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길 #31. 폰세바던과 철십자가 내리막길 경사가 심하다 (라바날 델 카미노-몰리나세카)

[조대장]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에 나도 일어났다. 넓은 건물 한칸에 2층 침대를 빡빡하게 넣어두어서 그런지 공간이 좁은 편이었는데, 사람들이 준비하는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잠을 푹 잘자서 일어나는 게 힘들지는 않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릿느릿 일어나서 천천히 준비를 시작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할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다음날 입을 옷을 입고 잤다. 신을 양말은 침대에 걸어두었고, 가방은 침낭만 말아서 넣으면 되도록 미리 준비를 다 해두었다. 원래 아침잠이 많은 편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은 전혀 문제없었지만 일어나서 준비하는 것은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

오늘은 카미노에서 가장 유명한 상징 중 하나인 철 십자가를 지난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다 같이 출발을 한다. 오래간만에 많은 일행이 한번에 움직인다. 일단 철 십자가까지는 같이 움직이는 게 어떻겠냐는 아버님의 권유도 있었고, '가장 유명한 상징에 가서 사진 하나씩은 찍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있었다.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잘 맞아서 오늘은 다 같이 출발을 한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간다. 다들 그동안 걸으면서 배낭의 무게에 익숙해졌고, 걸음도 제법 빨라져서 계속해서 오르막길이지만 오늘의 첫번째 마을인 폰세바돈(Foncebadon)에 일찍 도착했다. 아침은 이곳에 있는 바르에서 먹고 가기로 했다. 배가 불러야 잘 걸을 수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바르 바깥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어제 삶아 둔 계란과 바르의 빵, 커피 등 각자의 취향에 맞게 주문을 해서 먹는다. 나는 오늘 철 십자가를 지난 이후의 어마어마한 내리막길에 대한 글을 읽었기 때문에 커피를 마셨다.

주문을 하면서 바르 안을 둘러보니 작은 핀(Pin)과 폰세바돈과 카미노를 표현한 마그네틱 같은 여러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쭉 둘러보니 흥미로운 것들이 있어서 2~3개 정도 샀다. 카미노를 완주하고 나서 했던 생각이지만 걸으면서 이런 작은 기념품들을 더 샀어야 했다. 정말 이곳에서만 파는,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물건들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그때를 떠올리게 해주는데, 이때는 조급한 마음에 푼돈을 아끼느라 사질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일이다.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출발한다.

<폰세바돈을 떠나며>

폰세바돈은 꽤 역사가 깊은 마을인듯 했지만, 폐가가 꽤 많았다. 자리를 잡고 살기에 척박해보이는 환경이긴 했다. 우리야 지나가는 순례자니까 '경치가 좋다' 는 식의 말을 하지만, 이곳에 평생 살아보라고 하면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마을을 벗어나니 길 양옆으로 꽃이 많이 피어있다. 풀도 많고, 나무도 푸른 것이 걸으면서 보기에 딱 좋다. 높은 곳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올라가면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보인다. 가끔은 뒤돌아서 자기가 걸어온 길을 보는 것도 좋다. 생각보다 바쁘지 않다. 저곳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

저 멀리 폰세바돈이 보인다.

<철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는 길> 

드디어 저 멀리 모습을 보인다. 철 십자가(La Cruz de Ferro)다. 멀리서 보는데 가슴이 벅차다. 선사시대부터 제단이 있었다는 이곳은 그냥 보기에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정보를 떠올리고 책을 꺼내 읽기 전에 실제 철 십자가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진짜 여기까지 왔구나.'

거짓말 같다. 책을 읽고 있는 것 같다. 카미노 영상물을 큰 화면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순례자들이 가지고 온 돌, 근처에 있는 돌을 주워 그곳에 글을 쓰고, 사진과 편지 등을 꺼내서 철 십자가의 지주에 달아두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모였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을까.

본인은 부정할지도 모르겠지만 형대는 애교가 제법 있다.

다큰 어른에 수염도 저렇게 길렀지만,

아버님이 보시기에는 마냥 아이같아 보였나보다.

 그런 부분에서 티격태격이 있었다.

그래도 아들을 이해하려 하시는 모습이 좋았다.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있으면 좀 재미있었다.

각자의 희망, 내려놓고 싶은 것 등을 이곳에 두고 온다.

 <돌에 각자의 바람을 담다본다, Photo by 미순>

순간을 담아준 미순이에게 감사를 전하며

 

<한 자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나, Photo by 형대>

외국인들이 한 자매의 나이를 들으면 정말 깜짝 놀라곤 했다.

