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제향은 이렇게...칠궁제칠궁(사적 제149호), 종묘에 오르지 못한 왕의 생모 일곱 신위 봉안...
매년 10월 제례봉행
한철수기자 [문화=경기인터넷뉴스]
조선시대는 물론 왕조시대에서 왕자를 생산하는 후사(後嗣)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조선조 13대 명종까지는 중궁(中宮)을 통해 낳은 왕자가 보위에 올랐으나 외아들 순회세자가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죽고, 명종 또한 곧이어 승하(昇遐)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정에서는 중종과 후궁인 창빈 안씨 사이에 태어난 덕흥군의 3남 하성군을 왕위에 올린다. 후궁의 몸을 빌은 첫 왕의 탄생이다. 이후 적자의 생산은 중간 중간 끊기게 되고 서자격인 후궁의 아들이 보위에 오른다. 대표적 사례가 19대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 태어난 영조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 어미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컸다.그래서 즉위년 12월 13일 경복궁 북쪽(지금의 칠궁)에 숙빈 최씨의 신주(神主)를 봉안하는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를 세웠다. 뒤에 육상묘(毓祥廟), 육상궁(毓祥宮)으로 바꾸어 불렀다. 고종태황제 19년(고종, 1882)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했다.
순종효황제 2년(융희2.1908.순종)에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등 5개의 묘사(廟祠)를 이곳으로 옮겨 육궁(六宮)이라 부르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이안(離安)되므로 칠궁(七宮)이 된다. 칠궁은 왕 혹은 추존왕을 낳은 일곱 명의 후궁의 사당(궁,사우,묘사,궁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칠궁은 서울시 궁정동에 위치하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됐으나,청와대 바로 옆에 있어 경비와 보완의 이유로 일반인 출입금지는 물론 향사(享祀.제사)도 중단되었었다.2001년이 돼서야 일반에 제한공개 되었고, 문화재청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노력으로 2005년부터 매년 10월에 제를 다시 올려 오늘에 이른다.
왕은 낳았으나 후궁이기에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비운의 여인들의 넋을 달래는 칠궁제는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다. 칠궁제에 참석을 하기 위해서는 제를 주관하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보름 전에 인적사항을 보내 예약했다. 제일 3일전 참석해도 좋다는 우편물이 왔다.
그리고 제일인 2016년 10월 17일 9시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10시 30분경 삼문에 도착했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칠궁으로 들어간다. 1시간여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이날 정오에 시작한 칠궁제는 어떻게 지내는가 칠궁의 의미는 무엇인가 함께 살펴본다.(글쓴이 주)
-칠궁엔 누구누구의 신주를 모셨나...7궁과 7원 이야기
칠궁은 위에서 살폈듯이 왕이나 추존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사우(祠宇)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나라로 "살아서는 효로 죽어서는 예로 모신다." 는 것을 모범으로 삼았다.
조선 칠궁의 시원은 육상궁이다. 영조는 생모를 위해 현 위치에 사당인 숙빈묘를 세우고 효와 예로서 정성을 다했다. 이곳에 모신 일곱 후궁의 면면을 살펴보자. 본고는 세워진 연대순이 아니라 세계별로 소개한다.
저경궁(儲慶宮)은 선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원종(정원군-정원대원군)의 생모인 인빈(仁嬪) 김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원종이 살았던 남부 회현방 송현(남대문로 한국은행 뒤편)에 세워 영조19년(1743) 송현궁(松峴宮)이라 불렀다.
영조31년(1755) 궁호를 저경궁으로 고쳤다. 고종7년(1870) 계동(桂洞)의 경우궁의 별묘로 옮겼다가 다시 고종23년(1886) 경우궁과 저경궁을 옥인동으로 옮겼다. 순종2년(1908)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인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아버지는 감찰 김한우(金漢佑), 어머니는 충의위 이성(李誠)의 딸이다. 명종의 후궁 숙의 이씨의 외종으로 궁중에서 자랐다. 명종비 인순왕후가 선조에게 부탁하여 후궁으로 두게 했다. 이때 나이 14세였다.
후궁 가운데 선조의 총애를 받았고 정원군(元宗)을 포함 4남 5녀를 낳았다. 영조 24년 시호를 경혜(敬惠), 궁을 저경, 무덤을 순강원(順康園)으로 정했다. 순강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있으며 매년 11월 4주 일요일에 제향을 지낸다.
