민족이 잔혹하고 불공정한 민족적 압박을 받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인구와 재산은 전화와 이어진 역병과 기근,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었으며, 전화 도탄지역에도 드물게 암흑기였다. [14-15]
몽골 칸의 다한몽고는 1259년 쓰촨(四川)성 허저우(合州)를 공격하다 52세의 나이로 폭사했다.그러자 알리부아는 하라와 림에서 '홀리르대' 대회를 열려고 땀을 흘렸다.동시에 홀필열은 남송과 의화하여 개평부로 돌아갔다.
1260년 음력 3월, 홀필열은 한인의 지주 계급과 일부 몽골 종왕의 지지로 즉위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4월에는 중서성을 설립하여 국가 정무를 총괄하였다. [16] 5월에는 홀필열이 《즉위조》 법령을 반포하고 원나라 중통을 세웠다. [17] 아리부형은 땀이라고도 불리며 홀비열과 4년 동안 땀의 위패(제위)를 싸웠다. [5] [18]
1264년 알리불고가 패전하자, 홀비열은 몽골 칸의 최고 통치권을 획득하였다. 홀비열이 행한 '행한법(行漢法)' 주장은 몽골 전통에 어긋나 많은 몽골 귀족들의 불만을 사고, 홀비열 칸국 귀환을 거부함으로써 다른 몇몇 몽골 칸 나라들이 줄줄이 적대하게 만들었다.이 내전으로 4대 칸국은 차례로 독립했다가 원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했다. [5]
건립 대원
원세조
원세조
1271년, 홀필열은 《건국호조》를 공포하여 《역경》의 '대야건원(大野建元)'의 뜻을 따서[19] 정식으로 건국호 대원 [20]을 선포하였다.1년 후 유병충의 계획 아래 원제국은 김국중원의 대부분에 도읍을 지었다.북방 정세가 안정되자, 忽필열은 남송강장 류팅(劉 。)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양(楊陽)을 먼저 뽑고, 부한(浮漢)을 창장으로 하여 남송을 진취시키기로 결정하였다.1268년에는 아술(亞術)·유(劉)의 사단에 명해 한수를 사이에 두고 양·번중진( 。重鎭)을 포위했고, 양판군민은 6년간 고성을 지키지 않았다.1272년 초 원군이 번성을 함락하자 여문환 양양수수가 출하했다. [21]
이듬해 6월, 홀연히 백안독 제군에게 명령하여 두 길로 나누어 대거 남진하였다.좌군은 합답절도로 유정을 공격수로 하여 화이시가 출사하였다.백안은 본인과 아술이 우군의 주력을 이끌고, 9월에 양양에서 출발하여 한수를 따라 창장에 들어가면서, 동문병에게 회서 정양에서 남으로 내려와 안경을 하라고 명하여 호응하는 줄 알았다.12월에 원수군이 장강에 진입하여, 적송강의 요새를 방어하였다.송한악주사가 하귀둔을 통솔하고, 한양과 악주 송군이 항복하였다.백안은 아리하그에 병력을 배치하고 형호를 경유하여 수륙의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며 여문환을 공격수로 삼았다.송나라 연강의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여씨의 옛 부서로서, 모두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1274년 2월, 가사도는 제도로부터 정병을 감독받아 원군을 막아냈다.이때도 그는 화폐를 받들어 의화하려다가 백안이 거절하자 지주 하류 딩자저우(丁家洲)에서 가까스로 원군과 싸웠다.송군의 내부 불화로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다.그해 가을, 백안은 건강(장쑤성 난징), 진강 일선에서 삼도추송린안(저장성 항저우)으로 분병했다.1276년 정월에 송유제(宋有帝) 조(趙)가 항원을 올렸다. [21]
이후 남송 대신 문천상은 장세걸, 육수부 등과 동남해안에서 계속 항거하며 익왕 조하를 황제로 옹립했다.조하사 후 위왕 조병(趙昺)을 옹립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1278년 문천상은 패전하여 포로가 되어 3년 넘게 갇혀 있다가 원나라의 수안을 거절하고 의연하게 죽었다.
천하를 통일하다
1279년 김조강장 장홍범이 원군을 지휘하여 애산해전에서 남송의 마지막 저항세력을 소탕하자, 육수부는 여덟 살 난 어린 황제 조병부를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순국하였고 남송은 멸망하였다. [5] 원나라의 통일, 당말 번진 할거 이래 중국의 남북 대치 종식, 각 민족 정권의 장기병존하는 분열과 전란국면은 다민족 통일국가의 공고함과 발전을 추진하였다. [21]
애산유적지
애산유적지
몽골이 남송을 멸망시키자 지배층에서는 허형을 비롯한 유신파와 아합마를 비롯한 이재파 관리들의 다툼이 벌어졌다.몽골은 많은 재산과 보상으로 각 왕에게 상을 주고, 게다가 지출도 많아 재정도 날로 빠듯해진다.유신파는 원나라가 경비를 절감하고 세수를 감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대로 색안인 위주재테크파 관리들 생각남인들은 막대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조정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수해야 한다.이에 따라 북·중 간에는 이 문제가 그치지 않고 있다.
쿠빌라이는 색목 관리인 아합마를 신임하여 상서성을 설립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였다.대신 유신은 한화를 더 받은 태자 진금을 주축으로 한파를 형성해 아합마에 맞섰다.결국 알합마는 총에 찔려 죽었고, 그 뒤 진금도 병에 걸려 죽었다.홀필열은 여전히 잇따라 한인 노세영과 외아들을 임용하였다이재파 관리를 등용하다.조정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다 [5] [22].
사향원정
송 후 원나라의 멸망에 대해 쿠빌라이의 여러 나라와 인접해 일련의 전쟁을 일으키고, 만약 자바와 아난이 일본 등 점성 있다.1274년, 일본을 강타한 허리케인원을 군 성폭행 “분에이의 역” 고 했지만, 일본 군대도 공을 세우지 못하고 원.또 1281년, 원나라의 일본 두점을 공격, 어택 온 흔도, 몽골군.율한군·고려군 종고리둥도는 쓰시마해협에 대해, 판원호는 신부군(元政府가 조직한 남송군대)을 이끌고 징위안(慶元, 저장성 닝보)에서 북쪽으로 진격해, 역사적으로 '홍안(弘安)의 전투'로 불렸다.호크가 일본 섬으로 군을 만나 나쁜 허리케인이 많은 전함들, 또 익사한 병사들을 일본군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불시에 습격하다 하지만 두 차례 전쟁 [11]이 흔들렸다. 일본의 통치를 세우
원-일 전쟁
원-일 전쟁
1282년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忽必烈)는 광저우(廣州)에서 모두 바다를 건너 성(城, 현재 베트남 남부)을 공략하며 연전(連戰)을 거듭했다.1284년부터 1285년까지 진남왕 보르베르는 반 탈환( 忽欢, 忽必, 忽必, 忽)을 파병하여 안남(南南, 베트남 북부)을 침공하였고, 모두 점성에서 북상하여 전쟁을 돕고 남북을 협공하였다.안남왕이 도성에서 철수하니, 그 주님힘써 산림을 은닉하여, 피하다.원군과 결전하여 원군이 지치면 또 나가서 교란한다.5월에 탈환은 여름비가 그치지 않고 역병이 유행하자 퇴사했다.모두 전사를 사주하다.
원군은 1283년과 1285년 두 차례 윈난(雲南)성에서 미얀마 포간 왕조를 침공했고, 1287년 포간으로 진군해 강제로 세공방물을 만들어 되돌려 보냈다.같은 해에 원나라가 다시 안남을 침공하여 이듬해에 군량을 다하여 노북으로 환원하였다.1292년 12월, 사필·역흑미실·고흥이 천주에서 시작되었다.자바(인도네시아) 침공자바 섬). 자바 통치자가 항원하고, 원군을 청해 적국갈랑을 토벌하고, 갈랑왕을 무찌른 후 군사를 복거하여 거원하자, 원군은 군대를 몽땅 퇴사시켰다[5].
남송을 공격한 이래로, 해마다 전쟁과 함께 궁중 곡록, 종번 세사를 하사받는데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다.쿠빌라이는 부족한 국용을 해결하는데 급급해 '재테크'로 인기를 끌었던 아합마·노세영·상고 등의 신임이 두터워졌다.1270년부터 1272년까지,1287년부터 1까지291년 두 차례에 걸쳐 상서성을 설립해 재산을 정리했다.상서성의 재테크 정책은 주로 세수증대, 흥철야금, 주농장기매각, 괄정(사·사찰에 빼앗긴 남송공전의 추가징수), 정산(각지에서 매년 체납된 돈과 식량을 추징), 화폐법 변경 등으로 국가 수입이 눈에 띄게 늘었다.그러나 이치가 부패하여, 집중하여 수탈하고, 횡포에 빠져, 사회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 되었다.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 동당시, 대외 전쟁을 위해, 동정해선을 만들어, 연해와 강남 지역의 부역 징발은 날로 심해졌다.국민들은 무거운 봉건 착취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잇달아 봉기하였다.
1283년 강남에서는 민족별 봉기가 200여건, 1289년에는 400여건으로 늘어났다.이 전후로 광저우(廣州)에서 오난시(五南喜)·리더(麗德)·푸젠(福建)성 황화(黃華)·중밍량(宗明亮) 등이 이끄는 몇 차례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5] [23-24]
제통전계
메조: 쿠테타
원성종
원성종
1294년 홀필열이 세상을 떠났다.태자가 진금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제위는 각 방면에서 쟁탈하였다.결국 군신은 진금의 장남인 진나라 진나라와 삼남인 철무이 사이에서 선택하고, 철목이는 원나라 세조로부터 황태자보와 진수화림(鎭守和林)을 하사받았다.고진왕이 감마랏빛으로 물러나자, 철목이는 즉위하였는데, 원성종이었다.。
원 성종은 즉위 후 대외전쟁을 멈추고 국내 군정을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제왕세력을 제한하고, 일부 조세를 감면하며, 율령을 신설하는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사회갈등은 일단 완화되었다.동시에, 발병하여 서북해도·독와 등을 격파하고, 도와·차팔아 귀속시켜, 서북의 장기간의 난국을 다소 변화시켰다.구경하다.
원성종은 재위 기간 동안 거의 수성국면을 유지하였으나, 하사품을 남발하고, 수입과 지출이 부족하여 국고가 부족하여 화폐가 절하되었다.일찍이 군대를 보내서 팔백 명의 며느리(현재 태국 서북부)를 징집하여 운귀 지역을 난장판으로 일으킨 적이 있다.만년에 병환하여 황후인 브룩함과 색목대신에게 위임하여 조정은 날로 쇠퇴하였다.원성종 집권 말기에도 성공과오랫동안 적대적이던 은둔형 부랑자.칸의 화는 서북의 난국을 종식시켰다[5].
