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한국의 산지 승원 안동 봉정사 극락전(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과 영산전을 답사하고 돌아나오면 들린 곳이 봉림사지였고 그곳에 삼층석탑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명문 대가들이 즐비했던 안동 지방에서 특히 숭유억불로 불교가 탄압을 받던 시절에 사찰이 제대로 보존되기에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이곳을 답사 방문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당시 세도가들의 명당 싸움이 심했을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안동 봉림사지 삼층석탑은 봉림사 자리에 있던 석탑이라고 하지만 봉림사에 대한 검색은 일체 되지 않습니다. 문화재청 간행물 2021한국사지총람 증보판_下 에 실려있는 자료에 보면 봉림사가 아니라 "복림사(福林寺)"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복립사에 대한 연혁에 관련된 자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참고 자료로 "• 『永嘉誌』(1608) •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1942) • 『문화유적총람』(1977) • 『안동향토지』(1983)를 참조로 하였는데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1608년 『永嘉誌』에는 복림사의 옛 명칭을 "죽림사(竹林寺)"라고 하였고, 1942년 자료집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석탑이 있던 곳은 원래 죽림사가 있던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죽림사에 대한 기록도 전무무후한 상태입니다.
어쨌던 사찰이 있던 곳은 현재 안동장씨 소유의 봉림정사가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찰이 있던 터를 당시 유생들의 권력으로 개인들의 사유지로 소유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수서원"도 옛날 숙수사지가 있던 곳임을 감안 할 때 불교가 탑압을 받던 시절에 쉽게 유생들의 손으로 폐사지나 존재했던 사찰들이 쉽게 넘어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례도 많고요.
봉림사지가 안동 장씨의 소유 땅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봉림사지가 있는 주변을 둘러보면 풍수지리를 몰라도 상당히 좋은 터임을 알 수 있고, 또 대찰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터입니다.
봉림사지 주변에는 안동 세도가들의 재사가 있습니다. 하나의 골짝에 "풍산류씨 금계재사"와 "안동권씨 능동재사"가 100여미터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이 상당히 명당터였었나?하고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고서 당시 세도가 두 집안이 한 골짝에 재사를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곳을 벗어나면 안동 장씨의 "장태사공 성곡재사"가 지척에 있습니다. 권문 세도가들이 안동 서후면에 몰려있어서 그런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지극히 개인적 느낌으로 받아드릴수 밖에 없는 현장의 모습은 그러했습니다.
한국문화재청의 안동 봉림사지 삼층석탑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이 간략합니다.
『안동 장씨 소유의 정자인 봉림정사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으며, 현재 탑신의 3층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像)을 새겨 놓았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에도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특히 1층 몸돌에는 문모양을 새겨 장식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 갔으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둥근 돌이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어, 이 때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봉림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사찰로 추정되는 봉림사(鳳林寺)가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석탑이다. 봉림사는 조선 전기에 이미 폐사되었던 듯하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으나, 현재 탑신의 3층 지붕돌(옥개석)은 없어진 상태이다. 높이 3.35m. 하층기단은 두틈한 돌 2매로 구성하였고 면석에는 꽃무늬 안상(眼像)을 새겼다. 상층기단은 4매의 면석으로 구성하고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1매가 파손되어 다른 돌로 교체하였다. 상층기단 갑석은 2매로 구성하였는데 윗면을 경사지게 하여 가운데 부분을 3단으로 새기고 그 위로 다시 도드라지게 2단받침을 새겨 초층탑신을 받치고 있다. 모서리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1층 탑신의 전면과 후면에는 문모양〔문비(門扉)〕에 자물쇠를 조각하였고 나머지 두면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으며, 밑면 받침은 1∙2층이 4단인데, 1층 탑신과 2층 탑신의 석질이 다르다. 3층 탑신 위에 바로 뒤집어진 노반(露盤)이 올라 가 있고 그 위에 복발 없이 바로 앙화(仰花)와 보주(寶珠)를 얹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어,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비와 자물쇠 문고리가 새겨진 모습은 통일신라 하대와 고려 전기에 조성된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안동지역에서는 봉정사 3층석탑, 임하동 동삼층석탑이 그러한 사례이다.
안동지방에서 보기 드문 화강암 3층석탑 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봉림사지는 누가 언제 창건하였고 어떻게 폐사가 되었으며, 왜 안동 장씨의 소유의 땅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의문입니다.
1단 기단에 옥개석 받침을 보면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고려시대에 석탑 탑신 면석에 조각이 많이 되기도 했습니다.
봉정사 극락전(국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