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양각 재명 매죽문 선형 필세 필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401호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백자양각(白磁陽刻) 재명 매죽문(在銘梅竹文) 선형 필세 필가(扇形筆洗筆架)는 상기 유물은
19세기 분원리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 선형 필세(筆洗) 겸 필가(筆架)로 표면에
매죽문과 시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굽 바닥면에는 제작자와 시기를 알려주는 음각명이 있다.
미세한 철분이 소량 포함되어 있으나 대체로 밝은 회청색을 띠는 치밀질의 백토를 사용하였으며
표면에는 분원리 시기 특유의 담청색 반투명유약을 입혔는데 유면에는 빙열이 없고 광택이 은은 하다.
유약은 전면에 고르게 시유하였으며 편평한 굽바닥면은 유 약을 닦아내고
고운 모래를 받쳐 구운 것으로 추정된다. 부채모양의 평면에 얇은 흙판을 붙여 입체적으로 성형하였는데
몸체의 반은 물이 고이는 필세로, 반은 세 개의 붓을 꽂을 수 있는 구멍을 내 필가로 구성하였다.
필가와 필세의 경계부 기벽에는 작은 물구멍이 있으며
그 위로 이룡(驪龍)의 상형물을 부착(貼花)하여 막 승천하려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부채꼴의 바깥쪽 곡면에는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양각하였는데
문양은 백토이장(白土泥裝)을 얹어 부조풍으로 표현하고 윤곽은 가늘게 음각하여 돋보이게 하였다.
윗면과 부채꼴 안쪽면에도 역시 백토이장을 사용하여
당나라 시인 한유(韓愈, 768~824)의 싯구인 “함영저화(含英咀花)”와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의 싯구인 “수부재심유룡칙령(水不在深有龍則靈)”을 각각
전서체로 양각하였다. 편평한 굽 바닥면에는 제작과정에 새긴 “을미육월상원우중 석봉작 우석서
고사화(乙未六月上沅雨中 石峯作 又石書 高士畵)”라는 전서체 음각명이 남아있어
을미년(1835년 혹은 1895년) 6월에 석봉(石峯)이 만들었으며
우석(又石)이 글을 쓰고 고사(高士)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제작당시에 이룡(驪龍)의 형상이 부착된 기벽면이 일부 갈라졌으나
이후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굽 바닥면을 깨끗이 갈아냈으며
바닥면 한쪽 모서리가 미세하게(5mm가량) 결손 되었다.
필세 내벽면에 먹물 등 오염이 약간 남아 있다.
이 백자 선형 필세 겸 필가는 조선후기 선비사회에 유행한 문방청완 취미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유물로
19세기 광주 분원리 관요에서 제작된 고급품으로 평가된다.
비록 유태의 품질이 최상급이라 보기 어려우나 만듬새가 정교하고
조형적으로도 창의성이 돋보이는 유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부채를 모티브로 한 백자 문방구는 연적 등이 다소 전해지고 있으나,
이처럼 필세와 필가를 함께 구성한 예는 거의 없다.
다만, 이 유물과 동일한 형식으로 함께 제작된 또 다른 한 점이 해강도자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을미년 6월에 우석(又石)이 만들었다”는 동일한 내용의 명문이 있어
이들의 제작시기와 제작자는 물론 서로의 관계를 통해 제작배경을 유추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죽헌집
윤음
익재집
역옹비설전후집
효행록
교지
전적
경주이씨 양월문중 소장 고문서 및 전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401호
이 고문서(古文書) 및 전적(典籍)은 경주(慶州)에 세거(世居)해 온 경주이씨(慶州李氏) 양월문중(楊月門中) 소장(所藏)의 교지(敎旨), 호구단자(戶口單子), 소지(所志), 완의(完議), 입의(立議), 유향소(留鄕所) 관련 고문서 및 필사원본류, 구강서원(龜岡書院) 관련 필사원본류, 죽헌집(竹軒集) 등이다. 이들 고문서(古文書)는 유일본(唯一本)으로서 관찬사료(官撰史料)의 미비점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특히 조선시대 유향소(留鄕所) 관련 문건과 경산 자인현 유향소(留鄕所) 분설(分設)에 따른 서목(書目), 보문평(普門坪) 개간(開墾)을 둘러싸고 야기된 갈등으로 품관(品官)과 역리(驛吏)들이 작성한 완의(完議)와 소지(所志) 등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및 전적 317점 2책을 일괄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종 목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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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진주 응석사 삼존여래좌상 (晉州凝石寺三尊如來坐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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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목조/ 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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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 | 3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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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 2003.10.30~2010.1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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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경남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 741 응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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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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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응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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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리 자 | 응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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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응석사(凝石寺)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주불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세불상이 봉안 되어 있다. 불상조성기에 따르면 응석사(凝石寺)가 화재로 폐허가 된 후 경천(敬天), 극수(克修), 일휘(日輝) 등이 발원하여 법당, 승당, 요사 등을 짓고 1643년(崇禎14년)에 삼존을 모셨다고 한다. 불상 조성에는 청헌(淸憲)과 법현(法玄), 원택(元澤) 등의 조각승이 참여하였다. 삼세불상 중 석가여래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보다 약간 크게 제작하여 삼불의 주불로서 존재감있게 표현하였다. 삼세불상의 비례는 신체에 비해 두부(頭部)가 큰 편이다. 얼굴은 방형에, 머리는 육계를 구별이 없이 낮고 둥글게 하고, 정상계주와 중간계주를 표현하였다. 상호는 살짝 반으로 감은 두 눈에 코등이 반듯한 코, 끝이 살짝 올라간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루어 단정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은 편이나 신체의 흐름이 팔로 좁게 연결되면서 상체가 왜소하게 보인다. 상체에 비해 앉은 자세는 무릎이 높고 넓어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게 보인다. 이처럼 세 불상은 기본적으로 상호와 신체 비례 등이 같으며 존상에 따라 수인과 옷주름에 세부적인 차이가 난다. 석가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뜨린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착의법은 왼쪽어깨를 덮은 변형편단우견에 드러낸 가슴 아래를 가로지르는 내의를 주름지게 표현하였다. 사선과 직선으로 떨어지는 옷주름은 간략하면서도 두께감 없이 편평하며, 옷자락의 끝단은 형식적인 곡선으로 마무리하였다. 약사야래와 아미타여래는 한쪽 손을 가슴 부분까지 올리고 다른 손은 무릎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었으며, 손의 위치는 서로 반대이다. 착의법은 이중의 대의를 걸쳐 입고 가슴 아래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내의는 석가여래와 다르게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불상 조성을 주도한 청헌(淸憲)는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화승으로, 1626년 충북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1360호), 1636년 전남 구례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좌상(보물 제1548호), 1639년 경남 하동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378호), 전남 고흥 능가사 대웅전 목조석가불좌상, 1641년 전북 완주 송광사 대웅전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274호) 등 조선후기 중요 불상으로 손꼽히는 다수의 불상을 제작하였다. 1643년에 제작된 응석사(凝石寺) 목조삼세불상은 청헌(淸憲)의 말년에 조성된 상으로서 조형성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조각승 청헌(淸憲)의 불상 양식의 흐름을 알수 있는 중요한 불상이다. 보물 제1687호 진주 응석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으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2011년4월28일 해지.
진주 응석사 삼존여래좌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