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석가모니(釋迦牟尼)는 불교의 교조이다.
서양에서는 가우타마 붓다(영어: Gautama Buddha)라고 칭한다.
샤캬족 국가인 샤캬 공화국(오늘날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하거나 고행을 하였으나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가 긴요함을 알았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선정을 수행하여 35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Buddha, 佛陀)가 되었다.
윤회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신을 믿으면 극락 간다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신자들은 불교 석가모니(釋迦牟尼)교주를 믿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 모르는 불교 신앙생활을 했다고 보아도 된다.
원래 석가모니(釋迦牟尼) 불교는 소승불교다.
소승불교의 발달 과정을 살펴보면, 석가모니때 발달했던 원시 불교와
아소카왕(Asoka, BC304∼BC233, 印度를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제국의
제3대 왕)이 불교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했을 때의 불교를 통틀어
소승불교라고 한다.
소승불교는 아함경이 중심이다.
아함이란 문자 그대로 전승(傳承) 또는 전승(傳承)한 가르침이며,
스승에서 제자로 계승한 것을 뜻한다.
제자들은 스승이 돌아가시자 스승의 귀한 가르침이 잊혀지지 않고
또 변질되지 않도록 스승의 말씀들을 결집하였다.
이를 위하여 500 제자들이 모여 다문제일의 아난다와 다른 제자들이
자신들이 스승으로부터 들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전체 앞에서 여시아문,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여 그 내용을 말하였다.
꼭 하고 싶은 얘기다.
소승불교 자취가 묻히고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죽은지 6,7백년 후에
나가르주나 용수(龍樹)가 대승불교(大乘佛敎)창시했다.
요즘 같으면 사이비 종교(似而非 宗敎) (Pseudo-religion, Cult)라고
비판을 받고 대다수가 받아드리지 않았거나 믿지 않았을 것이다.
대승불교 大乘佛敎
인도에서 동방에 전해진 불교의 한 종파. 대승불교는 석가 입적 후
500년이 지난 기원전 1세기경, 20여 개의 부파가 난립하던
부파불교(部派佛敎) 말기의 기존 불교를 소승(小乘, Hinayana)이라고
비판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불교사상 운동이었다.
‘대승’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큰(maha) 수레(yana)’란
의미로서, 대승불교는 개인의 깨달음만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모두 제도(濟度)해
정토(淨土)의 피안(彼岸)에 함께 다다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승불교의 기본 경전은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등이며,
창시자는 다.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등에 의해 계승되어 인도 굽타왕조 때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7세기 중엽부터 밀교(密敎)가 성행하고,
12세기 말부터는 이슬람교와 힌두교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서 회생한 후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
‘북방불교’란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성행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승불교 [大乘佛敎] (실크로드 사전, 2013. 10. 31., 정수일)
불교에서 소승불교에 대비해 보살사상을 강조하는 불교운동.
정의
불교에서 소승불교에 대비해 보살사상을 강조하는 불교운동.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를 뜻하는 범어 마하야나(Mah?y?na)의 한역어로
소승(小乘), 즉 히나야나(H○nay?na)에 맞서는 말이다.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승교도들은 스스로를 대승이라고 부르고,
그 이전의 부파 불교교단들을 가리켜 소승이라고 낮추어 불렀는데
‘대승’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불교교단은 장원을 중심으로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일정한 지역에 스투파(Stupa, 塔)가 건립되고 수행자가 거처하는
장소에 정사(精舍:수도하는 곳)를 세우는 등 교단은 안정된 기반 위에서
각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전국적 유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경제적 기반은 신자들이나 지역의 장자들이 시주한 토지였음이 확실하다.
교단의 경제적 안정은 불교교리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이를 ‘아비달마’라고 한다.
아비달마란 말은 범어 아비다르마(abhidharma)의 음사(音寫)로서
문자 그대로 ‘법(法, dharma)에 대한(abhi)’ 연구를 뜻한다.
그것은 법의 이론적 분석과 종합으로서 여기서 수립된 교리체계는 매우
복잡하고 또한 치밀한 것이었다.