1307년 원성종이 세상을 뜨자 전 태자 진금의 손자인 해산이 원상도(元上都)에 있던 것은 원무종(元武宗)이었다.아우인 애육리발력팔달을 황태자로 세우고 형제의 종제를 약속하였으며, 또 애육발력팔달이 죽으면 무종의 아들과 세겜[25]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하였다.원무종 재정위기 모면 위해비행기, 재설치를 명령하다상서성이 큰 은화를 찍어 보내자 달러화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1309년 원정이 차합대 칸국( 汗合臺 汗國)과 보루대 칸국( 。阔臺 汗國)을 양분하면서 보루대 칸국은 멸망하였다.
중국 문화 운동.
1311년 원나라 인종이 즐겨 육리발력팔달(育麗發力八達)을 즉위하자 생모인 흥성황태후의 중신인 철목(鐵木)이 우승(右勝像)을 지냈다.원인종은 원무종의 경제조치를 취소하고 아들인 석덕팔라(石德八剌)를 황태자로 세워 선립과 세조계위를 약속하고 석덕팔라(石德八剌) 등을 전위하는 약속을 어겼다.원 무종의 맏아들 화세자는 주나라 왕이고, 장자는 주나라 왕이다.화세조는 윈난에서 이사하였으나 화세라 도중에 기병하여 서북으로 유목하였다. 원인종은 또 세라와의 동생인 투테무어를 남방으로 추방하였다.[5]1314년 한화를 제창한 원인종은 과거사를 부활시켜 연우의 복과(復科)로 불렸다.
원나라 때 건축된 공자묘
원나라 때 건축된 공자묘
1320년 원 인종이 사망하자 석덕팔래는 원 영종이 되었다.원영종은 부친 원인종의 이유치국 정책을 이어받아 중앙집권과 관료체제를 강화하였고, 1323년 원제국의 공식 법전인 대원통제(大元通制) 2539조를 편성·반포하도록 명령했다.그는 또 조정에서 제거할 것을 명령했다.철석같은 세력,하지만 청소가 확대되고 조정의 몽골 보수세력이 원영종의 유치국 시정에 불만을 품으면서 철목의자철(義子鐵 。)은 1323년 여름 피서지로 그득한 틈을 타 상도 이남 15㎞의 남파(南波)라는 곳에서 원영종(元英宗)과 재상(在相)을 찔러 죽여 남파(南波)의 변(變)로 불렸다.
원영종이 암살당하자 진수와 임을 지키던 진나라 왕 감마랏의 장남이자 진금의 장손인 철목이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원영종을 찌르는 반신을 죽이고 즉위한 것은 태정제(泰定帝)였다.태정제가 즉위한 후 원영종으로부터 해남도로 추방된 도테무르를 회왕으로 봉하고 건강을 지켰다. [5]
내란이 빈번히 발생하다.
1328년 태정제가 세상을 떠났다.정승이 라라사를 쓰러뜨린 것은 상도에서 태정제의 아들 아속길팔을 임금으로 받들었으니 이는 천순제를 위함이다.한편, 원무종의 구부 중신인 연철목아와 허난성 정승 백안은 각각 비밀리에 무북과 강남에 사신을 보내면서 주왕과 세혁을 맞이하고 그의 동생인 투탕무어를 맞이하였다.결국 투타목어대도(大都)에 이르러 1328년 독립한 원문종(元文宗)이다.화세흔이 화림에 도착하자 즉위를 선언한 것은 원명종이었다.원문종은 겉으로는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형님을 황제로 받들어 상도의 남쪽에서 만나 원문종은 원명종을 독살하고 황후를 황제로 불렀다. [25]
원 문종
원 문종
원문종이 중조된 후, 문치를 크게 발전시켰다.원문종은 1329년 2월 규장각 학사원을 설립하고 경사를 강의하는 책을 펴내며 역대 치란을 고찰했다.또 모든 훈귀대신의 자손을 규장각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규장각 아래 예문감을 두었는데, 유가의 전적을 몽골어로 번역하고교정하다. 같은 해에 편집을 명령하다《원경세대전》을 편찬하고 2년 후에 완성하여, 원나라를 위해 중요한 전장 제도를 기술한 대작이다.그러나 원문종(元文宗) 때 승상(承相) 연탁목(延 燕木)이 자신의 공로를 믿고 조정을 농락하면서 대원조정은 더욱 부패하였다[5].[5]했다.
원문종이 1332년 세상을 떠난 뒤 형(원명종)을 독살한 죄를 씻기 위해 일곱 살짜리 서라구투의 차남 의린질반과 함께 황제로 영종(元寧宗)을 추모했다.그러나 원 영종은 재위 두 달도 안 돼 세상을 떠났고 얼마 후 연탁목아도 죽었다.원 명종의 장남 타환독목자야독한 황후부답실리가 정강(광서 계림)에서 왕으로 소환된 것은 원혜종이었다. [26]
원혜종은 재위 초기에는 우승상이 백안(白 。)하는 세력이 강해 한때 원혜종을 안중에도 두지 않을 정도로 국정을 장악했다.시간이 지날수록 백안(白 。)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원혜종은 백안 조카의 탈피를 도운 끝에 백안을 파면하고 정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26]
원혜종은 1343년 『요사』 『금사』 『송사』의 3사를 편찬하도록 명하여 1345년에 완성하였다.
봉기 풍운
주사조: 원말농민봉기, 홍건군봉기, 홍건군
원순제
원순제
원나라 때 몽골 통치자는 더욱 강화되어 한인에게 각종 명목상의 조세를 부과하였는데, 민족적 억압이 심하여 한인들은 더욱 자주 약탈당하였다.각 민족을 서로 다른 등급으로 나누어, 한족 군중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인민들이 봉기하여, 1325년에 하남성에 있는 조축인, 곽보살의 지도자가 발생하였다.의 봉기.
몽골 지배계급 내에서는 권력 다툼을 위해 서로 출정하는 바람에 원나라의 쇠락이 가속화됐다.1350년 원 정부는 '지정통보' 돈을 주조하고 새 '중통원보'를 대량으로 발행하도록 하는 등 화폐법 변경을 지시했지만 물가가 급등했다.
이듬해, 원혜종은 자루를 파견하여 황하를 다스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민부를 동원하여 15만 명, 2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였다.관리들이 기회를 틈타 공갈 협박을 하여 불만을 조성하였다.백련교 수장인 한산동(韓山洞), 유복통(劉福通) 등이 5월에 교중을 거느리고 거사를 벌이기로 결정하였으나, 사건이 누설되어 한산동이 포살되자 유복통(劉福通)이 한산동의 아들 한복통(韓福通)을 데리고 갔다.숲이 겹겹이 둘러싸인 포위를 뚫다한산동은 송휘종 8대손(宋徽宗 8세손)으로 '복송(福宋)'을 기치로 붉은 수건을 표지로 내걸었고, 이후 곽자흥(郭子興) 등이 가세했다.펑화상도 호북에서 서수휘의 봉기를 도왔다.이로써 대원멸의 서막이 열렸다.몽골 정부는 파병해 각 지역의 홍건군을 진압하고, 승상이 탈피하여 서주 봉기군 참깨이부를 직접 독전(獨戰)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탈탈률군은 1354년 고우송(高郵起義軍) 의사성부(張士誠部)를 포위 공격하다가 북·중(北中)에 의해 탄핵( 。 。)되고 말았다.주원장(朱元璋)은 1356~1359년 병사한 곽자흥(郭子興)의 뒤를 이어 세력을 확장해 강남의 절반을 점령했다.이와 동시에, 북방에서 단테무르를 발견하였다.(이찰한)과 이사제등원군 장성은 북방 홍건적의 반격을 개시하였다.
1363년 북방의 홍건군이 안풍 전투에서 신흥(新興)으로 투항한 장사성(張士誠)에게 패하고 유복통(劉福通)이 전사하자 한림아는 남하하여 주원장(朱元璋)에게 귀순했다가 피살되었다.
북원의 흥망
원말농민전쟁
원말농민전쟁
주원장(朱元璋)은 천유양(陳友 诚)·장사성(張士誠)·방국진(方國眞) 등 기타 남방봉기군과 남방대원(南方大元)의 세력을 격파한 후 1367년 북벌을 시작하여 대장 서달(徐達)·상우춘(常春春) 등의 협조를 얻어 1368년 8월 통주를 함락시켰으며, 원혜종은 7월 28일 황급히 도망쳐 서달솔군이 원군을 함락시켰다.조의 수도 원대도베이징), 위안은 전국적인 통치로 끝났다.주원장(朱元璋)은 원혜종이 북둔하자 그를 순천명(順明)으로 보고 '순제(順帝)'라는 시호를 붙여줬다.