 하긴 나도 가끔 놀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체사진, 멋지게 찍어준 어느 외국인에게 감사하며>

가끔 이 순간이 그 자체로 '영원'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저 때가 그랬다.

그냥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다.

보기만 해도 콧등이 시큰해질 정도로 그립다. 

<진심을 담아>

내 소망도 담아본다.

글씨 좀 예쁘게 쓰고 싶었는데..돌이 울퉁불퉁해서(변명)

미소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발랄'아닐까.

<발랄2>

형대도 발랄하다.

철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해서 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른 곳도 그랬지만 떠나고 싶지 않다.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 철 십자가를 본다. 그래도 가야 한다. 우리 앞에는 아직 약 240km정도의 여정이 남아있다. 지금의 이 여운과 감동, 먹먹함을 언제 또 느낄 수 있을까.

이제 아쉬움과, 철 십자가를 뒤로하고 다시 출발한다.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제일 뒤에서 천천히 가려는데 미애가 옆으로 온다. 내가 살짝 눈물지은 걸 눈치챘는지 이런저런 말을 건다. 우리는 작년(2014년)에 소중한 사람을 떠나 보냈다. 나는 할머니, 미애는 큰아버지다.

<굉장히 사적인 얘기입니다. 읽지 않으셔도 여행기를 읽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나는 할머니와 아주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누나나 사촌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 추억도 많고 친하게 지냈지만, 나는 왠지 그러질 않았다. 할머니도 나를 보고 '조금 어색한 손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 말이 조금은 서운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했었다.

할머니는 정말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학교에서 논문을 쓰다가 그날따라 집중도 안되고 몸도 안좋아서 집에 일찍 갔는데, 부모님이 할머니가 쓰러지셨으니 빨리 부산에 가야된다면서 나가시길래 나도 따라나섰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 아버지,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저 살아계시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약 10년 간의 해외 파견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집 근처로 모셔오게 된 것에 기뻐하던 아버지였다. 같이 사는 것은 할머니가 극구 반대했다. 아마 자식들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그리고 그 날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울산으로 이사오기 3일 전이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사망통보였다. 정말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닥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는 것 뿐이었다. 나는 누나에게 전화를 했고, 집에서 초조해하고 있던 누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는 내 울음소리에 "가셨나?"라는 말을 하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친아들처럼, 할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여기며 자란 사촌동생은 그때 진도 팽목항에 가 있었다. 사촌동생이 이 믿을 수 없는 일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우는 것 뿐이었다.

의사가 나를 부른다. 사망원인과 이런저런 절차를 통보해주기 위해서 그나마 제일 덜 울고 있는 나를 부른다. 할머니의 시신 앞에서 한번 더 사망확인을 하고 원인을 알려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할머니와 추억이 참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추억하나가 떠오른다.

대학원에 처음 들어간 해, 가을에 나는 창원에 벌초를 가야했다. 아버지는 베트남에 계시고, 사촌동생은 진해에 있어서 창원 큰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요일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가는 게 싫었던 나는 토요일에 부산에 있는 할머니댁으로 갔다. 그곳에서 하루 자고, 아침에 창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요일 새벽에 울산에서 가나, 부산에서 가나 비슷한데 왜 그랬나 싶다. 어쨌든 할머니, 할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옆방으로 건너가서 잤다. 새벽녘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져서 보니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계셨다. '우리 큰 손자'라는 말만 계속 반복하는 할머니의 손길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그저 눈물만 흘린다. 이제는 내가 먼저 할머니의 손을 잡아보지만 너무 늦었다. 그렇게 상을 치르고 한달 뒤쯤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 뭘 잘못 먹은 거 같은데, 의사가 원인을 모르겠단다. 그러면서

"스트레스 수치가 너무 높아요. 한번 더 이 정도로 올라가면 진짜 위험합니다."

라고 한다. 높을 수밖에. 그때 결심했다. 뭐든 해봐야겠다고. 그래서 나는 지금 이곳에 왔다.

미애도 작년(2014년)에 큰아버지 상을 치렀다. 미애는 큰아버지 얘기를 많이 했었는데, 그만큼 어린 시절부터의 추억과 기억이 많았다. 지금 이곳 철 십자가에서 우리는 지난 해 떠나보낸 소중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눈물 흘린다. 부디 그들이 좋은 곳이란 곳에 갔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그리고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행복하게 함께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같이 걸어간다. 참 고마운 일이다.

풍력발전소 옆에 태양열 발전기가 있는 것을 본 미애가

"저 태양열 발전기는 풍력발전소 돌리려고 설치 한 거야"라고 말하니

영광이가 빵 터졌다. 영광이가

"그렇게해서 풍력발전소 돌리면 뭐해?"라고 하니

미애는 "풍력발전소 잘 돌아간다고 홍보하는거야"

란다. 영광이는 한번 더 빵 터졌다.