아비달마 교학의 사상적 특징은 인간의 내면세계와 객관세계를 분석하여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한 데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문제에 이르면 각 부파에 따라 다시 입장이 달라진다.
삼세실유(三世實有: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있음)니
법체항유(法體恒有:진리의 몸은 영원함)니 하는 주장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본래 법이라는 것은 종교적 체험 속에서 자각되고 행위를 통하여
실천되어야 한다.
그 법을 외부적인 관점에서 대상화하고 논리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청정한 ‘생명력’을 생활 속에서 기르려는 불교 본연의
실천적 성격과 어긋나는 것이다.
법의 연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연구의 진전이
곧 불교 본래의 종교성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출가수행자의 재가 신자에 대한 교화도 형식적인 설교로
전락하여 비구와 재가신자의 관계는 공덕을 쌓게 하는 매체로서의
기계적인 기능만이 정착되었다.
교학의 연구는 진전되었지만 그것은 일상생활 속의 재가신자와는
동떨어진 깊숙한 승원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부 엘리트들의
사변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교단은 외형과 내면이 모두 세속화의
흐름과 타락의 기풍을 낳고 있었다.
이처럼 부파불교는 지나치게 번삽한 이론 전개를 일삼아 불교를 일부
출가자들만의 전유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출가수행자들이 중생을 향한 이타행보다는 그들의 수행 목표인
아라한과를 얻기 위한 자리 추구에만 몰두하는 폐단도 낳았다.
이러한 교단 상황에 대한 반발과 종교적 반성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 운동이다.
그와 같은 움직임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비달마 불교의 모든 모순을 극복하고 불교의 이론적인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을 동시에 정비하고자 했던 움직임이 곧 대승불교운동이다.
당시 대승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우선 대상의 실체를 인정함으로써
아집과 법집을 낳게 했던 유부(有部:아비달마 불교)의
법체항유설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자리행만을 고집하여 점차 대중의 지지를 상실해 가고 있던
아라한 중심의 불교를 더욱 대승적인 수행 목표인 보살 중심의 불교로
전환하여 불교에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었다.
중관(中觀)과 유식설(唯識說)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대두된 대승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관사상은 아비달마 교학의 실유(實有)사상을 타파하고 공관(空觀)에
입각한 중도의 진리를 제시했고, 유식사상은 불교의 초보적 심리설을
더욱 고차원적인 수준의 대승적 심리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사상은 대승불교의 이론적 토대이자 그 후 중국불교의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이해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중관사상(m?dhyamika)은 불멸 후 600-700년경 남인도 사람
용수(N?g?rjuna)가 확립시킨 이론이다.
그는 제2의 석가모니 또는 팔종(八宗)의 조사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정도로
불교사상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흔히 인간들은 존재의 고정적 실체성을 믿는 경향을 띤다.
그 결과 대상의 영원불변성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은 곧 여러 가지
번뇌망상을 낳는 원인이 된다.
용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존재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대상에 대한
어떠한 마음의 집착도 초월한 경지, 그것이 바로
무상정득각의 세계라고 한다.
그 세계는 생(生)과 멸(滅), 상(常)과 단(斷), 일(一)과 이(異),
거(去)와 래(來) 등 여덟 종류의 극단을 부정한 중도의 세계이다.
용수의 중관사상은 바로 이 팔부중도관(八不中道觀)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입장은 일체제법의 무자성(無自性:영원한 자성이 없음)을 강조하는
반야공사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유식사상(vijnanav?din)은 소승불교의 교학적 약점을 보완하고,
용수의 반야공사상이 지나치게 허무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게 된 데 대한
반발로 나타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상의 기초자들로서는 미륵(Maitreya,彌勒), 무착(Asa○ga,無着)
그리고 세친(Vasubandhu,世親) 등을 들 수 있다.