원혜종은 천하에 은퇴하고 격년제로 응창에 이르렀다.그는 계속해서 '대원'이라는 국호를 사용해서 역사를 '북원'이라 불렀다.당시 북쪽에는 원혜종이 유막남막북에 있었고, 관문에는 간쑤딩시(甘肅定西)에 원장확곽첩목아(元將 。 。木 。王保)가 주둔하고 있었고, 그 외에 원정은 동북지방과 윈난(雲南)지역을 거느리고 있었다.주원장, 북녘을 점령하기 위해방, 병분2로 취한다각개 격파 방식, 이것이 1차 북벌이다.원혜종은 패전 후 1370년 응창(應昌)에서 사망하였고, 원소종은 즉위 후 모북과 임으로 북으로 피신하였다.명장의 풍승이 간쑤 지역을 탈취했다.그러나 원장확곽첩목아는 여전히 모북에서 명장 쉬다(徐達) 등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명태조는 여러 차례 편지를 써서 투항하였으나, 증곽첩목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원장(朱元璋)이 '세계의 사나이'로 불렀다.1378년 4월, 원소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뒤를 이었다.원 천 원제께서 계속 계십니다명나라와 맞서서 여러 차례 명경을 침범하였다. [27]
북원령이 소유한 동북지방과 운남지역은 1371년 원나라 요양행성 핑장유익이 항명해 명나라가 랴오닝 남부를 점령했다.그러나 나머지 동북 지역은 여전히 원나라 태위 나하가 통제하고, 나하가 진산(金山)에서 20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현재 랴오닝성 창투진산보 북쪽 요하남안 일대).), 명군과 대치했다십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명나라의 무예를 거절하였다.1387년 풍승, 푸유덕, 란위 등이 5차 북벌을 일으켜 나하출의 금산 공략을 목표로 삼았다.숱한 전쟁을 치른 끝에 1387년 10월 나하가 항복해 남옥을 물리치고 명나라가 동북지방을 점령했다.운남을 지키던 원나라 량왕은 라와르밀을 섬겼는데, 원정이 초원으로 되돌려 보낸 후에도 계속 충성하였다.1371년 명태조는 탕과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사천성을 평정하였다옥진, 아울러 항복을 권고하다.왕미과. 1381년 12월, 명군이 운남으로 쳐들어갔고, 1382년 량왕이 곤명을 탈출하여 자살한 후, 명군이 대리를 공격하여 명군이 운남지역을 평정하였다. [27]
주원장(朱元璋)은 북원 세력을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해 1388년 5월 남옥( 月玉)에게 명군 15만을 거느리고 제6차 북벌을 감행하였다.명군은 고비사막에 걸쳐 고기잡이 해(몽골국 벨호수)에 이르러 원군을 격파하고 8만여 명을 생포하였는데, 원나라 원제와 그의 장남 천보노는 도망쳤으나 유자지보노가 명군에 의해 생포되었다.붙잡아, 이리하여 북원국에 이르렀다.세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1388년 원나라 원제와 장남 천보노는 아리고의 후예인 디디에르에 의해 살해당하고, 북원은 더 이상 연호와 대원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28]
1399년 예니세이의 상류 연안에 분포한 키르기스스탄의 귀리치는 달랍의 아들인 엘벡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이를 물리치고 죽이는 등 각부를 지배하는 패권을 얻었다.엘베르크의 아들 쿤테무도 1402년 귀리의 칼에 맞아 즉위했다.그 개국호를 몽골이라고 부르다명나라를 타타르라고 부르는데 북원은 죽었다. [27]
강역
영토 범위
일본 동쪽부터 원나라의 강 역.해남이 남해 서에 도착하다."동진요좌서극유사, 북유음산 남월해표, 한당극성시에도 못 미쳤다"는 원사(元史)의 말이다. [29]
원나라의 지도
원나라의 전신은 대몽이다고국, 1206년칭기즈칸이 건국할 때 정말 새우 나무 사막 지역에서(남북과 숲이 지역)으로, 즉 역대 네르친스크를 거쳐 경영 및 몽골 칸의 제국 이후 세번부터 서정, 강 역, 동해 일본해·동해. 흑해 서쪽에 도착했다.지중해 지역 서쪽으로. 크로스벨리아, 남으로 페르시아에 임하다.만. 칭기즈칸 시기에는 동쪽에 분봉하였다.도제왕과 서도제왕, 동도제왕은 철목진의 동생으로 대부분 세북동부와 동북부에 봉인되어 종속성이 비교적 강하며, 서도제왕은 철목진의 아들로, 그중 분봉장자술은 함해, 리해, 발카시호 이북의 흠찰초원, 그리고 발도로부터 흠차칸국을 건립하였으며, 봉차자찰합대는 석하 이북의 서요구사이다. [30]
1279년, 원세조상이 남송 통일의 통중을 멸망시키려고 공격하였다.한나라, 모남, 모북, 동북부(외동북동쪽과 사할린 포함), 신장동부(원초에는 탑리목분지를 서쪽으로는 파령까지), 청장고원, 팽호군도, 제주도 및 남해제도는 모두 원나라의 통치 범위 내에 있다. [31] 자멸여러 차례 일본에 대한 남송, 하고 있다.미얀마, 아난, 자바 등이 충돌했지만 강역은 대체로 안정됐다.1310년 원무종(元武宗) 때 차합대 칸국( 汗合臺 汗國)과 보금자리활대한국( 。 。臺 汗國)을 나누어 원나라가 보금자리 칸국( 。 。臺 。國)의 막서영토( 。西領土)를 취득하였다
행정 구역
주사조: 원나라의 행정 구역
원나라 시기에는 전국을 중서성의 직할로 구분하였다.경기지역(하북, 산동, 산서 및 모남 일부 지역)은 선정원(초명총제원)이 관할하는 토번지구와 10개 행중서성으로 각각 영북행성, 랴오양행성, 간쑤성, 섬서행성, 허난강북행성, 후광행성, 쓰촨성, 윈난성, 저장성, 장시성 성이다. [30] [32]
원나라의 행정 구역 약도
원나라의 행정 구역 약도
원선정원관할지
원선정원관할지
번속국
원나라의 번속국은 고려·미얀마·안남·점이었다.성 및 4대 칸국. 그중 두 개의 직속 국가, 즉 고려 왕조와 버마 포간 왕조는 특별 행정구역인 징동행성과 메나중행성을 분리하여 설치하였다.서북쪽에서는 1268년 굴활대 칸국의 해도가 땀의 자리를 되찾으려고 합동으로 칸국과 차합대 칸국의 반원을 흠찰해 해도의 난으로 불렸다.원정은 1304년 원성종 때에 이르러 이 3대 칸국과 화의를 이루었고, 이리 칸국과 함께 원나라의 종주를 인정하여 성왕하였다.원나라의 번속국이며 원나라이다.성종과 이리 칸의 군주'진명황제 화순만이지보' 등의 한문인새, 실질적으로도 인정하다그 독립성. 1310년 원무종 때에 원나라와 차합대 칸국이 연합하여 굴활대 칸국을 멸망시켰다.원문종 연간에 『경세대전』을 편찬할 때, 흠찰 칸국, 차합대 칸국, 이리 칸국을 원나라의 번속국으로 지정하였다. [30]
원나라와 4대 칸국(대만판 강역도)
원나라와 4대 칸국(대만판 강역도)
정치
행정 기구
중앙 최고 기구는 중서성이다.중서성(中書省)은 상승천자(上承天子)가 하총백사(下總百司)로 내려가 6부를 거느린 최고 행정기관으로 재상의 직권을 행사한다.중서성 장관은 서령 이하에 우좌 승상을 실임의 재상으로 두었다.아래에는 평장정사(平章政事), 우좌승(右左左承), 참지정사(參知政事)를 부상으로 두었다.중서성 아래에 이·호·례·공·형·병 6부를 두었으며, 상서·시랑을 두어 정무를 나누었다. [33] 상서성은 시치시폐(時治時 废)로 문하성(門下省)이 복원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서성(中書省)의 지위는 전대에 비해 매우 중요하다.중서령은 통상 황태자가 담당한다. [34] 중서성 제결기관 외에, 또 직접 책임을 지다.수도의 대도 부근을 관할하다.의복리지역. 상서성, 주로 재정 업무를 책임지지만, 시폐에 불과하다.
감찰 기구
어사대(御史臺)는 원나라 최고 감찰기관이다.질은 1품, 대부는 2품, 중승은 2품, 시어사는 2품, 치서시어사는 2품, 정삼품은 백관선악과 정치적 득실을 규합한다. [35] 어사대하(御史臺下)에는 전중사(殿中司)·찰원( 以及院)·내팔도(內八道)의 숙정렴(肅政 肃)의 방문(訪司이 중 전 중사는 경성관료의 조상과 휴가 상황을 파악하였고, 차원 아래 어사(御史)를 감찰하고 민(民)을 감찰하는 24명을 두었으며, 내팔도 숙정렴(肅政 廉) 방문사(訪中司)가 대복리(對服里)를 담당하였다.(지금 북경, 천진, 허베이,산동·산서 일대)·요동과 양회 지역이 분구되다감찰은 모두 여덟 개. [36]
지방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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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 제도.
원나라의 지방 최고 행정 기구는 모두 일급 행정 구역이다.명칭. 줄여서 성이라 부르거나 성이라 부르기만 한다.원치는 서성(書省)의 전국 정무를 도성(都省)으로 하며, 도성(都省)이라고도 한다. 대원폭이 넓기 때문에 복리지역은 중서성(中書省), 티베트지역은 선정원(宣政院)이 관할하는 것 외에 제도로의 중요도 10개의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치하여 각 지역을 관리한다.세조·무종조 세 차례에 걸쳐 상서성을 단기 설치해 정무를 주관하는 동안 행중서성은 그에 맞춰 행상서성으로 개칭했다.원인은 그 제도를 "모두 성이 천하의 기회를 잡고, 십 성은 성으로 정했다.천하를 나누어 다스린다"고 말했다. [37]
1260년, 한법을 준용하여, 중서성 총영사관을 세웠다.전국 정무(政務) 시치(時治) 승상(承相) 및 평장(平章) 정사(政事), 좌승(左承), 우승(右承), 참지사(參知政事) 등 재집관(在集官이어 각 지역에 행중서성을 잇달아 개설했다.초기에는 전대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여 중서성 재집관들이 각 행성을 다니면서 어느 곳의 중서성사(中書省)로 칭하였다.이후 이런 행성은 사실상 이미 상설 지방행정기구가 되었다.1286년에는 성·대·원·부관을 선임하고, 각 행성에 설치된 정승을 폐하고, 평장정사(平章政事)를 최고장관으로 임명하였다.도성과 성은 서로 구별된다. 나중에, 부분적으로지방 대사가 많은 행성 허설승상. 1320년 원인종복파 각 행성 승상…기존의 자가 모두 평지로 떨어졌다.장정사. 태정제(1324-1328) 이후 일부 행성에서는 정승을 설치하여 필요와 보직자의 지위를 고려하여 정하였다.각 행성에서는 보통 평장정사 2원(종1품), 우승, 좌승 각 1명(정2품), 참지사 2명(종2품)의 품질을 도성관과 같이, 좌사, 우사를 합하여 치랑중, 원외랑, 도사를 두었는데, 도성보다 품격이 낮다.원 말 일부 행성에서는 평장 우승 좌승 참정 등을 추가로 배치하기도 했다.행성은 관할 지역의 돈과 양곡, 병갑, 둔종, 조운 및 기타 군국의 중사를 관장하며, 길, 부, 주, 현을 통솔하고,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위사통지를 설치하여 행성의 파견기관으로 삼았다. [38] 행정 성 아래에 도, 노, 부, 주, 현, 말단 행정 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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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원
선정원(宣政院, 초명은 총제원(總制院)이다.질은 1품에서 서쪽으로 간다.티베트 지역의 불교와 군정 사무. [39] 토번(蕃)에 일이 생기면 분원왕진(分院王鎭)이며, 또 다른 인(印)이 있다.만약 대정벌한다면 부의를 망라할 것이다.그 사람을 쓰면 스스로 뽑는다.이를 뽑으면 군민이 함께 통섭하고, 승려와 세속을 함께 사용할 수 있다. [40] 1264년 총제원을 세워 국사(國師)를 받들었다.1288년 당제토번이 선정전에서 조회를 찾아왔다고 해서 선정원(宣政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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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위사
선위사, 군민의 일을 도읍으로 하여 총군현을 구분함.성에는 정령이 있으면 하에 포고하고, 군현에는 청이 있으면 성에 이른다.변경의 군인이 있으면 도원수부(都元 府府)가 되고, 그 다음이 원수부(元 。府)다.원복에 있으면서 사위·무위·선무 등 품계가 다양하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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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사
위문 사절단의 품계가 2품에 이른다.매사 위문 삼인종2품. 동지의 일원. 종3품. 부사일원. 정4품. 경력일원. 종6품. 도사일원. 종7품. 조마겸가각 관리일원. 정9품.범육도: 산동동서도, 익도로치.하동산서도, 대동로치.회동도, 양주치.절동도 경원 노치.형호 북도, 중흥 노치.호남도. 천 임로치.
