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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고향, 부산을 떠난지 어연 36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렸고, 부산을 마지막 가 본지도 십수년이 지난지라,
이번 기회에 물론 동창친구들도 만나겠지만, 코흘리개 시절 함께 뛰놀던 동네동무들도 보고 싶었고, 아직도 눈에 선한 동네 골목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4월 10일로 예정되어있는 부산 양정국민학교 제10회 동기모임에 먼 길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가겠다 일찍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이번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부러 부산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문득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죽음의 대장정에서 살아남은 연어들은 수역만리 타향에서 어생^^을 즐기다가도 바다를 등져야 할 때가 다가오면 고향을 떠날 때 겪었던 고통을 마다 않고 기어이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회귀한 다음에야 생을 마감한다.
근자들어 부쩍 고향이 마음에 다가오는 것을 보면 아직 인생이란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종착역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단 말인가? 정말? 설마…..
동창들을 만나 보니 아직도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던데………. 나만 별나게 감성적이 되어 버렸나? 나만 유독 mid-life crisis의 끝물을 심하게 앓고 있는 건가?
기일이 다가와 요일을 체크해 보니 4월10일이 토요일이 아니라 화요일이었다. 이를 어찌한담? 주중엔 안되는데?
결국 이번에는 아쉽지만 어렵겠다는 생각을 굳혀가던 참에 김 **동문이 메일로 전화로 모임에 참석할 것을 강요해와-이 글도 실은 **의 강압을 못이겨 작성하는거다-우유부단한 나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일까지도 작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침도 한참 지난 다음에야 가겠다 마음을 정하고, 오후에 예정되어 있던 계획을 취소하고 12시 조금 지나 부산으로 향했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그 먼 거리를 홀로 운전해 가는 것이 무모한 짓이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피로가 엄습해 왔다. 이젠 국민학교 시절 몸이 아니군.
낼 모레 **인가? 벌써? 나 원 참
난 사람만나기를 좋아하고 대화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다. 쌍방 공유할만한 관심분야를 가진 대화상대를 만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고……
운전해 가는 중에 여러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 갔다. 긴 세월 만남이 없었던 연유로 시종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지는 않을까?
누가 돈을 엄청 벌었고, 누가 출세했고, 누가 잘났고, 누가 공부를 많이 했고,…..등에 대화가 지나치게 집중되어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지는 않을까? ………. 씁쓸한 기분으로 후회하면서 돌아오게 될까?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석양 무렵 그럭저럭 상당한 거리를 운전해와 언양인가를 지날 때 영부가 전화를 걸어와 나이생각해서 조심운전하란다. 영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30-40분 정도 후 부산에 진입했고 영부가 일러 준대로 해운대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수영에 도착했다.
내 기억에서 삭제된 길이고 주변 환경이었다. 옛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기도해라. 수영에서 양정으로 향하는 길은 낯설지 않았다! 순간 글로 표현하기 힘든 야릇한 기분에 휩싸였다. 포근한 엄마 품에 안겼다 할까?
트럭이 지나갈적마다 먼지폭풍이 일던 시골길은 이제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었지만 신작로의 방향과 동네의 기본윤곽은 게도 잡고 물놀이도 하러 동네 동무들과 오가던, 그 옛날, 그대로 인 것 같았고 경찰병원인가 육군병원인가 하는 병원도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36년만, 역사적인 해후였다.
양정 국민학교 정문 근처에 위치한 김 **동문이 운영하는 옥천 숯불갈비 집에서 드뎌 동무들을 만났다. 박 **동문만 옛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았을 뿐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이 없었다. 얘들이 옆집에 산다해도 우리 동심의 어릴때 인연, 알길없는 낯선 얼굴들이었다.
동무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내가 우려했던 것은 상당부분 기우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숨도 안쉬고 끝도없이 주고받던 대화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정다운 옛 동무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여자동무들은 모두 다 예쁘게 단장을 하고 나타났다. 난생 첨보는 중년부인들을 상대해 마구 반말을 해대는게 별로 어색하지 않네, 신기하다.
박 **동무는 연실 여자동무들을 찾아 자리를 옮겨 다니며 성희롱^^울 해댔다. 아마도 학창시절에도 여학생 꽁무니를 무척이나 따라 다녔던 모양인가 보다. 유일하게 얼굴이 기억나는 것을 보니. 하하하~우리 모두다 적당히 취기가 올랐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배 동문이 운영한다 했다. 양주가 나왔네. 이게 화근이 되어 결국 만취한 동무가 한두 명 나오긴 했지만 노래방 분위기, 그렇게 좋을 수가….
이제는 우리 모두 다 그 옛날 동심으로 돌아갔거나,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여자 동무들의 노래 솜씨가 대단했다. 조 **동무, 어쩜 저리도 노래를 잘 부를 수가! **이는 어린 시절 성악을 공부해 볼까 고민해 보기도 했단다.
밤이 깊어 여자 동무들을 시작으로 한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새벽 2시경에는 동무 대부분과 작별을 고해야 했다.
