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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임의 출생과 가계[편집]
윤임은 1487년(성종 18년) 가을 경기도 파주군에서 영돈령부사를 지낸 파평 윤씨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적개정난익대공신 판돈령부사 평양군이며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박중선(朴仲善)의 딸 순천부부인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의 친족으로, 고조부 윤번은 좌의정, 판중추부사를 지내고 파평부원군에 봉작되었으며 사후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정희왕후는 그의 증조할아버지 윤사균의 누이동생으로 증대고모 할머니였다. 한편 종증조부 윤사흔은 후에 윤지임의 증조부가 되고, 윤원형, 윤원로 5형제와 문정왕후의 5대조가 되며, 윤안인, 윤춘년의 4대조, 5대조이기도 했다. 고려 태사 윤신달의 18대손이며 문하시중 윤관의 14대손이다. 윤임의 집안은 무관의 가계로 그의 삼촌인 윤여해 역시 무신이었다.
증조부 윤사균은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으로 좌의정, 판공조사,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영평군에 봉작되었다. 할아버지 윤보는 공조참판을 지냈고, 후일 손녀 장경왕후의 현달로 아버지 윤여필이 영돈녕부사에 제수되면서 증 영의정 파릉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순천부부인 박씨는 적개공신, 정난공신, 익대공신으로 판돈녕부사 평양군을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박중선의 딸이다. 중종 반정 공신인 박원종은 그의 외삼촌이었고, 월산대군부인 승평부부인 박씨는 그의 큰 이모였으며, 예종의 차남 제안대군도 그의 이모부로, 작은 이모가 제안대군의 후처였다.
청소년기[편집]
그는 어려서부터 풍채가 좋고 위엄이 있었는데, 김상용이 쓴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는 일찍부터 '모습이 준엄하고 기국이 쓸 만하였다'한다.
어려서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서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위연을 설치하고 생시와 마찬가지로 모셨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손수 제철 음식을 올렸으며 병이 들었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여러 명의 첩을 축첩하였는데 신도비문에 의하면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처첩이 비록 많았지만 교태를 부리거나 투기하는 여인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그 중 기생출신 첩 매향은 임백령의 정인이었으나 자신의 첩으로 삼음으로서 그와 갈등하게 된다.
중종반정과 과거 급제[편집]
누이동생인 윤씨가 진성대군의 후궁이 되었다. 그 뒤 윤임은 음서로 출사, 여러 벼슬을 거쳐 선전관을 지냈다. 그 뒤 승평부부인이 연산군에게 겁탈당하고 자결하자 외삼촌인 박원종, 사돈인 홍경주[1], 연산군에 의해 축출된 사림파 정치인 성희안, 유순정 등과 모의, 1506년(연산군 12년) 박원종, 홍경주 등과 같이 거병,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앞장섰다.
중종 반정이 성공한 이후 중종으로부터 공신호를 받았다. 이후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간 누이동생은 폐출된 단경왕후를 대신하여 왕비 장경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은 지 얼마 후에 바로 사망했고, 먼 일족으로 9촌 조카가 새 왕비로 책봉되었다(문정왕후). 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 윤지임은 그의 8촌 형이었다.[2]
1512년(중종 6년) 무과에 급제, 오위도총부도사, 사복시첨정을 지냈다.
관료 생활[편집]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통정대부로 특별 승진하여 경원부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다.
1523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침략한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전하여 삭탈관직당하고 병사로 충군되기도 하였다. 1528년(중종 22년) 본부인 여주이씨가 세상을 떠나 1529년 2월 고양군 남면 향동에 장사지내고, 병마절도사 곽한(郭翰)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 뒤 남양부사로 전출되었다가 병조참의, 승정원승지를 거쳐 가선대부로 승진,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소윤과의 갈등[편집]
일찍이 인종이 왕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 중종은 이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생모도 일찍 여읜데다 병약하였고, 윤임은 그것을 염려하였다.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았을 때 윤임은 김안로와 함께 동궁(인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틈이 생겼다. 그 후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경원대군(명종)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퍼뜨려 모함했으며, 윤임은 또 윤원형 형제가 인종을 해치려 한다는 설을 조작하여 대윤과 소윤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중종은 불문율에 부치기로 하고 이들의 갈등을 중재한다. 그러나 대, 소윤의 알력은 가라앉지 않고 벌어졌다.