위문사 사도원수댁에서 2품에서 3원으로 일하게 되었다.동지 2인, 부사 2인, 경력 2인, 지사 2인, 가각 관리의 일원을 그대로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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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호순검사
주조: 팽호순검사
법률 제도
원은 끝내 완전한 법전을 반포하지 않았다.1271년 이전에 중원한지는 옥사를 단리하였는데, 기본적으로 김 《태화율》에 참작하여 죄를 짓고 다시 일정한 굴절관계에 따라 형을 하였다.1271년 11월, 대원이라는 국호를 만들면서 태화율의 금지를 명하였다.이후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쳤다.형벌은 단절된 판례, 유추 해석에 따라 부가형보다 다른 봉건왕조에 비해 사법의 자의성이 두드러진다.기타 방면의 입법 행정도 모두 조칙으로 한다제조·조격 (황제를 거쳐 직접 재단한다.지정 혹은 직접 중서성 등등에서중앙 정부 기관이 산하 부서에 수여하다.의각 정령을 근거로 함)이에 따르면 원나라의법제 체계는 주로 시립제, 임기응변으로 인한 각종 일방통행식으로 이루어져 있다.정부는 조정과 지방 관아에서 각 관아마다 각각 편제별로 차례차례 수여해야 하는 각종 격례에 대해 관리들이 이를 따르도록 명령했다. [42]
당시 "내이성부, 외이군부"는 조격을 베껴 썼다.…수십 권까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옛 사례를 찾아보거나 적재가 없으면 비교한다'고 되어 있다.칸막이와 단례는 해가 갈수록 쌓이고, 번잡함이 겹쳐서 서로 상쇄된다.원 정부는 해마다 내려오던 어느 한쪽의 조례를 '나누기' '작성' '정정' '등제'로 바꿔 새로운 법률문자를 만들어 '통례'로 공포하기도 한다.또한 국가의 정치 행정 규정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노신들을 소집하여 이전에 수여한 정부 문서 중에서 선택하였다.대저 영자여, 좌충우돌이라 하소서.이시소사'라는 뜻으로, '대'가 되었다.원통제《지정조격》.등격률유취는 모두 구이다법전적 성격의 정서(『통제조격』 참조).
등급 제도
봉건 제도에서 귀족은 최고 통치 지위에 처해 있다.몽골인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 정권을 세우자 몽골 귀족을 포함해 여러 민족 귀족이 병립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제국을 누가 통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낳았다.원나라는 몽골 귀족의 전제통치권을 지키기 위해 '민분 4등'의 정책을 채택하여 중국인을 1등 몽골인, 2등 색목인, 3등 한인, 4등 남인으로 나누었다.몽골 귀족의 특권을 지켜주는 정책이다. [43]
4등인 제도
等级民族
第一等 | 蒙古人 |
第二等 | 色目人(主要指西域人,是最早被蒙古征服的,如钦察、唐兀、畏兀儿、回回等,另外,蒙古高原周边的一些较早归附的部族,也属于色目人,如汪古部等。) |
第三等 | 汉人(指淮河以北原金国境内的汉、契丹、女真等族以及较晚被蒙古征服的、四川、云南人。) |
第四等 | 南人(最后被蒙古征服的原南宋境内各族,淮河以南不含四川地区的人民。) |
이 밖에도 일련의 불평등한 정책과 규정이 있다.한인들의 사냥, 권투 무술 배우기, 병기 소지 금지, 신에게 인사하기, 장보기 장사, 야간 걷기 등이 그것이다.한인은 군인이 되면 숙위를 채울 수 없고, 관직이 되면 부이(副二)만 할 수 있다(실제로는 예외적인 경우가 많지만).정벌 전쟁을 겪으면서 차별은 평소보다 더 심했다.1286년에는 아난 진격을 위해 전국의 말을 징발해 세목인은 세 마리 중 두 마리만 징발했고, 한인의 말은 얼마가 됐든 모두 징수했다.이후 끊임없이 말을 징발해 왔고, 그럴 때마다 한인의 말은 진품이 되었다. [44]
갑주 이상의 지방정부 수장은 모두 몽골인들이 맡고 있다.몽골인이 배급이 부족하거나 중앙아시아인이 뇌물을 많이 받을 때는 중앙아시아인이 맡는다.주지사·현장과 같은 몽골의 수장이 관할하는 1주나 1현이 바로 그의 봉건 채읍이다.그들은 한인에 대한 정치적 책임도 없고, 법적 책임도 더욱 없다.하지만 실제론 많은 승부욕이 통하지 않는다.한인의 병기 보유는 법령상 금지돼 있지만 대흥사씨, 역주장씨, 진정동씨 등은 몽골 귀족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다.반면 많은 몽골 빈민들의 삶은 고달파 원나라 중엽에 이르면 많은 수의 몽골 빈민들이 모여든다.통주 등지에서 팔려나가고 색동꾼들도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실제는 역시 지주 계급 정권이다. [44]
그러나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원나라가 신민을 4등급으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전문적인 법령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이러한 규정은 일부 정책과 규정에 반영되었는데, 예를 들어 한인이 몽골을 죽이면 목숨을 갚아야 하며, 몽고인은 죽으면 "단벌출징"을 하고, 전부 은을 묻으면 된다(원문에서는 설이나 몽고인, 설악당 원나라 1특권계급) [45].
근대에는 원나라 때 상당수의 한족(漢族)이 각급 관청에서 고급 직책을 맡았으며, 그중 적지 않은 것이 정규직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원사』 『신원사』 『몽골사기』에 나오는 3품 이상의 관리 864명 중 한인이 409명, 즉 전체의 47%를 차지한다.또 한인이 원나라 관부에서 정직을 한 것은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 및 행중서성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한족 관료들 외에 6부에서 상서를 지낸 사람들도 모두 수두룩하다.종합적으로 볼 때 한족들은 원나라의 각급 정부에 현임자가 많을 뿐 아니라 정직을 맡은 사람도 적지 않다."원나라 각급 관부의고급 관리는 몽골인이나 색목인이 맡아야 하는데 한인은 부직(副職)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46].
군사
군사 기구
원나라의 최고 군사 기구는 추밀원이었다.질은 일품에서 내려 갑옷의 기밀을 책임진다.범궁은 수위 금지, 변정군의 날개로 정벌과 수비를 간소하게 하고, 공적을 쌓고 관직으로 전환하며, 배도를 절제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부지원 6원은 1품, 동지 4원, 정 2품, 부추 2원, 종 2품, 첨원 2원, 정 3품, 동첨 2원, 정 4품, 원판 2원, 정 5품, 참의 2원, 정 5품, 경력 2원, 종 5품, 도사 4원, 정 7품, 승발 겸조마 2원, 정 8품, 가첨 2원, 정각 고관, 정 8품, 정관, 정관, 정관, 정 5품 등을 갖추고 있다.19명, 전사 2명, 몽골서사 2명, 전리 17명, 병원 의사 2명.
추밀원 아래에는 객성사·단사관·행추밀원·우위·좌위·중위·전위·수비수 등의 관서가 있다.
군종설치
몽골 중장병
몽골 중장병
참고: 시골 설
원나라 군대에는 몽골군, 탐마적군, 한군, 신부대 등이 있었다.모북 초원의 몽골인들은 여전히 병민합일(兵民合一)의 유목(遊牧) 생활을 하며 전시(戰時)에 출군(出軍)하고 평시에는 집목(集牧)을 하며 기르고 있었다.한지에서 원나라 군사의 출처는 고정된 군호에서 발급하는 방법을 취하였다.몽고는 2년 임자(1252년)가 대규모로 귀화했을 때 이미 지역 구분이 명확해졌다.내륙에 진출한 대다수 몽골인 가구와 김, 송강군의 집은 모두 군인이 저서를 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일부 한족이나 기타 각 민족이 군호로 새로 서명하여 일반적으로 모두 중호에서 충당하고 있다.군인들이 농사를 지으면 4경의 면세가 가능하며, 이를 '군대미'라고 한다.몽골, 탐마적군과 한군(金國 。軍과 몽골정권, 원(元)정부가 화북에서 발급하는 군대) 군호는 모두 오루를 통해 관리한다.오루의 주요 직책은 군번(軍戶)에서 정남(丁男)을 군대에 보내 응역하게 하고, 고(故) 군인들을 즉시 징집( 征 征)하는 '호하(戶下)의 동생'이 군역을 대신하여 군인의 결원을 보충하게 하는 것이다.둘째는 벤오루의 기병을 담당하는 군인의 안마와 지팡이, 판비 등 군수품 조달이다.몽골, 탐마적군의 오루는 이 오루의 역군사가 있는 만호, 천호 아래 소속으로, 한군 오루는 해당 지역의 관민관이 겸령한다.신부대(남송 강하군)에는 올로가 없다.