대빈궁(大嬪宮)은 그 유명한 희빈 장씨의 사당이다. 숙종이 죽고 경종이 복위하자 신주를 장씨의 사저인 정동에 두었다.경종2년(1722) 10월에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고 중부 경신방(종로구 낙원동)에 새로 지어 봉안했다.
고종7년(1870) 정월에 육상궁 안으로, 고종24년(1887) 낙원동으로, 순종2년 7월에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대빈 장씨는 숙종의 후궁과 정비를 오간 여인으로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이라 한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다.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숙원을 거쳐 숙의에 올라 숙종 14년 경종을 낳고 희빈이 됐으며, 인현왕후 민씨가 폐비되자 왕비에 올랐다. 6년 뒤 민씨가 복권되니 희빈으로 다시 내려 않는다.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사사됐다.
장씨가 죽자 광주 진해촌(眞海村, 광주시 오포면)에 묻었다. 1969년 고양시 서오릉으로 옮겼다. 아들인 경종이 재위 2년 만에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했으며, 줄여 대빈(大嬪)으로 부른다. 양력 11월 9일 고양시 서오릉 대빈묘에서 제를 지낸다.
육상궁(毓祥宮)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궁실이다. 영조는 즉위하자 자신이 자란 집에 건립할 것을 원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경복궁의 북쪽인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아 영조원년(1725) 12월 숙빈묘라 했다.
영조20년(1744)에 육상묘로, 영조29년(1753) 육상궁으로 올렸다. 고종19년(1882) 8월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새로 지었다. 육상궁은 연호궁과 함께 사용한다. 육상궁을 칠궁이라 하는데 이는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사우들을 1908년에 이곳으로 모았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1670~1718)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이자 제21대 영조의 어머니로 본관은 해주(海州)로 영의정에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딸이다. 7세 혹은 12세에 무수리로 궁에 들어 왔으며, 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었을 때 함께 궁으로 왔다는 설도 있다.
인현왕후를 잘 섬기며 궁궐생활을 하다가 인현왕후가 쫓겨나자 희빈 장씨가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모진 구박을 받던 중 숙종의 승은을 받아 아들 영수를 임신하여 숙원이 된다.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연잉군(영조)을 낳고는 숙의, 귀인, 숙빈에 오른다.
1701년 인현왕후가 죽자 숙종을 지극히 섬겼고, 왕후에 오를 기회가 있었으나 희빈 장씨와 같은 일이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는, 궁녀가 왕비로 오르는 금지법이 제정되는 바람에 중전에 오르지 못하고, 숙종44년 49세로 일기를 마쳤다.
파주시 광탄면에 장사를 지내고 소령묘라 했다. 영조29년(1753) 사당과 무덤의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1753년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시켰다. 매년 4월 셋째 토요일 기신제를 올린다.
연호궁(延祐宮)은 영조의 장남이자 정조선황제(정조)의 양부인 추존 진종소황제(효장세자. 진종)를 낳은 생모인 정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정조가 즉위하자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정빈을 연호궁으로 정하고 위폐를 증조할머니인 숙빈 최씨의 육상궁과 가까운 곳인 경복궁 추성문 밖에 두었다. 고종7년(1870)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금에 이른다.
정빈 이씨(1693 ~ 1721)는 이준철(李俊哲)의 딸로 영조가 즉위하기 전에 세자의 후궁인 소원(昭媛)으로 있으면서 뒤에 진종으로 추존된 경의군(敬義君)을 낳고, 영조 1년(1725) 정빈으로 올랐다. 영조 즉위전 28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자 파주시 광탄면에 장사지내고, 수길묘라 했다. 정조 2년(1778) 수길원으로 승격됐으며, 매년 4월 넷째 일요일에 제를 지낸다.
선희궁(宣禧宮)은 영조의 차남인 추존 장조의황제(사도세자.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영빈이 사망한 해인 영조40년(1764)에 북부 순화방(종로구 신교동)에 세우고, 영빈의 시호를 따서 의열묘(義烈廟)라 부르다가 정조12년(1788)에 선희궁으로 고쳐 부른다.
고종7년(1870) 신주를 육상궁으로 옮겼다. 고종33년(건양2. 1896) 선희궁으로 원래의 자리에 복원했으나, 순종2년(1908) 육상궁으로 다시 왔다. 처음의 궁터(서울시유형문화재 32)가 신교동에 남아 있다. 경우궁과 합사됐다.
영빈 이씨(1696~1764)는 영조의 차남인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로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종1품)이 되었으며, 영조6년(1730) 영빈이 됐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4명의 옹주를 연이어 낳은 뒤 영조11년(1735)년 원자를 출산하자 후사(後嗣)를 기다리던 영조는 크게 기뻐했다.
