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문학 기행
조 흥 제
동작문인협회에서 2018년도 춘계문학기행을 전라북도 전주(全州)로 정했다. 전주는 몇 번 가봤지만 문화유적을 보러 가지는 못했다. 더구나 문단에서 비련(悲戀)의 작가로 꼽히는 최명희의 혼불문학관에 간다고 하여 신청했다.
5월 12일 이슬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가운데 회원 42명은 동작문화원 앞에서 대절 버스를 타고 7시 40분 출발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논에는 물이 가득가득 담겨 있다. 모를 내려고 준비중이다. 금년에는 비가 자주 와서 모를 제때에 내니 하나님께서 이 땅을 축복해 주시는 것 같다.
11시 경 전주에 도착하여 전주역사박물관에 먼저 들렀다. 전시품은 가야시대의 유물이 많았다. 가야는 경남지방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라도지방까지 확장되었었다는 문화해설사의 해설이었다. 고대 유물이 무척 많아 중앙박물관을 무색케 했다.
점심은 나들벌 한정식당에서 꽃게탕을 곁들인 전라도 특유의 여러가지 반찬이 딸려 나왔다. 이 고장 특산물인 전주비빔밥을 못 먹어 좀 아쉬웠다. 몇 년 전 대한문학 세미나를 전주에서 열었었는데 저녁은 전주 비빔빕이 나왔었다. 큰 놋대접에 울긋불긋한 길이가 일정한 나물들을 뺑 돌아가면서 가운데로 눕혀 놓아 먹거리가 아닌 예술품 같았다. 밥을 쏟고 고추장을 듬뿍 넣어 썩썩 비벼 먹는 맛을 어디다 비기랴. 하지만 오늘 나온 반찬은 그보다 가짓수가 훨씬 더 많아 전라도 식문화의 진수를 보는 듯 했다.
어진(御眞)박물관에 가니 개량한복을 입은 40대의 예쁜 여자문화해설사(안혜련)가 안내를 맡았다. 전주는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고조부 대까지 살다 어떤 사건으로 강릉을 거쳐 함경북도 영흥으로 이사 갔던 고장이어서 조선왕조에 관한 유적이 많다. 어진은 왕의 초상화로 태조부터 여러 왕들의 것이 전시되어 있다. 어진을 그릴 때는 화가 혼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일곱 명이 각각 한 부위씩 그려 맞추고 더구나 입체적으로까지 그렸다니 특이한 제작 방법이다. 태조의 어진은 1872년 고종 9년에 그린 것이다. 생존 시에 그린 어진은 여러 번의 전란으로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니 안타깝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보관 서고(書庫)에 갔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밑층은 빈 공간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순종까지를 기록한 책(1,893권)으로 승정원(비서실)일기(3,386권) 다음으로 큰 기록이다. 이런 기록은 세계 역사상 유일한 기록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에 등재되어 있다. 승정원 일기는 전란으로 상당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 한 군데 두지 않고 4군데 부산하여 보관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사관(史官) 제도를 두어 왕의 앞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적었다. 심지어 화장실에 간 것 까지 기록했다. 왕은 귀찮았지만 못하게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무얼 적었는지도 볼 수 없게 제도를 만들었다. 성군 세종대왕도, 폭군 연산군도 보자고 했지만 사관은 보여 주지 않았다. 사관은 퇴근하여 집에서 하루 종일 적은 것을 정리하고 한 달이 되면 사관청에 제출했다. 거기서는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연말에 정리하여 여러 부를 만들었다. 그걸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지방 여러 곳에 서고를 짓고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다 불타고 전주본만 남았다. 내장산 굴속에 감춘 사람에 의해서였다. 임진왜란 후 다시 네 부를 만들어 전주, 적상산 안국사, 오대산, 마니산 등에 사고(史庫)를 짓고 보관했다. 하지만 오늘 날 전주 서고(書庫)에 책은 없고 만들던 사람들 여섯 명이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사진이 있고, 펼쳐진 책들만 있다. 모조본이라도 쌓아 놓았으면 좋지 않을까?
명륜당에 갔다. 왕과 어진에 제사 지내는 곳이다. 명절이나 기념일 뿐 아니라 초하루 보름에까지 지냈다니 그 비용이 얼마인가. 고려 때는 불교 때문에, 조선은 유교(儒敎) 때문에 국고 손실이 많았다.
