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백제의 수도에 가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는 사는 곳과 가까워 수십 번 방문했지만,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와는 상황이 달랐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이야 경주보다 공주와 부여를 찾아가기 쉽지만, 경상도 사람인 나에게는 공주와 부여가 서울보다 더 멀었다. 서울은 지방 어디서도 버스나 기차를 타면 갈 수 있지만, 지방에서 지방으로 가는 건 그렇지 않다. 창원에서 공주나 부여로 가려면 공주나 부여가 속한 충청남도의 광역시인 대전부터 가야 한다. 인구 10만을 조금 넘는 도시인 공주 그리고 10만도 채 되지 않는 부여와 직행으로 연결되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나마 충청남도의 교통 허브인 대전에 가야 공주와 부여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공주와 부여를 처음 찾은 건 늦겨울, 점점 더 날씨가 따뜻해질 때였다. 여행을 많이 다녀 본 사람들이라면 국내 여행을 떠나기 가장 안 좋은 시기가 11월 중순부터 3월 중순 까지라는 데 공감할 것이다. 이 네 달의 기간 동안 나무는 모든 잎을 떨구어 황량하기 그지없다. 동백이 꽃을 피우는 남쪽 지방을 제외하면 다른 지방은 눈 쌓인 설경을 보는 것 외에는 황량한 풍경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 나는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않았던 때라 계절에 상관없이 가고 싶은 곳에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공주와 부여를 2박 3일 동안 돌아다니기로 하고 대전을 거쳐 먼저 간 곳은 공주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공주와 부여의 평일은 너무나 조용했다. 겨울엔 주말에도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을 터인데 평일이라 공주 시내는 사람 한 명 지나가는 사람 없이 한산했다. 공산성과 무령왕릉에 찾아갔을 때도 내가 거의 유일한 방문객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29 -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700여 년간 존재한 한반도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 등 3개 시·군의 8곳 문화유산으로 구성되어있다. 세부 등재 지역을 살펴보면, 충남 공주시는 공산성 (사적 제12호), 송산리 고분군 (사적 제13호) 등 2곳, 충남 부여군은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사적 제428호와 사적 제5호),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 정림사지(사적 제301호), 부여 나성(사적 제68호) 등 4곳, 전북 익산시는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등 2곳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5-7세기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사이의 교류와, 그 결과로 나타난 건축기술의 발전과 불교의 확산을 보여주는 고고학 유적이다.
또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수도의 입지, 불교 사찰과 고분군, 건축물과 석탑을 통해 한국의 고대왕국 백제의 문화, 종교, 예술미를 보여준다. 이 모든 요소는 동 유산이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 고대 왕국들 사이의 상호 교류 역사를 잘 보여줌과 동시에 백제의 내세관·종교·건축기술·예술미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백제 역사와 문화를 증명하고 있다.
고대 도성의 필수 요소인 산성, 왕궁지, 외곽성, 왕릉, 불교 사찰은 백제역사유적지구의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고 그 전부가 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이 유적들은 백제 건축 구조의 중요한 증거와 기술적 진보, 발전을 온전한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 산성, 성벽, 왕릉의 산지 지형과 교통로적 입지 또한 중요한 요소이며 이는 신청 유산과 완충구역 내에 포함된다. 유산의 모든 요소들은 각각 국가지정 문화재이며, 세 개의 도시는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보존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고대 수도이다.
또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고고학적 유적지, 산성, 왕릉, 석탑의 건축학적 구조와 전체적인 도시 레이아웃의 진정성을 지키고 있다. 신청 유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진정성을 결정하는 모든 측면들의 역사적 증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공주의 대표적인 유적, 공산성과 무령왕릉
조용한 것이 유일한 장점인 2월 중순의 공주가 보유한 백제 유적이 뭐가 있는지 확인해봤다. 백제 유적이라고는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성으로 사용되어 수많은 전각이 있는 공산성, 공주 천도 시기의 백제 왕이었던 무령왕의 무덤인 무령왕릉, 공주에서 발굴된 보물들을 볼 수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이 전부인 듯했다.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룬 덕에 경주에 수많은 유적이 있지만, 패자인 백제에는 많은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 특히 공주는 백제의 수도였던 시기가 고작 64년 (475-538)에 불과해 유적이 적은 게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다. 백제에서 가장 오랜 수도였던 한성이 조선의 도읍이 되고 대한민국의 수도가 되면서 더욱더 많은 유적이 파괴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64년 도읍의 시간은 공주 관광이 하루 또는 이틀이면 충분하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공주에서 반드시 봐야 할 3곳인 공산성, 무령왕릉, 국립공주박물관을 다 둘러보는 건 하루면 충분하다. 공주의 근대문화유산까지 포함한다면 이틀이면 공주 관광을 만족스럽게 끝마칠 수 있다.
