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창터에서
조 흥 제
“자! 여기서 한 5분 동안 말씀 드리겠습니다.”하고 안내원은 잠간 말을 끊었다. 황폐한 잡초 사이에 잔디밭만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나무 꼬챙이로 땅을 파고 “야! 이것 보라. 여기도 있다.”하고 떠들어 대는 것이 보였다. ‘이곳이 과연 어떠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까’하는 호기심으로 안내자 곁에 바짝 붙어 서서 한마디라도 헛되이 듣지 않으려고 이목을 집중했다. “이곳은 1300년 전 백제 최후의 의자왕 2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마지막 공격할 때 백제가 쫓기게 되자 당시 군량미를 쌓아 두었던 창고를 적군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불을 질렀던 곳입니다. 이 창고의 건평은 7백여 평이라고 저쪽 표에 써있습니다. 각종 군량미 쌀, 조, 보리, 밀, 콩 등이 산 같이 쌓인 창고에 불을 놓자 그것이 몇 달 동안 타서 그 안에 곡식들은 재가 되었으며 지금도 그 곡식이 있습니다. 1300년 묵은 곡식의 숯덩이가…”하는 설명이 끝나자 너도 나도 그것을 캐러 갔다. 몇 알갱이 숯이 된 1300년의 장구한 세월을 지낸 것을 캐 가지고 “1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렇게 엊그제 탄 것 같이 생생합니까?” 하고 안내자에게 물으니 “아 숯이 되었으니까 그렇지요. 숯은 장구한 역사가 지나도 썩지 않는 법이랍니다. 이곳은 재작년까지만 해도 움푹움푹 패인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평평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에헴”
안내원은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우리들은 샛별같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주위를 뺑 둘러쌌다. “4292(1949)년도에 이대통령이 이곳을 순방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렇게 움푹움푹 패인 곳은 메워야 된다고 하여 당국에서 지금과 같이 메운 것입니다. 자 또 가십시다.”
우리는 또 잔솔밭을 헤치며 안내원을 따라 갔다. 쌍갈래 길에는 가위표로 비스듬히 된 표에 낙화암 부영경찰서라고 쓰여 있고 사자루, 고란사, 백화정이라고 여기 저기 쓰여 있다. 사진으로는 많이 보았으나 실제 보기는 처음이어서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이 기록은 1961년10월8일 일기장에 있던 부여 방문기의 일부이다.
700평의 창고엔 군량미가 얼마나 저장되어 있었을까? 넓이가 700평이면 한쪽 변이 27m 된다. 27×27m면 700평 쯤 되는데 높이는 얼마일까. 높이도 그 정도로 계산해 본다. 지금 많이 쓰는 무게의 단위인 t으로 계산해 본다. 한 t의 무게가 1000㎏이고 쌀 한 가마니의 무게는 80㎏이니 1톤에는 쌀 12가마니 반이 들어간다. 한 톤이면 물 면적이 1㎥이니 쌀도 그만한 부피가 되지 않을까. 내 가정이 맞는다면 군창터에 쌓여 있던 쌀의 양은 2만7000t이다.
70년대 우리나라 쌀 생산량이 4000만석이라고 했다. 쌀 한 섬의 무게는 147㎏이다. 4000만석은 27만 톤 쯤 된다. 이러한 계산법으로 보면 군창터에 쌓였던 군량미가 400만석 정도 되리라고 본다. 그게 탈 때 기간은 얼마나 걸렸을까? 그 많은 양식을 먹지 못하고 불태웠으니 끔찍한 일이다.