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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화. 난감한 주제를 만났다. 더구나 공간의 특성화라니. 예술단체나 축제보다도 공간은 특성화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삼는 일이 내 재주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어쩌랴, 청탁자의 거듭되는 구애(?)에 대책도 없이 손을 들고 말았다. 남의 부탁을 딱 끊어내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다.
특성화는 당위인가
청탁자는 특성화가 ‘당위’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나는 당위보다는 ‘전략’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앞글에서의 필자들이 뽑아낸 ‘전문화’ 혹은 ‘특성화’에 성공했다는 단체나 축제들도 당위보다는 전략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위든 전략이든 외피만 남과 다르게 걸쳤다고 해서 그것을 전문화 혹은 특성화에 성공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특성화를 보고자 한다면 그 내부의 고민을 어떻게 풀어냈는가를 봐야 할 것이다. 단체가 장르라는, 축제가 음악극이나 거리극이라는 외투를 걸쳤을 뿐인가, 나아가 그곳에서부터 어떤 아우라가 일어나서 그것이 외부에까지 긍정적으로 확산 되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같은 주제로 글을 쓴 분들의 고민도 거기에 있다고 나는 봤다. 그런 진정한 특성화의 모습이 아직은 멀어 보였으니 불가피하게 외피적 구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잘못 짚었더라도 용서하기 바란다.
우리 공간의 특성화를 논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겉만이라도 구분되는 색깔조차 희미하고, 대부분은 그저 낡은 틀 속에서 안주하고 있을 뿐이라고 나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주제에 늘어놓은 어려움이라는 것은 더 있다. 문화공간이란 단체나 축제와 같은 공간이동성이 없고 프로그램도 고정화된 시설의 특성(대부분의 대형 문화공간은 다목적용으로 지어졌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더구나 하나밖에 없는 지역의 대형 문화공간(문예회관 등 공공시설)은 특성화가 오히려 잘못된 전략적 선택일 수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러니 공간의 특성화란 서울처럼 극장이 많은 지역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말하자면 (공간) 특성화가 당위라는 논리에 딴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탁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어려움과 고민들을 담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논의가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극장 특성화의 다양한 유형
모호하겠지만 나도 특성화 공간의 사례를 들어야 한다면 이를 몇 가지로 유형화하는 것이 좋을 것이나 이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두서없이 나열하는 정도로 몇 가지만 우선 들어 보기로 한다.
새로운 예술적 경향의 특성화 사례로 주저함 없이 들 수 있는 곳이라면 LG아트센터가 있겠다. 모두 알다시피 이곳은 개관당시부터 기존의 극장과는 다른 운영방식을 들고 나왔다. 공연 프로그램을 세계 곳곳에서 찾되 진지한 예술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적 경향을 보이는 작품들을 주로 골라 무대에 올렸다. 이런 방식이 예술계는 물론 일반 관객들에게도 빠르게 먹혀들어 갔다. 최근에는 이런 태도가 다소 모호해졌다는 소리도 간혹 들리지만 나는 이들이 작품을 찾아내는 범위를 종전의 서구 공연시장에서 제3세계까지 넓혔다는 점, 게다가 서구식의 시즌 공개방식을 취하여 성공해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10만이 넘는 고객 정보를 쌓아놓고 패키지 판매 등을 도입하여 연평균 80% 내외의 유료 판매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극장이 특별한 장르적 선택을 했을 때 그것을 특성화라고 말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 본다. 가령 충무아트홀이 뮤지컬 중심으로 가고 있는 것 말이다. 이것을 그냥 단순한 전용극장의 개념으로 봐야 할까? 그러나 샤롯데나 코엑스 아티움 혹은 앞으로 지어지는 뮤지컬 전용극장과는 약간 다르게 봐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전용극장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다목적으로 만들어 놓고 수많은 선택이 가능한 가운데서 유독 뮤지컬을 주 장르로 골랐기 때문이다. 거기에 단순 초청방식만이 아니라 창작에도 적극적으로 손을 대고 있다. 고객들의 지지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여 이제 충무아트홀은 중구만의 공연장이 아니라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원각사의 전통을 잇겠다하여 지어진 정동극장이 연극과 클래식, 무용, 전통공연 등 여러 장르 사이를 왔다 갔다 해온 사이, 6월에 <맹진사댁 경사>로 문을 여는 같은 우산 아래의 명동예술극장은 옛 국립극장의 맥을 이어갈 준비를 활발히 하고 있다. 새로운 경향은 뒤로 접고 옛날처럼 연극의 무게감 있는 대중성으로 승부를 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말하자면 근래에 성공했다는 ‘연극열전’류 보다도 훨씬 더 ‘대중’과 가까이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되며 그 귀추가 주목된다.