새벽 2시가 넘어 나는 이 **, 김 **, 공 **이와 어깨동무하고 양정 국민학교 교정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운동장에서 서성이기도 하고 아직도 기본골격은 옛날 그대로인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보기도 했다.
그 옛날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쳐갔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6년 내내 토요일마다 교회에 가느라 결석을 해야 했는데 이를 두고 애들이 걸핏하면 놀려대곤 해서 동심에 멍이 들었던 기억 등이 되살아났다......
부산에 연고가 없는 나는 해운대에 위치한 **이 아파트에서 ***와 함께 하루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 해운대 공기는 정말이지 너무나 상큼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공연히 다 친근하고 정다워 보였다. 아~당장 부산에 내려와 살고 싶어라.
기환이와 영부는 나에게 온천도 시켜주고 아침도 사 준 다음 나를 송정으로 데리고 갔다. 해변을 따라 펼쳐져 있는 달맞이 길이라는 꽃길이 인상적이었다. 일주일전만 해도 벚꽃이 만발했단다.
차에서 내려 언덕에서 내려다 본 부산 앞바다는 요즘 들어 부쩍 심란해진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얄미울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오랜만에 접한 바다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태양을 반사하는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왔고, 엄마 품 같기도 했다.
우리는 송정으로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모닝 캄’이란 레스토랑에서 차를 마시며 그 정겨운 옛날이야기를 다시 나누기 시작했다. 뇌세포에서 삭제된 줄만 알았던 기억들이 고물고물 되살아나고 있었다.
기환이는 오늘 오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단다. 기환이도 나처럼 동무들이 보고 싶어, 너무너무 그리워 미국에서 일부러 시간을 내 한국에 나왔단다.
오전 11시경 양정 초등학교 정문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동무들에게 나누어 줄 기념품을 건네받고 얘들과도 작별을 고해야 했다. 동무들아, 고마워, 잘 있거래이~
문득 나의 학적부가 보고 싶어졌다. 특히 토요일 출결사항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학교를 다시 찾았다.
교무실에 들어가 10회 졸업생이라 소개하니 어느 여 선생님이 나를 교감 선생님께 안내한다. 어, 이 건 아닌데….그냥 학적부가 한번 보고 싶어서 왔는데…. 교감 선생님은 그 옛날의 학적부를 찾아낸다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먼저 학교를 안내해 주겠단다.
스토리가 이상하게 돌아갔으나 모교 선생님 호의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뭐하고 해서 엉거주춤 교감 선생님을 따라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나를 방송실, 회의실 등 학교 구석구석으로 안내하였고, 수업이 진행 중인 교실에 까지 날 데리고 가서 나를 10회 졸업생으로 까마득한 선배라고 소개를 하니 후배들로부터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상 오래 살다 보니 별 일도 다 있네.
오늘의 양정 초등학교는 부산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이란다. 내가 다니던 시절에는 피난민 수용소에 다름없는 학교였는데. 결국 궁금했던 학적부는 구경도 못하고 엉뚱하게 학교 소개만 실컷 받고 나왔다.
내가 살았던 동네로 향했다. 동문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동네 동무들은 아직도 이름과 얼굴이 모두 기억에 생생하다. 연철이, 연식이, 세종이, 우야, 홍식이, 영일이, 영환이, 중식이…….
내가 살았던 집터는 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 주인장에게 까마득한 옛날에 이 곳에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하며 반갑게 말을 건넸으나 무표정, 영 반응이 신통치 않네.
점심시간인데도 손님이 몇 없구나…지금 장사가 안돼 속이 거북한데 내가 30여년 전에 그 곳에서 살았건 말았건 그게 이 양반에게 뭔 상관?
기본 골격은 옛날 그대로인 가옥들도 여러 채가 있었다. 조금도 주저하지않고 안으로 들어가 그옛날의 나를 소개했으나 그 먼 옛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보고픈 옛 동무들도 다 고향을 등진 모양이었다.
동네를 둘러 보는데 허름한 가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옛날에도 저 자리에 가게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누고’하고 나오는 할머니 얼굴을 자세히 보니 낯이 익은 것 같았다.
아~홍식이 어머니였다.
우리 골목대장들은 그 옛날 매일같이 그 가게 앞에서 뛰어 놀았고, 홍식이 어머니는 이에 세숫대야로 물벼락을 쳐대는 등 딴 데 가서 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곤 했기 때문에 그 무서운 얼굴 윤곽이 아직까지도 나의 뇌세포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던거다.
나의 반복되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연로하신 홍식이 어머니는 나를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대화가 지속되던 중에 홍식이 어머니가 갑자기 무릎을 탁 치시더니 ‘아, 니가 바로 그 상이군인 집 아들이가!’ 큰소리로 말하시면서 내 손을 덥석 잡으셨다. 와~드뎌 나를 알아보신 것이다.
홍식이 어머니는 일찍부터 혼자된 몸으로 그 곳에서 40여년 갖은 풍상 견뎌내며 한 치의 이동도 축소도 확장도 없이 옛날모습 그대로 가게를 지켜왔단다.
