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에 잠에서 막 깨어난 해무가 안개처럼 흐르며 신비감을 더해주는 서해바다. 햇볕이 산란하면서 해무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휴가철인데도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해변은 인적이 없어 허허롭고 적막했다. 고즈넉한 백사장이 탐방객을 유혹하지만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해무 속을 들어설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곳은 태안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천리포해수욕장이다. 남으론 만리포해수욕장, 북으론 백리포해수욕장이 붙어있다. 원래 고기를 잡던 어막이 많아 막둥이라고 불리었지만 만리포해수욕장이 뜨면서 이곳에도 피서인파가 몰려들자 천리포란 이름을 얻었다.
해수욕장에 붙은 천리포수목원도 명칭은 해수욕장에서 따왔을 터이다.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 했던가. 수목원은 해변과는 사정이 딴판이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미리 도착해서 매표소 앞을 서성이는 탐방객들도 그랬고 넓지 않은 주차장을 절반가량이나 채운 차량도 그랬다. 알려진 대로 벽안의 미국인이 이곳 천리포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세계 속에 우뚝한 천리포수목원을 만든 스토리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1962년 부지를 매입했고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기 시작했으니 수목원 역사는 벌써 반세기를 넘는다. 수목원 설립자는 푸른 눈의 한국인 민병갈이다.
그의 한국이름은 한국은행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민병도에게서 두 글자를 얻고 끝 글자는 자신의 이름자에서 ‘칼’을 ‘갈’로 바꾼 것이다. 민병갈은 식물을 공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평생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민둥산 박토를 일궈 오늘의 수목원을 만들었다.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었고 산림분야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고 숲의 명예전당에도 헌정되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식물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일관했다. 살아있는 생명은 다 어우러져 살아가도록 배려했던 민병갈은 숲길을 가다가 나무 사이 거미줄을 만나면 돌아서 다닐 정도로 자연을 사랑했다.
그의 열정과 한국 사랑을 알고 수목원을 둘러보면 훨씬 의미 깊게 다가올 것이라고 이곳 근무자는 조언한다. 태어난 조국을 헬조선이라며 저주하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수목원을 찾는다면 심기일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수목원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목련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목원은 천리포해수욕장과 붙어 있어서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그로 인해 아한대성에서 아열대성까지 다양한 식물군을 보유할 수 있었고 사계절 아름다운 식물이 싱싱하게 자란다. 목련 동백 무궁화 감탕나무 단풍나무는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종을 보유하여 세계적인 수목원이 되었다.
세계 60여 개국에서 수입한 1만6천여 종 식물을 보유한 식물원은 40여 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 국내 유일의 민간수목원으로 아시아 최초로 ‘아름다운 정원’ 인증을 획득했다. 수목원은 1979년 재단으로 등록되어 10년 동안 해외교류 학습을 통해 영국 왕립원예협회 공로메달을 수여받았다. 수목원 코스를 돌다가 개화절정을 맞은 수국을 만났다. 탐스럽게 핀 수국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노인에게 우리 부부의 사진을 부탁했다. 서울에서 왔다는 그는 사진전문가처럼 보이는 장비를 휴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탁한 폰 카메라 사진은 셔터를 여러 번 누르는 것 같았는데 모두가 꽝이었다.
렌즈를 손가락으로 가리고 찍은 때문인데 참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재단 출범 한 해 전인 1978년 민병갈은 남해안 답사여행에서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의 자연 교잡으로 생긴 신종 식물을 발견하였다. 이는 세계에서 한국의 완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으로 검증되었다. 민병갈은 국제규약에 따라 발견자와 서식지 이름을 넣은 학명을 국제학회에 등록했고 한국이름은 '완도호랑가시'였다. 완도호랑가시는 다국 간 종자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퍼져나갔고 천리포수목원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1978년부터 11년 동안 36개국 140개 기관과 교류를 맺어 다양한 품종의 나무를 들여왔다.