그 뒤 자헌대부로 승진, 병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역임하였고 의정부참찬을 거쳐 숭정대부로 승진했다. 판서로 근무할 때 문서는 반드시 손수 초고를 작성하여 낭료는 감히 한 마디도 보탤 수가 없었고, 지켜보는 사관들도 흠을 잡지 못했다 한다. 또한 사람들도 역시 사사로운 것으로 간여할 수 없었다. 견리의 옥사을 처리함에 원통해하거나 지체된 경우가 없었고 호조판서로 재직 중에는 관용품을 남용하는 간사한 아전들을 적발하여 처벌하기도 했다.
1544년(인종 1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다시 형조판서를 거쳐 파은군에 봉작되고,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이어 윤원로, 윤원형을 파직,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문정왕후가 대신 정사를 돌보았다. 곧이어 판돈녕부사로 전임되었고, 이에 크게 세력을 얻은 윤원형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제거하였다. 이때 사림파인 유관과 유인숙 역시 그의 당으로 몰아 제거한다.
유배와 최후[편집]
윤원형 일파는 그가 자신의 외조카인 계림군을 추대한다는 설을 퍼뜨렸고, 정난정은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이를 문정왕후에게 전했다. 또한 무골(武骨)로 성격이 호방했으나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임백령(林百齡) 등에게 원한을 샀다.[3] 그의 첩 중 한사람인 매향은 본래 임백령의 정인이었는데 그가 차지하게 되었고, 임백령은 이 일로 원한을 품고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등에게 협력하였다.
1545년 8월 이기 등의 탄핵으로 유배령을 받고 남해로 유배가던 중 8월 28일 사사령(賜死令)이 떨어진다. 8월 30일 배소로 가던 중 충청북도 충주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8세였다. 당시 성인이던 그의 아들 흥인(興仁)·흥의(興義)·흥례(興禮) 등 3명도 함께 사형당하였다. 장남 윤흥인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랑, 첨정을 지냈고, 윤흥의는 생원이었으며 윤흥례는 당시 선공감감역이었다.
그의 다른 누이는 계성군(성종의 서자)의 양자가 된 계림군의 생모로, 이 인연으로 그가 계림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들 중 윤흥신과, 장남 윤흥신의 세 아들만은 유모와 하인들에 의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때 기적적으로 피신한 아들들 중 윤흥신은 후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을사사화와 중종, 명종조의 권신들의 권력농단에 대해 그에게도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이 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은 "사직(社稷)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며 역시 비판하였으나, 이이(李珥)는 "임은 죄가 없다"고 하여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바로 고양군 남면 항동 손좌건향의 언덕에 매장된 본부인 여흥이씨의 시신과 함께 합장하였다.
사후[편집]
묘는 다른 곳에 매장했다가 복권 후 1590년(선조 23년) 윤임과 전부인 여흥이씨 묘를 이장하면서 윤임을 가운데 묻고 부인을 좌·우에 함께 묻었다. 경기도 고양군 남면 향동리(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에 있다. 선조 즉위 후 1577년(선조 10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임진왜란 아들 윤흥신이 전사하면서 증 병조참의로 추증되면서 추은(推恩)으로 후에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관상감사에 특별 증직되었다.
