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을 하러 갔다 오는 바람에 늦어져서 혼자 사원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와 보니, 사무실에서 난교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황망히 서 있는 나를 보며 여직원 하나가 춥다고 불평을 해서 얼떨결에 문을 도로 닫았다.
일주일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이곳은 주로 큰 광고 업체에서 하청을 받아 일하는 경우가 많은 작은 회사로, 사무실에는 열 명이 조금 넘는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번 연말에 갑자기 일이 몰리자 나를 포함한 8명의 아르바이트생들을 급하게 고용해, 시급 4200원을 대가로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었다. 정말 구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기묘한 자세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같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한 살 연상의 여자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남녀노소 직급의 상하에 관계없이 열락에 들떠 엉켜 있는 사무실의 모습은 언뜻 보면 지상 낙원이나 천국 같기도 했다. 남자보다 여자가 많으니, 굳이 어떤 종류의 천국인지 따지자면 이슬람 쪽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슬쩍 나가볼까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새 문 앞의 빈 공간을 한 무리가 차지한 바람에 도로 나가기는 힘들어보였다. 나는 목표 지점을 바깥이 아닌 사무실 제일 안쪽의 창고로 수정했다. 사무실 책상과 복도와 사람들 사이를 조심스레 헤집고 지나가면서, 나는 이 사람들이 과연 저녁은 먹었을지 궁금해졌다. 바닥 여기저기에 식권이 흩어져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다들 먹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사무실에서 벌어진 일을 상상해 보았다. 무료하게 각자의 책상에 붙어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던 오후 6시, 누군가가 식권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소리친다. 오늘 식당 메뉴도 거지같고 더럽게 지루한데 우리 다함께 식욕을 성욕으로 바꿔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 말에 모두의 눈이 반짝이고 찬성의 박수소리와 함께 월드컵 결승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브래지어가 브라보를 외치는 시민들의 모자처럼 허공을 날고 바지 지퍼가 공장 컨테이너 돌아가듯 일사불란하게 내려간다. 수준 낮은 성인 코미디에나 나올 법한 광경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다.
복도를 지나가지 못해 가끔씩 책상을 타고 넘기도 하면서, 나는 최대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였다. 물론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쓰리 피스 정장을 갖춰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서 누드 비치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꼴인 지금 상황에서, 투명인간처럼 완벽히 존재감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적어도 남의 다리나 머리를 밟지는 않아야 했기에, 나는 발밑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하지만 너무 자세히 보려고는 하지 않으면서―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씩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아르바이트 생 중에서도 못생긴 편이었던 나를 굳이 자신들의 천국에 합류시키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 점에서 묘한 안도를 느끼고 여유 있게 걸어가 창고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들어가려다 말고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향수』의 광장 같은 사무실 안을 잠깐 둘러보았다. 그 때 한쪽 구석에서 심상치 않은 장면이 포착되었다.
여자와 남자가 각각 셋씩 모여 있는 그룹이었는데, 남자 중 하나가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배가 나온 중년의 아저씨였고 나머지는 모두 쌩쌩한 젊은이들이었다. 젊은 남자 둘과 여자 셋이 한참 재미를 보고 있는 와중에, 중년 남자가 여자들에게 어설프게 손을 대려 하는 것이 아무래도 젊은 축의 언짢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했다.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젊은 남자 중 한 명이 나를 보며 서류 복사를 부탁하듯 태연하게 말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학생. 이리 와서 주임님 좀 받아가. 혼자서 처리할 수 있겠지?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보고." 하는 식으로. 나는 서둘러 창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문이 닫히자 바깥의 어지러운 소리들이 볼륨을 줄인 듯 조그맣게 삭아들었다. 창고 안은 어두웠다. 가운데 있는 전등에 매달린 줄을 당겨 보았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점차 사물의 윤곽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래된 캐비닛과 쓰이지 않는 잡다한 기물들이 좁은 창고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나는 문 왼쪽에 놓인 낡은 가죽 소파로 가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앉는 순간 바퀴벌레가 튀어나오거나 하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다행히 소파 위로 무게가 실리는 소리만 났을 뿐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왼쪽 벽에 있는 캐비닛에 손을 뻗어 열어 보니 오래된 책방과 같은 냄새가 났다. 휴대폰을 켜서 액정 화면의 불빛을 비추자 낡은 잡지들이 한가득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시간도 때울 겸 꺼내서 읽어볼까 싶었지만, 저절로 꺼지는 액정 화면을 일일이 다시 켜는 것도 귀찮았고 눈도 피곤해질 것 같아 관두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안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지만 흥미로운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바깥의 난장판을 생각하면 여기에서 성인용품이라도 한가득 나와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혼자 웃으며 마지막으로 열어보았던 캐비닛을 닫는 순간, 갑자기 잠가 놓은 창고 문손잡이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누군가가 문을 열려 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문을 쳐다보며 뒷걸음질 쳤다. 정말 이 안에 성인용품을 숨겨 놓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를 부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아연해졌다. 몇 번 철컥거리던 손잡이는 곧 조용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문에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소리가 조금 달랐다. 열쇠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였다. 창고 한가운데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사이, 잠금장치가 풀리는 경쾌한 소리가 나고 곧이어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 문 틈새로 들어온 네모난 빛이 몸집을 부풀리며 넓어졌다. 문을 연 사람이 나를 보고 놀란 듯 움찔했다.
