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의 사랑 이야기
조선 정조
(1752-1800)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흔히들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 정약용과의 이야기, 수원 화성, 사도세자의 아들,
규장각 등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정조에게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의빈 성씨(1753-1786)입니다.
흔히들 궁녀는
임금의 사랑을 갈구하고 후궁이 되기를 누구보다
염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의 승은을
입어 임금의 아이를 낳는다면 후궁이 되어
떵떵거리면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의빈 성씨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정조가
먼저 반해서 쫒아다녔고, 두 번이나
차였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정조가 사랑했던 여인 의빈 성씨를
집중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의빈
성씨의 이름은 성덕임입니다.
의빈 성씨가
태어난 곳은 전해지지 않지만 한양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녀는
권력도 있고 잘 사는 가문 출신이 아니라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주변 정황으로
봤을 때는 양반 가문은 아니고 서얼이나 중인
가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언니와
고모가 양반의 첩으로 들어갔거든요.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은 그녀의
아버지, 성윤우입니다.
성윤우는
다름이 아니라 홍봉한의 집
청지기였습니다.
홍봉한이 누구냐고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누구냐고요?
정조의 친어머니입니다.
고로 의빈 성씨의
아버지 성윤우는 정조의 외할아버지 집
청지기였다는거죠.
물론 나중에는
홍봉한의 권세에 힘입어 무과에 급제한
정황도 보입니다
. 그동안 무과에
합격하지 못하던 사람이 주인 집 어르신이 출세하자
무과에 급제하고 승진가도를 달린다?
의심할만 합니다.
종3품
첨절제사까지 역임했을 정도였죠.
하지만
아버지는 의빈 성씨의 어린 시절 관직을
그만둡니다.
몸도 안 좋아졌고
관직 생활을 하면서 국고에 제출해야 될 돈하고 곡식을
내지 못해서 가세가 확 기울었거든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의빈 성씨는 1762년 10살의 나이로
궁녀로 입궁하게 됩니다.
그녀가
입궁하게 된 과정에는 혜경궁 홍씨가 뒤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원래 궁녀는
법적으로 노비를 선발하게 되어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명무실해집니다.
그래서
양민들도 궁녀로 들어오는 일이
빈번해지죠.
특히 궁궐의
높으신 분들이 자신의 사람을 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의빈 성씨의
경우도 비슷한 경우로 보여집니다.
자신의
친정에서 하인으로 부리던 자의 딸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혜경궁
홍씨는 의빈 성씨를 곁에 두고 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오며가며 당시 세손이던 정조와 마주쳤을거고,
정조는 의빈 성씨를 보고 반한거죠.
첫사랑이 아니었을까요?
정조의
첫 고백은 1766년 이루어집니다.
당시 정조는
15살, 의빈 성씨는 14살이었는데 정조의 고백을
의빈 성씨가 뻥차버립니다.
이유는
아직 세손빈이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의빈 성씨는 궁녀 생활을
지속합니다.
궁녀 생활 중에
정조의 두 누이인 청연군주, 청선군주와 함께 한글소설인
곽장양문록을 필사하기도 합니다.
정조의
여동생들과도 잘 지냈던 것을 보면 별 문제 없이 궁녀
생활을 이어나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조의
여동생들과도 어린 시절부터 봐왔기 때문에
사이가 좋았을 수 있죠.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정조는 세손에서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정조의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의빈
성씨를 아직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5년 만인 1780년에 2차 고백을 합니다.
첫사랑을 잊지 못했던 것일까요?
15살,
14살이었던 꼬맹이들은 30살, 29살의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되었습니다.
의빈 성씨는
또 거절을 했는데 이번에는 정조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의빈 성씨
밑의 하인을 벌하자 명을 따랐다고 합니다.
긴 세월만에
사랑을 쟁취해낸 정조는 그동안 쌓아놨던 사랑을 풀어서
성과까지 제대로 보여줬습니다.
그동안 정조는
자식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의빈 성씨가 1782년에
아들을 낳아준 것입니다.
이 아들이
바로 문효세자입니다.
앞의 두 번은
유산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 번째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죠.
이후 1784년에
옹주를 낳았지만 옹주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찍 죽고 맙니다.
2년 후,
1786년에는 아들 문효세자마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죠.
아들이 죽고난
이후에 몸이 많이 안 좋아진 의빈 성씨는 궁 밖으로
피접을 나가기도 하고
정조가
직접 돌보기도 했지만 아들이 죽은지 4개월 후에
사망하고 맙니다.
당시
의빈 성씨는 임신 9개월이었습니다.
첫 승은을
입은 1780년부터 사망한 1786년 사이에 의빈
성씨는 5번이나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금보다
낙후된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약해진 그녀의 몸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정조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해피엔딩이
아니라 새드엔딩으로 끝난 궁중의
로맨스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 점은 이후 임금은 새로 후궁 수빈 박씨를
간택해 아들을 보게 됩니다.
그 아들이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입니다.
출처 의빈 성씨 - 궁중의 사랑 이야기
[출처] 의빈 성씨 - 궁중의 사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