철 십자가를 지나 만하린(Manjarin)까지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다. 바닥에 잔돌이 많아 미끄러질까봐 조심해서 걷다보면 잘 포장된 도로가 나온다. 바로 그곳에 만하린이 있다. 만하린은 마을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냥 아래 사진의 바르와 길 옆으로 보이는 폐허가 거의 전부다.

<만하린(Manjarin)>

 <<만하린(Manjarin)>

만하린을 벗어나서 조금 걷다보니 노천카페가 나왔다. Cafe Movil이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전에 이곳에서 조금 쉬기로 한다. 철 십자가를 보고나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들 차분하다.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다르게 분위기가 가라앉아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거운 것은 아니다. 웃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지만 다들 어떤 여운이 남은 것 같은 느낌이다.

<노천 카페에 앉아>

곧 엄청난 경사의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체감상으로는 피레네 내리막길보다 이 내리막길이 더 가파르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경치가 너무 좋다. 발 아래만 보면서 걷기에는 너무 아까운 경치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천천히 걷다가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걸어간다.

<저런 곳에도 마을이>

정말 깜짝 놀랐다.

<아직 많이 남은 내리막길>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도 훨씬 경사가 급하다.

급경사를 잘 살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쪼갠 듯한 돌들>

걷다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돌에 발목이라도 부딪히면 엄청 아프다.

경사와 잔돌, 여러가지 돌을 신경쓰면서 걷다보면

발목과 무릎에 힘이 엄청 들어간다.

<식물의 생명력>

흙으로 덮여있는 것도 아니고 돌이 저렇게 많은데..

저런 곳에서도 풀은 자라고 꽃은 핀다.

<호기심 많은 영광이>

<미애와 형대>

형대는 미애에게 '누나, 누나'하면서 굉장히 잘 따랐다.

두 사람은 스타일이 잘 맞았다. 질투는 안했다.

형대도 참 발랄하다.

사진 찍는 나를 보면서 갑자기 춤을 추던 형대

<발목 다치기 딱 좋은 내리막길>

긴장하고, 조심하며 내려간다.

걷다보니 날씨가 좀 흐리다.

이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비를 맞고 싶지는 않다.

만약 비를 만난다면 피레네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엘 아세보(El Acebo)>

드디어 엄청난 내리막길이 마무리되었다.

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미애와 나는 조심해서 천천히 내려갔다. 제일 앞서 가고 있던 미순이와 아버님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고, 그 뒤를 가던 영광이, 형대, 미소가 작게 보일 뿐이다. 급할 건 없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조금 속도를 낼까 하다가 마을에 왔으니 바르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그렇게 엘 아세보(El Acebo)에 왔다. 그런데 바르에 우리 일행들이 보이질 않는다. 보통은 마을 첫번째 바르에서 기다리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그냥 갔나보다' 싶어서 우리도 쉬지 않고 그냥 간다. 엘 아세보는 작은 마을이지만 생각보다 알베르게가 많다. 아마도 엄청난 내리막길에 지친 순례자들이 많이 쉬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곳을 지날 때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 연세가 조금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내리막길을 내려와서 바로 알베르게에 들어가는 것을 적지 않게 봤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서부터 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확실히 힘들긴 했다. 엘 아세보도 우리가 지나온 마을들처럼 굉장히 역사가 깊어 보였다. 건물도 이전의, 그러니까 메세타나 그 전의 마을과는 다르게 생겼다. 아담해 보이는 마을이 귀여웠지만 지금은 우리의 목적지를 찾아가는게 우선이라 아쉽지만 지나면서 두리번 거리며 구경한다. 돈과 시간만 여유있다면 이런 마을에서는 하루 정도 머물면서 느긋하게 둘러보고 싶다. 평소에도 동네와 골목길 둘러보는 걸 즐겨하는 나로서는 이런 순간이 항상 아쉽다.

미애와 나는 잠깐 앉았다가 다시 출발한다. 엘 아세보의 출구 부분에 갔을 때 그곳에서 쉬고 있는 형대와 미소를 만났다. 우리는 조금 쉬긴 했지만 이곳에 앉아서 같이 쉰다. 오늘 내려온 내리막길의 무시무시함을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피레네와 비교를 하게 된다.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영광이를 놀린다. 영광이는 생장이 아닌 로그로교에서 카미노를 시작해서 피레네 얘기가 나오면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피레네도 못 걸어 본 게"

"넌 피레네 안 넘었으면 카미노 걸었다고 얘기하지마"

라는 식으로 말이다. 아버님까지 영광이를 놀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그만큼 피레네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다. 또, 우리 일행 중 영광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론세스바예스에서의 컨테이너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그렇다보니 공감할 것도, 얘기할 것도 많았다.