먼저 들린 곳은 공주가 자랑하는 유적인 공산성이었다. 공산성(사적 제12호)은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 백제 (475~538)를 지킨 왕성이다.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 공주 산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 산성으로도 불렀다. 조선 선조·인조 때 지금과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공산성에서 시대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산성의 주문(主門)은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이다. 진남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누각이며, 공북루는 1603년(선조 36)에 옛 망북루(望北樓) 터에 세운 것으로 고주(高柱)를 사용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다락집이다. 서문은 1975년에 보수 공사하였을 때 높이 4.4m, 너비 5,6m, 길이 17m의 크기를 확인하였지만 받침 부분만 복원되었고, 동문도 발굴 결과 길이 6.45m, 너비 2.46m였음이 확인되었다.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동문은 서문·남문·북문처럼 2층이었으며, 동쪽 외곽의 토성에도 약 4m 크기의 문 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만하루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이며, 임류각(臨流閣)은 백제 때 세운 건물이지만 파괴된 뒤 그 터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건물을 세웠다. 장대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2칸인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적심석만 남은 상태로, 주변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현재 성 안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를 비롯하여 광복루·쌍수정·명국삼장비·쌍수산정주필사적비·주춧돌·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공산성을 따라 걸으면 백제가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뒤 왜 공주를 도읍으로 삼았는지 이해가 된다. 드넓은 금강을 따라 터를 잡은 공산성은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고구려군을 관찰하기에 좋으며 언제나 물을 공급하는 곳이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나라의 존망을 걱정하는 처지에서 북쪽이 강이며 나머지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인 공산성은 백제의 어쩔 수 없는 궁궐 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공산성에서 왕릉로를 따라 1.5㎞ 걸으면 무령왕릉과 왕릉원이 나온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백제 웅진시기 왕실의 능묘 군이다. 금강의 남안에 솟아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작은 구릉의 동남향 능선 8부 정도에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표고 75m 내외 지점이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27년, 1932년에 이루어졌으며, 1971년 고분군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무령왕릉이 발견되어 조사가 이루어졌다. 도굴꾼들이 무령왕릉을 찾지 못 한 건 정말 다행이었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발견된 백제 무덤으로는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과 벽돌무덤(전축분)이 있는데, 1~5호분은 돔 형태의 굴식 돌방무덤이며 백제 전통의 고분 형태이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형태이다. 이들 무덤들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하는 475년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벽돌무덤 2기를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이 모두 굴식 돌방무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웅진시기 백제 왕실에서는 이미 굴식 돌방무덤에 대하여 형식이나 구조면에서 제도적으로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왕실 전용의 무덤 양식으로 완전히 정착시킨 듯하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발견된 굴식 돌방무덤의 구조를 살펴보면, 무덤의 입구인 널길[羨道], 시신을 모시는 나무널[木棺], 피장자의 껴묻거리[副葬品]가 함께 안치되는 널방[玄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에는 무덤을 덮었던 거대한 봉분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봉분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는 2기의 벽돌무덤이 있는데, 6호분과 무령왕릉이 그것이다. 두 벽돌무덤은 아치형 천정, 장방형 묘실, 동ㆍ서벽과 북벽에 설치된 복숭아형 등감이 있으며 바닥에는 ‘인(人)’자 모양으로 벽돌을 깔고 벽과 연접하는 부분의 공간은 삼각형 벽돌로 채운 점 등이 특징이다. 6호분의 벽화는 벽돌무덤 내에 사신도를 그린 유일한 사례이다. 무령왕릉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었다. 묘지석이 발견됨으로써 피장자가 무령왕 부부란 점이 밝혀졌으며 이들의 사망과 매장 시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로써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고분 연구에서 유적과 유물의 연대 결정, 고분 피장자의 신분 추정에 결정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무령왕릉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석수와 도자기를 비롯하여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 태국 및 인도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장신구 등이 발견되어 백제의 수준 높은 국제적 문화교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실제로 들어가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무령왕릉에 반드시 가야 하는 이유는 모형전시관이 있어 각 무덤의 내부를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화려한 선사시대 벽화가 있는 라스코 무덤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라스코도 동굴 벽화의 보존을 위해 라스코 IV라는 모형 전시관을 만들어 일반에 공개하여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게 해 준다. 무령왕릉과 왕릉원 또한 같은 이유로 모형전시관을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된 공주의 문화유적 두 곳을 모두 다 보았다. 세계유산은 아니지만 공주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하나 더 있다. 무령왕릉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국립공주박물관은 공주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은 백제의 문화 수준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공주 여행의 하루 일정을 마치는 마지막 장소로 택한 곳은 바로 국립공주박물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