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주변사람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사람, 인격장애의 한 유형이다.
“회의 때 나 비웃은 거야?”
“아닌데요.”
“씩 웃었잖아.”
“문자가 하나 와서 보고 웃은 거예요.”
“한 달 전 회의 때에도 내가 말하는 동안 웃더니, 내가 그리 우습나? 만만해?”
회의 중에 한 직원이 살짝 웃었을 뿐인데, 자기를 비웃은 것이라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던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은 매사 누군가 자기를 비난하지 않는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주변 사람은 의심덩어리에 자기중심적 해석만 하는 이 사람이 너무 힘들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합리적으로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이라면서 힘들어하지 않는다. 가족과 친구 관계에서도 의도를 의심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모든 상황을 장악해야 안심이 된다. 이 사람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인격은 한 사람의 일관되고 광범위하며 자연스러운 판단과 행동, 정서반응의 총합이다. 그런데 이 인격으로 인해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 피해를 주고, 그로 인해 사회생활의 전반적 적응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이를 인격장애(personality disorder)라고 한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삶의 한 시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들은 자신의 증상을 ‘본질적 나’의 구성과 다르다고 인식하며 그 문제 자체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인격장애의 경우 인격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신을 구성하는 본질의 일부이기에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아에 잘 어울린다고 여긴다. 즉 자신이 타인에게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불편해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치료를 통해 변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불안증이나 우울증을 ‘신발 속의 자갈(pebble in the shoe)’로 비유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정작 신발 안의 돌 때문에 걸을 때마다 통증을 느낀다는 의미다. 반면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입 안의 마늘(garlic in the mouth)’로 비유한다. 마늘을 좋아해서 양껏 먹었는데, 말할 때마다 마늘 냄새가 진동해서 주변 사람들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인격을 정의하고 유형을 분류하려는 시도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년경~기원전 347년경)은 일찍이 성격유형을 5가지로 분류해 환경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타고난 면이 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년경~기원전 322년경)는 인격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에 대해 어느 정도 현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병적인 성격 특성은 타고난 결함이고 정상범위 내에서 훈련이나 습관이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또 전체적으로 평균 범위에 속해 있는 것이 정상을 의미하며 어느 쪽이건 특성의 양극단에 속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했다.
인간의 기본적 습성에 대한 분류를 토대로 기원전 300년경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 기원전 372년경~기원전 288년경)는 성격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최초의 책『성격론(The Characters)』을 펴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12년 후배로 30가지의 성격 유형을 분류하고 각각에 대해 짧게 묘사했다. 여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정상범위 안의 성격 유형뿐만 아니라 현대 정신의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격장애 유형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18번째 유형인 ‘의심 많은 남자(suspicious man)’의 특징을 “모든 사람이 자신을 속이려 한다고 믿는다”라고 묘사하며 “하인을 시장에 심부름 보내고 몰래 다른 하인을 따라가게 해 돈을 얼마나 쓰는지 감시한다”라고 기술했다.
이 글의 앞부분에 예로 든 사람이 이 경우에 속하는데, 오늘날에는 ‘편집성 인격장애(paranoid personality disorder)’로 분류한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성격이란 동전에 각인을 찍듯이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직조된 영구적인 활동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여겨왔던 것이니 인격장애에 대한 연구도 그만큼 뿌리가 깊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8세기 근대의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부각되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18세기 이후 한 사람의 특징적 성질을 설명하는 데 ‘인격(personality)’이란 단어를 쓰고, 정상부터 병적인 것까지 일련의 연속선 안에 있다고 설명했다.
근대정신의학이 차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19세기 초반, 프랑스의 필립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년)과 장 도미니크 에스퀴롤(Jean Dominique Esquirol, 1772~1840년)은 괴이한 생각과 행동 패턴을 보이지만 광인은 아닌, 일군의 사람들이 있다고 보고했다. 피넬은 정신과 용어로 ‘인격장애’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이해력·판단력·지각능력·기억력에는 문제가 없고 일반인이 보기에도 정상으로 보이지만 작은 자극에도 쉽게 충동적인 공격성을 보이는 일부 남성들을 묘사하며 ‘망상이 없는 조증(manie sans délire)’이라는 진단명을 붙였다. 에스퀴롤도 ‘이치를 따지는 편집광(monomanie raisonnante)’이라는 정신병리를 묘사하면서 현재의 ‘편집성 인격장애(paranoid personality disorder)’와 유사한 유형을 소개했다.