방위 시스템
원대의 무사
원대의 무사
원나라 군사방위는 두 개의 큰 계통, 즉 수위경사(大都)의 숙위 계통과 전국 각지의 진수 계통을 지키는 계통으로 나뉜다.숙위군은 주설군과 시위친군으로 구성됐다.홀필열이 건국된 후 칭기즈칸이 창설한 사유설의 교대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금정(禁政)의열로 시종을 받들어, 상액 만 명 이상으로 황제나 측근 대신이 직접 절제를 하였다.시위친군( 环衛親軍)은 경기환위용으로 원나라 말기에 걸쳐 30여 위원을 두었는데, 위설도 지휘사(都 使使) 또는 솔사(率 。使)를 두었으며, 질서정연하게 만호에 상당(正三品)하여 추밀원( 枢密院)에 소속되었다.내륙으로 들어온 색목인 군대는 전투력이 강해 상당 부분이 시위 친군으로 편입됐다.진수군들은 주로 몽골군과 탐마적군이 복리를 지키고 있었다.화베이(華北)·산시(陝西)·쓰촨(四川) 등의 몽골·탐마적군은 각 지역의 몽골군 도만호부(都萬戶府·도원수부)가 통솔하는 추밀원 소속이다.남쪽은 몽골군·한군·신부군 상(相)이 주둔하고 있고, 방위는 임강연회 지역에 방점을 두고 있다.행성(行省)의 진수(鎭守) 제군(制軍)에 소속되어 있으며, 방면에는 경보가 있을 때 행추밀원(行枢密院)이 통솔하고, 평상시에는 일상적인 업무를 행성(行省)으로 귀속시키지만, 경방( 。防) 등 중요 군무(軍務)는 추밀원(전국의 군마는 황제와 추밀원 몽골 관리들만 알고 있고, 행성병마는 이를 비롯한 몽골 관리들만 알고 있다.
주요 전쟁
战争年份交战方
文永征日之役 | 1274年 | 日本(镰仓幕府) |
忽必烈灭宋之战 | 1276-1279年 | 南宋 |
弘安征日之役 | 1281年 | 日本(镰仓幕府) |
征占城之役 | 1282年 | 占城 |
征缅之战 | 1283-1287年 | 缅甸(蒲甘政权) |
第二次征越之战 | 1284-1285年 | 越南(陈朝) |
第三次征越之战 | 1287-1288年 | 越南(陈朝) |
征爪哇之战 | 1292年 | 爪哇 |
注:本表格仅显示1271年-1368年的战争,其它不计入。 [47] |
다음 계시판 중국역사 B 원나라 元朝 1271년-1368 몽골 징기스칸
元朝
元朝(1271年—1368年 [1] ),是中国历史上首次由少数民族建立的大一统王朝,统治者为蒙古孛儿只斤氏。定都大都(今北京),传五世十一帝,从1206年成吉思汗建立蒙古政权始为162年,从忽必烈定国号元开始历时98年。 [2] 元朝退出中原后的北元政权一直持续到1402年。
1206年,成吉思汗统一蒙古各部,建立大蒙古国。先后攻灭西辽、西夏、花剌子模、金朝等政权。蒙哥汗去世后,引发了阿里不哥与忽必烈的汗位之争,促使大蒙古国分裂。1260年忽必烈即位称帝,建元“中统”。1271年,忽必烈取《易经》“大哉乾元”之意改国号为“大元”,次年定都大都。1279年,彻底灭亡南宋流亡政权,结束了自唐末以来长期的混乱局面。 [2] 之后元朝持续对外扩张,进攻日本、缅甸、越南、爪哇等,但均遭失败。元朝中期皇位继承紊乱、政变频繁,政治始终未上正轨,而且汉化迟滞,发展不前。后期政治腐败,权臣干政,民族矛盾与阶级矛盾日益加剧,导致元末农民起义。 [3] 1368年,朱元璋建立明朝,随后北伐驱逐元廷攻占大都。此后元廷退居漠北,史称北元。1402年,元臣鬼力赤篡夺政权建立鞑靼,北元灭亡。
元朝时期统一多民族国家进一步巩固,疆域超越历代。元朝废除尚书省和门下省,保留中书省与枢密院、御史台分掌政、军、监察三权,地方实行行省制度,开中国行省制度之先河。
元朝商品经济和海外贸易较繁荣。元朝时与各国外交往来频繁,各地派遣的使节、传教士、商旅等络绎不绝。在文化方面,期间出现了元曲等文化形式,更接近世俗化。 [4]
中文名元朝 外文名Yuan dynasty 别 名大元大蒙古国,大朝 时间范围1271年12月18日 至 1368年9月14日 都 城大都(今北京) 帝 王忽必烈、铁穆耳、海山等 语 种蒙古语(八思巴文)、汉语等 货 币交钞(为主)、圆形方孔钱 人口数量九千万左右(1341年) 主要民族蒙古人、色目人、汉人、南人等 国土面积1372万平方公里(1330年) 开创者忽必烈 民族制度四等人制 主要城市上都、辽阳、临安、汴梁、哈拉和林、奉元等
目录
1 国号
2 历史
▪ 蒙古统一
▪ 扩张分裂
▪ 建立大元
▪ 统一海内
▪ 四向远征
▪ 帝统转系
▪ 汉化运动
▪ 内乱频发
▪ 起义风云
▪ 北元兴亡
3 疆域
▪ 领土范围
▪ 行政区划
▪ 藩属国
4 政治
▪ 行政机构
▪ 监察机构
▪ 地方制度
▪ 法律制度
▪ 等级制度
5 军事
▪ 军事机构
▪ 军种设置
▪ 防卫体系
▪ 主要战争
6 经济
▪ 农业
▪ 商业
▪ 货币
▪ 人口
▪ 赋税
7 文化
▪ 思想
▪ 文学
▪ 戏曲
▪ 宗教
▪ 史学
▪ 语言
▪ 艺术
8 科技
▪ 天文历法
▪ 地理
▪ 农学
▪ 数学
▪ 水利
▪ 建筑
▪ 机械
▪ 医学
9 民族
▪ 汉族
▪ 色目人
▪ 西南诸族
▪ 吐蕃
10 社会
▪ 祭祀
▪ 婚姻
▪ 丧葬
11 外交
12 帝王世系
国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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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朝前身是成吉思汗所建立的大蒙古国。 [5] 南宋李心传《建炎以来朝野杂记》乙集卷十九载:“蒙人既侵金国,乃自号大蒙古国。”元初汉文史科中尚有“大朝蒙古国”、“蒙古大朝国”(或仅称“大朝国”)等名,都是同一蒙文国号的不同汉译。 [6]
元世祖忽必烈鉴于本朝“舆图之广,历古所无”,像汉唐那样以初起之地或始封之邑为名,都不足以显示其盛大,于是在1271年发布《建国号诏》,取《易经》“大哉乾元”之义,以“大元”为国号。 [2] 元朝官方编纂的《经世大典》解释:“元也者,大也。大不足以尽之,而谓之元者,大之至也。” [7]
元朝建号以后,大蒙古国之名在汉文文书中不再使用,但并没有废除,蒙文文书中仍用此号,通常是与汉名国号并称,罗马字转写为Dai’on yeke Mongghol ulus(大元大蒙古国),或Dai’on Kemeku Yeke Mongghol Ulus(称为大元的大蒙古国)。 [8] 1368年元廷退居漠北,所以称呼元廷的残余势力为北元。 [2]
历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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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古统一
蒙古人的直系祖先是和鲜卑、契丹人属同一语系的室韦各部落。隋唐时,他们分布在契丹之北、鞑靼之西、突厥之东(洮儿河以北,东起嫩江,西至呼伦贝尔)的广大地域。曾受突厥的统治,突厥人多称之为达怛(鞑靼)。唐朝贞观年间,突厥势衰,后室韦人臣服于唐 [9] 。继突厥而起的回鹘政权崩溃后,室韦—达怛人大批进入大漠南北。
元太祖成吉思汗
元太祖成吉思汗
大约在9至11世纪,其中的一支蒙兀室韦,从望建河下游之东逐渐西迁,到了斡难河、克鲁伦河和土剌河三河的上源一带,分成尼鲁温蒙古 和迭儿列斤蒙古 两大支,合称为合木黑蒙古 ,其中包括许多大大小小的氏族、部落。合木黑蒙古之外,当时在蒙古高原活动的,还有蔑儿乞、塔塔儿、克烈、乃蛮、斡亦剌等部。所有这些氏族部落,先后都受到辽和金的统治 [5] 。
蒙古部落的经济发展很不平衡,到12世纪时,大部分从事狩猎游牧,只有少数部落经营农业。不过这时,他们通过同中原的贸易获得了大量铁器,从而推动了生产的发展,阶级的分化更加明显。为了掠夺更多的财富,各个部落的奴隶主互相展开战争。 [10]
蒙古高原地区的众多蒙古部落原为金朝的臣属。随着金的衰落, 蒙古部落也开始壮大起来,逐渐脱离金政权的统治。金泰和四年(1204年),蒙古诸部领袖铁木真通过战争统一了蒙古高原各蒙古部落。金泰和六年(1206年),铁木真被各部落推举为“成吉思汗”,建立政权于漠北,蒙古帝国成立,国号大蒙古国。从此,蒙古草原结束了长期混战的局面 [5] 。 [11]
扩张分裂
主词条:拔都西征、旭烈兀西征、蒙金战争、钓鱼城之战
大蒙古国成立后,不断发动对外战争扩张其疆域。1218年,蒙古灭西辽。1219年,成吉思汗西征中亚花剌子模, [12] 一直进攻到东欧的伏尔加河流域,于1225年东归。1227年,灭西夏,成吉思汗也在对西夏的远征中去世。 [13] 成吉思汗去世后,第三子窝阔台继位。1234年,蒙古联合南宋彻底灭金。1241年,西征的蒙古军队一度逼近东欧腹地。1246年,招降吐蕃。1253年,忽必烈远征西南,灭大理。
合川钓鱼城遗址
合川钓鱼城遗址
蒙古军队的对外战争中将大量敢于反抗的地区破城之后人口被屠杀和奴役。众多民族受到了残酷而不公正的民族压迫,难以计数的人口和财产在战火和随后的瘟疫、饥荒及自然灾害中损失,对战火涂炭地区而言也是少有的黑暗时期。 [14-15]
蒙古汗国大汗蒙哥于1259年在四川攻打合州时暴死,终年52岁。随后,阿里不哥谋求在哈拉和林召开“忽里勒台”大会以即大汗位。与此同时,忽必烈与南宋议和后返回开平府。