모두 피란민이었던 당시 그 동네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다고 했다. 한 집도 남지 않고 다 떠나갔다고 했다. 우리 집을 시작으로 한집 두집 마치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줄줄이 고향을 떠나갔다고 했다.
다들 먹구 살길 찾아 고향을 등지구 떠나갔다구 했다. 떠나간 후론 한번도, 단 한번도, 고향을 다시 찾은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내가 처음이란다.
‘홍식이, 어디 살아요? 꼭 보고 갈거예요’
‘홍식이 말이가’..........‘홍식이, 죽었다. 오래 전에 사고로 죽었다’........
‘뭐라고요? 홍식이가 죽었다고요?’……….
홍식이는 나 2살 아래로 유난히 나를 졸졸 따라 다녔던 녀석이었는데……. 홍식이 어머니는 나와 얘기를 하고 있으니 어렸을 때 홍식이 모습이 떠오른다며 연신 눈물을 훔치신다….
자고 가라는 말을 뒤로 하고 가게를 나섰다. 하루 밤 자고 가라는 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정답게 들렸다. 아마도 고향을 등진 후론, 진심으로, 자고 가라며 손목 붙잡는 정 느껴지는 경험을 해본 기억이 그닥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우울했다.
홍식아, 편히 쉬거래이.
이제 부산을 떠나야 하는데…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문득 부산 앞바다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아침에 기환, 영부랑 어깨동무하고 함께 갔던 곳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바다에 인접해 있는 길만 골라 운전해 갔다. 도중에 두번 차에서 내려 바다 가까이 다가가 서성였다. 얼마나 갔을까? 울산이란 푯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양정으로 다시 돌아와 모교 주위를 천천히 한바퀴 돈 다음 저녁 7시경 서울로 향했다.
p.s.
서울 및 인근에 사는 초등동창 동무들과 가까운 시일에 만남의 자리를 가질거다. 이 자리에서 활동적인 동무에게 부산까지 가서 어렵게 따낸 서울지부장 자리를 미련없이 양보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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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땐 청춘이었네. 저글 쓴 후 거의 30년 세월 더 흘러 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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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부산에서 태어났어요. 동래온천장 찾아 갔는데 기억 속의 길들은 다 없어 졌더라구요.
어릴적에 할머니가 절에 불공을 가셔서 따라 나섰다 무서운(?) 개가 쫓아오는 바람에 똥통에 빠졌구
할머니는 액땜을 하신다고 굿을 하셨죠.
중학교때 서울서 내려가면 "서울내기 다마내기" 놀리던 기억들...
다~ 아득히 그리운 기억들 이네요. 이렇게 추억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감사 하네요.
늘 주시는 글들 감사 합니다. 때론 공감도 하고 아픔도 함께 느낄 수 있고~
혼자 생각이지만 멋진 분 이신 거 같아요. 찐팬을 자처 합니다. 감사 합니다.
추억의여행 함께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리며,
저도 한국에와서 가고 싶었던
어릴적 살았고 뛰어놀던곳에 가서
추억에 젖었었던 생각이나서
살며시 미소지어 봅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향 없는 설 사람이라... 동무라는 말이 친근하고 소박하게 느껴져 좋습니다. 친구라는 말과 또 다른 느낌이네요. 마지막 반전에 띵~ 30년 전.
몽블랑님의 진면목을
조금은 더 알 수 있는
멋진 한 편의 수필집 같습니다
나이만 먹었지 사람 볼 줄 모른다고 자처하는 저조차도
선연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 몽블랑님의 진솔한 글
감사합니다
여러 대목에서 빵 터졌던 웃음
그리고 다시 숙연함을 찾았다가
웃다가 울다가 감정의 기복을 타고 느끼며 쫓아다닌
연어 한마리(^^지송)의 여정
참 즐거웠습니다!^^
아름다운 항구 도시, 부산이 고향이시군요?
양정국민학교는, 제가 존경하는 여러 분들이 그 학교 출신이라고 소개해서
학교 이름이 낯설지 않군요.
추억 여행의 수필, 뭉클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부산에 사는 저의 절친에게 안부 전화나 넣어봐야 겠네요.
고맙습니다, 몽블랑 선생님.
차라리 지금 마음이 더 편한 듯…
저 때는 견디기 힘들정도로 세상이 사람이….모든게 다 싫었어요.
너무나 좋은 댓글을 달아주신 고마운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
마치 내가 양정에서, 초등학교 교실로 들어가고, 홍식이 엄니 손 잡고 얘기하는 과거로의 여행 같아요. 저는 전포동에서 자라면서 성모여중을 다녔던지라 양정이 참 반갑게 기억됩니다. 과거로의 추억 더듬기!!
와~전포동, 거제리, 연산리 등등 추억속의 넘넘 그리운 이름들…
동네애들하고 양정에서 수영까지 수도없이 걸어 갔다오곤했어요.
오다가다 정구지(부추) 다 뜯어먹고…무시(무우) 뽑아먹다 밭주인안테 잡혀서 울고 손들고 서있기도 했고…ㅎㅎ
정말 바로 이웃에 사셨네요…
간만에 가슴 몽글 몽글해지는 글을 읽었어요.
심신 정화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