영국에서도 제임스 프리차드(James Prichard, 1786~1848년)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 특징을 보고했다. 정신과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질환으로 진단해서 법적 처벌을 피하게 하면 안 될 것이라는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초창기의 대표적인 인격장애는 아마도 ‘사이코패스(Psychopath)’ 내지는 ‘반사회성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편집성 인격장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부터 인격장애의 원인에 대해, 병적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는 천성론(nature)과 본질적으로는 모두 똑같이 태어났지만 자라온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인격장애가 생긴다고 보는 양육론(nurture)의 두 가지 관점을 체계적으로 주장하는 학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8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장 마르탱 샤르코(Jean-Martin Charcot, 1825~1893년)가 히스테리 환자를 최면으로 치료하고,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년)가 정신분석을 확립하면서 정신분석 발달이론이 환자의 인격 발달단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었다. 프로이트와 제자 칼 아브라함(Karl Abraham, 1877~1925년)은 양육론의 관점에서 무의식적 갈등이나 어린 시절에 경험한 트라우마가 구강기·항문기·성기기의 정신성 발달에 정체를 가져와 성인이 된 후에도 일상적 판단이나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각각 의존성 인격장애(dependent personality disorder)·강박성 인격장애(obsessive compulsive personality disorder)·히스테리성 인격장애(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가 된다는 이론을 확립했다. 이는 1900년대 초반 인격장애 이론의 기반으로 자리를 잡았고, 프로이트는 1909년 「성격과 항문 성애(character and anal eroticism)」라는 논문에서 정신분석적 성격모델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비슷한 시기인 1910년경, 독일의 정신병리학자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 1856~1926년)은 인격장애가 편집망상형 정신증과 정동 정신증 사이의 생물학적 스펙트럼 안에 존재하고, 정신증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오랜 기간 일관된 패턴을 보이며, 정상적 생활을 어렵게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를 통틀어 정신병질 인격(psychopathic personality)이라고 명명했고, 인격장애는 타고난 기질적 결함이며 한 번 발현되면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정신병질 인격의 특징적 요인은 정상 범위 바깥으로 치우쳐 있어 정상적 성격에서는 보기 드물다고 본 것이다. 크레펠린은 1903년 『정신병리 교과서(Lehrbuch der Psychiatrie)』 7판에서 인격장애의 유형을 타고난 범죄자, 의지박약, 병적 거짓말쟁이, 편집광의 네 가지로 나누었고, 1915년 발간한 8판에서는 7가지 유형으로 확장했다. 이는 천성론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와 크레펠린의 두 이론을 모두 아우른 것이 1927년 쿠르트 슈나이더(Kurt Schneider, 1887~1967년)의 분류다. 정상적 인격기질에서는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편향적 인격 유형들을 찾아내서 처음으로 10가지 인격장애를 분류했고, 정신병질 인격을 “성격으로 인해 자신과 사회에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라 정의했다. 슈나이더가 분류한 인격장애 유형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포괄적 내용이어서 현대의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과 국제질병분류(ICD)에서도 유형 분류의 기본이 되었다.
현대적 의미의 인격장애는 한 개인의 내적 경험이나 행동이 문화적 기대에서 상당히 벗어난 채 인지, 감정, 대인관계, 충동조절 중 두 가지 영역 이상에서 지속적 패턴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광범위한 삶의 영역에서 일관되고 부적절한 판단과 감정, 대인관계 패턴을 보일 때 그 사람의 인격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10대 후반이나 20대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특징적인 패턴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야만 역시 ‘인격의 문제’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인격장애라고 진단하기 위해서는 일관성과 광범위성이 중요하다.
마크 짐머만(Mark Zimmerman)은 2005년 발표한 논문에서 정신질환자 중 최소 50퍼센트의 환자들을 인격장애로 진단할 수 있다고 보고했고, 스벤 토거센(Torgersen)은 2009년 논문에서 정상집단의 약 10퍼센트 정도를 인격장애로 진단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같은 우울증 환자라도 인격장애가 동반된 경우 증상이 더 심한 데다 치료반응도 좋지 않으며, 알코올 중독 등의 다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가족간 갈등이 더 많다고 일관되게 보고되었다.