영빈은 사도세자가 1762년 폐위당하는 와중에서도 동요하지 않았고, 1764년에 죽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했다. 그리곤 후궁 최고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듬해 시호를 의열(義烈)이라 했다.
소생으로 사도세자 외에 5명의 옹주를 더 낳았다. 무덤은 수경원으로 지금의 연세대 안에 있었던 것을 1968년 고양시 서오릉 명릉과 익릉 사이로 옮겼다. 매년 9월 넷째 일요일 제를 지낸다.
경우궁(景祐宮)은 정조선황제(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숙황제(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주를 봉안한 묘사이다. 수빈은 순조20년(1820)에 생을 마감하자 이듬해 신주를 창경궁 내 전각을 이용해 현사궁(顯思宮)이라 했다.
4년 뒤 북부 관광방 계동(종로구 계동 현대그룹사옥)에 사당을 세우고 경우궁이라 했다. 고종33년(건양2. 1896) 계동에서 순화방 옥동(종로구 인사동 순화병원)으로 옮기고, 1908년에는 육상궁(毓祥宮)에 합사하였다. 고종21년(1884)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고종이 잠시 이 궁에 피신하기도 했다.
수빈 박씨(1770~1822년)는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이다. 수빈은 영조46년(1771) 반남 박씨 좌찬성 박준원의 딸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반남이다. 정조의 정비(중전)에게서 후사가 없자 아들를 보기위해 정조가 직접 간택했다. 왕자(순조)를 낳자 정조가 크게 기뻐했다.
수빈은 행실이 착하고 예절이 바를 뿐만 아니라 평소에 말이 적고 의복과 일용품들을 지극히 아꼈으며, 궁녀들이 의복을 만드는데 있어서 작은 천 조각 하나라도 버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근검절약하였다.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자 아첨을 하려는 벼슬아치들이 수빈에게 은밀히 귀중품을 진상하다가 의금부에 잡혀가기도 했다.
순조22년(1822)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세상을 뜨자 양주군 배봉산 아래 장례를 치르고 휘경원이라 했다. 지금의 휘경동은 여기서 유래한다. 철종6년(1855) 순조의 인릉을 천장(遷葬)하면서 휘경원도 천장하기로 해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순강원(풍양궁 인근) 우측으로 옮겼다. 7년 뒤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광릉 인근)로 다시 옮겼다. 매년 5월 넷째 일요일 제를 올린다.
덕안궁(德安宮)은 대한제국 고종태황제(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英親王. 의민황태자)의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엄비는 광무원년(1897) 황태자 이은을 낳자 귀인에 오르고, 1903년 순헌황귀비 칭호를 받았다.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의 명례궁 터에 경선궁을 짓고 생활하게 했으며, 1911년 7월 엄비가 사망하자 덕안궁으로 바꿨다.
1913년 지금의 중구 태평로1가 61번지에 새로 궁을 짓고, 묘우(廟宇)을 덕안궁이라 했다. 1929년 7월 덕안궁을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기자 칠궁으로 부르게 됐다.
덕안궁은 정면 3칸의 목조건물로 앞툇간이 틔어 있으며, 네모기둥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앙에 화려한 무늬로 투각된 제단과 위패가 놓여 있고, 측면은 중방 아래까지만 벽돌을 쌓았으며, 뒷면은 상방까지 벽돌을 둘렀다. 사당 앞 서쪽에 남북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이안청(移安廳)으로 사용하던 부속건물이 있다.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태황제(고종)의 후궁이다. 1854년 한성부 서소문방 서소문에서 평민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8세에 경복궁 나인으로 입궁했다.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으며, 31세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으나 명성황후에게 발각되면서 궁궐에서 쫓겨났다. 을미사변 직후 궁으로 다시 들어와 고종의 시중을 들다 영친왕을 출산하자 상궁에서 귀인, 순빈, 순비가 되었다가 1903년에는 황귀비가 된다. 아관파천 때는 고종과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했다.
1905년 양정의숙(양정고), 1906년 진명여학교(진명여고)와 명신여학교(숙명여대)를 세웠다. 1911년 7월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남양주시 금곡동 지금의 홍릉 곁에 안장했으며, 원호는 영휘원이다. 매년 양력 4월 13일에 제를 지낸다.