1260年农历三月,忽必烈在汉人地主阶级及部分蒙古宗王的支持下即位称帝;四月,忽必烈设立中书省,总管国家政务; [16] 五月,忽必烈颁布《即位诏》法令,并建元中统。 [17] 阿里不哥亦称汗,并与忽必烈随即展开了四年的汗位(帝位)战争。 [5] [18]
1264年阿里不哥战败,忽必烈夺得蒙古汗国的最高统治权。 忽必烈推行的“行汉法”主张,明显违背了蒙古传统,造成许多蒙古贵族的不满,拒绝归附忽必烈汗国,结果导致其他几个蒙古汗国纷纷敌对。这场内战让四大汗国先后脱离独立,直到元成宗时期才承认元朝为宗主国。 [5]
建立大元
元世祖忽必烈
元世祖忽必烈
1271年,忽必烈公布《建国号诏》,取《易经》中“大哉乾元”之意 [19] ,正式建国号大元 [20] 。一年后,在刘秉忠规划下,元帝国建都于金国中原的大都。北方政局稳定后,忽必烈决定采用南宋降将刘整建议,先拔襄阳,浮汉水入长江,进取南宋。1268年,命阿术、刘整督师,围困隔汉水相望的襄、樊重镇,襄樊军民拒守孤城达六年。1272年初,元军攻下樊城,襄阳守帅吕文焕出降(见襄樊之战)。 [21]
次年六月,忽必烈命伯颜督诸军,分两路大举南进。左军由合答节度,以刘整为前锋,由淮西出师。伯颜本人与阿术领右军主力,九月,自襄阳出发,沿汉水入长江;同时,命董文炳自淮西正阳南逼安庆,以为呼应。十二月,元水师入长江,克宋江防要塞阳逻堡。宋汉鄂舟师统帅夏贵遁,汉阳、鄂州宋军降。伯颜分兵留阿里海牙经略荆湖,自领水陆大军顺流而东,以吕文焕为前锋。宋沿江诸帅多为吕氏旧部,皆不战而降。
1274年二月,贾似道被迫督诸路精兵,抵御元军。这时,他仍企图奉币称臣议和,被伯颜拒绝,只好在池州下游丁家洲勉强与元军会战。因宋军内部不和,一触即溃。同年秋,伯颜从建康(江苏南京)、镇江一线分兵三道趋宋都临安(浙江杭州)。1276年正月,宋幼帝赵㬎上表降元。 [21]
之后,南宋大臣文天祥与张世杰、陆秀夫等在东南沿海继续顽抗,拥立益王赵昰为帝。赵昰死后,又拥立卫王赵昺,继续抗战。1278年,文天祥兵败被俘,被囚于大都三年之久,拒绝了元朝的招安,后从容就义。
统一海内
1279年,金朝降将张弘范指挥元军在崖山海战消灭了南宋最后的抵抗势力,陆秀夫背着8岁的幼帝赵昺投海殉国,南宋灭亡。 [5] 元朝的统一,结束了自唐末藩镇割据以来中国的南北对峙、各民族政权长期并存的分裂和战乱局面,推动了多民族统一国家的巩固和发展。 [21]
崖山遗址
崖山遗址
蒙古灭南宋后,统治阶层出现了以许衡为首的儒臣派与以阿合马为首的理财派官员之争。由于蒙古需要大量财宝赏赐予各封王,加上开支繁重,所以财政日渐紧张。以儒臣派官员认为元朝应该节省经费、减免税收。反之以色目人为主的理财派官员认为,南人藏有大量财物,应没收以解决朝廷的财政问题。于是这个问题在朝中没有停止。
忽必烈信任色目官员阿合马,设立尚书省解决财政问题。而儒臣则以受汉化更深的太子真金为核心形成一派,与阿合马抗衡。结果阿合马被刺杀,而真金也于其后得病而死。忽必烈仍然先后任用汉人卢世荣、畏兀儿桑哥等理财派官员以之来解决朝廷的财政问题 [5] [22] 。
四向远征
元朝灭宋后,忽必烈对邻近诸国发动了一系列战争,如安南、占城、爪哇和日本等。1274年,元军侵日本遭遇飓风,日本称“文永之役”,但元军无功而还。1281年,元朝又分两路进攻日本,由忻都率蒙古军、汉军、高丽军从高丽东渡对马海峡,范文虎率新附军(元政府收编的南宋军队)从庆元(浙江宁波)浮海北进,史称“弘安之役”。元军在日本鹰岛遇飓风,战船多坏,将卒溺死者众,又遭日军掩杀,几乎全军覆没。 [11] 但两次战争动摇了日本镰仓幕府的统治。
元日战争
元日战争
1282年,元世祖忽必烈遣唆都从广州渡海攻占城(今越南南部),连战逾年。1284年至1285年,镇南王孛儿只斤·脱欢(忽必烈子)发兵侵安南(越南北部),命唆都从占城北上助战,南北夹攻。安南王撤离都城,其主力走匿山林,避免与元军决战;待元军疲惫,又出而攻扰。五月,脱欢因暑雨不止、瘟疫流行,被迫退师。唆都战死。
1283年与1285年,元军两次从云南出侵缅甸蒲甘王朝;1287年,元军进至蒲甘,迫缅国定岁贡方物后退回。同年,元朝再侵安南,次年以粮尽师老北还。1292年十二月,史弼、亦黑迷失、高兴从泉州起航出侵爪哇(印尼爪哇岛)。爪哇统治者降元,并请元军助讨其敌国葛郎,打败葛郎王以后复举兵拒元,元军力竭退师 [5] 。
从攻南宋以来,连年战争,加以宫廷廪禄、宗藩岁赐,都需要巨额经费来支持。忽必烈急于解决国用不足的问题,因而日益信用以“理财助国”邀宠的大臣阿合马、卢世荣、桑哥等人主持国政。1270年至1272年、1287年至1291年间,两次设尚书省综理财用。尚书省的理财政策主要包括:增加税收、兴铁冶、铸农器官卖、“括勘”(追还被私人、寺院夺占的南宋公田,起征田赋)、“理算”(追征各地历年积欠的钱粮)、变更钞法等,使国家的收入显著增加。但由于吏治腐败,专注搜刮,流于横征暴敛,成为阻碍社会经济发展的重要原因之一。同时,为了对外战争,打造东征海船,沿海和江南地区徭役征发日益加重。人民不堪沉重的封建剥削与压迫,纷纷起义。
1283年,江南各族人民起义凡两百余起,1289年更增至四百余起。在这前后,爆发了广州欧南喜、黎德和福建黄华、钟明亮等人领导的几次规模较大的起义。 [5] [23-24]
帝统转系
主词条:大都政变
元成宗铁穆耳
元成宗铁穆耳
1294年,忽必烈去世。由于太子真金早死,帝位由各方争夺。最后,群臣在真金的长子晋王甘麻剌及三子铁穆耳之间选择,由于铁穆耳受元世祖下赐皇太子宝及镇守和林。故晋王甘麻剌退让,铁穆耳即位,即元成宗。
元成宗即位后,停止对外战争,专力整顿国内军政。采取限制诸王势力、减免部分赋税、新编律令等措施,使社会矛盾暂时有所缓和。同时,发兵击败西北海都、笃哇等,都哇、察八儿归附,使西北长期动乱局面有所改观。
元成宗在位期间基本维持守成局面,但滥增赏赐,入不敷出,国库资财匮乏,钞币贬值。曾发兵征讨八百媳妇(今泰国西北部),引起云贵地区动乱。晚年患病,委任皇后卜鲁罕和色目大臣,朝政日渐衰败。元成宗执政末年还成功与长期敌对的窝阔台汗国议和,结束了西北的动乱局面 [5] 。
1307年,元成宗去世后,前太子真金之孙海山即位于元上都,是为元武宗。并立其弟爱育黎拔力八达为皇太子,约定兄终弟及,同时又约定爱育黎拔力八达死后,帝位复归武宗之子和世㻋 [25] 。元武宗为了摆脱财政危机,下令重新设立尚书省,并印发至大银钞,结果导致至元钞大为贬值。1309年,元廷与察合台汗国瓜分了窝阔台汗国,窝阔台汗国从此灭亡。
汉化运动
1311年,元仁宗爱育黎拔力八达即位后,生母兴圣皇太后的重臣铁木迭儿为右丞相。元仁宗取消了元武宗的经济措施,并立其子硕德八剌为皇太子,违背与元武宗相约先立和世㻋继位,再传位硕德八剌等之约。封元武宗长子和世㻋为周王,将周王和世㻋徙居云南,但和世剌途中起兵前往西北游牧,元仁宗又将和世剌之弟图帖睦尔放逐至南方 [5] 。1314年,提倡汉化的元仁宗恢复科举取士,史称“延祐复科”。
元朝时期修建的孔庙
元朝时期修建的孔庙
1320年,元仁宗去世,硕德八剌即位,是为元英宗。元英宗继承了其父元仁宗的以儒治国政策,加强中央集权和官僚体制,并于1323年下令编成并颁布元帝国正式法典——《大元通制》,共2539条。他还下令清除朝廷中铁木迭儿的势力,但随着清理的扩大,再加上朝廷中的蒙古保守势力对元英宗以儒治国的施政不满,导致铁木迭儿的义子铁失在1323年夏天趁格坚汗去上都避暑之机,在上都以南15公里一个名叫南坡的地方,刺杀了元英宗及宰相拜住等人,史称南坡之变。
元英宗被行刺后,镇守和林的晋王甘麻剌的长子、真金的长孙也孙铁木儿率兵南下,杀掉行刺元英宗的叛臣后即位,是为泰定帝。泰定帝即位后,封被元英宗放逐到海南岛的图帖睦尔为怀王,镇守建康。 [5]
内乱频发
1328年,泰定帝去世。丞相倒剌沙在上都奉泰定帝之子阿速吉八为帝,是为天顺帝。而与此同时,元武宗的旧部重臣燕铁木儿与河南行省丞相伯颜则分别秘密向漠北和江南遣使,同时迎接周王和世㻋与其弟图帖睦尔。结果,图帖睦尔先至大都,在1328年自立为帝,是为元文宗。而和世㻋抵达和林后,也宣布即位,是为元明宗。元文宗表面上表示愿意退位,奉兄为帝,两人遂相会于上都之南,元文宗毒死元明宗后称帝。 [25]
元文宗
元文宗
元文宗重祚以后,大兴文治。1329年二月,元文宗设立了奎章阁学士院,掌进讲经史之书,考察历代治乱。又令所有勋贵大臣的子孙都要到奎章阁学习。奎章阁下设艺文监,专门负责将儒家典籍译成蒙古文字,以及校勘。同年下令编纂《元经世大典》,两年后修成,为元代一部重要的记述典章制度的巨著。但元文宗在位期间,丞相燕帖木儿自恃有功,玩弄朝廷,导致大元朝政更加腐败 [5] 。
元文宗于1332年去世后,为洗刷他毒死哥哥(元明宗)的罪行,遗诏立年仅七岁的和西拉古图土次子懿璘质班为帝,是为元宁宗。但元宁宗仅在位不到两个月即去世,不久后燕帖木儿也去世。元明宗的长子妥懽帖睦尔被札牙笃汗皇后卜答失里从静江(广西桂林)召回并立为帝,是为元惠宗。 [26]
元惠宗在位之初,右丞相伯颜的势力很大,把持着朝政,甚至一度不把元惠宗放在眼里。随着时间的推移,元惠宗与伯颜的矛盾日益尖锐,后来在伯颜之侄脱脱的帮助下,元惠宗终于成功地废黜了伯颜,并控制了政局。 [26]
1343年,元惠宗下令修撰《辽史》《金史》《宋史》三史,至1345年修成。
起义风云
主词条:元末农民起义、红巾军起义、红巾军
元顺帝
元顺帝
元朝时期,蒙古统治者变本加厉向汉人收取各种名目繁杂的赋税,民族压迫十分严重,汉人被掠夺更为常见。将各民族分为不同等级,残酷剥削汉族群众,人民揭竿而起,在1325年就发生了河南赵丑厮、郭菩萨领导的起义。