그였다. 롱 노우즈와 니퍼 같은 연장이 가득 든 플라스틱 바구니를 양 손에 들고 있었다.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에 키홀더가 걸려 있었다. 열쇠가 그 밑으로 늘어져 달랑달랑 흔들리며 바깥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 빛났다. 그는 아침에 보았던 셔츠와 넥타이와 카디건과 면바지의 단정한 차림 그대로여서, 창고 문을 열기 전에 사무실 안에서 그의 얼굴을 찾고 있었던 나는 적이 안심했다.
잠깐 놀란 표정을 하던 그는 곧 평소처럼 차분한 얼굴이 되어 창고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나는 깜깜한 곳에 혼자 숨어 있었던 것이 부끄러워 '불이 안 켜져요' 라고 겸연쩍게 중얼거렸다. 그는 문 오른쪽 벽을 더듬어 스위치―나는 스위치가 있다는 것을 몰랐었다―를 몇 번 까딱거려 보더니, 조금 느린 걸음으로 방 가운데로 걸어와 전등에 매달린 줄을 당겨보기도 했다. 전등 바로 밑에 있던 나는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그 대신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그를 지켜보았다. 불이 켜지지 않자 그는 깨끗이 단념하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달리 앉아 있을 곳도 없었기 때문에, 그를 따라가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 소파 끄트머리에 슬쩍 엉덩이를 걸쳤다. 그는 별 말 없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흘낏 본 액정 화면에 뜬 시각은 7시 37분이었다. 시간만 확인하려 했던 것인지 그는 휴대폰을 더 만지작거리지 않고 바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낼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내가 먼저 머뭇머뭇 한 마디를 건넸다.
"저녁 드셨어요?"
"아니요, 아직."
"다른 데 있다 오셨나 봐요."
"아래층에 물품 확인할 게 좀 있어서."
네에, 하고 김빠지는 대답을 하며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고 나니 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의미 없이 잘 보이지도 않는 손톱을 만지작거렸고, 그는 그저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앉아 어둠 속을 둥둥 떠다니는 사물의 희미한 경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쪽 엄지손톱을 문지르다 나는 다시 말을 걸었다.
"밖으로 안 나가세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일주일 간 지켜 본 그는 원래 표정이 없는 편이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보였다 해도 아마 나는 해독할 수 없는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상태로 침묵하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는 게이라서요."
나는 순간적으로 사무실 안의 환락을 떠올렸다. 분명 그곳은 동성애자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 비슷한 흉내라면 몰라도. 나는 그의 말에 가벼운 상심을 느끼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그쪽은요?"
"아, 저는……."
대답 대신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는 대답은 않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점퍼 안에 입고 있던 후드티의 주머니에서 카스타드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라도 드실래요? 저녁 안 드셨다면서요."