1589년 후처인 현풍곽씨가 아들 윤흥신의 임지인 서산군에서 사망하자 그해 8월 남면 향동의 오좌자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1590년 10월 윤임과 전부인의 묘를 어머니 순천부부인 박씨 묘 아래로 천장하면서 그를 가운데에 묻고 부인은 좌우에 매장하였다. 그의 묘소 위에는 어머니 순천부부인 순천박씨의 묘소가 있고, 그의 묘소 아래에는 모친의 몸종의 묘가 있다.[4] 아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어머니 순천 박씨 묘가 몸종 묘와 함께 있다. 평생을 수족같이 따랐던 정성이 지극하여 후손들이 특별히 몸종 사후 위 아래로 매장했다고 한다.[4] 드문 묘제라 한다.[4]
후에 임진왜란에 참여한 아들 윤흥신(尹興信)이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증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므로, 원종공신의 아버지에게는 1계급 특진되는 전례에 따라 윤임에게도 관작이 추증되어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 관상감사에 추증된 것이다. 1606년(선조 36년) 8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최립이 글을 짓고, 김현성이 글씨를, 김상용이 전서를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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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윤원형의 출생과 가계[편집]
윤원형은 1509년에 경기도 파주군에서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려 태사 윤신달의 19대손이며 문하시중 윤관의 15대손이다. 위로 형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윤원로가 있고, 누나인 문정왕후가 있었다.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누나인 문정왕후가 중종의 계비로 들어간 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사관을 거쳐 1538년 교리로 시독관을 겸직하고 사헌부지평, 홍문관응교 등을 지냈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후의 명종)을 낳자 당시의 권세가인 김안로를 제거하였다. 또한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경원대군을 해하고자 한다고 모함하여 서로 다투었는데, 이때 윤임 일파를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윤원형과 윤임은 친척이었는데, 윤원형의 5대조 윤번의 딸이 세조비 정희왕후로,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흔의 4대손이었다. 윤임은 윤번의 차남 윤사윤의 후손으로 윤원형의 아버지 윤지임과는 8촌간이었다. 윤원형은 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의 고손자였다.
청소년기[편집]
그의 누이 문정왕후는 중종의 계비로 입궐한 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慶原大君) 환(峘 : 뒤의 명종)을 낳자, 형 원로(元老)와 함께 외척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3년(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관료 생활[편집]
문정왕후의 책비 직후[편집]
한편 장경왕후가 병으로 죽자 윤임 등이 자신의 친족이기도 한 그의 누이인 숙원 윤씨를 지지하여 왕비로 간택된다. 장경왕후와 윤임은 모두 그의 아버지 윤지임과는 8촌 삼종형제간으로, 조선시대 기준으로 8촌은 사망했을 때 유복친에 해당되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이후 윤원형이 자신의 외조카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를 하면서 윤임 일가와의 관계는 악화된다. 이후 홍문관수찬·교리·지평·응교 등을 지냈다.
1537년 인종의 사돈인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파직, 유배되었다가 이 해 김안로가 사사되자 풀려나왔다.
1543년(중종 38년)에는 중국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했다. 귀국 후 통정대부승정원좌부승지로 승진, 다시 좌승지, 공조참판 등으로 승진했다. 1544년 중종이 병으로 죽고 장경왕후 소생 태자가 인종으로 즉위하였다. 또한 그의 조카딸이자 형 윤원량의 딸이 인종의 후궁이 되어 입궐, 숙빈 윤씨가 되었다.
1544년 승정원좌부승지로 승진, 좌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윤의 송인수(宋麟壽)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윤임과의 갈등[편집]
인종은 병약하였는데, 그는 일찍부터 경원대군을 차기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공공연히 갈등했다. 그해 대윤의 송인수(宋麟壽)의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한다. 윤원형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정적인 윤임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윤임이 희빈 홍씨의 소생인 중종의 여덟째 아들 봉성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3] 이후 그는 형 윤원로, 조카 윤춘년 등과 짜고 윤임을 축출할 계획을 세운다. 인종이 8개월 만에 죽고 11세의 어린 나이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석방되고 다시 복직되었다. 그해 예조참의가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고 명종 즉위 직후, 국왕의 장례는 5월장이 원칙이었으나 윤원로, 문정왕후, 이기(李芑) 등과 함께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인종의 장례를 박하게 치르게 했다.[4]
권력 장악[편집]
을사사화와 집권[편집]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크게 세력을 얻어,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일파와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이 공로로 보익공신, 위사공신 등에 책봉되었다. 이때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자신의 외조카인 계림군을 추대한다는 설을 퍼뜨렸고, 정난정은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이를 문정왕후에게 전했다. 윤임은 귀양가던 길에 충청북도 충주에서 사사당했다.