-왕을 낳은 후궁의 칠궁제는 이렇게(1)...제수진설
2016년 10월 17일 화창한 가을 정오에 시작한 칠궁제는 종묘대제의 축소판이다. 조선의 국가의례는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 오례의에 의해 진행된다. 칠궁제는 길례에 해당되며, 조선 초기에 정리된 오례의 보다는 영조 이후 제정된 제향의례를 따랐을 것이다.
칠궁은 왕의 사친(私親)의 원침(園寢)이 멀리 있어 자주 찾아가 볼 수 있도록 궁궐과 가까운 곳에 세웠다. 봄·가을 두 차례에 올리는 춘추향사(春秋享祀)와 탄신일 등 특별한 경우 배알을 했다. 왕조시대에는 예조에서, 국권을 상실한 다음에는 장례원(掌隷院)에서 지금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주관하고 있다.
종묘에는 왕과 왕비의 신분이므로 네 번 절하는 국궁사배를 올리나 칠궁에서는 두 번 올리는 재배를 하는 것과 제수가 단출하다는 것이 다를 뿐 의례에 임하는 자세는 다를 바 없다.
제수(祭需)는 음양의 원리에 따라 생물, 마른제수, 붉은 것은 양수(陽需)이며 익히거나 젖은 것, 흰 것은 음수(陰需)이다. 이번 칠궁제는 <각궁묘원향례진설도의 저경궁춘추향>의 찬실도설과 준뢰도설에 따랐다.
신주를 중심으로 왼쪽에 [면(국수)-상화병(떡)-전포어-황률(말린밤)-홍산자, 가운데[전증(탕)과 개장(간장)]을 좌우에 두고 [편육-백자(잣)-중박계(약과)-백폐(흰모시)]를 위에서 아래로 진설한다. 오른쪽에 [시접-잡탕-적(지짐이)-건조(말린대추)-백산자]를 각각 진설하고, 좌우에 촛대를 백폐 앞에 술잔(작)과 받침대(점)를 둔다. (그림 참조)
제수를 담는 그릇 또한 음양오행과 천지인의 원리에 따라 담는다. 양기에 속하는 음식은 변(籩. 대나무그릇. 죽변), 음기에 속하는 음식은 두(豆. 나무그릇. 목기)에 담는다.
-왕을 낳은 후궁의 칠궁제는 이렇게(2)...제주의 종류
조선왕실에서 사용하는 제주는 오제(五齊)와 삼주(三酒)가 있다. 오제는 계절에 따라 가려서 제사에 올리는 술이고, 삼주는 제례참석자들이 마시는 술이다.
오제는 술이 익는 시기에 따라 범제(泛齊), 예제(醴齊), 앙제(盎齊), 제제(齊緹), 침제(沈齊)로 나눈다. 술은 담아 3일에서 7일이 지나면 익기 시작한다. 이때 밥알이 동동 뜨기 시작할 때의 술이 범제(동동주), 10일경이면 진액과 밥알이 동동 뜨고 단맛이 나는 술을 예제(감주), 엷은 푸른빛이 나며 비로소 술의 기운이 도는 술을 앙제(탁주. 농주), 잘 익어 찌꺼기가 가라앉고 붉은 기가 도는 술을 제제(약주), 농익어 찌꺼기가 완전히 가라앉은 맑은 술로 청주(왕주)라 한다.
삼주는 사주(事酒), 석주(昔酒), 청주(淸酒)로 구분한다. 사주는 침체 후 뜨는 술로 약한 적색으로 술기운이 강하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마시는 술이다. 석주는 겨울에 빚어 봄에 마시는 술로 제향 후 내리는 음복주이다. 청주는 겨울에 빚어 여름에 마시는 술로 과하주(過夏酒)라 한다.
칠궁제에서는 신관례에 울창주, 초헌관은 예제, 아헌관은 앙제, 종헌관은 청주를 올린다. 울창주는 울금과 검은 기장쌀로 담그는 향기가 좋은 술이다.
-왕을 낳은 후궁의 칠궁제는 이렇게(3)...제의 순서와 제집사
제의 절차는 재실에서 예를 익히는 습의를 하고 환복을 마치면, [예궁소(詣宮所. 각 궁으로 향함)-제관취위(祭官就位. 봉무 할 자리로 감)-신관례(삼상향-용찬례-폐백)-초헌례(헌작-독축)-아헌례(헌작)-종헌례(헌작)-음복례-망료-예필-환궁]순으로 진행된다.