다시 걷다보니 다음 마을인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os)에 도착했다. 이곳에도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쉬지 않고 걷는데 내려가는 길이 다시 험해졌다. 그래서 내리막길이 시작될 때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그때 우리 옆으로 한 무리의 일행이 지나간다. 형대가 대학에서 온 것 같다고 한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사람은 교수고, 나머지는 학생이라는 거다. 그러면 지금 카미노에 교수님이 학생들이랑 왔다는 말? 이걸 보고 교수님이 대단하시다고 해야할지, 학생들이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현재 대학원생인 나는 노코멘트. 잠시 앉아서 쉰 우리도 이제 다시 출발한다. 내리막길은 다시 급경사로 변했고, 길에는 자갈이 많아졌다. 확실히 만만한 길이 아니다.

다들 혹시라도 발목을 다칠까봐 조심해서 걷는다. 오늘의 목적지인 몰리나세카(Molinaseca)까지 어떻게 왔는데. 절대로 다치면 안된다. 하늘은 점점 흐려져서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고, 이 가파른 내리막길은 도무지 끝날 줄은 모른다. 그렇게 걷다보니 마을 하나가 보인다. 저곳이 몰리나세카다. 오늘의 목적지에 다왔다는 생각에 힘을 내서 걸어본다. 그리고 드디어 마을 입구에 들어왔다.

<드디어 나타난 몰리나세카(Molinaseca)>

발목이 후들후들 떨린다.

마을입구에서부터 안으로 걸어들어가니 강과 다리가 나온다. 그리고 그 다리입구에 미순이와 아버님, 영광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덥고 지쳐서 저 강에 발이나 한번 담궈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영광이는 이미 내려갔다왔다고 한다. 부럽다. 다리와 강물을 보는데 굉장히 멋지다. 많은 사람들이 강변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일단 우리는 빨리 알베르게부터 가기로 한다.

몰리나세카에는 알베르게가 마을에 없다. 마을을 벗어나서 조금 더 가야 알베르게가 있다. 공립, 사립 알베르게가 각각 하나씩 있는데 처음 마주치는 곳은 사립 알베르게인 산타 마리나(Santa Marina)다. 다들 급경사에 돌이 많은 길을 걸어서 그런지 지쳤다. 그냥 이곳 사립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일단 나부터가 그렇다. 형대가 자기는 아직 힘이 충분하게 남았으니 얼른 뛰어가서 공립 알베르게에 자리가 있는지 보겠다고 했지만, 나와 아버님이 말렸다. 가서 괜히 헛걸음하면 더 힘들고, 그냥 이곳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순이는 공립으로 가고 싶어했지만 내가 거절했다(그때 매몰차게 거절했는데 계속 미안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시설도 깔끔하고 좋다. 우리는 다 같이 2층에 있는 방으로 배정을 받았다. 방에는 2층 침대가 5개 정도 있었는데 엄청 넓었다. 생각보다 훨씬 쾌적한 환경에 마음이 놓인다. 자리 정리를 하고 씻고 빨래를 한다. 알베르게 지하에는 주방이 있었는데 오늘도 밥을 해 먹기로 했다. 형대가 아까 지나올 때 봤던 슈퍼마켓에 가서 고기를 사와서 구워먹자고 한다. 고기라면 당연히 좋다.

정리를 다 하고 나, 미애, 형대, 미소가 저녁거리를 사러 나간다. 영광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미순이는 알베르게 바깥에 앉아 일기를 쓴다. 알베르게를 나와서 마을로 가다보니 멀리서 제임스가 걸어오고 있다. 샌달만 신고 오늘 내리막길을 내려왔을 거라 생각하니 더 대단해 보인다. 제임스에게 오늘 이곳에 묵어갈 거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그럼 저기 보이는 사립 알베르게로 가라고 했다. 아직 자리도 남았고, 시설도 좋다고 하니 그러겠단다. 그럼 조금 있다가 보자는 말을 하고 우리를 다시 마을로 간다.