윤원형은 이때 윤임과 같은 외척 세력과 봉성군, 계림군 등과 같은 종친 세력 뿐만 아니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림들도 대거 같은 세력으로 몰아 처형했다.[3] 자신에게 역모의 누명이 돌아오자 두려웠던 계림군으느 도망치던 중 붙잡혀서 살해되었다. 이어 이기 등과 함께 사림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워 사림파 역시 윤임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체포, 투옥, 사형에 처한다.
이 공로로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이 되고 이어 그해 9월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관에 녹훈된 뒤 한성부우윤 서원군(瑞原君)이 되고, 그해 12월 호조참판이 되었다. 윤원형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켜 미처 제거하지 못한 윤임의 잔존 세력과 나머지 사림 세력을 모두 조정에서 몰아냈다.[3]
양재역 벽서 사건[편집]
양재역 벽서 사건이란 경기도 양재역의 벽면에 이런 내용의 벽서가 나붙었던 사건을 말한다. "위로는 여왕(문정왕후),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3]"
윤원형은 이 벽서 사건이 윤임 잔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해 조정에 남은 윤임의 잔존 세력을 모두 숙청했다. 윤원형이 윤임의 잔존 세력에 사림을 포함시킴으로써 갓 조정에 진출했던 사림은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어야 했다.[5] 양재역 벽서 사건을 계기로 을사사화를 피한 사림이 대다수 끌려와 형문을 당하고 유배, 파면당했다.(정미사화) 이 과정에서 사림파의 희생을 막으려는 이언적 등과 갈등, 이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언적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이어 윤원형은 1546년(명종 1년) 1월 자헌대부로 승진한 뒤 서원군(瑞原君)에 봉군되었고, 다시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 |
신은 척리(戚里)의 한사람으로서 외람되게 공신의 대열에 참여하여 벼슬이 이미 종2품에 이르렀는데, 이제 대신이 신을 공이 있다고 아뢰어 다시 정2품에 올랐습니다. 벼슬을 이렇게 헤프게 준다면 조정의 명기(名器)가 이로부터 무겁지 않게 됩니다. 개정하소서. |
” |
승진과 진봉을 사양하였으나 명종은 듣지 않았고, 곧 예조판서로 승진했고, 경연특진관을 거쳐 1547년 정헌대부 예조판서, 1548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친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다가 문정왕후가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듬해 형을 유배시키고 그 뒤 윤춘년(尹春年) 등과 함께 윤원로를 공격하여 사사하였으며 완전히 권력을 잡았다. 이 일로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은 그와 정적이 되었다. 1547년 동지춘추관사로 실록편찬에 참여하여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을 도왔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1551년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신불(神佛)ㆍ복서(卜筮)를 깊이 믿어서 1551년 이후 여러 번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점쟁이의 말을 따라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결국 의정부 우의정 겸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나갔고, 1557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우의정을 지냈다.
몰락과 죽음[편집]
생살(生殺)의 권한을 쥐며 권세를 쥐고 사형될 사람도 뇌물을 받고 무죄 석방하는 한편 노비·전토들을 막대하게 점령하고 사치생활을 끝없이 누렸다. 1560년(명종 15년)에는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 되었다. 이후 우의정을 거쳐 1563년 영의정에 올랐다. 국구이자 정승으로 세도를 부리다가,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정난정에 의해 독살된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가 윤원형과 정난정을 관아에 고발하였으며, 이후 양사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잃고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받은 뒤 강음에 은거하였다. 일설에는 유배된 것이라 하며, 사약을 들고 오는 금부도사를 보고 첩 정난정과 함께 자살하였다고도 한다.
1565년 윤원형과 정난정을 사형에 처하라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탄핵이 빗발쳤고, 윤원형은 그해 11월 18일에 경기도 강음현(江陰縣)에서 자결하였다.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에서 금부도사가 온다는 이야기를 잘못 듣고, 사형당하기 전에 미리 정난정과 함께 약을 먹고 자결했다고 한다.
