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이름모를 분들을 기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기념식은 부산·창원마산에서 번갈아 개최하는데 올해 기념식은 행정안전부(장관 이상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주최하고,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이사장 최갑순)이 주관 부산광역시· 경상남도·창원특례시가 후원해 열렸다.
▣ 釜馬民主抗爭 / Busan–Masan Uprising
1. 부마민주항쟁 개요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직할시와 경상남도 마산시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유신독재 반대를외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며
박정희의 제4공화국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부마민주항쟁,
4.19혁명과 함께, 대한민국의 4대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2. 부마민주항쟁 원인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원인이 된 2개의 사건>
* YH무역사건
1979년 8월, YH무역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사에 들어가 부당폐업 등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자 경찰이 야당 당사인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여성 노동자들을 향해 폭력적으로 진압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사망하게 된 사건입니다.
* 김영삼 의원직 제명
1979년 9월,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의원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유신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말을 하게 되고, 그 결과 김영삼 의원은, 총재직 정지와 의원직 제명을 당하게 됩니다.
3. 부마민주항쟁 의의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자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이다. 10월 유신 체제의 정당성의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사건으로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을 다시 열었던 사건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반유신 운동의 귀결점이자 총결산이었다. 게다가 단순한 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으로만 머물지 않고, 정권 내부의 갈등을 보다 급속히 자극하여 끝내 10.26 사건을 불러와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4. 부마민주항쟁 마무리
이렇게 부산과 마산 지역의 항쟁이 벌어지면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서, 정부에는 온건파(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강경파(경호실장 차지철)로 나뉘게 되며, 사태파악을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부산지역으로 내려보내게 됩니다.
김재규가 본 부산과 마산의 모습은, 단순히 야당의 선동과 조작이 아닌, 유신체제에 대한 민심이 돌아 선 것임을 알고, 곧바로 보고를 합니다. 하지만 강경파에서는 군대의 투입과 탱크까지를 거론하며,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강경파 쪽으로 기울게 되고, 김재규는 사태가 점점 악화되는 것을 걱정하게 되고, 이대로라면 더 큰 일로 벌지게 될 거라는 걱정을 하게 되고, 결국,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박정희 대통령과 강경파였던 경호실장 차지철을 저격하게 되며, 부마민주항쟁은 마무리가 됩니다.
5. 부마민주항쟁 이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정권 내부로부터 유신체제에 대한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에 밝혀진 내용이지만,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부마민주항쟁 현장에 공수부대를 출동시켰으며, 전두환 전 보안사령관은 부산과 마산지역의 진압작전 계획을 검토했다고 합니다.
2019년 부마민주항쟁은, 40년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부산대학교 새벽벌 도서관.
10.16 부마항쟁 기념비》■
억눌린 우리 역사
터져나온 분노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함성소리 드높았던
동트는 새벽벌
시월이 오면
핏발 선 가슴마다
살아오는 십 일육
동지여 전진하자
깨치고 나가자
뜨거운 가슴으로
빛나는 내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