슈퍼마켓에 들어가니 이것저것 많다. 한쪽은 정육점처럼 되어 있어서 고기종류도 많고, 과일, 과자 등 온갖 먹을거리가 있다. 우리는 일단 돼지고기를 인원에 맞게 산다. 주인은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신문지 같은 종이로 감싸준다. 맥주, 와인, 채소 등을 사는데 주인이 와서 과일을 잘게 썰어 서비스라고 하면서 한입씩 넣어준다. 훌륭한 서비스에 기분이 좋다. 과일도 조금 샀는데 체리를 서비스라고 하면서 많이 넣어준다. 서비스가 너무 좋은데 괜찮은가 싶은데 동네슈퍼마켓에서 팔 것 같은 쭈쭈바도 준다. 오늘 장보기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슈퍼마켓을 나오는데 비가 온다. 짐은 많고 걸어가야하는 거리도 있어서 근처 지붕있는 곳에 잠시 들어가 비를 피한다. 조금 전에 받은 서비스 쭈쭈바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형대가 조금 전에 산 돼지고기를 양고기라고 하잖다. 이 대범한 사기에 우리도 동참한다. 그것도 "짠! 사실은 돼지고기지롱!"이라고 밝히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끼리 속인 것에 만족하고 웃고 말자는 계획이다. 그리고 절대로 이 사실을 알리지 말자고 한다. '그럼 뭐가 남는거지?' 싶긴 하지만 재미있을 거 같아서 다들 동조했다. 이외에도 여러 얘기를 나누다보니 비가 그쳤다.

<순례자 다리 밑에서>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바로 식사 준비를 한다. 이것저것 챙기러 방으로 가보니 제임스가 있다. 우리가 짐을 푼 방에 제임스도 온 것이다. 반가워하면서 오늘 저녁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니 아버님이 이미 저녁초대를 하셨단다. 그럼 조금 있다가 준비 다 되면 내려오라고 한다.

주방을 보니 열악하다. 문제가 많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고기를 구울 수 있는 팬이 없다는 거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로 고민하는데 형대가 큰 냄비를 꺼냈다. '그래 어디서 굽든 맛만 있으면 되지.' 우리는 바로 냄비에 식용유를 두르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굽다보니 냄비의 속이 깊어서 조금 애먹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일행들에게 '양고기'를 먹일 생각에 들뜬 우리 일당은 희희덕 거리면서 식사 준비를 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했지만 그래도 꽤 그럴 듯 하게 갖춰졌다. 먹어보니 정말 맛있다. 오늘 사온 고기가 '양고기'라는 말에 다들 신기해하면서 먹는데 미순이가 '돼지고기랑 맛이 똑같다'라고 해서 웃음이 터질 뻔 했다. 형대는 제임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듣고 있던 나는 순간 움찔했다. 형대가 무의식적으로 양고기(Lamb)라고 하지 않고 돼지고기(pork)라고 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니 다행히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고기와 같이 사온 수박과 과일도 꺼내서 깎아 먹는다. 양이 제법 많아서 옆에 있는 자전거 순례자들에게도 나눠준다. 그들도 답례로 자기들이 먹고 있던 과일을 준다. 양이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엄청 배부르게 잘 먹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조잡하게 했지만 다들 대만족이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시간을 보낸다. 나와 형대는 와이파이가 잘 잡히는 로비에 앉아서 내일 갈 곳과 정보 등을 보고 있는데 미소가 밖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와서 좀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 나가보니 순례자 한명이 자신은 지금 폰페라다(Ponferrada)까지 가는데 길을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러면서 핸드폰을 건네는데 목적지와 지도는 나와있지만 늦은 시간이라 길을 찾기가 힘들 것 같다는 말이었다. 내가 직접 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되나 생각하는데 형대가 구글 맵에서 네비게이션 모드를 찾아 실행시켜 준다. 나도 몰랐던 기능이라 보니 정말 기가 막히다. 그 순례자는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며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시간도 늦었고, 비도 조금씩 오고 있어서 그냥 이곳에서 머무는 것은 어떠냐고 하니 괜찮다고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떠난다. 폰페라다까지는 6km정도를 걸어가야 하는데 괜찮을까.

어느덧 잘 시간이 되었다. 다른 때도 그랬지만 오늘은 정말 푹 잘 것 같다. 오늘의 내리막길은 정말 굉장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잘 내려왔다는 것에 만족감과 행복함을 느낀다. 한 가지 걱정은 아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다. 우리는 단지 비가 온다는 것만으로 레온에서 하루 쉴 만큼 비에 대한 일종의 '공포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내일 새벽에 일어났을 때는 부디 이 비가 그쳤기를 바라면서 잠을 청한다.

<폰세바돈, 노천카페, 몰리나세카에서 받은 도장>

먼저 떠난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항상 함께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엄청난 내리막길을 아무도 다치지 않고 내려온 것에 안도하며

오늘 걸은 거리 25.6km

작성자 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