다음에는 한옥마을로 갔다. 마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한옥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9만 평에 650채가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우리가 서 있는 산에 이목대, 오목대가 있는 전주성터로 후백제의 견훤이 성을 쌓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최명희문학관에 갔다. 최명희는 혼불 10권을 쓰다 병이 나서 죽으면서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갑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람이 죽을 때는 더 살려고 아둥바둥 몸부림치는게 보통인데 최명희는 짧은 인생(50세)을 살다 가면서도 오히려 감사했으니 가슴 뭉클하다. 최명희 문학관은 전주 뿐 아니라 남원에도 있다고 한다. 전주 문학관은 한옥 한 채를 문학관으로 꾸민 아담한 문학관이다. 여러 가지 사진과 육필 원고, 자, 볼펜, 가위 등 문방사우(文房四友)가 있다. 혼불을 나선형(螺旋形)으로 쌓은 것이 특이하고, 원고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이 1m는 넘을 것 같아 대가다운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정비석 등 과거의 문인들은 자기만의 원고지를 인쇄하여 썼다고 한다. 이제는 원고지에 글을 쓰지 않으니 필체 뿐 아니라 원고지 자체도 기념품이 되리라.
최명희는 1947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기전여고와 보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진 빛’으로 등단. 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에 『혼불』 1부를 발표하여 문단에 주목을 받았다. 혼불은 양반가 한 가정의 흥망을 소재로 쓴 것이다. 단편 ‘정옥이’, ‘만종’ 등을 발표하는 한편 혼불을 2부에서 5부까지 신동아에 연재하여 97년 전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지병인 난소암을 앓으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계속 집필하다가 끝맺지 못하고 1998년 세상을 떠났다.
내가 최명희를 존경하는 까닭은 병을 치료하면서 천천히 글을 쓰면 좋았을 것을 무리하다 쓰러진 것이 안타깝지만 한편 부러워서다. 이런 작가가 또 있다. 조선일보의 이규태기자다. 그는 33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연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59년 공채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사회부 기자로 뛰면서
『대지』로 노벨상을 받은 펄벅 여사가 방한하여 경주에 갈 때 동행했다. 기차 타고 가면서 늦은 가을이었던지 감나무에 잎은 떨어지고 새빨간 감이 몇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펄벅 여사가 “왜 감을 남겨 놓았느냐”고 물었다. 이기자는 “겨울에 까치가 눈 속에 먹을 것이 없으면 먹으라고 남겨 놓았다.”고 했더니 여사는 무릎을 탁 치면서 “그것 한 가지만 봐도 한국에 오기를 잘 했다.”고 했다. 그 기사가 신문이 나가자 반응이 좋았다. 몇 년 후 조선일보에 장편 『세종대왕』을 연재하던 박종화에게 사에서는「한국 근대사」를 쓰라고 했더니 수락했다. 하지만 며칠 후 못하겠다고 했다. 사고(社告)까지 나갔는데 취소할 수도 없어 큰일 났다. 사장은 이규태기자에게 그 글을 쓰라고 했다. 이규태는 연세대 화학과 출신인데 역사물을 쓰라니 격에 안 맞지만 사장은 사람 볼 줄을 알았던가 보다. 이규태기자는 바짝 긴장하여 도서관으로 출근하여 자료를 모았다. 집필하여 「개화백경」이라는 제목의 글을 1주일에 한 번씩 문화면 1개면에 게재했는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예정보다 훨씬 긴 70 회를 연재하였다. 그는 한국학에 미래가 있다고 보고 계속 연구하여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독보적인 책을 냈는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이규태 코너’라는 난을 만들어 주고 매일 쓰라고 했다. 이규태 코너는 원고지 6매에 달하는 수필 형 칼럼이다. 그걸 24년 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썼으니 초인적인 끈기였다. 지병으로 집필을 계속할 수 없었지만 73세에 죽는 날 아침까지 글을 썼다니 대단한 집념이다. 나는 일주일에 수필 한 편 쓰기도 힘들다. 글을 쓰다 진력이 나면 무조건 쉰다. 그래서 인지 깊이 있는 작품을 쓰지 못하는데 두 분은 글을 잘 쓰기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음까지도 피하지 않았으니 그 정신이 부럽다.
5시 경 전주를 떠나 8시 경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번 문학기행을 준비한 은학표 회장님, 안철환 사무총장님, 박숙자 사무차장님, 항상 솔선수범하여 수고하는 조형은회원께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