난대성 상록활엽교목 호랑가시나무는 대개 육각형 잎 모서리마다 가시가 돋아 있는 게 호랑이 발톱을 닮았다고 해서 우리 이름 호랑가시나무가 됐다. 완도호랑가시나무는 잎이 둥근 감탕나무와 가시가 돋친 호랑가시나무의 중간 모양이어서 거의 타원형인 잎에 가시도 적고 날카롭지 않지만 이 나무는 잎에 가시가 없이 둥글다. 푸르고 윤기 나는 잎과 크리스마스 무렵 빨갛게 무르익는 열매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잎과 열매 달린 가지를 둥글게 엮어 집 문에 내거는 크리스마스 리스로 사랑받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완도호랑가시나무는 겨울열매가 새빨갛게 익어 나무를 온통 붉게 물들인다.
민병갈은 국제적인 교류에 관심이 많았고 우리나라의 환경과 식물을 바깥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1997년 4월 국제목련학회 연차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1998년 5월에는 미국 수목원이 주축을 이룬 범세계적 학술친목 단체인 HSA총회를 천리포수목원에서 개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2002년 4월, 81세로 숨을 거두었고 천리포수목원 내 나무에 묻혔다. 기념관은 평소 사라져가는 한국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 안타까워하는 설립자의 마음을 담아 1994년 전통 초가지붕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동관엔 설립자의 일대기와 한국과의 인연, 한결같은 식물사랑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서관은 설립자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밀러가든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사방을 관찰할 수 있도록 출입구를 빼고는 전체를 개방형 창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선 늦은 밤까지 관솔불을 밝혀가며 만든 수목원의 젖줄인 큰 연못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고 설립자가 처음 매입한 천리포 논 네 마지기와 초가집 풍경도 눈 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모든 풍광들보다 소중한 것은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도록 꾸민 것이다. 얼마나 개구리를 사랑했으면 죽어서는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까지 했을까. 수목원에서는 바다 쪽 5백 미터 지점에 반구형 섬이 조망된다.
마을 주민들은 섬이 닭 벼슬을 닮았다고 닭섬이라고 부르지만 민병갈은 낭새섬이라고 불렀다.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사는 바다직박구리가 이 섬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다. 섬은 조수간만의 차로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지면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 수목원에서 걸어 들어갈 수 있고 2시간 가까이 갯벌 체험을 할 수 있다. 수목원 관리지역인 섬은 80년대 초부터 호랑가시나무 등 자생상록활엽수를 심기 시작했다. 수목원 탄생 비화 한토막이다. 민병갈은 만리포해수욕장을 자주 갔는데 우연히 만난 홀아비 농민이 딸을 시집보낼 돈이 필요하다고 졸라대어 4천5백 평 야산을 떠맡았다.
당시 천리포는 전기나 도로도 없는 그야말로 강촌이었다. 당초 바닷가에 별장을 지으려다가 생각이 바뀌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틈틈이 매입한 땅이 18만 평에 이르자 52세 때 아예 공공수목원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200킬로미터를 달려와 수목원에서 보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식물공부를 시작하여 나중에는 해외 학회지에 연구결과도 발표하였고 원예학회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비치메달까지 받을 정도로 대가가 되었다.
그는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좋겠다고 수목원을 차린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삼백 년을 내다보고 시작했다. 나는 어떤 목련 한 그루가 꽃을 피우기까지 26년을 기다린 적이 있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나무의 나이테는 일 년에 한 개만 생긴다. 수목원도 마찬가지다. 천리포수목원은 내가 제2의 조국으로 삼은 한국에 길이 남을 나의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그는 사전에 입지 조사를 한 적도 없었고 우연히 땅을 떠맡게 되었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을 뿐이다. 원래 한국의 자연을 좋아하다가 나무에 관한 열정을 발견하고 공공수목원이라는 꿈을 키워온 것이다.
한 해 방문객이 30만 명에 이르는 세계적 수목원이 된 것은 그가 당초 의도한 바가 결코 아니었다. 다가온 우연과 자신이 처한 상태에서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 이루어낸 결과물이었다. 사흘은 매달려야 제대로 다 둘러볼 수 있다는 수목원을 주마간산 격으로 딱 3시간 돌았다. 사흘이 안 되면 오늘 오후만이라도 머물면 그만큼 얻는 게 많을 터인데 현실은 그마저도 허락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건 다시 찾는다는 것이다. 계절을 달리하여 방문하면 수목원은 또 다른 옷을 갈아입고 탐방객을 맞아줄 것이다. 단풍 곱게 물든 가을풍광을 미리부터 그려보며 수목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