사후[편집]
그가 죽고 곧 명종도 바로 사망했으므로 복권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손들은 연좌되지 않았다 한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 산 4-20번지(현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 산4-20번지) 선산 근처에 안장되었다.[6] 정난정 역시 그의 묘소 뒤편에 안장되었는데 묘비는 조선의 멸망 이후에나 세워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과 저서는 그가 정치적으로 몰락하였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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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묘역 관리인으로 자처하는 교하문중은 정정공의 셋째 윤사흔(양평공)계 이하 윤원형(소윤) 직.방계 형제들의 후손들이 주로 촌락을 이루어 살아왔고 정정공의 둘째 윤사윤(성안공)계 이하 윤임(대윤)의 후손들은 8형제중 3형제가 윤임과 더불어 사사되거나 거의 멸문을 당해 잔여 후손들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 정정공의 첫째 윤사분(이정공)의 묘가 양평공과 더불어 정정공 묘역에 있으나 성안공의 묘는 화성에 모셔져 있고 윤임의 아버지인 파원부원군(장경왕후 아버지)의 묘가 정정공 묘역에 있으나(사화때 몸을 보전) 부인은 생전 화를 당한 아들 곁에 묻히고자 하여 고양시 향동의 윤임 묘 옆에 모셔져 있다.
윤임의 아들중 사화에 살아남은 흥신,흥제 형제가 임진왜란때 다대포 첨사로 있다가 임진왜란의 첫 승전을 하였으나 결국 재침입때 형제가 끌어앉고 순절하여 떨어지지 않아 합장하였다.
묘는 후손들이 남양주 화도읍 종산으로 옮겨 이장했으며 정발,송상현등과 더불어 부산의 충렬사에 위패되어 있고 다대포에는윤공단을 지어 해마다 시와 시민이 제를 올린다.
세조가 장인에게 하사한 방대한 면적의 정정공 묘역은 '정정공 전체 문중'의 땅이나 몇해전 교하문중이라는 몇명의 소유로 등기되어 있어 신도시 개발을 앞두고 적지않은 소란이 파벌간에 있었고 결국 외지에 산재해 있던 문파들의 요구로 인해 지방문화재로 추진되어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 내용중 일부에도 나오지만 근래에도 대윤과 소윤 후손들의 소통이 없는 듯하고 정정공 시제 또한 냉랭한 분위기가 없지 않을듯 하다. 대윤 집권시 소윤을 돌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윤 집권시 대윤과 사림을 몰살시킨 일로 아직고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고 회한하는 후손들의 지적대로 아직 정정공 묘역에 안장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찿기조차 힘든 윤임과 그의 어머니 묘를 아버지 파원부원군이 안장된 정정공 묘역에 이장되어야 함이 옳을듯하다. 골육 상쟁의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피의
성격이 묻어 시간을 도배해서는 아니될 일이고 피의 혈통이란 과거의 습성을 승계하여 그대로 성향으로 굳어지는 행태를 말함이니 후손들과 지역의 민심이 들여다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다.
[파평부원군(정정공 윤번):세조의장인,시조의 15대손,윤관장군의 11대손,자->이정공,성안공,양평공]
[파원부원군(윤여필): 중종의 장인(인종의 외조부,자->대윤 윤임:시조의 18대손,윤관장군의 14대손)]
[파산부원군(윤지임): 중종의 장인(명종의 외조부,자->소윤 윤원형:시조의 19대손,윤관장군의 15대손)]
정정공 묘역 문화재 구역은 운정신도시 북단 파주이마트 왼쪽 야산 넘어에 분포해 있고 다율방과후학교가 진행되는 옛
교하중학교 터의 오른쪽에 위치한다. 이 옛 교하중학교내의 한곳을 노무현정부 초기 대한민국 수도를 교하로 해야하고
청와대 터가 바로 그곳이 적합하다고 했던, 서울대 교수 출신의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가 문헌으로 언급한바 있다.
광해군 시절의 교하천도론 명맥과 유사하다.
묘역 주변에는 고인돌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어 고대의 흔적까지 느낄수 있다.
문화재 묘역 내에는 중시조 정정공 묘를 비롯하여 부원군묘 3기, 정승묘 7기, 판서묘 8기, 참판묘역 30기등이 분포하고 있다.
--- maximus / che guevara
첫댓글 당하리 와동리 일대 '덕'자 돌림 윤씨들이 많던데 모두 소윤파 사람들인거군요.
밑에 글에 종묘지기인가도 훈덕씨가 나오고 국회의원,체육회장,등등 많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