인격장애를 정의할 때 또 한 번 부딪치는 어려움은 이를 차원 모델(dimension model)로 판단할지 카테고리 모델(category model)로 판단할지에 대한 문제이다. 차원 모델은 일반적인 스펙트럼 안에서 양극단에 속하는 인격을 질환으로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이 극단적으로 심해서 일상생활을 못한다면 회피성 인격장애(avoidant peronality disorder)로 진단할 수 있다. 반면 카테고리 모델에서는 정상인에게서 거의 볼 수 없는 병적인 기질과 특징이 존재하고, 이 기질의 유무로 인격장애를 진단한다. 조현병 증상에 환청이나 망상이 있어야 하듯이, ‘UFO의 존재를 굳게 믿고 이를 찾기 위해 사회생활을 포기하는 것’처럼 특이하고 기이한 행동양태를 보일 때 분열형 성격장애(schizotypal personality disorder)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차원 모델의 한계점은 어디서부터 병적이라고 판단해야 할지 모호해 분명한 진단이 어렵다는 점이다. 내향성과 외향성처럼 공통적 기질의 스펙트럼 안에서는 더욱 구분하기 어렵고, 회피성 인격장애와 사회공포증(social phobia) 같이 비슷한 문제를 갖는 경우 진단은 더욱 어려워진다. 카테고리 모델도 나름의 한계가 있다. 먼저 인격장애를 진단하다 보면 딱 하나의 진단만 내리는 경우보다는 두 개 이상 내리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배타적인 기질만 갖고 있다면 다른 진단이 나올 수 없지만, 실제로는 여러 진단이 교차하는 것이다. 또한 같은 인격장애로 진단받았다 하더라도 환자들의 두드러진 증상들은 제각각이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현대 정신의학계는 인격장애를 새로이 분류하기 시작했다. 1952년 처음 나온 DSM 1판은 정신분석의 영향으로 스트레스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기질을 강조했고, 이 기조는 DSM 2판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 DSM 3판에서는 현대 인격장애 분류의 근간을 이루는 변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다축진단체계인데 1축에는 일정 시점에만 증상이 나타나는 정신질환을, 2축에는 인격장애·지능·특징적인 방어기제와 같이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속성들로 나누어 진단하게 했다. 기존의 정신분석적 관점을 거의 없애는 한편, 특징적 문제 행동이나 패턴을 증상으로 기술한 다음, 일정 개수 이상일 때 진단할 수 있게 했다. 10개의 인격장애를 3개의 군집으로 분류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 강박성 인격장애는 남성에게서 더 자주 진단된다. <ⓒ Lars Klintwall Malmqvist> 2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정신분석적 이론의 영향이 강해 임상 현장에서 진단의 객관성이 결여되기도 한다. <출처: the psychiatry> |
1980년 이후 약 30여 년간 이러한 인격장애 진단을 기반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진단 방법 각각의 장단점도 분명해졌다. 경계성 인격장애와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tic personality disorder)는 정신분석적 이론의 영향이 강해 임상 현장에서 진단의 객관성이 결여되는 반면, 한 가지 진단이 어려운 환자를 임상적으로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는 상당히 유용했다. 진단기준에 있어서 성과 문화의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해졌다. 히스테리성·경계성·의존형 인격장애는 진단기준이 되는 증상들에 정상적 여성성이 많이 반영되어 여성에게 더 빈번히 나타날 수밖에 없고, 반면 반사회성·강박성 인격장애는 증상에 남성적 행동이 많이 포함되어 남성에게서 더 자주 진단된다. 정서적 출렁임, 나태함과 근면의 평가,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향, 집요함 등은 사회문화적 배경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DSM 4판과 5판 책 표지. 현재 5판에서는 10개의 인격장애가 수록되어있다.
1994년 DSM 4판까지 나온 후까지도 인격장애 분류에 한계점이 지적되었다. DSM 5판을 준비하던 특별위원회는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인격장애 정의와 분류를 시도했다. 카테고리 모델과 차원 모델을 통합한 하이브리드 모델(hybrid model)로 인격장애를 분류했고, 증상의 심각도를 기술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인격장애를 정의할 때 ‘자기(self)’와 ‘대인관계’의 기능 문제를 핵심 증상으로 보았는데, 이는 기존 정신병리학 위주의 네오크레펠린학파적 관점에서 벗어나 정신분석적 이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현대정신의학계가 다시금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의 현대적 해석을 주목하게 되었다는 사인으로 해석할 만했다.
DSM 5판의 인격장애 준비위원회가 발표한 혁신적 분류는 많은 관심을 불러왔지만, 2013년 5월 미국정신과학회 총회의 이사회에서 급격한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대 의견이 많았다. 결국 새로운 인격장애 분류는 ‘더 많은 연구와 관심을 가질 부분’으로 밀려났고, DSM 5판에는 이전 판의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됐다. 그 결과 현재 10개의 인격장애가 본 진단에 수록되어 있다. 편집성, 분열성, 분열형, 반사회성, 자기애성, 경계성, 히스테리성, 회피성, 의존성, 강박성 인격장애 등은 각각 사고, 감정, 불안의 특징을 갖는 3개의 군집으로 나뉘며, 군집 안에서 서로 생물학적 기반을 공유해 증상도 유사한 면이 많다. 우울성 인격장애와 피동공격성 인격장애는 상세불명의 인격장애에 수록돼 있다.
이처럼 인격장애의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격의 분류와 정의는 여전히 더 발전된 방향을 찾고 있다. 어떤 요인이 사람의 인격을 질환의 범주로 놓을 만큼 결정적이었는가의 문제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한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인격 전체를 평가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첫댓글 자기애성 인격장애에 편집증까지 가진신 분 주위에서 겪어보았어요.
참으로. . . 답이 없더군요 피하는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