칠궁은 일곱 분의 위폐를 모신 곳이지만 두 곳을 합사했으므로 모든 헌관의 수는 7배수가 아니다.이번 칠궁제에는 헌관 21명, 제관 41명 등 총 62명의 제관이 봉무했다.
이날 참가한 제관을 구체적으로 나누면 신위전에 잔을 올리는 3헌관(초·아·종헌관) 21명, 제를 주관하며 홀기를 낭독하는 집례 2명, 축을 읽는 대축 7명, 궁실에서 헌관이 잔과 백폐를 올릴 때 돕는 궁사와 축사 14명, 제의를 돕는 재랑 7명, 제를 감독하는 감찰 5명, 헌관을 이끄는 알자 5명, 집례의 창홀을 따라하는 찬자 2명으로 3헌관을 제외한 제관을 제집사(諸執事)라 한다. (표 참조)
제관의 행렬은 재실인 [삼락당-내삼문-저경궁 외 4궁(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과 [삼락당-중문-육상궁 외 1궁(연호궁)] 두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진행됐다.
-왕을 낳은 후궁의 칠궁제는 이렇게(4)...제관취위
각궁에 도착한 제관들이 봉무(奉務)할 자리로 이동하는 의식으로 먼저 집례와 찬자 알자가 국궁재배를 하고, 관세위에서 손을 씻고 제자리로 간다.알자가 궁실에 근무할 감찰 궁사, 대축, 축사, 재랑 등 제집사를 절할 자리로 이끌고 국궁재배를 마치면 동계와 동문을 통해 입실한다.
제집사가 제 위치에 서면 대축은 신주장에서 신독을 꺼내신주를 모신다.알자가 제의 준비가 마쳤음을 알린다.이때 알자는“부르오”라고 외친다.“부르오”를 외치는 것은 헌관과 제집사가 홀기대로 의식을 마쳤으니 다음을 의식을 낭독하라는 신호이다.
집례의 홀기 창에 따라 제에 참석한 참반원과 3헌관이 국궁재배를 한다.일곱 신위에 올리는 첫 인사다. 헌관과 제집사는 절을 할 때와 제의 중 필요에 따라 홀을 홀주머니에 꽂고,이동할 때나 서있을 때는 홀을 가슴 높이로 쥐는데, 왼손을 오른손 위로 올린다.
-왕을 낳은 후궁의 칠궁제는 이렇게(5)...신관례(晨祼禮)
신관례는 신(혼)을 모시는 강신(降神)의식이다.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로 관세위에서 손을 씻고,동계와 동문을 통해 궁실로 들어ㅘ 술잔이 놓인 준상[준소(樽所)으로 가 서쪽을 바라보고 선다.
술을 따르는 집준자는 술단지 뚜껑인 멱(冪)을 열고 국자인 용작(龍勺)으로 제주인 울창주(鬱鬯酒)를 용찬(龍瓚)에 따른다.이를 거멱울창주(擧冪鬱鬯酒)라 한다.거멱울창주를 마친 초헌관은 신위 앞에 무릎을 꿇고 향을 세 번 올리는 삼상향을 한다.
축사는 초헌관의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용찬을 초헌관에게 전하고 초헌관은 눈높이로 들었다 마루에 둥글게 뚫은 관지(灌地) 구멍에 울창주를 세 번 나누어 붓는다. 이를 용찬례라 한다. 이어 축사가 흰비단이 든 대바구니를 초헌관에 전하고 초헌관이 높이 받들어 올리면 대축이 받아 신위전에 올린다. 이를 폐백이라 한다. 초헌관은 일어서 동문을 나가 제자리로 간다.
-왕을 낳은 후궁의 칠궁제는 이렇게(6)...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신관례를 마치면 궁사와 대축은 제수를 올리는 진선(進饍)을 한다. 이어 첫잔을 올리는 초헌례를 실시한다. 알자의 인도를 받은 신관례와 같은 방식으로 입실하고, 술을 따르는데 초헌례에 사용하는 제주는 예제(醴齊)이다. 축사가 초헌관에 잔을 주면 초헌관은 눈높이로 올리면 대축은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린다.
대축은 제상의 제수의 뚜껑을 열고 젓가락 자루가 서쪽을 향하게 놓는다. 이를 계개서병정저(啓蓋西柄正箸)
라 한다. 대축은 초헌관 서쪽에 앉아 동쪽으로 향하고 무릎을 꿇는다. 제에 참석한 참반원은 모두 무릎을 꿇는다. 대축이 축을 읽는 독축을 하면 초헌례를 마치고 초헌관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헌관과 종헌관은 관세위에서 손을 씻고 궁실에 들어와 초헌관과 같은 방식으로 잔을 올린다. 이때 올리는 제주는 아헌관은 앙제(盎齊)를 종헌관은 청주(淸酒)를 올린다.