蒙古统治阶级内部却在为争权夺利而互相征战,因此加速了元朝的衰落。1350年,元政府下令变更钞法,铸造“至正通宝”钱,并大量发行新“中统元宝交钞”,但导致物价迅速上涨。
次年,元惠宗派贾鲁治黄河,欲归故道,动用民夫十五万,士兵二万。而官吏乘机敲诈勒索,造成不满。白莲教首领韩山童、刘福通等人决定在5月率教众发动起事,但事泄,韩山童被捕杀,于是刘福通带韩山童之子韩林儿杀出重围,指韩山童为宋徽宗八世孙,打出“复宋”旗号,以红巾为标志,其后郭子兴等人也纷纷加入。彭和尚亦在湖北扶助徐寿辉起义。至此揭开了大元灭亡的序幕。蒙古政府则派兵镇压各地红巾军,由丞相脱脱亲自督战攻徐州起义军芝麻李部,一度取得了很大的胜利。
1354年,脱脱率军围攻高邮起义军张士诚部,被朝中弹劾,功亏一篑。1356年到1359年,朱元璋继承了病逝的郭子兴的地位,并不断扩充自己的势力,攻占了江南的半壁江山。与此同时,在北方察罕帖木儿(李察罕)和李思齐等元军将领则开始对北方红巾军展开反攻。
1363年,北方红巾军在安丰之役中败给新兴并降蒙的张士诚,刘福通战死,韩林儿南下投奔朱元璋,随后被杀。
北元兴亡
元末农民战争
元末农民战争
朱元璋在击败陈友谅、张士诚、方国珍等其它南方起义军和南方大元势力后,于1367年开始北伐,在大将徐达、常遇春等的协助下,于1368年八月攻克通州,元惠宗于七月二十八日,仓惶北逃,徐达率军攻陷元朝的首都元大都(北京),元作为一个全国性质的统治结束。元惠宗北遁,朱元璋认为他顺天明命,给他上谥号为“顺帝”。
元惠宗退至上都,隔年又至应昌。他继续使用“大元”国号,史称北元。当时北方除了元惠宗据有漠南漠北,关中还有元将扩廓帖木儿(王保保)驻守甘肃定西,此外元廷还领有东北地区与云南地区。朱元璋为了占领北方,采取兵分二路,各个击破的方式,此即第一次北伐。元惠宗战败后于1370年在应昌去世,元昭宗即位后北逃至漠北和林。明将冯胜夺取了甘肃地区。然而元将扩廓帖木儿仍然在漠北多次与明将徐达等人作战。明太祖曾多次写信招降,但扩廓帖木儿从不理会,被朱元璋称为“当世奇男子”。1378年四月,元昭宗去世,继位的元天元帝继续和明朝对抗,屡次侵犯明境。 [27]
至于北元领有的东北地区与云南地区方面:1371年,元朝辽阳行省平章刘益降明,明朝占领辽宁南部。然而其余东北地区仍由元朝太尉纳哈出控制,纳哈出屯兵二十万于金山(今辽宁省昌图金山堡以北辽河南岸一带),与明军对峙了十几年,多次拒绝明朝的招抚。1387年冯胜、傅友德、蓝玉等人发动第五次北伐,目标是攻占纳哈出的金山。经过多次战争,1387年10月,纳哈出投降蓝玉,明朝占领东北地区。镇守云南的元朝梁王把匝剌瓦尔密,在元廷退回草原后仍然继续忠效之。1371年明太祖派汤和等人领兵平定据有四川的明玉珍,并且劝降梁王未果。1381年12月,明军攻入云南,1382年梁王逃离昆明并自杀,随后明军攻克大理,明军平定云南地区。 [27]
朱元璋为了彻底扫除北元势力,于1388年5月命蓝玉率领明军十五万发动第六次北伐。明军横跨戈壁至捕鱼儿海(蒙古国贝尔湖)击溃元军,俘虏八万余人,元天元帝和他的长子天保奴逃走,但是幼子地保奴被明军擒住,至此北元国势大衰。1388年元天元帝及长子天保奴被阿里不哥后裔也速迭尔杀害,北元不再使用年号及大元国号。 [28]
1399年,分布在叶尼塞河上游沿岸的吉尔吉斯部首领鬼力赤,否认爱猷识理达腊之子额勒伯克的宗主权,将其打败并杀死,取得了统治各部的霸权。额勒伯克之子坤帖木儿继位后也于1402年被鬼力赤杀死,明史称其改国号为蒙古,明朝称为鞑靼,北元亡。 [27]
疆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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领土范围
元朝疆域东起日本海、南抵南海、西至天山、北包贝加尔湖,元史称“东尽辽左西极流沙,北逾阴山南越海表,汉唐极盛之时不及也”。 [29]
元朝地图
元朝地图(17张)
元朝的前身为大蒙古国,1206年成吉思汗铁木真建国时领有大漠南北与林木中地区(即尼布楚地区),经由历代蒙古诸汗的经营及三次西征后,疆域东起日本海、东海,西抵黑海、地中海地区,北跨西伯利亚,南临波斯湾。成吉思汗时期分封东道诸王与西道诸王,东道诸王是铁木真之弟,大多分封于塞北东部与东北地区,从属性较强;西道诸王则是铁木真之子,其中分封长子术赤于咸海、里海、巴尔喀什湖以北的钦察草原,后由拔都建立钦察汗国;封次子察合台于锡尔河以北的西辽旧地,史称察合台汗国;三子窝阔台分封于乃蛮旧地,后由海都建立窝阔台汗国;塞北、汉地、东北、青藏及新疆东部则由幼子拖雷获得,后由元朝直辖。 [30]
1279年,元世祖攻灭南宋一统中国。汉地、漠南、漠北、东北(包括外东北和库页岛)、新疆东部(元初据有塔里木盆地西抵葱岭)、青藏高原、澎湖群岛、济州岛及南海诸岛皆在元朝统治范围内。 [31] 自灭南宋后虽然多次对日本、缅甸、安南、爪哇等国有所冲突,然而疆域大体趋于稳定。1310年元武宗时期,元朝与察合台汗国瓜分窝阔台汗国,元朝取得窝阔台汗国的漠西领土。
行政区划
主词条:元朝行政区划
元朝时期,全国划分为由中书省所直辖的京畿地区(即河北、山东、山西及漠南部分地区),由宣政院(初名总制院)所管辖的吐蕃地区,以及十个行中书省,分别为岭北行省、辽阳行省、甘肃行省、陕西行省、河南江北行省、湖广行省、四川行省、云南行省、江浙行省、江西行省。 [30] [32]
元朝行政区划简图
元朝行政区划简图
元宣政院辖地
元宣政院辖地
藩属国
元朝的藩属国有高丽、缅甸、安南、占城及四大汗国。其中有两个直属的藩属国,即高丽王朝与缅甸蒲甘王朝,分置特别行政区征东行省与缅中行省。西北方面,1268年窝阔台汗国的海都意图夺回汗位而联合钦察汗国与察合台汗国反元,史称海都之乱。直到1304年元成宗时期,元廷与这三大汗国达成和议,并与伊利汗国一同承认元朝的宗主地位,成为元朝的藩属国,而且元成宗并赐伊利汗国君主刻有“真命皇帝和顺万夷之宝”等汉文印玺,实质上也承认其独立性。到1310年元武宗时期,元朝和察合台汗国联合攻灭窝阔台汗国。元文宗年间编纂《经世大典》时,将钦察汗国、察合台汗国、伊利汗国列为元朝的藩属国。 [30]
元朝及四大汗国(台湾版疆域图)
元朝及四大汗国(台湾版疆域图)
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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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政机构
中央最高机构为中书省。中书省上承天子,下总百司,领六部,为最高行政机关,行使宰相职权。中书省长官中书令以下,设右、左丞相为实任的宰相。下设平章政事、右左丞、参知政事为副相。中书省下设吏、户、礼、工、刑、兵六部,设尚书、侍郎分理政务。 [33] 由于尚书省时置时废,门下省不复置,故中书省地位较前代尤为重要。中书令通常由皇太子担任。 [34] 中书省除为决策机构外,还负责直接管辖首都大都附近的腹里地区。尚书省,主要负责财政事务,不过时置时废。
监察机构
御史台,是元朝最高监察机关。秩从一品。大夫二员,从一品;中丞二员,正二品;侍御史二员,从二品;治书侍御史二员,正三品,掌纠察百官善恶、政治得失。 [35] 御史台下设有殿中司、察院以及内八道肃政廉访司。其中,殿中司负责掌握京城官员的上朝和请假情况;察院下设二十四名监察御史,负责监察官民;内八道肃政廉访司负责对腹里(今北京、天津、河北、山东、山西一带)、辽东和两淮地区进行分区监察,共有八个。 [36]
地方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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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省制度
元朝地方最高行政机构,并为一级政区名称。简称行省,或只称省。元置中书省总理全国政务,也称都省;因大元幅员辽阔,除腹里地区直隶于中书省、西藏地区由宣政院管辖外,又于诸路重要都会设立十个行中书省,以分管各地区。在世祖、武宗朝三次短期设立尚书省主管政务期间,行中书省也相应改称行尚书省。元人称其制为:“都省握天下之机,十省分天下之治。” [37]
1260年,遵用汉法,立中书省总领全国政务,始置丞相及平章政事、左丞、右丞、参知政事等宰执官。其后,相继于各大地区建立行中书省。初期,仍沿用前代制度,以中书省宰执官出领各行省,称行某处中书省事。以后此类行省实际上已成为常设的地方行政机构。1286年铨定省、台、院、部官,罢各行省所设丞相,只置平章政事为最高长官,以与都省相区别。后来,部分地大事繁的行省许设丞相。1320年,元仁宗复罢各行省丞相,已置者皆降为平章政事。泰定帝(1324-1328)以后,某些行省又设丞相,视需要及任职者的地位而定。各行省一般置平章政事两员(从一品),右丞、左丞各一员(正二品),参知政事两员(从二品),其品秩与都省官同;左司、右司合为一,置郎中、员外郎、都事,品秩皆低于都省。元末,有些行省还增置“添设”平章、右丞、左丞、参政等官。行省掌管辖境内的钱粮、兵甲、屯种、漕运及其他军国重事,统领路、府、州、县;距离省治远的地方,另设宣慰司统之,作为行省的派出机构。 [38] 行省下有道、路、府、州、县、基层行政设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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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政院