유식(vijnaptim?trat?)이란 말은 인간을 중심으로 볼 때 정신과 물질 등
내외의 모든 존재들은 오직 심식(心識)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며
이 심식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정신과 객관세계의 관계에서 정신을 능동자, 객관세계를
수동자로 보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신의 소유자는 만법의 주인이며 선악제법은 오직 이 정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유식에서 말하는 식은 일반적으로 아뢰야식(?laya-vijn?na)을 가리키지만,
8종의 식, 즉 안·이·비·설·신·의의 육식과 말나식(manas-vijn?na)
그리고 아뢰야식 모두를 가리키기도 한다.
아비달마 교학까지는 6식을 들고 있으나 유식학파에서는 6식 속에서
이들 식을 일으키는 운동 주체로서의 근원적 식을 상정하고 이를
아뢰야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말나식도 상정하게 되었다.
아뢰야식이 제8식, 말나식이 제7식이 된다. 제7말나식은 제6식의 의지처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 자체와 제8아뢰야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식이다.
특히 이 식은 아뢰야식을 상대로 끊임없이 사량(思量), 집착하며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등 근본 번뇌를 야기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그리고 아만(我慢) 및
아애(我愛) 등의 근본 4번뇌를 야기케 하여 제6의식 등 다른 식에게도
많은 지말전뇌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선과 악의 상대적인 작용을 끊임없이 발생시키고
많은 업력을 조성케 하여 생사윤회하는 고통의 원동력이 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제8아뢰야식은 지금까지 말한 모든 식의 근본식이 되며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이는 아뢰야식이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유식사상에 따르면 모든 식의 행위와 육체적 행위는 선악의 업력이 되어
이 아뢰야식에 보존된다고 한다.
이는 곧 아뢰야식의 능동적 기능을 표현한 것으로 이를
능장(能藏)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아뢰야식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그 업력을 받아 들여 보존하는
역할을 하므로 소장(所藏)이라고도 한다.
또한 아뢰야식이 집장(執藏)의 뜻도 갖는 것은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된 망집(妄執)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모든 업력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선악업력을 다른 식에 공급하여 발동케 하므로 모든 선악의 행동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이 식의 작용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셈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과거세의 업력을 보존한 이 식이 먼저 태어날 것이며,
내생으로 떠날 때도 금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가 육체로부터
맨 마지막에 떠난다.
그것이 육도윤회의 인연을 따라 다시 이 세상에 생명체로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뢰야식은 현재의 생명체가 내외의 사건과 현실을 일으키게 하는
주체가 되며 동시에 그 업력에 따른 생사윤회의 주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아뢰야연기라고 부른다. 중관과 유식사상 이외에도 대승불교
이론에는 ‘모든 중생들에겐 부처가 될 씨앗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주장하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등이 있다.
인도에서 일어난 대승불교사상은 그 뒤 중국으로 건너가 천태와 화엄
그리고 선 및 정토사상 등으로 발전되어 갔다.
법의 뿌리는 하나이되 그 가지는 점차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던 것이다.
한국불교는 이처럼 중국화된 대승불교를 받아 들여 지난 1600여 년 동안
때로는 영화를 누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질곡을 겪기도 하면서
그 끈질긴 사상의 생명력을 오늘에까지 이어 오고 있다.
대승불교의 종교적 특징은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의 표상인
보살(Bodhisattva) 사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보살정신의 핵심은 자신이 피안(깨달음의 세계)으로 건너 가기 전에
다른 모든 존재들을 먼저 피안으로 건너게 한다는 ‘이타행’에 있다.
소승의 이승(聲 緣覺:pratyeka-buddha)은 자기 자신만이
차안(此岸:번뇌망상이 있는 생사의 세계)을 버리고 피안에 가려고
노력하며 차안에 남은 사람들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여기는 마음이 없다.
대승이란 자리(自利)냐 아니면 이타(利他)냐 하는 이원적(二元的)
대립의 차원을 넘어 자리와 이타가 함께 공존하는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이타’는 자기를 희생하고 오직 남을 위해
산다는 의미의 이타주의(利他主義)와는 다르다. 거기서는 자리와
이타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보살은 이승(二乘)처럼 차안을 버리고 피안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차안의 모든 사람을 피안으로 건너게 해준다.