-왕을 낳은 후궁의 칠궁제는 이렇게(7)...음복례
음복례는 초헌관이 제집사와 참반원을 대신하여 술과 음식을 마시고 맛보는 의례이다. 이번 칠궁제에서는 저경궁과 육상궁의 초헌관을 대표로 했다.
알자의 인도에 따라 동계로 올라 동문 앞에 마련된 음복장소로 이동한다. 대축은 준소에서 청주를 따라 동문으로 나와 초헌관에 음복술인 복주(福酒)을 넘기고 초헌관은 마신다. 음복을 마치면 대축은 빈 술잔을 받아 작점에 놓고, 제상에서 제수를 들고 나와 초헌관에게 건내 맛보게 한다.
음복례가 끝나면 3헌관은 국궁재배한다. 이어 참반원도 절을 한다. 궁실 안에서는 대축이 제물의 뚜껑을 덮는다. 다시 3헌관과 참반원이 국궁재배하면, 대축이 신주의 덮개를 덮고 신독을 신주장에 봉안한다.
-왕을 낳은 후궁의 칠궁제는 이렇게(8)...망례와 예필
망료(望燎)는 제의 마지막 순서로 축문과 비단을 태우는 의식이다. 알자가 저경궁과 육상궁의 초현관을 망료위로 인도하고, 각 궁의 대축은 축을 궁사는 폐를 들고 신문으로 나와 망료위로 가 태운다.
이번 칠궁제에서는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의 대축과 궁사들은 올렸던 축과 폐를 저경궁 대축과 궁사에게 전하면 소전대야에서 태우고, 망료위로 가면 대축은 “예필(禮畢)”이라고 외친다.
제집사가 궁실에서 나와 제자리로 돌아가 절을 한다. 이어 집례, 찬자, 알자도 제자리로 돌아가 절을 한다. 칠궁제가 끝났다. 궁사는 궁실로 들어가 제수는 거두는 철찬(撤饌)을 하고 제관(祭官)은 환궁을 한다.
-글을 마치며
칠궁은 왕은 낳았으나 중전의 신분이 아니었기에 나라의 사당인 종묘에도 오르지 못한 7명의 후궁을 위로하는 사당이다.하지만 제향은 오궁에서 거행된다.경우궁에 선희궁을, 연호궁에 육상궁을 합사(合祀)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향공간도 두 곳으로 나뉜다. 재실인 삼락당을 중심으로 서쪽에 5궁인 저경궁, 대빈궁, 경우궁, 선희궁, 덕안궁을 동쪽에 2궁인 연호궁, 육상궁으로 나뉘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칠궁에는 묘사 외에도 영조의 사모곡이 보이는 냉천정, 초가정자, 이안청, 삼락당, 송죽재, 풍월헌, 수복방, 삼문, 중문, 내삼문, 외삼문 등 건축물과 위풍당당한 느티나무, 늘어진 소나무 그리고 연못은 조선왕조의 전형적인 정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연호궁의 삼문 조각장식은 여성들의 공간임을 알리듯 아름답기 그지없다.
왕을 낳은 궁중 여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예로서 제를 올리는 칠궁은 제한적으로 개방을 한다. 관람 20일전 예약을 하면 문화관광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관람할 수 있다. 화요일~토요일 10시, 11시, 14시, 15시에 개방을 한다. 예약 문의는 02-730-5800로 하면 된다.
끝으로 귀한 제례를 참반하고, 덕안궁에서 제의 절차를 관람하고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례부 관계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참조문헌: 조선왕조실록(인터넷 태백산고), 조선의 국가의 제사(한국학중앙연구원.2009), 종묘친제규제도설번역집(문화재청 종묘관리소.2010), 종묘대제 제수진설(문화재청 종묘관리소. 2010), 조선왕릉제향(전주이씨대동종약원.2009~16), 한국민족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6), 칠궁제 홀기(전주이씨대동종약원.2016), 인터넷 두산백과, 인터넷 문화컨텐츠닷컴, 조선왕릉관리소 홈페이지, 문화재청 홈페이지 등 다수)>
[사고] 본고는 한철수 보도위원이 운영하는 구지옛생활연구소에서 기사와 사진을 제공했습니다. 기사내용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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