宣政院,初名总制院。秩从一品,掌管西藏地区佛教事务和军政事务。 [39] 遇吐蕃有事,则为分院往镇,亦别有印。如大征伐,则会枢府议。其用人则自为选。其为选则军民通摄,僧俗并用。 [40] 1264年,立总制院,而领以国师。1288年,因唐制吐蕃来朝见于宣政殿之故,更名宣政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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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慰司
宣慰司,掌军民之务,分道以总郡县,行省有政令则布于下,郡县有请则为达于省。有边陲军旅之事,则兼都元帅府,其次则止为元帅府。其在远服,又有招讨、安抚、宣抚等使,品秩员数,各有差等。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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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慰使司
宣慰使司,秩从二品。每司宣慰使三员,从二品;同知一员,从三品;副使一员,正四品;经历一员,从六品;都事一员,从七品;照磨兼架阁管勾一员,正九品。凡六道:山东东西道,益都路置。河东山西道,大同路置。淮东道,扬州置。浙东道,庆元路置。荆湖北道,中兴路置。湖南道。天临路置。
宣慰使司都元帅府,秩从二品,使三员,同知二员,副使二员,经历二员,知事二员,照磨兼架阁管勾一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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澎湖巡检司
主词条:澎湖巡检司
法律制度
元始终没有颁布完备的法典。1271年以前,中原汉地断理狱讼,基本上参用金《泰和律》定罪,再按一定的折代关系量刑。1271年十一月,在建“大元”国号同时,下令禁用《泰和律》。以后曾数次修律,都没有完成。判狱量刑,主要根据已断案例,类推解释,比附定刑,与其他封建王朝相比,司法的随意性较显著。其他方面的立法行政,也都以诏制、条格(经皇帝亲自裁定或直接由中书省等中央机关颁发给下属部门的各式政令)为依据。因此,元朝的法制体系,主要是由因时立制、临事制宜而陆续颁发的各种单行法构成的。政府下令,凡在朝及地方各衙门均应分别类编先后颁发的各种格例,使官吏有所持循。 [42]
当时“内而省部,外而郡府,抄写条格,至数十册。遇事有难决,则检寻旧例,或中所无载,则施行比拟”。条格和断例岁增月积,繁杂重出,互相抵牾。元政府有时将历年所颁降的某一方面的条例重加“分拣”、“斟酌”,厘定“等第”,形成新的法律文字,作为“通例”公布。同时,对国家的政制法程,也几次召集老臣,从以往颁发的政府文书中选出“可著为令者,类集折衷,以示所司”,所成《大元通制》《至正条格》等格律类聚都是具有法典性质的政书(见《通制条格》)。
等级制度
在封建制度里,贵族处于最高统治地位,当蒙古人侵占其他国家建立政权后,就出现了包括蒙古贵族在内的多个民族贵族并立的情况,这产生了帝国该由谁统治的问题。元朝为维护蒙古贵族的专制统治权,采用“民分四等”的政策,把中国人分为四等:一等蒙古人,二等色目人,三等汉人,四等南人。这一政策维护蒙古贵族的特权。 [43]
四等人制度
等级民族
第一等 | 蒙古人 |
第二等 | 色目人(主要指西域人,是最早被蒙古征服的,如钦察、唐兀、畏兀儿、回回等,另外,蒙古高原周边的一些较早归附的部族,也属于色目人,如汪古部等。) |
第三等 | 汉人(指淮河以北原金国境内的汉、契丹、女真等族以及较晚被蒙古征服的、四川、云南人。) |
第四等 | 南人(最后被蒙古征服的原南宋境内各族,淮河以南不含四川地区的人民。) |
除此之外还有一系列不平等的政策和规定。比如禁止汉人打猎、学习拳击武术、持有兵器(例如数家才可共用一把菜刀)、集会拜神、赶集赶场作买卖、夜间走路。汉人如当兵则不许充宿卫,如当官也往往只能做副贰(虽然实际上存在很多例外情况)。遇到征伐战争,差别待遇较平时更甚。1286年,为了进攻安南,征用全国马匹,色目人三匹马中只征两匹;而汉人的马,无论多少,全部征收。以后不断征马,每次如此,汉人的马就成为珍品。 [44]
甲主”以上的地方政府首长,全由蒙古人担任。当蒙古人不够分配,或中亚人贿赂够多时,则由中亚人担任。蒙古官员大多数是世袭的,每一个蒙古首长,如州长、县长,他所管辖的一州或一县,就是他的封建采邑。他们对汉人没有政治责任,更没有法律责任。但实际上对于许多豪强是不适用的。虽然法令禁止汉人持有兵器,但大兴史氏、易州张氏、真定董氏等待遇和蒙古贵族相差无几。相反许多蒙古贫民生活却很困苦,到了元朝中叶,常有大批蒙古贫民在大都、通州等地被贩卖,色目人也有不少沦为奴仆的。实际还是地主阶级政权。 [44]
然而学术界迄今并没有发现元代有把臣民明确划分为四等的专门法令,但这种划分却反映在一些政策和规定中,例如汉人打死蒙古人需要偿命,而蒙古人打死汉人只需“断罚出征,并全征烧埋银”(原文为怯薛歹蒙古人,怯薛歹为元代一特权阶级) [45] 。
近代有研究指出,元代有相当多的汉族人在各级官府担任高级职务,其中不少是正职。在《元史》、《新元史》、和《蒙兀儿史记》所作传的864名三品以上的官员中,汉人占了409位,即总数的百分之四十七。此外,汉人在元朝官府里做正职的,除了在中书省、枢密院、御史台及行中书省担任高官的汉族大僚外,在六部中任职尚书的,亦俯拾皆是。综合来看,汉族人在元朝各级政府不仅任职显要者甚众,而且担任正职者也为数不少。认为“元朝各级官府 的高级官吏,必须由蒙古人或色目人担任,汉人最多只能做到副职”的说法并非准确 [46] 。
军事
编辑
军事机构
元朝最高军事机构是枢密院。秩从一品,掌天下兵甲机密之务。凡宫禁宿卫,边庭军翼,征讨戍守,简阅差遣,举功转官,节制调度,无不由之。置知院六员,从一品;同知四员,正二品;副枢二员,从二品;佥院二员,正三品;同佥二员,正四品;院判二员,正五品;参议二员,正五品;经历二员,从五品;都事四员,正七品;承发兼照磨二员,正八品;架阁库管勾一员,正九品;同管勾一员,从九品;掾史二十四人,译史一十四人,通事三人,司印二人,宣使一十九人,铨写二人,蒙古书写二人,典吏一十七人,院医二人。
枢密院下设有客省使、断事官、行枢密院、右卫、左卫、中卫、前卫、后卫等官署。
军种设置
蒙古重装骑兵
蒙古重装骑兵
参见:怯薛
元代军队包括蒙古军、探马赤军、汉军、新附军等。在漠北草原的蒙古人,仍过着兵民合一的游牧生活,战时出军,平时便屯聚牧养。在汉地,元朝军士的来源采取从固定的军户中签发的办法。蒙哥二年壬子(1252年)大规模籍户时,已明确地区分民户和军户。进入内地的大多数蒙古人户及被收编的金、宋降军之家,皆以军户著籍;此外还有一些汉族或其他各族人户陆续被新签为军户,一般都由中户充当。军户种田,可免税粮四顷,称为“赡军地”。蒙古、探马赤军和汉军(金国降军和蒙古政权、元政府在华北签发的军队)军户,都是通过奥鲁进行管理的。奥鲁的主要职责,一是从军户中起发丁男当军应役,并及时起征亡故军人的“户下弟男”承替军役,弥补军队缺员。二是负责按时为本奥鲁起发的当役军人置备鞍马、器杖、盘费等军需。蒙古、探马赤军的奥鲁,隶属于该奥鲁当役军士所在的万户、千户之下,汉军奥鲁由所在地区的管民官兼领。新附军(南宋降军)未设奥鲁。
防卫体系
元代武士
元代武士
元代军事防卫分为两大系统,即戍卫京师(大都)的宿卫系统和镇守全国各地的镇戍系统。宿卫军队由怯薛军和侍卫亲军构成。忽必烈建国后,保留了成吉思汗创立的四怯薛轮番入侍之制,用他们列值禁庭以充护卫侍从,常额在万人以上,由皇帝或亲信大臣直接节制。侍卫亲军用于环卫京畿,到元朝末年先后置三十余卫,卫设都指挥使或率使,品秩与万户相当(正三品),隶属于枢密院。进入内地的色目人军队,由于战斗力较强,相当一部分被编入侍卫亲军。镇戍诸军的布局,腹里主要由蒙古军和探马赤军戍守。华北、陕西、四川等地的蒙古、探马赤军由各地区的蒙古军都万户府(都元帅府)统领,隶属于枢密院。南方以蒙古军、汉军、新附军相参驻戍,防御重点是临江沿淮地区。隶属行省的镇戍诸军,方面有警时由行枢密院统领;平时日常事务归于行省,但调遣更防等重要军务仍受枢密院节制。全国军马总数,只有皇帝和枢密院蒙古官员知道,行省兵马也只有为首的蒙古官员知道。
主要战争
战争年份交战方
文永征日之役 | 1274年 | 日本(镰仓幕府) |
忽必烈灭宋之战 | 1276-1279年 | 南宋 |
弘安征日之役 | 1281年 | 日本(镰仓幕府) |
征占城之役 | 1282年 | 占城 |
征缅之战 | 1283-1287年 | 缅甸(蒲甘政权) |
第二次征越之战 | 1284-1285年 | 越南(陈朝) |
第三次征越之战 | 1287-1288年 | 越南(陈朝) |
征爪哇之战 | 1292年 | 爪哇 |
注:本表格仅显示1271年-1368年的战争,其它不计入。 [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