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이 작곡한 노래 안 들어보고 안 불러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 일본 관헌들의 총칼에 어쩔 수 없이 몇 곡 작곡해 준 것이 친일의 죄가 되나? 정풍송(작곡가)
『문무대왕의 칼럼 ‘다시 찾아본 박시춘의 옛집’을 읽고 작곡가 정풍송 선생이 보내온 칼럼을 게재합니다. 정풍송 선생은 밀양 출신으로 박시춘 추모사업에 크게 기여한 바 있습니다.』
박시춘 선생님께서 1996년 별세하셨을때, 제가 밀양시에 박선생님의 동상과 노래비 건립과 '박시춘가요제' 등을 제안했는데, 당시 밀양시 의회와 밀양의 원로들이 극구 반대했습니다. 반대한 이유는 "박시춘이 밀양을 위해서 뭘 했나", "박시춘이 잘 나갈 때 밀양을 찾기나 했나" 등이었습니다.
그런 시시비비 속에 2년여쯤 지났을 때 '밀양아리랑제' 행사가 끝나고 저녁 만찬 모임에서, 당시 이상조 밀양시장이 “박시춘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2년이나 지났는데 박 선생님 동상, 노래비 건립 건이 아직 매듭을 짓지 못해 유감”이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때 좌석 여기저기서 역시 "박시춘이 우리 밀양을 위해서 뭘 했나" 류의 발언이 빗발쳤습니다. 박 선생님의 동상, 노래비, 박시춘 가요제 등을 처음 제안했던 제가 듣고 있기엔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어나 발언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의 말씀과 같이 박 선생님께서 고향을 자주 찾고 우리 밀양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더라면 참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이 활동하시던 1930년대 40년대 50년대는 지금 형편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는 일제 하이고 음악 저작권법도 제대로 되지 않아 너무나 가난했고 고향을 위해 뭘 하기도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이 우리 국가사회와 우리 국민들에게 남기신 업적은 너무나 큽니다.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좋은 노래로 한을 달래주었고, 6·25전쟁 때는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으로 수많은 전쟁 피난민의 아픔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리고 '전우여 잘자라' '전선야곡' 등을 작곡하여 우리 국군장병과 우리 국민들의 사기를 드높혀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너무나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박시춘 선생님이 작곡하신 노래 한두 번 이상 안 들어보고 안 불러보신 분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라고 설파했습니다.
그토록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던 사람들이 조용해지면서 한 사람도 제 발언에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찬이 끝나고 이상조 시장이 제 곁에 오더니 "와 오늘 정풍송 말 잘하더라, 정풍송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내일 당장 예산 짜서 올릴 거다"라고 하면서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던 모습 지금도 떠오릅니다. 친구였던 이상조 시장의 그때 그 성의가 고맙기 한량 없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밀양시에서는 12억 예산을 확보했는데, KBS에서 '박시춘 가요제'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지방의 그런 행사들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지금까지 하던 것도 다 폐지하고 있는데 새삼스레 밀양만 박시춘 가요제를 새로 시작하면 다른 지역에서 야단일 거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시 KBS 부사장과 본부장 몇명과 담당 예능국장 등을 만나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방송국은 몰라도 KBS는 박시춘 선생님을 외면해선 안된다. KBS 가요무대에서 박시춘 선생님 작품 한 주일이라도 빠질 때가 있더냐" 등등.
천신만고 끝에 KBS 편성제작회의에서 밀양 '박시춘 가요제'를 전국 방송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밀양 영남루 옆에 박시춘 선생님의 생가 복원과 동상·노래비 등을 건립하고, KBS 박시춘 가요제를 2회까지 성대하게 했습니다.
1회부터 과거 박시춘 선생님과 인연이 깊었던 현인 선생님을 비롯해 반야월, 손석우, 백설희, 신세영, 신카나리아, 손인호, 안다성, 명국환, 김용만, 남백송, 송운선 선생님 등 원로 가수들과 원로 작사, 작곡가들을 밀양에 직접 모시고 가서 '박시춘 가요제'를 열었는데 관중이 3만여 명이나 운집하여, 당시 KBS에서도 놀라 매년 고정 편성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시민단체라는 곳에서 KBS와 밀양 시청 등에 전화를 끝없이 해 "박시춘은 친일 작곡가인데 왜 KBS에서 박시춘 이름으로 가요제를 하느냐"며, 생가 복원과 동상·노래비 건립한 곳에 관람객들 출입도 못하게 했습니다.
하도 귀찮게 하니 KBS에서 어느날 전화로 "정 선생님 시민단체에서 항의가 너무 심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 당분간만 다른 명칭으로 하다가 조용해지면 다시 ‘박시춘 가요제’로 합시다"라고 제안해 왔습니다.
이런저런 논의 끝에 '밀양아리랑 가요제'란 명칭으로 당분간만 하는 걸로 했는데 벌써 20여 년이 지나버렸습니다. 그간 몇번 원래의 명칭 '박시춘 가요제'로 환원하자고 이야기했으나 아직 그대로 있어, 고향 후배, 작곡계 후배로서 도리를 다 못해 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일제시대 그 당시 작곡가로 가장 유능했고 가장 유명했기 때문에 일본 관헌들이 총칼 들이대고 작곡해내라 하니 어쩔 수 없이 몇곡 작곡해 준 것이 오늘날까지 그토록 죄가 될까요? 일제하 그때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완장 찬 사람들의 횡포라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