예술 장르적으로는 다양한 선택을 하고 있어 얼핏 아무런 특색이 없다할 수 있으나, 이를 보완하듯 독특한 축제를 가진 극장들도 근래에 증가하고 있다. 원조는 아마도 예술의전당의 교향악축제일 것이다. 국립극장의 사계절 축제, 의정부예술의전당의 국제음악극축제,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의 국제거리극축제, 성남아트센터의 국제무용제, 고양문화재단의 호수예술축제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대전문화예술의전당은 스프링 페스티벌이라는 지역 예술가들을 수용하는 축제를 열어 지역 공공극장으로서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전용극장, 다목적 극장, 새로운 시도 그리고 튼튼한 관객기반
이쯤에서 외국의 사례 몇 개를 세 가지로 유형화하여 들어 보겠다. 전용극장 형을 먼저 살펴본다. 오페라극장, 연극 전용극장 등은 대부분 제작 중심으로 운영된다. 공간이 중심이 되기보다는 오페라단이나 극단이 중심이 되어 극장공간을 운영하기 때문이고, 극장은 예술단체의 창작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공간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전용극장은 대개 단기간에 여러 작품을 번갈아 올리는 레퍼토리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시즌 공개방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기반도 튼튼하다. 예술경영의 완성도가 높다는 이야기다. 특정 공간을 예로 들 것도 없이 어느 나라든 오페라하우스나 연극전용극장을 잠깐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술단체가 있는 우리나라의 대규모 극장들이 예술단체 중심이라기보다는 극장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예술단체도 작품 제작이라고 해봐야 일 년에 수편에 불과하고 언제 무엇이 공연되는지 예측할 수 없는 양상과는 매우 다르다.
두 번째 유형인 다목적극장 형들은 고정적인 전속단체나 상주단체보다는 외부의 유명한 예술단체들과 제휴관계를 맺고 일정 양의 프로그램을 공급받는 경우가 많다. 특정기간, 이를테면 계절별로 예측 가능한 프로그램의 일괄공개와 예술교육 등 관객개발을 위한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우리처럼 특성화된 축제를 열고 있는 곳들도 있다. 우리가 아는 바비칸센터가 상주관계를 맺고 있던 로열셰익스피어 극단과 결별한 뒤 다른 무용, 극단들과 제휴를 맺는 한편 바이트(Bite) 축제를 열고 있고, 뉴욕의 브룩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BAM)의 넥스트웨이브 페스티벌(Next Wave Festival), 영국 남부 브라이튼 돔(Brighton Dome)의 브라이튼 페스티벌 등도 독특한 축제로 이름을 얻은 지 오래다.
세 번째 유형은 새로운 양식과 공간이 어우러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다. 베를린의 샤우뷔네 극장은 공간이 세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분할형으로 레퍼토리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며, 작품 수준이나 진지한 실험성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런던의 배터시(Battersea) 아트센터는 큰 규모는 아니지만 세 개의 작은 극장공간과 로비까지, 극장 전체의 공간을 무대로 사용하기도 하면서 스크래치라는 독특한 작품 제작 방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품 제작을 5단계로 하여 각각의 단계에서도 관객의 관람이나 작품의 입도선매가 이루어지도록 하면서 점차 공연의 완성도를 높여 나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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