아니요, 괜찮아요. 됐어요. 그런 대답을 생각한 나는 풀죽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그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손에서 과자를 받아가더니, 잘 먹을게요, 하고 인사하고 나서 바로 봉지를 뜯어 과자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부스럭부스럭 어둠 속에서 과자를 먹고 있는 그가 우스워 고개를 돌렸다. 한 번 웃음이 새어나오고 나면 끝도 없이 큭큭대며 웃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겨우 웃음을 삼키고서 마실 게 없어서 어떡하죠, 하고 말하자 그는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시간이 흘렀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소리는 아직 사무실 쪽이 다 정리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순간 창고 안이 조금 더 밝아진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창문 밖의 밤하늘에 구름을 헤치고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달이 이렇게나 밝은 거였구나. 감탄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달이 참 밝네요."
"달이야 항상 밝죠."
그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 어투에는 과장되지 않은 친밀감이 묻어 있었다. 그 친밀감은 청자보다 대상을 향한 감정,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달을 향한 것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그가 말하는 '달'은 모두가 떠올리는 불특정한 개념의 집합체로서의 달이 아니라 특정한 달을 지칭하는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달, 즉 깜깜한 창고 안에서 창문을 통해 보는 달이라든가.
나는 또 하나의 연결고리를 상상했다. 어쩌면 그는 매일 밤, 혹은 보름달이 뜨는 밤,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정규 난교파티가 벌어지는 날 밤마다 불을 끈 창고 안에서 보름달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이번 상상은 퍽 만족스러웠다. 요란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어느 원시 마을의 하늘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는 남십자성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기도 없고 전개도 없는 한 폭의 그림. 그가 달에게 다정해지듯이 나는 그 그림에 다정해졌다. 그 고즈넉한 풍경의 반복을 생각하니 몸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소파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잠시 후,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창고 구석으로 가서 무언가를 꺼내 이리저리 건드리기 시작했다. 철컥거리는 기계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그가 있는 쪽에서부터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와 달빛과 함께 창고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와 다시 내 옆에 앉았다. 피아노는 익숙한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전주 부분이 끝나고 노래가 시작될 즈음에 입술을 달싹였던 나는, 곧바로 들리기 시작한 어떤 이의 부드러운 노랫소리에 아슬아슬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남자는 기교를 자제한 섬세한 목소리로 Moon River를 불렀다. 연주와 노래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 물 흐르듯 일렁거렸다. 피아노 연주자가 직접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녹음한 것인지 잡음이 꽤 섞여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래된 레코드를 듣는 듯한 따스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노래에 방해되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좋아요, 진짜."
"녹음하는 걸 싫어해서 몰래 한 거예요."
그는 달을 부르듯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는 눈을 감고 소파에 편안하게 기댄 채 온몸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 불이 켜진다면 그의 미소를 볼 수 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불빛을 생각하니 바깥의 일이 궁금해졌다. 요가 학원을 다니고 있다던 동갑내기 여자애는 지금쯤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을까. 그녀의 유연한 몸을 상상하자 내 몸이 괜스레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욕망도 이상도 버거워진 나는 그저 안락한 단칸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에게 물었다.
"언제쯤 끝날까요."
"글쎄, 한…… 35번쯤 하고 나면 지치지 않을까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키득거렸다. 달빛과 어둠의 입자들이 웃음에 밀려 종소리처럼 흔들렸다.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달을 보며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댔다. 편안했다. 그의 남자친구는 이제 Over the Rainbow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그렸던 그림 위로 은은한 BGM이 깔리는 순간이다. 코끝이 찡해지는 합작이었다. 그림의 관람객은 나 하나뿐이고, 감상에 젖는 것도 나 하나뿐이다.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지구가 돌아가듯 완벽해 보였다. 달이 저 멀리서 지구와 느린 왈츠를 추고 있었다.
슬며시 눈을 감아 달빛을 거두며, 나는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 35번의 절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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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씩 불쑥불쑥 다녀가네요. 히히.
읽어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나'는 '그'를 좋아합니다.
이 사실을, 제가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느끼지 못하셨나요? 아니면 아 좋아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읽으셨나요?
어떤지 궁금합니다ㅠㅠㅠㅠㅠ
첫댓글 호감이 있는건 충분히 읽히는것 같은데요?
근데 실은 '나' 가 여자인줄몰랐네요....
맞아요 그것도 문제죠ㅠㅠㅠㅠㅠㅠㅠㅠ 흑흑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감이에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