즉, 차안과 피안을 왕래하는 나룻배의 주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차안과 피안을 왕래하는 바탕이 되는 입장이며, 세계 종교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불교의 고유한 입장이다.
‘생사즉열반’이라는 말은 불이(不二)를 실천하는 보살의 선언이다.
대승불교는 붓다를 초세간적(超世間的) 존재로 보며 역사적 인물로
나타난 붓다는 그 화신(化身)으로 규정한다.
불교도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소승불교에서는 아라한(阿羅漢, arhat)이라고
부르는 깨달은 성인이다.
그렇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편협한 이기적 발상이라고 보고,
깨달음에 이르렀으나 다른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成佛)을 뒤로
미루는 보살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보살의 가장 큰 공덕인 자비(慈悲)가 원시불교에서 강조했던
지혜(智慧)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보살을 통해 생기는
공덕은 중생들에게 옮겨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러한 관념이
우리 나라와 중국·일본의 정토교(淨土敎) 같은 타력적(他力的)
신앙을 낳기도 했다.
이처럼 대승불교는 어떤 특정한 인간이 특정한 교리를 설하여
성립시킨 종교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몇 가지 종교 흐름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불교의 대중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서원을 통해 구원을 설하는 흐름도 있고, 또한 참선의
경험으로 공과 반야의 지혜를 설하는 ≪반야경≫ 유파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불타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는 가르침도 있다.
이러한 갖가지의 흐름 속에서도 대승불교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법의 자각을 중시하는 지혜의 요소와 보살로
불리는 수행자들이 표방한 자비행의 두 요소를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는
입장이 곧 그것이다.
참고문헌
『대승불교 개설』(평천창 외, 정승석 옮김, 김영사, 1986)
『대승불교의 사상』(우에다 요시부미, 박태원 옮김, 민족사, 1989)
『문수보살의 연구』(정병조, 한국불교연구원, 1988)
『불타의 세계』(나까무라 하지매 外, 김지견 역, 김영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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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Kristos인의 일부 공통점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로마서 10장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36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많은 분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서는 절대로 하나님은 볼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천국에 가면 남녀가 참 좋은 여건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상상을 하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 교제 (異性交際)는 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2장 25절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20장 35절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이러므로 우리는 이 지상에 살 동안에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유지해야하며
독신 생활보다는 결혼해서 부부가 함께 생활해야 합니다.
사별을 하신 분에게는 재혼을 허락하신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부부간에 적절하게 육체적인 관계를 즐기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즐거움입니다.
또한 특별한 준비 없이 간단한 입맞춤으로 상대의 스킨(skin)을
감미롭게 해준다거나 쾌감을 위해 애무를 해주는 것도
부부간의 행복을 고조시켜 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성경말씀 여기에 옮겨 적어 올립니다.
전도서 4장 9∼12절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죽으면 영혼은 그렇게 소망했던 천국으로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 이전에 기대했던 천국을 심오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나 성도님들은 천국에 가면 서로 만날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선후배 믿음안에 형제자매…….
그러나 호홉이 끊어지면 우리의 생각은 소멸되고
기억하고 싶은 좋은 일이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쁜 기억도
결국에는 다 잊어버린 다는 것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시편 146편 4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전도서 2장 16절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죽음과 일반이로다
욥기 19장 26절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8절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늘 나라에서는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늘 나라에서는 우리의 령(靈)이 영생복락(永生福樂)을 누린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타
구약성서는 역사와 예언을 기록해 둔 것이며
신약성서 중 일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중 소수는 예를 들어하신
내용있음 참고하셔야 합니다.
보기 예
마태복음 7장 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들보 국어사전
뜻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을 건너질러 도리와는
‘ㄴ'자 모양, 마룻대와는
‘十’자 모양을 이루는 나무
출처 : 김용호 《영원의 양식》 중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출애굽기 33장 20절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다.
요한복음 4장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살과 뼈가 없다
누가복음 24장 39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나님은 그림자도 없다.
야보고서 1장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볼 수 없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요한일서 4장 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